빈센트 회상

아마도 36년 만에, 맨해튼의 ‘더 메트The Met’에 갔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핑계로 게을러진 나를 부추기신 분은 고맙게도 박영선 전 장관님이시다. 뉴욕에 체류하시던 중 어느 날 나에게 The Met에 있는 그림들의 사진까지 보내시며 방에만 처박혀 있지 말라는 듯 말없이 채근하셨다. 빈센트 반 고흐의 컬렉션에 들렀을 때 오래전 빈센트에 미쳐 모든 작품 사진을 모았고, 당시 네덜란드에 체류하던 조카를 통해 온갖 자료를 구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 덕분에 그때 대학교에서 강의하면서 <인간과 예술>이라는 단원을 가르치기 위해 빈센트 관련 자료들을 바탕으로 4시간 열강을 하기도 했었으며 그런 인연으로 강사료 별로 없는 곳에서 특강을 초대받기도 했었다. 빈센트의 생애가 기구하기도 했고 젊은이들에게 매력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그렇게 본의 아니게 어설픈 빈센트 전문가가 되어야만 했던 것은 또 다른 긴 얘깃거리이다.

The Met에서 유리관에 담긴 작품은 그의 자화상 한 점이었다.(맨 밑 사진) 그 작품 설명에는 파리 거주 당시(1886~1888년) 20점 이상의 자화상을 그렸다는 설명과 함께 『I purposely bought a good enough mirror to work from myself, for want a model.나는 나를 모델로 삼으려고 일부러 좋은 거울 하나를 샀다.』라는 여러 의미를 담은 구절이 눈에 띄었다. 문득 2005년쯤에 학생들에게 예술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고 빈센트를 알리기 위해 빈센트의 귀를 자른 자화상(아래 왼쪽-네이버 이미지)과 함께 <빈센트가 자신의 귀를 잘라야만 했던 이유는?>이라고 썼던 글이 생각나 다시 찾아보았다.

1888년 12월 23일 밤 빈센트 반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잘라야만 했던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날 밤 도대체 왜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일까? 여러 가설들을 가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사랑하던 여인과의 관계 때문이었을까? 너무도 사랑했던 여인에게 줄 것이 없어 고민하다가 아침마다 자신에게 아름다운 새소리와 바람 소리를 들려주는 귀라도 잘라서 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좋아하던 그녀가 볼품없이 생긴 고흐의 얼굴 중에서 그나마 잘생긴 부분은 귀라고 했기 때문에? 사랑했던 그녀가 자기를 사랑한다면 귀를 선물해 달라고 했기 때문에? 당시 투우사가 소와의 싸움에서 이긴 뒤, 그 소의 귀를 잘라 사랑하는 여인이나 아름다운 여인에게 바치는 풍습을 생각하고 소가 아닌 자신의 귀를 잘라 그녀에게 주고 싶었기 때문에?

(*고흐의 일생에 고흐와 개인적인 관계로 등장하는 여인은 다섯이다. 영국에서 로이어 부인 집에 하숙하여 살 때 그 부인의 딸이었던 열아홉 살배기 외제니 우르술라가 첫째였는데, 당시 고흐는 스무 살이었다. 그녀에게 청혼했고, 이미 숨겨 둔 약혼자가 있다고 응답했던 여자이다. 두 번째 여성은 1881년, 고흐 나이 28세 때 만났던 큰아버지 스트리커라는 목사의 딸 케이이다. 남편과 사별한 처지에서 고흐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던 여인이었으며 고흐와 만날 때는 이미 8살 된 아들이 있었다. 끈질긴 빈센트의 구애와 편지들에도 응답이 없었고, 이에 암스테르담으로 찾아갔을 때 큰아빠를 통해 더는 괴롭히지 말라는 쪽지만으로 응답을 받았고, 이에 고흐가 촛불에 자신의 손을 넣으며 ‘제 손이 이 뜨거움을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시간만큼이라도’ 만날 수 있기를 갈망했고, 또 그녀가 나타나지 않으면 손뿐 아니라 온 몸을 태워버리겠다고 했음에도 끝내 화상만을 입고 돌아서야 했던 여인이다. 다음은 매춘부였던 크리스틴 클라지나 마리아 후르닉이 있다. 고흐는 그녀를 시엔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고흐가 그녀를 만났을 때 이미 3살이나 연상이었고 다섯 살 난 딸이 있었으며 또 임신 중이기도 했다. 알코올 중독에 성병을 앓던 여인이었음에도 돈이 없어 모델을 구하지 못했던 고흐에게 모델이 되어 주었고, 위로가 되어 주었으며, 생리적 욕구의 해결사이기도 했던 여인이다. 고흐는 두 아기의 엄마이기도 했던 그녀와 동거하면서 그녀에게서 성병을 옮아 한동안 고생도 했다. 그러나 동생 테오를 비롯한 주변의 압박과 입 하나라도 줄여야 할 현실적인 가난, 그리고 그녀의 게으르고 문란한 생활, 돈 문제로 그녀의 동생이 고흐에게 폭행을 가하는 등 여러 가지가 겹친 복합적인 이유로 그녀를 떠나야만 했었다. 그리고 누에넨에서 만난 이웃 섬유공장 주인의 딸이었던 마호르트가 있다. 고흐보다 10살이나 많은 41세의 노처녀였다. 고흐의 집에서나 고흐의 과거를 잘 알고 있는 마호르트 가족의 반대로 마호르트가 정신 불안을 얻게 되었고, 이에 빈센트는 곤란한 입장이 되었다. 결국 그녀가 자살 소동을 부렸고 이에 대한 온갖 비난이 고흐에게 쏟아져 비극으로 막을 내린 사랑 아닌 사랑이다. 술집 여자 라셸-라헬이라 발음하기도 한다-도 있는데, 이 라헬이라는 이름에 관하여는 마태오 복음 2장 18절의 ‘자식 잃고 슬피우는 라헬’이라는 귀절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그녀가 바로 1888년 12월 23일 밤 11시 30분경 고흐가 ‘조심해서 다루라’ 하면서 귀를 잘라 건네주었던 라마르틴 광장의 술집 여자였고 창녀였다.)

귀를 잘랐던 이유에 대한 두 번째 가설은 잠시 함께 살던 고갱과의 관계에서 추론해 볼 수도 있다. 고갱과 말다툼을 하다가 고갱에게 심한 말을 들었고, 그런 말을 들은 자신의 귀가 저주스럽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고갱이 다툼 끝에 집을 떠나자 그 고갱을 죽이고 싶도록 미웠는데 떠나버린 고갱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는 생각 끝에 자신의 분을 못 이겨서였을까? 화가들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아를이라는 곳에 여러 화가를 초대했으나 이에 고갱만이 응답하여 같이 지내게 되었고, 얼마가 흐른 뒤 고갱과의 다툼 끝에 고갱마저 떠나려 하는 것을 듣고 자기의 진심을 너무도 몰라준다는 심정을 결국 자해로 표현해낸 것이었을까? 고갱이 다툼 끝에 자기를 피하고 계속 만나주지 않으니까 화가 나서였을까? 고갱과 다투었고, 그로 인해 고갱이 떠나겠다고 하자 또다시 참을 수 없는 외로움을 남겨주게 될 고갱과의 이별이 두려웠고 그 이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고갱과의 다툼 끝에 고갱을 면도칼로 죽이려고 덤볐으나 이에 실패하고 분함을 참을 길이 없어서였을까? 사실 고흐 자신이 자신의 귀를 잘라버린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고갱과의 싸움 끝에 고갱이 옆에 있던 펜싱 검을 들어 자른 것이었을 수도 있다.(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고갱이 떠나버린 뒤 자신의 물건을 보내 달라고 했을 때, 펜싱 검만이 없고 마스크와 장갑이 있었는데 이는 고갱이 자신의 행실을 은폐하기 위해 사고 직후 펜싱 검을 챙겨 떠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세 번째 가설은 그림을 그리던 중의 상황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곧 자화상을 그리던 중 자신의 귀가 잘 안 보이고 그림으로서 잘 포착이 되질 않아서리라고 생각해 볼 수 있거나, 자화상을 그리던 중 귀 부분이 이상하다는 고갱의 지적에 귀 부분을 계속 고쳐도 잘되지 않았고, 이에 실제 귀를 잘라 그림과 맞춰 보느라고 그랬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네 번째 가설은 빈센트가 앓았던 병적인 이유와 관련지어볼 수도 있다. 귀 울림증을 오래도록 앓던 중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을까? 고흐가 알코올 의존증이 있었고, 압생트(absinthe)라는 독한 술을 즐겨 마셨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일이다. 고흐는 술에 취해 일시적인 환각 상태에서 귀를 잘랐을 수도 있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심리적인 이유에서였을까? 추락을 두려워하는 비행기 조종사가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는 길 중 하나가 그 비행기를 스스로 추락시켜 버리는 것일 수도 있는 것처럼, 인정받지 못하고 처절하게 생을 마감하고야 말 것 같은 자신의 추락이 두려워 스스로 자신을 추락시켜 버리기 위해서였을까? 그림을 위해 목숨까지 걸었으나 끝내 인정받지 못한 자신의 그림, 그리고 동생에게 평생 생활비를 받아 연명해가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뭔가 색다른 돌파구를 마련하고픈 결심과 심정의 표출이었을까?

빈센트가 자신의 귀를 자른 이유로서 여섯째 가설은 성경을 근거로 추론해 볼 수도 있다. 일찍이 목사가 되기 위해 오랫동안 공부했고, 전도사로도 활약했던 고흐의 과거를 볼 때 고흐가 성서를 익히 주지하고 있었음은 자명하다. 고흐는 비탄과 고독의 겟세마니 동산에서 어느 날 예수님을 잡으러 왔던 무리 중 하나인 말코스의 귀를 제자인 베드로가 칼로 내리쳐 잘라 버렸으나 이를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셨음을 상기했고(참조. 요한 18,10 마태 26,52 마르 14,47 루까 22,51), 자신의 비참하고 외로운 처지가 예수님과 같다고 여겨 이를 구해 주실 분은 진정 예수님뿐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내용은 누구나 빈센트를 읽어내며 추가할 수 있는 가설 중 몇 가지일 뿐이다. 한 인생을 주체할 길 없는 열정으로 치열하게 살아 아직까지도 그 열정에 많은 이를 아우르는 빈센트는 여전히 참 멋있다. 『엠마누엘 무니에 Emmanuel Mounier(1905~1950년)는 다음과 같이 썼다. “소란스러운 삶으로부터 물러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 자신 속으로 내려가 첫 휴식처의 고요에서 멈추지 않고 그 모험을 끝까지 밀고 내려가기로 결심한 사람은, 곧 모든 피난처로부터 던져진다. 예술가, 신비가, 철학자들은 때로 완전히 바스러질 지경에 이를 정도로, 우리가 매우 기이하게도 ‘내면’이라 부르는 그 총체적 체험을 한다. ‘내면’이라는 호칭이 기이하다는 것은, 그들이 거기서 우주 전체와 맞닥트리게 되기 때문이다.”(프랑수아 바리용, 흔들리지 않는 신앙, 심민화 옮김, 생활성서, 2018년, 450쪽)』(20211112)

One thought on “빈센트 회상

  1. 귀한 해설 자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치열하게 살다 간 그의 생애를 애도합니다.
    오베르 쉬아즈에 있던 그의 묘지에서
    가슴 벅차했던 기억까지 덤으로 생각납니다.
    아 고흐!
    날것의 생생함을 보여준
    이시대의 찐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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