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25,14-30 또는 25,14-15.19-21(연중 제33주일 ‘가’해)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마태 25,21.23) *출처-unsplash.com

지난주부터 듣는 마태오 복음 25장에 있는 ‘열 처녀의 비유(1-13절)’, ‘탈렌트의 비유(14-30절)’, ‘최후의 심판 비유(31-46절)’ 중 두 번째이다. 종말에 관한 말씀으로 들려주시는 세 비유 중 열 처녀의 비유에서는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고 나뉠 수도 없는 것을 묵상하고, 루카복음에도 전하는 오늘 복음의 탈렌트 비유에서는 주님 앞에서 셈해야 할 때 결코 땅에 묻어 놓아서는 안 되는 것을 묵상하며, 다음 주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는 최후의 심판에서 기준이 될 것이므로 반드시 행해야만 할 그리스도인의 소명에 대해서 묵상한다고 할 수 있다. 세 비유 모두 하늘 나라에 관한 비유로서 하늘 나라가 선물이요 과제이며, 은총이요 요청임을 알린다. 현재와 종말 사이 중간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은 하늘 나라의 과제와 요청에 따라, 곧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만 종말에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세 비유들의 기본 뜻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듣고 행해야만 한다.(마태 7,21-27;24,45-51)

비유에 나오는 ‘탈렌트talent(=타고난 재주나 재능, 재간, 수완, 솜씨)’라는 어휘 때문에 이 비유는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것을 잘 활용해야 한다는 내용으로만 읽힐 우려가 있다. 또한 사람에 따라서 이 비유를 이윤을 남기는 경제 활동의 근거로 삼거나 그리스도인들의 활동주의activism의 성서적 근거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비유를 읽는 데에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대한 준비와 깨어있음이라는 마태오 복음 25장 전체의 맥락으로 보아 무리가 있다. 거듭 밝히지만, 경제적 관점이나 돈의 관점, 그리고 활동주의가 아니라 모든 것이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깨어있음의 관점에서, 현재 손에 쥔 것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주인의 신뢰와 위탁에 따른 종들의 태도, 곧 주인의 뜻을 얼마나 제대로 알아들었는가 그렇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 비유의 초점이다. 어떤 면에서 말씀을 잘못 읽으면 차라리 안 읽는 것만 못할 때가 있다.

이 비유는 능력 발휘를 하라고 부추기거나 고무하는 비유가 아니다. 이윤을 내야 하고 실력 발휘를 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다.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는 도전 앞에서 두려워하며, 직면하지 않고, 급속하게 변화하는 사회의 문화적 조건에 눈을 감으며, 하는 일을 그저 할 뿐 자주 뜨뜻미지근하고 아무런 창의력을 발휘하려고도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로서 가슴 아프게 들어야 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이 비유가 많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왕성한 사목활동을 통해서도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고, 왜 그런지를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그저 정신없이 바쁘기만 한 사목적 활동주의activism를 조장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런 면에서 이 비유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의식과 책임, 근면, 성실함, 무엇보다도 창의성의 관점에서 읽어야 할 필요도 있다. 수행하는 사목적 일의 양量, 곧 성사의 집행 건수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공동체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태껏 가보지 않았던 새로운 변방과 경계를 찾아 나아가도록 하는 주님 말씀에 대한 순명이 공동체를 공동체답게 한다. 그리스 사람들이 필립보 사도에게 찾아가 “선생님,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요한 12,21) 하였듯이 오늘날 현대인들도 우리 교회 앞에서 어색하게 그 말을 소리 질러 반복하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들과 함께 그 길을 찾아가는 나침반은 오직 복음뿐이다.

1. “하늘 나라는…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마태 25,14)라는 구절로 비유는 시작한다. 주님께서는 더는 이 땅에 우리 가운데 계시지 않고 긴 여행을 떠나시듯 우리를 떠나셨다. 그리고 떠나시면서 당신 종들에게, 제자들에게 “각자의 능력에 따라”(마태 25,15) 탈렌트를 맡기시며 이를 불리라는 숙제를 주셨다. 세 종이 있었는데, 두 종에게는 각각 “다섯 탈렌트”와 “두 탈렌트”라는 거금을 맡겼다. 그러나 세 번째 종에게는 달랑 “한 탈렌트”, 그렇지만 그것도 결코 적은 돈이 아닌 돈을 남겼다. 주인은 종들에게 한없는 신뢰로 자기의 “재산을 맡겼다.(전 재산의 8분의 5나 2=4분의 1, 그리고 1이라고 읽으면 훨씬 더 실감이 난다) 종들로서는 자기들의 재산이 아니고 주인의 재산인 그 재산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주인의 신뢰를 배반하지 않는 것이 되고 주인이 돌아올 때 보상이 따를 것이었다. 주인이 “각자의 능력에 따라” “재산”을 맡겼지만, 이는 선물이면서도 동시에 이를 잘 지키고 불리라는 과제였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는 하느님의 편애偏愛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하나에 대한 그분의 각별한 배려와 사랑, 그리고 관심이다.

“탈렌트”는 돈의 이미지를 넘어 은총이고 선물이다. 리옹의 이레네오 성인(St. Irenaeus of Lyons, 130~202년?)께서는 이 “탈렌트”를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생명』이라고 풀이한다. 생명은 절대 낭비하거나 무시하거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생명이 아무 가치도 없는 것처럼 다루어지는 현실을 목격한다. 예를 들어 OECD 국가 중 청소년 자살률 최고라는 불명예를 안고 사는 나라가 우리나라이다. 어떤 이들은 생명을 낭비하고 그저 되는 대로 살면서 그 누구도 못 알아볼 정도로 낯선 이가 될 때까지 그렇게 삶을 내팽개치고 만다. 그러나 생명은 단 하나이고 그 생명을 살 것인가 잃을 것인가 하는 책임은 전적으로 그 생명을 사는 이에게 달려있다. 동방의 다른 교부들은 “탈렌트”를 제자들 하나하나에게 맡겨진 ‘주님의 말씀’이라 한다. 그 말씀을 잘 지키고 무엇보다도 각자의 인생을 통해서 그 말씀을 세상이라는 밭에 뿌리고 심는 실천으로 열매를 맺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신명 30,19)라는 말씀처럼 “생명”의 문제는 ‘생명 선택’의 문제이다.

“다섯 탈렌트”를 우리 오감五感의 은총으로 풀이하는 대大 그레고리오(St. Gregory I the Great, 제64대 교황, 재위: 590~604년) 같은 교부들도 있지만,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년)는 탈렌트를 『그분의 말씀, 순수한 말씀, “흙 도가니 속에서 일곱 번이나 정제된 순은(시편 12,7)” 같은 말씀』으로 이해하면서 다섯 탈렌트를 성서에 대한 영적 이해로, 두 탈렌트는 문자의 의미영적인 의미로, 그리고 한 탈렌트를 문자에만 매달려 있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2.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종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마태 25,19) 영광스러운 주님의 재림이 늦어지는 것을(참조. 마태 24,48;25,5) 암시하는 구절이다. 모든 종이 주인 앞에 불려 나온다. 주인은 종들과 함께 그동안 종들을 신뢰하여 맡겼던 자기 재산에 관하여 ‘잘했겠지!’ 생각하며 그동안 종들 각자의 능력에 따른 책임을 셈한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가 나아가서 다섯 탈렌트를 더 바치며”(마태 25,20) 그동안 맡았던 재산을 두고 위험을 감수해야 했던 능력, 쓸데없이 재산이 줄어들거나 낭비 내지는 손실되지 않도록 노력했던 분투의 과정을 내보이며 다섯을 열로 만들어 주인에게 돌려드리자, 주인은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1) 한다. 두 탈렌트를 받아 넷으로 곱빼기를 만들어 돌려드린 종도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 두 종은 “능력에 따라” 각각 다른 양의 탈렌트를 받았으나 주인이 그들에게 다시 돌려준 보상과 대우는 정확히 ‘같다’.

3. “한 탈렌트…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그런데 한 탈렌트를 받은 이가 주인 앞에 나올 때 그는 주인에게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마태 25,25) 한다. 같은 비유를 전하는 루카복음에 따르면 종의 말에 주인이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루카 19,22) 하였다고 한다. 종은 “두려운 나머지…”라고 한다. 두려움은 신뢰의 관계를 이루지 못하게 하고, 모든 것을 마비시킨다.

이 종은 자신이 하는 말에서 이미 자기가 주인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를 만들어냈음을 내비치고 있다. 그 종 스스로 자기 두려움의 투사로 자기가 주인의 상을 그렇게 만들었고, 자기 스스로 다른 이를 신뢰하지 못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는 주인을 겁을 주는 사람이고, 말도 안 되는 것을 터무니없이 요구하는 심판관으로 만든다. 이런 생각으로 그 종은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고, 나름대로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땅에 숨겨” 두었으며 받았던 탈렌트를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주면서 주인의 것을 그저 훔치지 않았을 뿐이라고 강변한다. 복지부동伏地不動이고 무사안일無事安逸주의이다. “악을 저지르는 데는 약삭빠르면서도 선을 행할 줄을 모른다.(예레 4,22)”는 말씀대로이다.

주인은 화를 내며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마태 25,26-27) 한다. 주인은 그 종 스스로 만들어낸 잘못된 주인의 상에 순종하였으므로 “악하고”, 그래서 주인과의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내키지 않는 신뢰와 사랑으로 마지못해 살아서 “게으른” 종이었다고 한다. 주인이 믿고 맡겼던 신뢰와 사랑을 지켜갈 ‘마음’도 없었고 ‘능력’도 없었다 한다. 그뿐만 아니라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지라도 남들이 이자를 불려줄 은행에마저 그 돈을 맡기려고 하지 않았다 한다. 한 마디로 주인이 믿고 맡긴 재산에 대해 그 종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한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과 선물을 누군가와 나누기보다는 파묻어 버리기가 훨씬 더 쉽고, 새로운 보물을 발견하려 하기보다 이미 소유한 보물을 그저 유지하려 하기가 더 쉬우며, 누군가가 우리에게 뭔가를 잘해주면 이를 순수한 호의와 사랑으로 인정하는 것보다 깎아내리고 불신하기가 훨씬 더 쉽다는 것을 체험한다. 바로 여기에 그저 할 수 있는 최소의 것만을 행하려는 사람들의 맹점과 합리화가 있다. 세 번째 종이 사실 나쁜 행위를 한 것은 없었을지 모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데에 그의 잘못과 죄가 있다. 그래서 어쩌면 훗날 최후의 심판 날에 하느님 앞에는 받은 것을 열매 맺게 한 사람과 받은 것을 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착하고 성실한 종들”은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눌 것”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악하고 게으른 종”, “쓸모없는 종”은 그가 나름대로 잘했다고 생각하고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에블린 워Evelyn Waugh(1903~1966년)는 게으름이야말로 현대 사회의 고질적인 죄악이라고 했다. 정말 중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져 버린 이 세대의 죄악이라는 것이다. 사목자로서의 소명은 바로 게으름이라는 수렁에 빠진 사람들을 일깨워 이 세상을 좀 더 나은 세상으로 가꾸어 가는 것에 동기부여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무 떠벌리고, 흥분하고 과장하는 것이라고 해도 미지근한 것보다는 뜨거운 쪽에 있어야 하는 것이 사목자의 소명이다. 성경은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묵시 3,16)” 한다. 게으름은 ‘나이를 먹어가도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다’ 하며 나이 먹어가는 사람들에게 더욱 쉽게 찾아오는 유혹이기도 하다. 단테 알리기에리Durante degli Alighieri(1265~1321년)는 『아아, 선善을 함에 있어 너희가 미지근한 탓으로 저지른 그 게으름과 미루던 버릇을 진정 불꽃 같은 열성으로 이제 보상하는 백성아!(단테 알리기에리, ‘신곡神曲-연옥편’, 제18곡 106, 최민순 역)』 하고 탄식한다.

나로서는 비유가 다르게 끝났으면 더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주인의 마음이 더욱 분명히 드러나고 제자들의 마음도 주인이 원하는 마음이 될 것 같아서이다. 감히 비유의 결론을 한번 바꾸어보자면; 『주인이 맡겼던 한 탈렌트를 가지고 세 번째 종이 주인 앞에 나와 주인께 말씀드리기를,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주신 한 탈렌트를 가지고 한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오는 동안 그 모든 돈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당신이 참 좋은 분이시고 저의 부주의를 이해해 주실 만한 분이시라고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주인은 그 종에게 맡겼던 돈보다도 자기를 그렇게 생각하며 믿고 있는 종에게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비록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지만, 네가 너의 주인인 나에게 그렇게 믿음을 가졌으니 너도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하였다.』 이렇게 비유의 마지막이 바뀌어도 복음은 여전히 기쁜 소식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범이신 성모님이야말로 지극히 착하고 충실한 종이시다. 당신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던 크나큰 은총이요 선물인 『구세주라는 복음을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지극한 사랑으로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 내놓으신 아름다운 여인(교황 베네딕토 16세)』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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