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13,1-23(연중 제15주일 ‘가’해)

“씨뿌리는 사람…씨…말씀” by Wolf Khan

앞으로 몇 주간 계속하여 마태오복음 13장에 나오는 비유들을 들을 것이다. 이 마태오복음 13장에는 몇 개의 비유가 담겨있어 일명 ‘비유들의 장’이라고 불린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하였다.”(마태 12,14) 하는 말씀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제자들이나 군중들이 한편에서는 떨어져 나가고, 특별히 유다의 종교 지도자들을 비롯한 기득권층은 이미 예수님에 대해서 적대감을 느끼고 예수님을 해치려고 하는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을 계속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해치려고 하였듯이 오늘날에도 복음을 전하는 이들 앞에는 이러한 상황이 왕왕 발생한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당혹스러운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 나라에서는 매주 적어도 몇 백만 명 이상의 남녀 신자들이 주일미사에 나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고, 또 예수님께 믿음을 두고 싶다고 말하면서 성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고자 한다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도 지난주와 다른 또 하나의 주일일 뿐, 다가오는 하늘 나라의 표징을 보여주는 그 어떤 표징도 없이 전혀 변화가 없는 현실이 계속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하느님의 말씀은 정말 효력이 없는 말씀일까? 강론대에서 강론하는 사람들이 말씀이 아닌 자기들 얘기만을 하고 있어서일까? 그 말씀을 전해 듣는 이들은 정말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모시고 있는 것일까? 말씀을 듣는 이들이 말씀을 듣기만 할 뿐 실생활에 옮기지 못하는 것일까?

마태오는 오늘 복음의 말씀이 선포되는 배경을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마태 13,2)라는 상황으로 설정하면서 예수님께서 물 가운데, 그리고 군중은 물 건너에 있는 것처럼 마치 앞서 언급한 오늘날의 교회와도 같은 상황이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도 그대로였던 듯이 복음을 기록한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제1독서, 이사 55,10-11) 하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반드시 현실이 되고 효과를 내고야 만다는 것을 믿고 안다. 그런데 도대체 말씀은 왜 그렇게 부족한 열매의 결과만을 맺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답을 숨겨놓고 있는 듯이 보이는 예수님의 비유를 깊이 묵상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많이 배운 사람들의 지적知的인 말씀이라기보다 당신의 말씀에 영감을 주었던 갈릴래아 농민들이 살았던 모습 그대로 당신이 보고 생각하였던 내용을 활용하여 단순한 보통의 청중을 향해 말씀하신다. 실제로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여러 번 만나셨고 보셨을 예수님의 비유는 매우 유명한 말씀이고 수많은 해석이 있지만, 이는 한편에서 그만큼 더 주의 깊게 그 말씀을 읽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1. “씨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버렸다.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3-9) 비유의 전문全文이다.

팔레스티나 농부들이 씨를 뿌리고 나서 그 씨를 묻기 위해 쟁기질을 했다는 사실을 모르면, 이 비유에 나오는 씨뿌리는 사람이 무작위로 그렇게 씨를 뿌려대면서 많은 씨를 낭비하지나 않았는지 의아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땅에 심어져야 할 하느님의 말씀인 씨앗, 아낌없이 뿌려져야 할 말씀의 씨앗은 결코 모자라는 법이 없이 풍성하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은 그 말씀을 듣는 이들이 많기도 하지만, 정작 듣는 이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사실도 안다.

씨가 떨어진 “길‧돌밭‧가시덤불‧좋은 땅”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복음 후반부(마태 13,18-23)에서 별도로 “악한 자가 와서…빼앗아 갈 수 있는 씨앗”, “뿌리가 없어 오래가지 못하는 씨앗”,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숨을 막는 씨앗”, “말씀을 듣고 깨닫는 씨앗”으로 설명해 주신다. 이들을 다른 말로 풀자면, 말씀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열성이 없이 피상적으로만 듣는 사람,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리를 만들고 말씀에 열성이 북받쳐 올라오면서도 내면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 모든 면에서 열매를 맺을 충분한 가능성이 있지만, 그 마음에 다른 것, 곧 부와 성공, 그리고 권력과도 같은 우상들이 강력하게 자리를 잡아서 말씀을 위한 자리를 용납하지 않고 말씀 씨앗이 공간 부족으로 죽게 만드는 사람, 말씀 씨앗을 받아들이고, 생각하며, 깨닫고, 묵상하며말씀을 자기 생활에 실현하는 사람들이다. 자리를 잡은 한 개의 씨앗은 처음에 뿌려진 그 많은 씨앗과 갖은 고생을 다 했던 씨 뿌리는 사람의 노고에 비할 때 언뜻 실망스럽게 보일 수 있지만, 작은 것이라고 얕보아서는 안 된다. 바로 그 씨앗이 싹이 터 많은 열매를 맺는다.

성 그레고리오St. Gregory I the Great 교황(590~604년 재위)은 특별히 “가시”에 관해서 『가시들은 세속적인 부유함입니다. 부유함은 부질없는 욕망의 가시들로 불쌍한 영혼들을 헤집어 놓고 죄로 이끌어 끔찍한 상처를 내고 피를 흘려 고통스럽게 합니다.』라고 해석한다.

성 요한 카씨아노St. John Cassian(360~433년)는 완덕의 길에서 “열매”를 거두기 위해 이미 우리 안에 담긴 “겸손”의 씨앗이 자라지 못하게 만드는 8가지 잡초들, 『① 음식(food) ② 性(sex) ③ 부질없는 물건들과 집착들(things) ④ 분노(anger) ⑤ 낙담과 실의(dejection) ⑥ 나태(acedia) ⑦ 허영(vainglory) ⑧ 교만(pride)을 뽑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성인에 의하면 이 잡초들을 뽑는 방법은 무엇보다도 생각하지 않는 것(unthinking)이고, 항상 기도하기, 곧 지속적인 추구이다. 씨앗은 이미 심어졌다. 하느님의 왕국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그 왕국이 드러나도록 해야 하고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 역사 안에서 성인聖人이란 자신 안에, 그리고 사람들 가운데 이미 존재하는 그 신성神聖과 인성人性을 잘 싹트게 했던 사람을 말한다.

2. “왜…비유로 말씀하십니까?”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9) 하시는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마치신다. 듣는 이들을 반성하게 하는 비유는 선포되는 순간에 듣는 이들을 통하여 그 의미가 실현된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로마 10,17)이다. 예수님께서는 “자, 들어보아라!”(마르 4,3)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마르 4,23) “너희는 새겨들어라”(마르 4,24)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마르 7,14) 하신다. 신앙인들에게 “들음”은 은총이고 생명이며 행복이다. 주의 깊게 들어야 하고, 마음으로 들어야 하며, 회개에 이르도록 들어야 한다. 교회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전례생활, 성사생활을 고려하면서), 책의 말씀을 들어야 하며(성경, 영적 독서-수많은 성인이 책을 통해 회개했다. 책 속에 길이 있다), 내 마음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예수님께서 당신의 자리인 내 마음 안에서 말씀하시니. 매일, 규칙적으로, 조용히!)

비유로 이야기하는 것이 예수님 당시 라삐들 사이에 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까닭으로 제자들은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마태 13,10) 하고 물으며 다가올 하늘 나라에 관해 자기들이 알아듣기 쉽게 뜻을 설명해 주십사 하고 청한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마태 13,11) 하고 대답하시며 제자들이 그렇게 놀라 의아하게 생각할지라도 제자들은 그 신비를 알아들을 수 있으므로 큰 책임이 있다는 듯이 말씀하신다. 같은 내용을 마르코 복음사가는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마르 4,11) 하고 훨씬 더 강한 어조로 기록한다. 그렇다. 예수님 당신의 왕국과 관련한 모든 계시가 가난한 제자들에게 넘겨졌고 맡겨졌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제자들은 장막을 걷어내고 장막 너머에 감춰져 있는 신비에 다가가 이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제자들이 구원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서 당신 신비를 펼쳐 보이신 신비를 알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특권이라기보다 하나의 큰 책임이다.

3.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마태 13,13.15) 하시는 말씀을 덧붙이신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 6,9-10을 인용하시면서 자기만족과 종교적 자기 폐쇄에 빠진 사람들에 관해서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누구에게는 주시고 누구에게는 주시지 않는다는 식으로 그렇게 그들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게 하셨다는 말씀이 아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대상이면서도 그 말씀을 듣지 않고 땅에 떨어져 싹이 트지 못하게 한 사람들이 스스로 그 발등을 찍었다는 말씀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히브 4,12) 하는 말씀대로 그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께서는 반드시 듣는 이를 살리고 낫게 하시며 구원하신다. 반대로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심장(마음)이 딱딱하게 굳는 심근경색심장 섬유화를 유발하여 말씀에 점점 더 무감각하게 만들고 말씀을 들어도 듣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인간 편에서 거부하여 그렇게 된 것이다. 생명이 왔어도 받아들이지 않아서 결국 죽어간다.

이스라엘 백성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자주 마음이 굳어지고 귀를 닫으며 눈을 감곤 했다.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들으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엇이 주님의 말씀인지 주님의 말씀을 식별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말씀을 듣고도 우리의 눈과 귀를 고쳐주시려고 항상 기다리시는 하느님께 돌아가려고 회개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가 귀멀고 눈멀었으니 저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씀을 드리기만 하면 될 텐데도 말이다. “은혜로운 때…구원의 날”(2코린 6,2 이사 49,8),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루카 19,44), “주님의 은혜로운 해”(루카 4,19)가 바로 내 앞에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둘러서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마태 13,16-17) 하고 말씀하신다. 구약 시대의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메시아의 날에 그분의 행적을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자 꿈꾸었지만 불가능했던 것을 내가 불렀고 나를 따랐던 너희는 너희의 눈으로 이를 볼 수 있었고 너희의 귀로 들을 수 있었다고 말씀하신다. 훗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는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본 것, 이 생명의 말씀”(1요한 1,1)이라고 진지하게 이를 고백할 것이었다. 어떤 생각이나 사상이 아니고, 교조적인 신조나 윤리조항도 아니며, 한 인간이요 나자렛 예수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 하느님으로부터 오신 분께서 ‘너희가 나를 만났고 너희의 오감으로 나를 느꼈다. 그러니 너희는 진정 행복하다!’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매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씨앗을 우리 마음속에 심는 우리는 주의 깊게 깨어 있어야만 한다. 말씀이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는 그 말씀을 내면화하고 지키며 묵상하고 그 말씀이 우리 안에 호흡하시도록 해야만 한다. 인내롭게 이 말씀을 우리 마음에 모셔 지켜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 그 말씀의 씨앗을 위한 자리를 만들고 이를 빼앗아 가려는 못된 것들로부터 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 영적인 싸움을 마다하지 말아야만 한다. 말씀에 믿음을 두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복음은…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로마 1,16)이다. 아멘!

3 thoughts on “마태 13,1-23(연중 제15주일 ‘가’해)

  1. 생각지도 않은 열악한 장소, 작년에 심었던 들깨에서 씨가 엉뚱한데 떨어져 놀랍게도 들깻잎이 나온다. 특별히 영양분을 주지도, 물을 주지도 않았는데…말씀께서는 여느 곳을 가리지 않고 어김없이 생명을 불어 넣어주신다. 부족한 내 마음에도 생명의 말씀께서 열매를 맺어주시도록 기도한다.

  2. “길가,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 비유로 말씀하신 내용에 내 마음의 밭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잠시 성찰의 시간을 가지며….. 걱정, 불안, 미움, 욕심 등등으로 가득 차 있는 나에게, 착한 신자가 아니어서 어렵겠지만 앞으로 하느님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마음으로 듣고, 성찰과 회개를 통해 제 마음의 밭에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가 맺을수 있기를 희망하며….. 신부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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