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수면睡眠-졸음 수, 잘 면)

사람은 누구나 대개 인생의 3분의 1 동안 잠잔다. 사람은 맨 처음에 잠으로 인생을 배우고 적응하느라 긴 시간 동안을 자고, 두 발로 걷기 시작하면서 시시때때로 틈만 나면 자고 싶어 하며, 인생의 종장에 가서는 혼수상태로 자는 연습을 집중적으로 하다가, 마침내 영원한 잠(영면永眠-길 영, 잠잘 면)에 들어간다. 하루만 놓고 보더라도 사람은 지나온 시간과 세상의 냄새를 뿜어내느라 씩씩거리고 코를 골면서 반드시 자야 한다.

어쩌면 인간은 너무나 약한 존재여서, 단 하루도 눈뜨고 견디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여서, 그렇게 뇌腦(정신)의 어리석음, 간肝(피)의 분노, 허파肺(숨)의 탐욕이라는 3독毒을 잠으로 해독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조물주는 인간의 오장육부五臟六腑를 쉬게 하시느라 낮을 빛으로, 밤을 잠으로 섭리하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잠잘 때 인간의 역사 안에 들어오셨고, 그분의 나라가 그렇게 사람들이 잘 때에 와 있었던 것이며, 인간이 잠들었을 때 당신은 쉬지 않고 창조를 계속하시느라 아직까지 잠이 들다가 깨다가를 반복하며 노심초사하시는지 모른다. 노인들이 잠이 없어진다고 말해도 잠의 총량에 있어서는 젊은 사람들과 대동소이하다. 잠자는 시간에 어쩔 수 없이 밤과 낮을 거꾸로 살아야만 하는 안타까운 인생을 사는 이들이 많고, 대개 밤이 될 때 떼지어 잠자리에 들며, 네가 서 있으면 나도 서 있고 네가 잠들면 나도 잠들겠다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잠자리에 들어도, 결국 잠은 혼자서 자야만 한다.

사람이 눈물을 흘리고 마음이 몹시 무겁다가도 언제이냐 싶게 잠이 덮치면 참을 수 없는 불행이다. 아울러 눈을 떠서 잠에서 깨어난 뒤에도 내가 왜 눈을 떠야 하는지를 가늠할 수 없다면 그것은 불행 중 불행이다. 잠은 일단 눈꺼풀로 감싸면 좋은 일이든 궂은 일이든 모든 것을 잊게 해주는 약藥이다. 잠은 눈꺼풀로 오기에 잠의 휘장인 눈꺼풀은 인간이 견딜 수 없는 가장 무거운 무게이다. 잠은 인간만 자는 것이 아니다. 밤낮 눈을 뜨고 있다는 물고기도 자고, 겨울잠을 자는 동물을 비롯하여 모든 동물이 반드시 자야 하며, 식물도 밤에는 자야 하고 모든 잎을 떨구어 최대한 활동을 줄이면서 4계四季 중 겨울 한 철은 숨을 죽여 자야만 한다. 만물이 이렇게 잠잔다.

잠은 욕망이다. 잠은 환상·망상·공상·상상幻妄空想이다. 잠은 먹고 마시는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 잠잘 생각을 놓지 못하는 쾌락이다. 잠은 쉼이다. 그래도 잠은 천사를 만나 계시를 듣고, 우주의 영감을 얻으며, 나의 무의식이나 잠재의식을 구체화하는 때와 장소이다. 잠은 망각 연습이고 죽음의 연습이다. 동양이건 서양이건 ‘혼수昏睡(어두울 혼, 잘 수), lethargy’라는 말의 뜻이 ‘경이에 대한 응시’이고, ‘망각과 잠을 불러오는 병’이며, 또한 ‘짙은 잊음’이듯이 그것이 잠이다. 잠은 잘 때 자야 한다. 잠들지 않은 새벽별의 소명이 되어 새벽 수탉처럼 운다고 해도 자칫하면 이웃의 잠을 깨우는 소란이 되듯 잠과 소음은 상극이다. 잠은 절대 보지 말아야 할 신랑 에로스의 얼굴을 보지 않는 신뢰이면서도 의심이며 불행의 시작이다. 잠은 도둑이나 악마에게 음모이며 기회이다. 큐피드의 화살이 떨어진 곳에서 돋아난 ‘사랑에 취한 야생 비올라’라고 부르는 화초의 꽃 즙을 잠자는 남자나 여자의 눈꺼풀에 떨어뜨리면, 잠을 깨는 순간 눈에 띄는 최초의 창조물을 미친 듯이 사랑하게 된다는 낭만이고 그리움이다.(*20170206-이미지,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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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적어도 3분의 1은 자는 것이어서인지 배우자를 얻기 위해 하느님 앞에서 쏟아지는 깊은 잠이 들어야 했던 구약의 아담 이야기(참조. 창세 2,20-25)로부터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성경에는 유달리 자고 깸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예수께서는 다급하게, 여러 번,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깨어있으라 하셨다. 처절한 십자가 고통을 목전에 두고서 괴로워하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제발 좀 깨어있어 달라고,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있을 수 없느냐, 아직도 자고 있느냐 하며 거듭 채근하셨다. 그러나 스승의 최측근이었던 그들마저 잤다.(참조. 마태 26,36-46 병행구) 그런가 하면 그 제자들이 훗날을 살아가기 위해 내내 추억과 기억의 원천, 희망의 샘이 되었던 주님의 영광을 흘깃 보게 된 타볼 산의 체험도 비몽사몽非夢似夢 간의 잠 속에서였다.(참조. 루카 9,32)

이렇게 예수님의 제자들은 스승의 처절한 고통과 찬란한 영광을 잠 속에서 겪었다. 하늘 나라의 비밀을 캐묻던 지식인 니코데모에게도 만물이 잠자는 시간이 스승을 만나고 온갖 것과 우정을 나누며 자신을 낮추는 기회였다.(참조. 요한 3,1-21) 그런데도 잠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완덕을 추구하는 수도 생활의 거룩한 전례와 일상의 틈새에 잠입하여 제자들이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태 26,41) 하는 스승의 말을 감히 흉내 내어 틈만 나면 늦잠을 자게하고, 또한 ‘졸더라도 자비로우신 하느님 앞에 있는 것 자체가 명상이요 묵상’이라는 변명을 하게 한다. 그래서 잠은 “너 게으름뱅이야, 언제까지 누워만 있으려느냐? 언제나 잠에서 깨어나려느냐? ‘조금만 더 자자. 조금만 더 눈을 붙이자. 손을 놓고 조금만 더 누워있자!’ 하면 가난이 부랑자처럼, 빈곤이 무장한 군사처럼 너에게 들이닥친다.”(잠언 6,9-11) 하는 말씀대로 게으름이요 가난이다.

성 암브로시오(St. Ambrosius 340년?~397년)는 “당신이야말로 만물을 내신 천주님, 밝은 빛으로 낮을 입히고, 포근한 잠으로 밤을 입히며, 하늘을 다스리시는 님, 늘어진 팔다리 쉬게 하사, 일할 힘 도로 주시고, 지친 맘 일으키시니, 시름에 찬 고달픔 풀어주시니….”라며 잠으로 하느님을 노래했고,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relius Augustinus 354년~430년)는 “깨었다가 잠이 들고, 잠이 들었다가 깨는 동안 나와 나 사이는 얼마나 엉뚱한 것이옵니까? 그런 때 나의 이성은 어디에 있사옵니까? 생시에 이런 유혹을 물리치고, 그 현실 자체가 꾀이더라도 끄떡 않는 그 이성이? 두 눈과 함께 감깁니까? 육체 감관과 함께 잠을 자는 것입니까?…나의 소망을 잠재워주던 사랑 겨운 노래의 기억과 습성…영혼이란 일찍부터 사랑을 위하여 생겨난 것. 기쁨에서 잠을 깨어 행동할 그때부터 저 좋아하는 일체의 사물에로 움직여 가느니라.…”하며 불순한 자신의 가슴 치는 심경을 고백록에서 잠에 비유하여 기록한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용서하는 일에 눈뜨지 못한 사람은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것이라고 경고했다.(*2016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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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일장춘몽一場春夢이고, 미처 밥 한 솥 다 끓여내지 못한 한단지몽邯鄲之夢이며, 한낱 나비의 꿈인지 꿈의 나비인지 모를 호접지몽胡蝶之夢일지라도, 일상이 눈물 젖은 탄식의 침상일지라도, 불면의 베개를 베고 누웠다 하더라도, 잠은 자야만 한다. 오늘도 자야 하고 내일도 자야 하며, 관절의 마디들이 풀어질 때까지, 아니 그 너머까지 자야 한다. 이 세상이 사업의 장소가 되어 시끄럽고 소란한 경제 성장의 소음 때문에 자는 법을 잃어가는 것이니 한 번이라도 인류가 숨을 돌리는 것을 본다면 기쁨일 것이라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 1817년~1862년)의 말처럼 낮밤을 혼돈混沌 속에 몰아넣고 만 이 세상은 제대로 자는 법을 배워야 한다. 고대 의학이 ① 빛과 공기 ② 음료와 음식 ③ 운동과 휴식 ④ 잠과 깸 ⑤ 배설과 제거 ⑥ 영혼의 성향(감정과 욕망)이라는 6가지 조절시스템이 인간의 본성에 맞게 배열되어야 한다고 했으니, 고대 사람들도 알았던 그 상식대로 현대 사람들은 더 늦기 전에 잠과 깸을 조절해야 한다. “광야의 까마귀와 같아지고 폐허의 부엉이처럼 되었으며, 잠 못 이루어 지붕 위의 외로운 새처럼 된”(시편 102,7-8) 이들이 자야 한다. 잠의 깊은 뜻을 깨우치며 제대로 자야 한다.(*20160206)

One thought on “잠(수면睡眠-졸음 수, 잘 면)

  1. 건강검진에서 수면 검사를 하면서, 또 자는 동안 고루 숨 쉬지 않는다는 전문 의사의 진단으로, CPAP이라는 마스크를 쓰고 숨을 멈춤 없이 고르게 쉬게 해주는 기계 사용을 권유 받고 사용 중이다. 약간의 불편함은 있지만, 확실히 아침에 더 상쾌한 느낌에 꾸준히 사용 중이다. 육체적으로 잠을 잘 잘 수 있어야, 영적으로 주인을 잘 맞이하기 위해 깨어있는 자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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