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격은 최선의 방어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자녀를 양육하면서 아이들이 못된 것을 배우지 않도록 막고, ‘진선미眞善美’를 사랑하도록 하는 것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아이들의 내면이 참되고 아름다우며 선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면 거기에는 더럽고 지저분한 것들이 들어갈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흔히 ‘예방豫防교육(Preventive System)의 원리’라고도 부르는 내용이다. 혼탁한 사회의 어두운 뒷면이나 온갖 디지털 매체의 영상이 빚어내는 역기능이 아이들에게 끼칠지도 모르는 해악의 공포 앞에서 자녀들을 보호한답시고 전전긍긍하면서 초조해할 것만은 아니다. 아이들이 인격적인 존재로 성장하도록 하기 위한 최선은 무엇을 하지 않도록 막고 금지禁止하며 차단할 것인가가 아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무엇을 생각하고 접하며 행실의 모범과 기준으로 삼게 할 것인가를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이미지 출처-영문 구글)

예술작품

몬테소리Montessori 교육 철학을 주창한 마리아 몬테소리Maria Montessori(1870~1952년)는 아이들이 있는 환경이나 공간에 반드시 그들의 수준에 맞는 아름다운 예술 작품들을 제시하거나 게시하도록 했다. 오늘날 아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나 사랑스러운 자녀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여지없이 파고들어 그들의 눈길을 잡아끌기 위해 현란하게 치장하거나 상업적 의도를 교묘하게 감춘 선정적인 정보물이 많으며, 아동이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소위 ‘시장市場’의 매출이 막대하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지하철 어디서나 공공연하게 만나게 되는 게임 광고판이나 얄궂게 신체의 특정 부위를 강조한 만화의 캐릭터들만을 생각해 보아도 이는 자명하다. 그저 한때 지나가는 아이들의 관심사일 뿐이고 그러다가 말겠지 하는 안이한 방치 속에 아이들이 거주하는 공간의 한 벽면이 엉뚱한 것들로 채워져 있기보다는 인류의 위대한 유산으로 남겨지는 고전적인 예술 작품들의 색상이나 구도로 채워질 수 있을 것이며, 아직 말을 못 하는 아기들이라 할지라도 정신없이 움직이며 치고받는 폭력적인 만화나 동영상 대신에 고전적인 예술 작품들의 플래시 카드를 관람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부모는 내가 낳은 아이가 뭔가 특별하고 영재이며 뛰어난 소양을 지녔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 아이는 그저 작고 어린 훌리건hooligan일 뿐이다. 그리고 부모는 곧잘 자기들의 순간적인 편의를 위해 아이들을 방치한다. 아이들은 보는 대로 되어간다.

음악

아이들이 무엇을 듣게 할 것인가도 중요하다. 아이들이 클래식 음악을 듣도록 하는 것이 엄청 따분할 것이며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저 강약만으로 정신없이 빠르게 엇박자로 때려대는 비트 음, 서정적인 선율이 아닌 ‘소리’만으로 채워진 이어폰을 아예 귀에 꽂고 살아가는 요즈음의 아이들이다. 성탄절이면 누구나 ‘나 홀로 집에’라는 영화를 떠올리며, 애나 어른이나 이미 보았던 영화인데도 또 보며, 이는 연례 행사처럼 고전으로 우리 곁에 남아있다. 매년 12월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무렵이면 온 가족이 앉아 ‘호두까기 인형’의 배경 음악 속에서 그 발레 작품을 하품하면서 억지로라도 보는 것, 그리고 먼 훗날 아이들이 눈물 어린 쓴웃음을 지으며 성탄절이 다가올 때마다 엄마 아빠의 등쌀에 성탄절이면 매번 지겹게 그 작품을 볼 수밖에 없었다는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운 일일까? 아이들은 다양하고도 반복된 기억 속에서 듣는 방식과 들리는 것들의 패턴 분석, 그리고 그에 대한 의견과 자기주장을 배운다. 아이들은 듣는 대로 되어간다.

시詩

아마도 지금은 노인의 나이에 들어선 이들이나 선생님의 엄한 추궁으로 시들을 외우고 시조를 암송해야 했을지 모른다. 아이들이 디지털 단절음과도 같은 ‘단축어가 아닌 시어詩語’로 제 생각을 표출하고 일상을 간결하게 정리하도록 할 수는 없을까? 시인은 대부분 사람이 두리뭉실하고 막연하게, 무의식중에 그저 생각만 하고 있는 것들을 함축된 어휘로 대표해 주면서 사람들이 정돈되어 살아갈 수 있게 하며 인간의 삶에 여운을 지니게 한다. 그리고 그런 내용은 우리 사회의 개념이 되고 문화가 되며 삶을 멋지고 풍요롭게 한다. 인스턴트커피와 주스 한잔을 앞에 놓고서일지라도 우리 아이들과 함께 아름다운 고급 언어와 어휘, 그리고 문장으로 무엇인가를 한 번 더 생각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아이들이 사용하고 있는 말도 안 되는 단축어를 따라 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 속에서, 아이들에게 행여 들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감추며 어쭙잖게 흉내 낸 단축어에 어설프게 웃지 않도록 조심하며 아이들과 어울려보려고 애쓰는 대신, 아이들이 고리타분하다고 타령을 하더라도 아이들과 함께 품위 있는 시 한 편이라도 암송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과연 어려울까? 이는 그저 감상적인 낭만일까? 아이들은 암송하는 대로 되어간다.

자연自然

부모가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보다 자연이 가르치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이 큰 차이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의 이름에 ‘큰 대大’를 앞에 붙여 ‘대자연大自然’이라 한다. 우리나라에서 상당 기간 지속되고 있는 ‘자연인’이라는 TV 프로그램을 보며 대리만족하고, 대부분은 결코 되지 못하고 또 되지도 못할 자연인을 꿈꾸는 것보다는 가끔일지라도 아이들과 함께 자연 안에 들어가 자연을 느끼고 사랑하며 사랑받고, 인간이 어울려 살아야 하는 생태를 관찰하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말할 수 없이 큰 공부이다. 아이들에게 거액의 과외를 시켜주는 것보다도 아이들과 함께 하루의 자연 학습이라도 함께하는 것은 학습을 넘어 말 그대로 거대한 ‘과외科外’ 과목이 된다. 자연 속에서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떤 음音도 흉내 내지 못한 새소리를 듣고, 그 어떤 거장巨匠도 표현하지 못한 빛깔을 만나며, 그 어떤 작가도 묘사하지 못한 황홀한 장면을 접하며 감탄한다. 좁고 작은 나라이지만 우리 국토의 70%가 산이라고 배운 우리 곁에는 한두 시간도 안 되는 거리에서 지금 우리 자녀와 씨름하고 있는 공간과는 전혀 다른 호수, 강, 나무, 꽃, 동물들, 그와 어우러지는 인간의 삶을 만난다. 아이들이 자연에서 보고 배운 것들의 일지日誌를 쓸 수 있고 그릴 수 있다면 그 일지는 이미 위대한 고전古典이요 걸작이다. 아이들은 접하는 대로 되어간다.

일상日常

청소하고 밥상 차리며 설거지하고 빨래하는 것들, 매일 해야만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일들, 물 긷고 땔나무 주우며 마당 쓰는 일들을 창의적이고 예술적으로 할 수는 없을까? 매너리즘에 빠지고 하기 싫어 미루게만 되는 판에 박힌 루틴routine이 되어가는 것들을 새롭게 하고 재미있게 할 수는 없을까? 우리는 그것을 ‘삶의 예술’이라 부른다. 밥상을 차리더라도 길에서 주운 나뭇잎 한 장을 깨끗이 씻어 곁들이면 온 식구에게 웃음과 활력의 계기가 되고, 빨래가 개켜져 있는 모습 하나에서도 그것이 어디에 어떻게 놓여있는가, 혹은 언제 어떻게 누구와 정리하는가에 따라 ‘이야기’가 되며, 진공청소기의 소음과 걸레질도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하는가, 그리고 내가 짓는 미소에 따라 경쾌한 리듬이 된다. 일상을 처리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라 장식하고 꾸며 평범한 것을 범상치 않은 아름다움으로 만드는 기교와 기술의 연마가 수행修行이며 공부工夫이다. 아이들은 함께 사는 대로 되어간다.

One thought on “공격은 최선의 방어

  1. 언젠가 들은 전 오바마 대통령과 부인 미쉘의 대화중 그들의 자라온 어릴적 다른 환경속에서도 공통된 점은 오바마 대통령이 언급한 ” tightend family bond” 안에서 성장,-즉 가족으로 부터는 사랑을 느끼고 이웃으로 부터 도움을 주고 받는 환경-속의 성장을 언급하며, 그것이 바로 community (공동체) 였다 라고 표현한 짧은 내용이 기억난다. 과거나 지금이나 너무도 다른 환경 영향속에서 성장하는 아이들 속에서 공통적으로 어떠한 격차 없이 갖을수 있는건 “사랑” 이지 싶다. 살수도 팔수도 없는….. 나이가 들어 손자 손녀를 보게되는 이 나이에, 어른들도 열심히 노력하여 올바른 사랑을 표현 하는 방법에 게을리 해서는 안될것 같다. 성장한 자녀에게 아직도 쓴말을 하지만 그때마다 얼마나 생각을 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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