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6,60-69(연중 제21주일 ‘나’해)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

전례적으로 요한복음 제6장의 종결부에 드디어 도달했다. 다음 주부터는 ‘나’해의 복음인 마르코복음으로 돌아갈 것이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신 “생명의 빵”에 관한 긴 말씀이 유다인들뿐 아니라 심지어 제자들 가운데에서도 논란과 충격이 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 공동체 간에 야기된 이러한 논란과 위기에 맞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메시아, 곧 하느님께서 보내신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고백하는 결정적인 증언을 남기는데, 이러한 내용은 네 복음서 모두가 전한다.(참조. 마르 8,29와 병행구) 이러한 논란과 위기는 예수님을 따르면서 애정과 주의를 기울여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는다고는 하지만, 때때로 그 말씀이 제자들의 귀에마저 받아들이기에 참 어렵게 들리고,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알아들은 척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분이라고 하면서 보잘것없고 죽음으로 치닫는 인간의 몸인 당신의 ‘’(히브리어·basar/희랍어·sárx)과 피를 먹고 마셔야만 산다고 하시고, 그를 통해 살아계신 하느님을 이야기할 때에 제자들은 혼란에 빠졌다. 수군거리고, 말다툼을 벌이고, 듣기 거북하다며 불평하고, 투덜거리며, 예수님을 등지고 되돌아간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있는 그 예언자시다.”(요한 6,14) 하였고, 심지어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요한 6,15)고까지 하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요한 6,51 참조. 요한 6,33.38.41-42.58) 하고 누차 이를 강조하시듯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면서 도저히 받아들이기에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예언자도 좋고 메시아도 좋으며 하느님께서 보내신 것까지도 받아들이겠지만, 하늘에서 인간의 육신을 취하시어 오셨으며 그 육신을 십자가의 잔혹한 죽음에 이르기까지내어주시고’(넘겨지다, παραδίδωμ, paradídomi = give over, entrust) 먹어야 할 살과 마셔야 할 피로(참조. 요한 6,51-56) 주신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에 어려웠다. 사람들은 이를 참을 수 없었고 들어줄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1. “듣기가 너무 거북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요한 6,60-6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투덜거림을 아시고 제자들 가운데 분열이 생기거나 당신을 더는 따르지 않을 위험을 감수하시면서도 직설적으로 거침없이 진실을 말씀하신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요한 6,61-62) 하시며 다소 공격적으로 말씀하신다. ‘올라가는 것을 보다’라는 표현에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14)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요한 8,28)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요한 12,32) 등에서 보듯이 사람의 아들이 십자가에 들어 올려지는 것, 십자가 위의 치욕적인 죽음, 전에 오셨던 곳으로 다시 올라가심의 뜻이 두루 담겼다.

“율법이 육으로 말미암아 나약해져 이룰 수 없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루셨습니다. 곧 당신의 친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을 지닌 속죄 제물로 보내시어 그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셨습니다.”(로마 8,3) 하는 대로 사람들은 십자가 위 예수님의 처참하고도 비참한 육의 모습을 통해 더욱 거북하고 더욱더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을 맞을 것이지만, 예수님의 온전한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예수님께서 공격적으로 말씀하시는 듯하지만, 사실은 예수님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숱한 오해와 불신, 모욕을 참아 받으시면서도 당신의 말씀을 말씀대로 사셔야 했고 지켜내셔야만 했다. 도대체 사람들은 예수님께 왜 그렇게 공격적이어야만 했을까?

예수님께서는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요한 6,65) 하신다. 예수님께로 가는 것을 허락하시는 아버지의 은총은 말 그대로 선물이요 은총이다. 인간적인 어떤 시도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순전히 아버지의 허락이요 선물임을 알라는 이 말씀 역시 받을 만한 자격이 있거나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던 종교인들에게는 또다시 화를 돋울만한 일이었다. 사람들의 화를 돋우며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못마땅하게 했던 예수님의 행적은 특별히 그분이 너무 인간적이고 여타의 인간과 똑같으며 그저 한낱 평범한 “요셉의 아들 예수”(요한 6,42)이며, 사람들 손에 넘겨지고 배반을 당하며, “너희 가운데 하나는 악마다.”(요한 6,70) 하신 대로 열둘 중 하나에 의해 죄인들의 손에 떨어지고 만다는 사실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느님과는 정반대의 하느님,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이시지만 기대하던 메시아와는 정반대의 메시아, 무력하고 가난하며 약하고 인간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그런 메시아를 주님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바로 그 지점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가 담겨있다.

수 세기를 두고 수많은 무리와 이슬람을 비롯한 종교들이 받아들일 수 없었고, 오늘날까지도 강하게 거부하는 부류의 사람들은 바로 이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못하여 생겨난다.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나자렛 사람 예수요 요셉의 아들 예수이며 실제 인간이시고 죽을 수밖에 없는 몸을 지니신 분이시면서도 구세주라는 사실을 하느님께서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셨음을 거부하고 공격한다. 그리스도교 신앙 역시 이 점을 간과하면서 오직 전지전능하신 하느님만을 모시려 하고, 죄 말고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절대로 될 수는 없는 하느님만을 모시려고 한다면 쉽사리 오류에 빠지고 독단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1515~1582년)는 『주님께서 ‘친구가 많지 않은 분’임을 알았다.』라고 말한다. 예수님을 떠나가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적으로만 알아들으려 하여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이라 하고, 감미로운 말씀을 씁쓸하게 자신을 옭아매는 말씀이라 하며, 거룩한 계약의 말씀을 속박의 사슬과도 같은 말씀이라 여긴다.

2.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그래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려다가) 되돌아가고 더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요한 6,66) 이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무리 중에 소수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측근 중 측근이랄 수 있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과 약속을 알고 계시므로 낙담하거나 의기소침하지 않으신다. 소수만이 남더라도 아버지께서 신실하신 분이심을 알기 때문이다. “되돌아간” 소위 제자들은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종교적인 확신 때문이었을까? 그 어떤 경우라도 결국 신앙의 부족이었음은 분명하다. 처음에는 소명을 받아들이고 열정에 북받쳐 예수님을 따라나섰을 것이지만, 자기 인식과 이성에만 갇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여 넘어지고 말았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걸어온 길을 부인하고 지나온 자기 길을 되돌아보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벗어나 “되돌아간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께서 개인적으로 부르셨던 사도요 제자인 유다도 있었다. 과연 그런 일이 가능할까? 가능하다. 예수님의 공동체에도 그렇고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도 악마의 하수인이 되는 이가 있고 배반 말고는 다른 것을 못 하는 이들도 있게 마련이다. 사랑의 관계는 배신을 안다. 배신자는 사랑 자체를 제거하려고 위협한다. 배신자는 마땅히 사랑에서 제외되어야만 한다. 공관복음에서 최후의 만찬에 배치했던 유다의 배신에 관한 내용을 복음사가 요한은 의미를 담아 최후의 만찬 장면(참조. 요한 13,21-30)과 바로 여기 예수님께서 모든 이에게 주시는 당신 생명의 빵을 전하는 ‘성체성사에 관한 담화맨 끝에 배치한다.(참조. 요한 6,70-71)

어떤 의미에서 오늘의 교회는 사람들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을 용기를 감히 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되묻고 싶다. 항상 성공의 표징만을 구하고 신자들의 숫자만 신경을 쓰며 신앙의 질이 아니라 공동체 크기만을 생각하는 교회가 아닌가를 묻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이지 “믿음이 약한 자들”(마태 6,30;8,26;14,31;16,8;17,20 루카 12,28)임이 틀림없다. 우리는 때때로 가능한 한 위기와 우리의 실패를 멀리하고 감추며, 침묵하거나 못 본 척하려 하고, 그것마저 주님의 뜻이었다는 사실을 외면하려 한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요한 15,2) 하신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가지치기와 손질은 “아버지”의 몫이지 공동체를 책임 맡고 있거나 공동체 안에서 특정 임무를 수행하는 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복음은 그 자체로 끌어당기기도 하고 넘어뜨리기도 하는 힘이다. 복음의 일꾼은 주저함이 없이 복음을 솔직하게 선포할 뿐이다. 시몬 베드로는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는 예수님의 물음 앞에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한다. 베드로의 말처럼 복음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과 함께 예수님을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으로 고백한다. 예수님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 곧 ‘셰키나Shekinah’를 고백한다.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의 살과 피를 통해 사람이 되신 분 안에 하느님께서 계신다.

3. “저희가 누구에게하느님의 거룩하신 분

베드로는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하고 반문하고 제자들 전체를 대신하여 “저희가”라고 하면서 “스승”이요 “예언자”이시며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종합적으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고백한다. 베드로의 반문은 ‘나를 사랑해?’라고 물어오는 연인 앞에 ‘그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와 같은 형식이다. 참으로 정감이 서려 있으면서도 상호 간에 보이지 않는 신뢰의 끈이 엉켜 있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이 항상 쉬운 것만도 아니고, 그렇다고 항상 즐거움으로 들을 수 있는 것만도 아니며, 또한 완전히 알아들을 수 있는 것만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는 이 세상살이 동안 그 어느 곳에서도 다른 대안을 찾을 수가 없음은 자명하다. 우리가 주님 외의 누구에게서도 다른 답을 찾을 수가 없다는 믿음만이 우리를 마침내 승리하게 만들 것이다.

베드로는 이를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시절을 통해 “알았고 믿어 왔던” 내용이라 한다. 베드로가 고백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은 일찍이 천사가 성모님께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라고 알려주었던 바로 그 이름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곧 주님(JHWH)의 거룩함에 참여하시는 분이시다. “거룩하신 분”은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도 없이 하느님을 부르며 외쳤던 하느님의 이름이며 요한계 문헌과 전통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참조. 묵시 3,7)을 지칭하는 호칭이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시기적으로 아직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한 상황이므로 온전하게 주님을 알고 이러한 고백을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많은 경우에 자기가 입으로 고백하는 말의 크기를 모르는 채 말하는 것이 상례이다. 이러한 전제 안에서 베드로의 고백을 본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떠나가는 상황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과 남을 결심과 각오가 되어있었다는 것만큼은 적어도 분명한 사실이라고 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베드로처럼 당신과 함께 끝까지 남아 주님의 길을 함께 걷는 자와 당신과 함께 깊은 만남을 가진 자에게만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다. 유다인들은 혼자 속으로 생각하든지, 자기들끼리 투덜대든지 하면서 예수님을 떠나갔기에 끝내 예수님을 알아 모시지 못하지만,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는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깊은 만남을 가지며 대화하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며 끝까지 그분과 남아 마침내 그분의 살과 피를 먹어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고백한다. 『하느님을 찾는 것은 어두운 밤이다. 신앙도 때로 어두운 밤이다.…인간에게 매일매일도 어두운 밤이다. 그 누구도 인생의 바로 다음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다. 그런데도 모두가 믿음으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간다. 인생의 여정은 걸음걸음이 신앙의 행위이다.(파울로 코엘료Paulo Coelho, 1947년~)』

이렇게 예수님의 “생명의 빵”에 관한 긴 말씀이 끝난다. 아마도 이 말씀 안에는 우리가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한 내용, 우리가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내용,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내용이 담겨 있을 것이다.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유다인들이나 제자들만이 아니라 사실 우리에게도 참 어려운 말씀이다. 단순히 머리로만 이해하지 않고 우리의 실존을 담아 구체적인 일상에서 이 말씀을 살아낸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임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예수님 곁에 남았던 열하나처럼 우리의 허약함과 약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되돌아가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항구하게 그분을 따른다. 그분을 거부하거나 그분에게서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총을 그저 받기만을 원하면서 그렇게 그분 곁에 머무른다.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콜로 2,9-10) 하신 대로 우리와 같으신 예수님께서,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먹이시고 살리신다. 영성체 안에서 우리가 받아 모시는 영원한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그분의 나라를 향해 나아간다. 아멘!

4 thoughts on “요한 6,60-69(연중 제21주일 ‘나’해)

  1.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고백하면서도 세상적으로 힘든 상황에서는 떠나려고 하는 저를 보게 됩니다.

  2. 무력하고 가난하며 약하고 인간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그런 메시아의 모습으로 오신 주님을, 그 시대에 내가 만났다면 나는 어떤 반응을 했을까? 주님을 떠나가는 사람들 대열에 끼어있지 않았을까?
    아버지의 은총은 거저 주어지는 선물, 은총이란 말씀이 큰 위로가 됩니다.

  3. 우왕좌왕 헤매는 제자들 속에 있을 것 같은
    제 모습을 봅니다.
    근데
    마음속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곁에 계실 구세주 하느님!
    경배합니다. 찬양합니다.
    흔들리면서 뿌리 잡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4. “자기가 입으로 고백하는 말의 크기를 모르는 채 말하는 것이 상례이다”라는 말씀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오늘 말씀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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