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사목자의 양성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7월 17일 문학이 미래의 사제나 사목자의 양성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관한 서한을 발표했다. 다음은 영어에서 옮겨온 번역문 전문이다.

1. 저는 원래 이 편지에 사제 양성과 관련된 제목을 붙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해 보니, 이 주제가 사목 활동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 나아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적용된다고 여겨졌습니다. 여기서 저는 개인적인 성숙 과정에서 소설과 시를 읽는 것에 관한 가치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2. 휴가 중 지루함을 느낄 때, 덥고 따분하며 조용한 동네에서 좋은 책을 찾는 것은 우리를 건강하지 못한 선택에서 멀어지게 하는 오아시스가 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피곤함, 분노, 실망 또는 실패의 순간, 기도가 우리에게 내면의 평화를 지켜주지 못할 때, 좋은 책은 우리가 마음의 평화를 찾을 때까지 마음의 궂은 날씨를 견딜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독서에 소비된 시간은 새로운 내면의 공간을 열어주고, 성장의 길에서 우리를 방해하는 몇 가지 강박적인 생각에 갇히지 않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과 같이 소셜 미디어, 휴대전화나 기타 기기들에 끊임없이 노출되기 전에는 독서가 흔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러한 경험을 지닌 이들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실 것입니다. 독서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전혀 아닙니다.

3. 더욱더 자율적이면서도 이야기의 의미를 탐구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 영상 매체와 달리, 책은 독자에게 더 큰 개인적 참여를 요구합니다. 독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상상력을 통해 그 범위를 넓히고, 자신의 능력, 기억, 꿈, 개인적인 역사, 모든 드라마와 상징을 동원하여 또 다른 이야기를 쓰면서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냅니다. 이런 식으로 독서를 하다 보면 독자가 처음에 의도한 것과는 전혀 다른 텍스트가 또 나타나게 됩니다. 문학 작품은 이처럼 살아있고 계속해서 열매를 맺는 텍스트로, 언제나 다른 방식으로 말할 수 있으며, 독자 개개인이 자신만의 독창적인 종합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독서를 통해 우리는 저자가 제공하는 것에서 내면적으로 성장하게 되고, 우리가 읽는 새로운 작품들은 우리의 세계관을 새롭게 하고 확장해 줍니다.

4. 이러한 이유로 저는 적어도 일부 신학교에서 ‘화면’에 대한 집착과 폐해, 피상적이며 폭력적인 가짜 뉴스에 대응하여 문학에 시간과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그들은 조용한 독서를 위해 시간을 할애하고, 우리에게 여전히 많은 것을 전해주는 고전이나 새로운 책들을 토론하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직자 양성 프로그램에 문학에 대한 충분한 기초 교육이 일반적으로 포함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학을 종종 단순한 오락거리나 교육과정에 포함되지 않아도 되는 ‘하위 예술(minor art)’로 여기거나, 사목을 준비하는 미래의 성직자 교육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간주하기 일쑤입니다.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 문학은 필수적인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러한 접근 방식이 건강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미래의 사제들을 지적, 영적으로 심각하게 빈곤해지게 할 수 있으며, 문학이 인간 문화의 핵심, 더 구체적으로는 각 개인의 핵심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특권을 빼앗아버릴 수 있습니다.

5. 이 편지로 저는 근본적인 변화의 필요성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한 신학자가 “문학은 인간 존재의 가장 본질적인 핵심에서 비롯하며, [그들 존재의] 신비한 수준에 닿아 있다 … 문학은 삶이고 의식 자체이며, 언어의 모든 개념적 자원을 활용하여 자아를 완전히 표현해내는 것이다”(R. LATOURELLE, ‘Literature’, in R. LATOURELLE & R. FISICHELLA, Dictionary of Fundamental Theology, New York 2000, 604)라고 말한 관찰에 동의합니다.

6. 따라서 문학은 우리 인생의 이러저러한 깊은 욕구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문학은 우리의 구체적인 존재, 그 안에 내재된 긴장과 욕망, 그리고 의미 있는 경험들과 깊은 차원에서 교류하기 때문입니다.

7. 저는 젊은 교사로서 학생들과 함께 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1964년과 1965년, 28세의 나이에 저는 산타페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쳤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마지막 두 학년을 가르쳤고, 제 학생들이 《엘 시드(El Cid)》를 공부하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은 불만을 토로하며, 대신 가르시아 로르카García Lorca의 작품을 읽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학생들이 《엘 시드》는 집에서 읽도록 하고, 수업 시간에는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들을 토론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학생들은 현대 문학 작품을 읽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당시 관심을 가졌던 작품들을 읽으면서, 문학과 시에 대한 더 일반적인 취향이 발전되었고, 결국 다른 작가들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결국,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더 위대한 것을 찾게 되며, 각 개인은 문학에서 자신의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Cf. A. SPADARO, “J. M. Bergoglio, il ‘maestrillo’ creativo. Intervista all’alunno Jorge Milia”, in La Civiltà Cattolica 2014 I 523-534)

저로서는 비극 작가들을 좋아하는데, 우리가 그들의 작품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우리 자신의 개인적 드라마를 표현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등장인물들의 운명에 대해 눈물을 흘리며, 본질적으로 우리 자신, 우리의 공허함, 부족함, 그리고 외로움에 대해 눈물을 흘립니다. 물론 제가 읽은 것들과 똑같은 책을 읽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 자신만의 삶에 공감하는 책들을 발견하고, 자신의 여정에서 진정한 동반자가 될 수 있는 책들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권고로 필수적이라고 여겨지는 책을 단지 의무감으로 읽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안내에 언제나 열려 있는 상태에서, 열린 마음으로, 놀라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일정한 유연성과 배울 준비를 하고, 각자 삶의 매 순간에 필요한 것들을 발견하기 위해 독서를 선택해야 합니다.

신앙과 문화

8. 문학은 또한 당대의 문화, 또는 단순하게 말해서 타인의 삶과 체험에 관하여 진지하게 대화하려는 신앙인들에게 필수적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문학과 예술도 그 나름대로 교회 생활을 위하여 중요하다. 인간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고 완성하려는 시도에서 인간 본연의 특성과 인간의 문제와 경험을 배우려고 노력하며, 역사와 전 세계 안에서 인간의 자리를 찾고 인간의 불행과 기쁨, 욕망과 능력을 밝히고 인간의 더 나은 운명을 그리려고 힘쓰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문학과 예술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표현되는 인간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다.”(사목헌장, 62항)라고 천명한 그대로입니다. 실제로 문학은 우리 일상의 현실, 그 현실에서 벌어지는 열정과 사건들, 우리의 “행동, 일, 사랑, 죽음, 그리고 삶을 채우는 모든 가련한 것들”(K. Rahner, “Il futuro del libro religioso”, in Nuovi saggi II, Roma 1968, 647)에서 그 단서들을 얻습니다.

9. 고대와 현대 문화가 지닌 상징, 메시지, 예술적 표현들, 그리고 그들이 담고 있는 깊숙한 고통, 두려움, 열정, 끝 모를 이상이나 열망을 포착하고 우리를 자극하는 것에 우리가 친숙하지 않거나 무시하고 이를 소홀히 한다면 그 핵심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문학이 소설이나 시를 통해서 표현하고자 했던 ‘이야기들’에 우리가 무지하고 이를 제쳐두거나 감사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남성과 여성의 마음에 말을 건넬 수 있겠습니까?

10. 교회는 선교의 체험을 통하여 신앙이 뿌리를 내리게 된 서로 다른 문화와의 만남 안에서 그러한 문화들이 지닌 최고의 것을 주저 없이 활용하고 끌어내는 방법을 통하여, – 종종 문학을 통하여, 새로움과 신선함, 아름다움을 배웠습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특별한 문화·역사적 ‘문법 체계’가 복음의 풍요로움과 깊이를 모두 표현해낼 수 있다는 식의 맹목적인 근본주의자들의 ‘자기 조회(self-referentiality)’라는 유혹으로부터 교회를 해방하여 주었습니다.(참조. 복음의 기쁨 117항) 절망을 심으려고 하는 오늘날의 많은 종말론적 예언들이 이러한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다양한 문학적, 문법적 스타일과의 접촉은 하느님의 계시를 훼손하거나 우리 식대로의 필요성이나 사고방식으로 계시를 축소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의 계시가 지닌 풍요로움(다성성多聲性, polyphony)을 더욱 깊게 탐구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11. 그러므로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도교가 당대의 고전적인 문화에 진지하게 참여할 필요를 분명하게 깨달았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동방 교회의 교부 중 한 분이신 체사레아의 성 바실리오St. Basil of Caesarea께서는 370년에서 375년 사이에 아마도 당신 조카들에게 보내고자 쓰신 젊은이에게 보낸 말씀에서 자기가 ‘이교도 작가들’(밖에 있는 이들, hoi éxothen, those outside)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저술한 고전 문학의 풍요로움을 찬양하였습니다. 교부께서는 신학과 주석에 유용한 그들의 논증(lógoi, discourses)이나 금욕적이며 도덕적인 생활에 유용한 품행(práxeis, acts, conduct)이라고 부르는 윤리적 내용이라는 두 가지 면에서 이를 보았던 것입니다. 바실리오 성인께서는 고전을 젊은 그리스도인들의 교육과 수련을 위해 영혼에 유익을 주는 안내서(ephódion, viaticum)와 같은 수단이라면서 글을 마쳤습니다.(해당 글 IV, 8-9) 이렇게 그리스도교와 당대의 문화가 만나면서 복음 메시지의 신선한 소개가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12. 문화에 대한 복음적 식별 덕분에 우리는 인간의 다양한 경험 속에서 성령의 현존을 인식할 수 있으며, 마음과 사회적, 문화적, 영적 환경 안에 존재하는 사건, 감성, 욕구, 깊은 갈망 속에 이미 심어진 성령께서 현존하신다는 씨앗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7,16-34에서 바오로 사도께서 아레오파고스 광장에서 행하신 접근 방식에서 우리는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에 대해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몇 사람이 ‘우리도 그분의 자녀다.’ 하고 말하였듯이,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사도 17,28)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에는 두 인용문이 담겨있는데, 하나는 시인 에피메니데스Epimenides(기원전 6세기)의 간접 인용문이고, 다른 하나는 별자리와 좋고 나쁜 날씨의 징조에 관해 쓴 솔리의 아라투스Aratus of Soli(기원전 3세기)라는 시인의 작품 페노메나Phaenomena의 직접 인용문입니다. 여기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독자’임을 드러내면서 문화의 복음적 식별이라는 문학 작품에 접근하는 자신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바오로 사도를 비웃으며 수다쟁이(spermologos, babbler)라고 일축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말 그대로 ‘씨앗을 모으는 이(a gatherer of seeds)’였습니다. 분명 모욕적인 비난이기도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매우 진실한 내용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처음에 “그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 찬 것을 보고 격분”(사도 17,16) 하였지만 이교도인의 시에 담긴 씨앗을 모았으며,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대단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사도 17,22) 하면서 그들이 극도로 종교적임을 인정하고, 그들의 고전 문학 내용에서 진정으로 ‘복음을 맞이할 준비(praeparatio evangelica)’가 담겨있음을 발견했던 것입니다.(A. SPADARO, Svolta di respiro. Spiritualità della vita contemporanea, Milano, Vita e Pensiero, 101)

13. 바오로 사도께서 하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도께서는 “문학이 인간 내면의 심연을 밝히고, 뒤이어 계시와 신학이 그리스도께서 그 심연에 들어가 그 심연을 어떻게 비추시는지를 보여준다(literature brings to light the abysses within the human person, while revelation and then theology take over to show how Christ enters these depths and illumines them)”(R. LATOURELLE, ‘Literature’, in R. LATOURELLE & R. FISICHELLA, Dictionary of Fundamental Theology, New York 2000, 603)라는 사실을 이해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심연의 면전에서 문학은 영혼의 목자들이 자기 시대의 문화 안에 들어가 열매를 맺는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도와주는”(SAINT JOHN PAUL II, Letter to Artists, 4 April 1999, 6)입니다.

육화하지 않은 그리스도

14. 미래의 사제 양성에 문학 공부가 장려되어야 하는 구체적인 이유를 살펴보기 전에, 저로서는 먼저 현대 종교적 환경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거룩함으로의 회귀와 영성의 추구는 그 성격이 모호한 현상입니다. 오늘날의 과제는 무신론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을 찾는 많은 사람의 목마름에 적절히 대응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이질적인 해결책들로 이 목마름을 채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육신 없는 예수님, 다른 이들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으로 이 목마름을 채우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자신을 치유하고 해방하며 생명과 평화로 가득 채워 주고, 또한 형제적 친교와 선교의 풍요로움으로 부르는 영성을 찾을 수 없다면, 그들은 참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게 하거나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지 못하게 하는 그릇된 해결책들에 속아 넘어가고 말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89항)

복음을 선포하는 데에 시급한 우리 시대의 과제는 신자, 특별히 사제들이, 인간의 육체가 되시고 사람이 되셨으며 역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나 만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요청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 곧 열정, 감정, 느낌, 도전과 위로를 주는 말, 만지고 치유하는 손, 해방과 용기를 주는 표정, 환대, 용서, 의로운 분노, 용기, 담대함, 한마디로 ‘사랑’을 잃지 않도록 해야만 합니다.

15. 바로 이 수준에서 문학에 친숙해지면 미래의 사제들과 모든 사목자가 주 예수님의 온전한 인성에 더욱 민감해지고, 그리하여 그분의 신성이 온전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이 복음을 선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 안에서만 참으로 인간의 신비가 밝혀진다.”(사목 헌장, 22항)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참된 가르침을 누구나 체험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어떤 추상적인 인간의 신비가 아니라 모든 남성과 여성의 구체적인 삶의 일부인 상처, 욕망, 기억, 희망의 신비입니다.

위대한 선

16. 실용적인 관점에서 볼 때 많은 학자는 독서 습관이 인생에 여러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더 많은 어휘를 습득하도록 하고 지적인 능력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에 따를 때 독서는 사람들의 상상력과 창의성을 자극하여 자기의 이야기들을 더욱 풍요롭게, 더욱 잘 표현하도록 하는 방법을 배우게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독서는 집중력을 향상하게 하며, 인지능력 저하를 막아주고, 스트레스와 불안을 진정시킵니다.

17. 더 나아가 독서는 인생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상황을 이해하고 대처할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켜 줍니다. 독서를 통해 우리는 인생의 도전을 극복해가는 등장인물의 생각, 고민, 비극, 위험, 두려움에 몰입하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끝까지 따라가다 보면 나중에 나의 인생에 도움이 될만한 통찰력을 얻게 되기도 합니다.

18. 독서를 장려하기 위해 저로서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는 잘 아는 작가들의 짧은 두 대목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소설들은인생에서 조금이라도 알기 위해서는 몇 년이 걸리고, 그중 강렬한 것은 발생 속도가 너무 느려서 우리가 좀체 알아차리기 어려운 인생의 모든 기쁨과 불행까지도 우리 안에, 시간이라는 공간 안에 펼쳐놓는다.(in us, in the space of an hour, all the possible joys and misfortunes that, in life, it would take us entire years to know even slightly, and of which the most intense would never be revealed to us because the slowness with which they occur prevents us from perceiving them)”(M. PROUST,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 – Du côté de chez Swann, B. Grasset, Paris 1914, 104-105)

위대한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나는 천 명의 사람이 되지만 여전히 나 자신으로 남는다. 희랍의 시에 나오는 밤하늘처럼 나는 무수한 눈으로 보지만, 보는 사람은 여전히 나다. 하느님께 경배드릴 때, 사랑할 때, 도덕적으로 행동할 때, 그리고 알게 될 때, 나는 나 자신을 초월한다. 그리고 이때처럼 나다울 때는 없다.(In reading great literature I become a thousand men and yet remain myself. Like the night sky in the Greek poem, I see with myriad eyes, but it is still I who see. Here, as in worship, in love, in moral action, and in knowing, I transcend myself; and am never more myself than when I do)”(C.S. LEWIS, An Experiment in Criticism, 89)

19. 그렇지만 독서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이러한 일반적이고 개인적인 이점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이 글을 쓰는) 저의 의도는 아닙니다. 독서로 새로운 사랑을 장려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타인의 목소리 경청

20. 문학을 생각하면 아르헨티나의 위대한 작가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가 자기 학생들에게 늘 했던 말, 즉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작품의 사상이나 비평에 집착하기보다는 단순히 그 작품을 읽고, 그 작품과 직접 접촉하며, 우리 앞에 놓인 살아있는 텍스트에 몰입하는 것이라고 했던 말(Cf. J.L. BORGES, Borges, Oral, Buenos Aires 1979, 22)이 떠오릅니다.

보르헤스는 처음에는 자신이 읽고 있는 내용을 조금밖에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읽다 보면 어찌 되었든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라면서 이 개념을 자기 학생들에게 설명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listening to another person’s voice), 이것이 바로 제가 아주 좋아하는 문학에 대한 정의입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도전해 올 때 그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듣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많은 신학이나 심리학을 공부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즉시 자기 고립에 빠져들고, 우리 자신과 우리 하느님과의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일종의 ‘영적인 청각 장애(spiritual deafness)’에 빠지게 됩니다.

21. 타인이라는 신비에 민감하여지도록 하는 문학에 대한 이러한 접근 방식은 우리가 타인의 마음을 어떻게 어루만져야 하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여기서 저는 1964년 5월 7일 성 바오로 6께서 예술가들과 작가들에게 하셨던 용기 있는 호소를 생각하게 됩니다: “저희는 여러분들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사목에는 여러분의 협동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 사목은 사람들이 영의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 형언할 수 없는 세계, 하느님의 세계에 다가갈 수 있고 알아들을 수 있으며 실로 확신하도록 감동적으로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러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다가갈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세계로 표현해내는 데에 장인들입니다.”(SAINT PAUL VI, Homily, Mass with Artists, Sistine Chapel, 7 May 1964)

요점은 이것입니다. 신자들의 임무, 특별히 사제의 임무는 정확하게 말해서 다른 사람의 마음에가 닿아(감동하도록 하여, touch)” 그들이 주 예수님의 메시지에 열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위대한 임무에 문학과 시가 제공할 수 있는 기여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닙니다.

22.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신앙을 성찰하며 시와 수필로 현대 문학에서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시인 엘리엇T.S. Eliot은 오늘날의 종교적 위기는 만연한 감성적 무능력(emotional incapacity)의 위기라고 묘사하였습니다.(Cf. T.S. Eliot, The Idea of a Christian Society, London 1946, 30) 우리가 이러한 진단을 믿는다면 오늘날 신앙의 문제는 특별한 신앙 교리를 더 믿거나 덜 믿거나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동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가 하느님과 하느님의 창조물, 그리고 다른 인간 존재의 얼굴에서 깊게 감동하지 못하는 무능력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감응(responsiveness)을 치유하고 풍부하게 만들어가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일본 사목 방문을 마치고 돌아올 때 서양이 동양에서 배워야 할 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었습니다. 그때 저의 대답은 “제 생각에 서양에는 시詩가 조금 부족합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Press Conference on the Return Flight to Rome, Apostolic Journey to Thailand and Japan, 26 November 2019)

식별 훈련

23. 그러면 사제는 문학과의 만남을 통해 어떤 이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위대한 소설 작품들의 독서를 사제 양성에서 중요한 요소로 고려하고 이를 장려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제 생활 지망자들을 훈련하면서 “사제와 시인 사이에는 상호 간에 깊은 영적 끌림이 있다(there is a profound spiritual affinity between the priest and the poet)”라는 칼 라너Karl Rahner의 통찰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Cf. A. SPADARO, La grazia della parola. Karl Rahner e la poesia, Milano, Jaca Book, 2006)

24. 독일 신학자의 말을 들으면서 이러한 질문들에 답해보도록 합시다.(Cf. K. Rahner, Theological Investigations, Vol. III, London 1967, 294-317) 라너에게 시인의 말들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향수로 가득하고, “무한으로 들어가는 문, 이해할 수 없는 것들 안으로 들어가는 문과도 같고, 시인들은 이름이 없는 것들을 부르며, 파악할 수 없는 것들로까지 뻗어나갑니다.(gates into infinity, gates into the incomprehensible. They call upon that which has no name. They stretch out to what cannot be grasped.)” 시는 그 자체로 “무한을 제공하지 않으며 무한을 가져오거나 담고 있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말씀의 임무이며 라너가 계속하여 말하듯이 “시적 언어는 하느님의 말씀을 부릅니다.”(Ibid. 316-317)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은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말에는 하느님을 향한 본질적인 갈망, 그 말씀을 향한 지향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히브 4,12-13)라고 히브리서가 분명하게 밝히고 있듯이 진정으로 시적인 언어는 하느님의 말씀에 유비적으로 참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25. 이에 비추어 칼 라너가 사제와 시인 사이에서 놀라운 유사점을 그릴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말씀 만이 홀로 말로 표현되지 않는 모든 실제의 궁극적 감옥을 구성하는 것, 다시 말해 하느님과 관련하여 벙어리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the word ‘alone can redeem that which constitutes the ultimate imprisonment of all realities which are not expressed in word: the dumbness of their reference to God’)”(Ibid. 302)

26. 그러므로 문학은 표현 양식과 의미 사이에서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합니다. 식별 훈련을 제공하면서 미래의 사제들이 자신의 내면과 주변 세계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연마하도록 합니다. 따라서 독서는 자기 존재의 진실로 이끄는”이 되고, 불안이나 위기의 순간이 없는 영적인 식별 과정을 위한 기회가 됩니다. 실로 수많은 문학 작품은 이냐시오 성인St. Ignatius이 영적인황폐(desolation)”라고 불렀던 것에 해당합니다.

27. 이냐시오 성인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저는 영혼의 어두움, 정신의 소용돌이, 저속하고 세속적인 것에 따른 동요, 믿음·희망·사랑의 결핍으로 몰아가는 여러 충동과 유혹으로 인한 불안. 온통 무기력함, 미지근함, 슬픔, 창조주 주님에게서 분리된 것처럼 자신을 발견할 때를 ‘황폐’라고 부릅니다.(I call desolation darkness of the soul, turmoil of spirit, inclination to what is low and earthly, restlessness rising from many disturbances and temptations which lead to want of faith, want of hope, want of love. The soul is wholly slothful, tepid, sad, and separated, as it were, from its Creator and Lord)”(SAINT IGNATIUS LOYOLA, Spiritual Exercises, n. 317. 영신 수련, 317)

28. 우리가 어떤 텍스트를 읽을 때 느끼는 어려움이나 지루함이 반드시 나쁘다거나 쓸모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나쁜 상태에서 더 나쁜 상태로 나아가는 이들”에게 선한 정신이 불안, 동요 및 불만을 유발함으로써 작동한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Cf. ibid., n. 335) 이는 “대죄에서 또 다른 대죄로 넘어가는 이들”이 지닌 영의 식별에 관한 첫 번째 이냐시오 규칙을 문자 그대로 적용한 것일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 안에서 선한 영은이성의 빛을 사용하여 양심을 자극하고 가책으로 채웁니다.”(Ibid., n. 314) 이런 식으로 그들을 선善과 아름다움美으로 인도해가는 것입니다.

29. 그러므로 독자는 잘 정리된 메시지의 단순한 수용자가 아니라 구원과 멸망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고 뚜렷하지 않으면서 왔다 갔다 하는 지형에서 앞으로 나아가도록 도전을 받는 사람입니다. “식별”이라는 행위로서 독서는 읽는 “주체”이자 대상인 “객체”로서 독자와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어떤 소설이나 시를 읽으면서 독자는 자신이 읽는 말로 자신이읽히는(being read)” 체험을 합니다.(Cf. K. Rahner, Theological Investigations, Vol. III, London 1967, 299) 그러므로 독자는 경기장의 선수로 비유해볼 수 있습니다. 선수가 게임을 하지만 게임 역시 선수들이 전적으로 행동에 사로잡혔다는 의미에서 그들을 통해 플레이됩니다.(Cf. A SPADARO, La pagina che illumina. Scrittura creativa come esercizio spirituale, Milano, Ares, 2023, 46-47)

주의집중과 소화

30. 잘 알려진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이미지를 빌릴 때 콘텐츠에 관한 한, 문학은 “망원경(a telescope)”과 같은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M. PROUST,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 Le temps retrouvé, Vol. III, Paris 1954, 1041) 문학은 존재와 사물을 가리키며, 총체적인 인간의 체험과 우리의 이해 사이에 “엄청난 거리”가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문학은 또한 삶의 윤곽과 맛을 살리기 위해 인생의 장면들을 보정補正하는 사진관에 비유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문학이 ‘하는’ 일입니다: 문학은 삶이라는 그림을 ‘계발(啓發, develop)’하도록 하며”(A SPADARO, La pagina che illumina. Scrittura creativa come esercizio spirituale, Milano, Ares, 2023, 14), 그 의미로 우리에게 도전하고, 한 마디로 삶을 있는 그대로 체험하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31. 그러나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일반적인 시각은 현실적이고 단기적인 목표가 우리에게 가해오는 압력으로 ‘초점이 맞춰지고’ 좁아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전례나 사목, 자선활동과 같은 우리의 헌신과 봉사조차도 (우선 눈앞에) 달성해야 할 목표에 초점이 맞춰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마태 13,18-23)를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상기하여 주신 것처럼, 씨앗이 시간이 흘러 풍성한 열매를 맺으려면 돌밭이나 가시덤불에 떨어져 말라버리거나 질식하지 않아야 하고, 좋으면서도 깊은 땅에 떨어져야만 합니다. 효율성에 대한 과도한 관심은 언제나 우리의 식별을 무디게 하고, 감수성을 약화하며, 복잡성을 무시하게 할 위험을 초래합니다. 우리에게는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속도를 늦춰 들여다보고 들을 시간을 가지면서 무비판적인 생활 방식이라는 피할 수 없는 유혹에 맞서 균형을 잡아야 할 필요가 절실합니다. 어떤 사람이 책을 읽기 위해 멈출 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32. 우리는 단순히 전략적이거나 결과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무한한 웅장함을 체험하는 식으로 현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재발견하고 이를 수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실에 대한 접근 방식을 특징짓는 것이 관점, 여가, 자유이며, 문학은 이러한 접근 방식에서 특권적이지만 독보적이지는 않은 표현 형태입니다. 따라서 문학은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식별하며, 어떻게 개별 인간과 상황의 현실을 탐구할지 가르쳐줍니다. 문학은 범주, 설명 체계, 원인과 결과의 선형적인 역학 관계, 수단과 목적을 통해서만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의미로 넘쳐나는 하나의 신비로서 개인과 상황의 현실을 탐구하는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33. 문학의 역할에 관한 또 다른 놀라운 이미지는 인간의 신체 활동, 특별히 소화消化 작용입니다. 11세기의 수도승이었던 생 티에리의 윌리엄William of Saint-Thierry과 17세기의 예수회 회원이었던 장 조셉 수린Jean-Joseph Surin은 소가 여물을 되새김하는 반추反芻라는 이미지를 관상觀想적인 독서의 이미지인 루미나시오ruminatio로 발전시켰습니다. 이에 관하여 수린은 ‘영혼의 위胃(stomach of the soul)’를 언급하였으며, 미쉘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라는 예수회 회원은 권위있는 ‘소화 독서의 생리학(physiology of digestive reading)’을 언급하기도 하였습니다.(M. DE CERTEAU, Il parlare angelico. Figure per una poetica della lingua, Secoli XVI e XVII, Firenze 1989, 139 ff) 문학은 이 세상에 있는 우리의 현존을 성찰하게 하고, 이를 “소화”하게 하며, 동화하게 하고, 우리 경험의 표면 아래에 있는 것을 파악하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한마디로 문학은 삶을 해석하고, 삶의 더욱 깊은 의미와 본질적인 긴장을 식별하는 데에 봉사합니다.(A SPADARO, La pagina che illumina. Scrittura creativa come esercizio spirituale, Milano, Ares, 2023, 16) (*참고, 이연학, 성경은 읽는 이와 함께 자란다-거룩한 독서 /되새김, 성서와 함께, 2006년, 62-68쪽 http://benjikim.com/?p=11317)

타인의 눈으로 보기

34. 언어 사용 측면에서 문학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타인의 눈으로 보는(seeing through the eyes of others)”(Cf. C.S. LEWIS, An Experiment in Criticism) 입장에 우리를 놓는다는 것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인간성을 확장한다는 관점의 폭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이 현실을 어떻게 보며, 어떻게 경험하고, 어떻게 반응하는지 상상으로 공감하여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공감이 없이는 연대, 나눔, 자비, 연민이 있을 수 없습니다. 독서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느낌이 단순하게 우리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임을 발견하게 되고, 가장 소외된 사람일지라도 혼자라고 느끼지 않게 됩니다.

35. 놀라운 인간성의 다양함, 시간적, 공간적 문화와 학습 분야의 다원성은 문학에서 그 모든 다양함을 존중하고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됩니다. 동시에 이러한 다양성은 우리에게 낯선 것이 아니라 나눔이라는 의미 가득한 상징적인 문법으로 번역됩니다. 문학의 독특함은 과학적 서술 모델이나 문학 비평의 판단처럼 경험을 객관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깊은 의미를 표현하고 해석함으로써 그 경험의 풍요로움을 전달하는 데에 있습니다.

36.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는 저자의 서술 능력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의 서술 능력으로 우리 각자는 버려진 소녀의 눈물에 우리도 울게 되고, 이불을 당겨 잠들어 있는 손주를 덮어주는 할머니를 그리게 되며,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가게 주인의 안타까움을 공감하고, 끊임없는 비난에 시달리는 이의 모욕에 분개하며, 비참하고 폭력적인 삶에서 피할 수 있는 길이 오직 꿈밖에 없는 소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우리 내면의 경험과 어렴풋이 공명을 일으킬 때 우리는 타인의 체험에 더욱 민감해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빠져나와 그들의 삶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들의 투쟁과 욕망에 공감하며 그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되고, 결국 그들의 여정에 동반자가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과일 장수, 매춘부, 고아, 벽돌공의 아내, 언젠가 멋진 왕자님이 찾아오리라고 믿는 할머니의 삶에 빠져듭니다. 우리는 때때로 공감과 온유, 그리고 이해로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37. 장 콕토Jean Cocteau는 자크 마리탱Jacques Maritain에게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문학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문학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문학을 통해 벗어나 보려고 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오직 사랑과 믿음만이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게 한다.(Literature is impossible. We must get out of it. No use trying to get out through literature; only love and faith enable us to go out of ourselves.)”(J. COCTEAU – J. MARITAIN, Dialogo sulla fede, Firenze, Passigli, 1988, 56; Cf. A SPADARO, La pagina che illumina. Scrittura creativa come esercizio spirituale, Milano, Ares, 2023, 11-12) 타인의 고통과 기쁨이 우리 마음속에서 타오르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요? 여기서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인간적이라면 그 어떤 것도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38. 문학은 상대주의적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서 가치들을 빼앗아가지 않습니다. 문학에서 선과 악, 진실과 거짓에 관한 상징적 표현들이 개인이나 집단적인 역사적 사건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문학이 도덕적 판단을 유보하는 것은 아닙니다. 맹목적이거나 피상적인 단죄에 빠지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예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 7,3)라고 말씀하신 대로 말입니다.

39. 타인의 폭력, 좁은 시야, 또는 연약함에 관하여 읽으면서 우리는 이러한 현실에 대한 우리 자신의 경험을 성찰할 기회를 얻습니다. 문학이 독자에게 인간 경험의 위대함과 비참함에 대한 더 넓은 시야를 열어줌으로써, 문학은 타인을 이해하려는 인내심, 복잡한 상황에 접근할 때의 겸손함, 개인에 관한 판단의 온유함, 그리고 우리 인간 조건에 대한 민감성을 가르칩니다. 판단이 필요한 것도 분명 사실이지만 그 판단의 한계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판단이 사형 선고로 이어져서는 결코 안 되며, 사람을 제거하거나, 인간성을 억압하면서 영혼이 없는 법의 절대화를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40. 문학에서 탄생한 지혜는 독자에게 더 큰 관점, 한계의 인식, 인지적이거나 비판적인 사고보다 경험에 더 가치를 두는 능력, 특별한 풍요를 가져다주는 가난을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심어줍니다. 세계와 인류의 신비를 참과 거짓, 옳고 그름의 이원적 대립으로 축소하는 것이 부질없는 것이며 아마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독자는 판단을 내리는 책임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는 지배의 수단이 아닌 더 큰 경청으로 나아가기 위한 동기로서의 판단입니다. 동시에 이는 성령의 현존으로, 또한 은총으로 주어진 역사, 인간 활동에 의존하지 않는 예측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사건, 우리의 인간성을 구원의 희망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정의하는 놀라운 풍요에 참여할 준비를 뜻합니다.

문학의 영적인 힘

41. 저는 이 짧은 성찰을 통해 문학이 사목자들과 미래 사목자들의 마음과 정신을 교육하는 데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강조했다고 믿습니다. 문학은 우리의 이성을 자유로우면서도 겸손하게 사용하도록 하며, 인간 언어의 다양성을 풍요롭게 인식하도록 하고, 우리의 인간적 감수성을 넓히며, 마침내 여러 목소리를 통해 말씀하시는 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도록 영적인 개방성을 자극할 수 있습니다.

42. 문학은 독자들이 자기 조회나 잘못된 자족감, 때로는 교회의 담론까지도 오염시킬 위험을 안고 있는 고정된 관습적 언어, “말씀”의 자유를 가둘 수 있는 우상들을 무너뜨리도록 우리를 돕습니다. 문학의 언어는 언어를 움직이게 하고, 해방하며, 정화하는 언어입니다. 궁극적으로 문학은 더 크고 확장된 표현의 시야로 언어를 열어줍니다. 문학은 이미 우리 인간의 말에 현존하고 계시는 “말씀”을 환영하도록 우리 인간의 언어를 열어줍니다. 인간의 언어는 그 자체로 자신을 완전하고 결정적이며 완성된 지식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 하고 말씀하신 것처럼 오시는 그분을 듣고 기대하도록 합니다.

43. 마지막으로, 문학의 영적인 힘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류 가족에게 맡기신 원초적인 임무, 곧 사람이 다른 존재와 사물에 “이름”을 붙이도록 하셨던 임무(참조. 창세 2,19-20)로 우리를 돌아가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맡기시어 창조물을 보살피도록 하신 존재의 사명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존엄성과 다른 여타 존재의 의미에 관한 인식을 담고 있습니다. 사제들 역시 “이름”을 붙이도록 하신 원초적 임무, 의미를 부여하는 임무, 그리고 창조물과 육신이 되시어 우리 인간 조건의 모든 차원에 빛을 비추시는 능력을 발휘하시는 “말씀” 사이에서 소통의 도구가 되라는 임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44. 사제와 시인 간의 유사성은 하느님의 “말씀”과 우리 인간 말 사이의 신비스럽고도 불가분한 성사적 일치에서 빛을 발합니다. 이러한 일치는 경청과 자비에서 태어난 섬김의 사목, 책임감이 되는 은사, 아름다움으로 드러나는 진리와 선의 비전을 불러일으킵니다. 시인 폴 셀란Paul Celan이 우리에게 남겨준 말, “진정으로 보기를 배우는 이들은 보이지 않는 것에 가까이 다가간다.(Those who truly learn to see, draw close to what is unseen.)”라는 말을 어찌 곱씹어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P. CELAN, Microliti, Milano 2020, 101)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2024년 7월 17일, 교황 재위 12년 차에, 프란치스코)

*이미지-구글, 영어 원문 참조: https://www.vatican.va/content/francesco/en/letters/2024/documents/20240717-lettera-ruolo-letteratura-formazione.html

6 thoughts on “문학과 사목자의 양성

  1. 길어서 휴대폰 상에서 읽기가 아니 되옵니다.
    1차시도 실패.

    마음
    가다듬고 다시 읽어볼랍니다.

    미간에 힘 빡 주고…

  2. 23번까지 읽다가 지쳤음.

    시처럼
    사제의 말씀도
    간결하고 서정적이며
    향기로울 수 있기를…

    퍼뜩 떠오른 생각이었습니다.

    내일 시간내어 24번.부터
    2차 읽기 시도 해 볼랍니다.

  3. 저 또한 한번에 읽기엔 너무 길어 3일에 걸쳐서야 읽음이 끝났네요.
    교황님께서 문학에 신앙을 접해 말씀하신 것이 참으로 새롭습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라는 문학의 정의가
    타인의 삶을 간접 체험하게 하는 드라마와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4. 습관적으로 외출을 할 때면 얇은 책 한 권을 챙겼는데
    모두가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공간에서 용감하게 책을 꺼내 읽어야겠어요^*^

  5. 성경읽기가 떠올랐습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생명의 말씀이요, 그렇지 않는 이들에게도 인류 최고의 문학작품이라 했습니다. 진지하게, 마음을 기울여, 미간에 힘 빡주고, 성경을 읽어야 겠습니다.

  6. 중고 시절, 두 분의 시인과 한 분의 평론가에게서 국어와 영어를 배웠습니다. 이 시간은 교과 내용을 뛰어넘어 제 가슴에 깊이 각인된 문학 수업으로 이어지곤 했습니다. 제가 외출할 때나 짧은 여행길에 한 권의 시집을 챙겨가는 것도 은사님들 덕분이지요. 너무나도 소중한 교황님의 이 긴 글을 아름답게 번역해 주신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저장해 출력한 후 새기며 읽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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