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근선漸近線

문과와 이과를 구분하던 고등학교 시절, 이과에 지원했고 수학에서 분명히 배웠을 ‘점근선’이라는 것이 처음 들어본 말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렵고 힘들어 그만큼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던 내용이었음일까? 오랜 수학 과목의 개념을 들춰내면서, 인생을 사는 동안 배워야 할 것은 지금이건 오랜 세월이 지나서건 반드시 다 배우고 넘어가야만 인생이 끝나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새삼 그때 그렇게도 어려웠던 내용을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가르치셨을까 싶어진다.

「점근선(漸近線, 영어: asymptote)」은 한자로 ‘점점/차차/차츰 나아갈 점, 가까울 근, 줄 선’이 합해진 낱말이다. ‘계속 함께하면서도 결코 함께이지는 못한다’라는 뜻이 담긴 영어 낱말의 어원은 조금 더 쉽게 다가온다. 수평선이든 수직선이든, 사선이든 ‘곧바른 선’에 어떤 ‘곡선’이 다가가지만, 결코 한 점에서 만나질 수 없는 상황에서 기준이 되는 ‘곧은 선’이 점근선이다. 점근선에는 수평·수직·사선 점근선이 있다. 수학적인 예로서는 어떤 수를 반으로 나누는 것이 1/2이고 그것을 다시 반으로 나누면 1/4, 또다시 반으로 나누면 1/8 ……. 그런 식으로 계속 나누면 나누어지기는 하지만 절대로 분모 값이 0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하느님 앞에 선 인간사와 세상사도 자꾸 점근선을 떠올리게 한다. 수평 점근선은 세상사, 수직 점근선은 하느님께 다가가려는 인간과 피조물, 사선 점근선은 인간과 세상이 아파하며 살아가는 비끄러진 아픔과 상처의 비유이고 은유이다. 인간은 하느님께 다가가기를 꿈꾸지만, 결코 가 닿을 수 없는 존재이게 마련이다. 모든 것을 지으신 하느님은 곧은 직선이시지만 인간은 곡선이다. 점근선은 완전하신 하느님과 불완전 존재인 인간 간의 간극間隙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도 하나인 듯싶지만, 결코 메꿔질 수 없는 틈새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실재의 나 사이에도 곰곰 생각해보면 엄청난 구렁이 가로놓여 있고, 하늘과 땅이 맞닿아있는 수평선에서도 하늘과 땅은 절대로 만나지지 않는다. 있는 것과 있어야 할 것 사이의 갭은 슬픔이요 괴로움이다. 지금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처럼 확실한 듯해도 이 땅에서는 결국 어렴풋할 따름이다.(참조. 1코린 13,12)

이러한 이치를 인생의 오묘한 ‘신비’라고 이름을 지어 한쪽에 치워 놓아 외면하고 싶어 하거나 다른 사람이나 무엇을 탓하면서 ‘사이/틈 간間’을 숨겨 그런 틈이 없는 것처럼 비치더라도 그대로인 것은 여전하다. 나 자신부터 내가 나를 속이지 말아야 한다. 저명한 물리학자 리처드 페인만Richard Feynman은 “첫 번째 원칙은 너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니, 너 자신이 (스스로) 가장 속이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The first principle is that you must not fool yourself—and you are the easiest person to fool.)”라고 말한다. 인간은 그렇게 「‘사이 간間’을 살아 인간人間, 세간世間, 시간時間, 공간空間을 살고, 긴 세월을 돌아본다 해도 결국 인생은 눈 깜짝할 사이여서 일순간一瞬間(깜짝일 순)이다. 인간은 간간間間이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착각과 자신을 속이는 어리석음 속에서 그렇게 산다.」(벤지, 사이 간間, http://benjikim.com/?p=6787)

그래서 인간은 은총을 기도한다.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는 인간의 건너편에는 하느님이 계신다. 우주의 기원자, 생명의 작가, 진선미 자체,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분이 계신다. 나의 어쭙잖은 노력과 하늘이 내려주실 은총 사이의 깊은 구렁이 메워지기만을 오롯이 바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 계신다. 하느님의 개입과 그분의 투자를 업신여기는 이들에게는 화禍가 있을 것이다.

C.S. 루이스Lewis는 우리 인생을 재건해가시는 하느님의 놀라운 과정을 집 짓는 것에 비유한다. “하느님께서 뭘 뚝딱거리시길래 맨 처음에 ‘아, 이런 집을 지으시려는가 보다.’ 하고 짐작하였었는데, 어느샌가 다른 쪽에서 하수구와 지붕의 방수를 손보고 계시고, 그런가 싶으면 어느샌가 다른 쪽에 한 층을 더 달아내시며 마당을 가꾸시길래 그렇게 나와 내가 살 아담한 집을 지으시는가 싶었는데, 어마어마한 궁전을 생각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고 계셨으며, 그런가 싶으셨더니 이제는 아예 그 집에 당신께서 살고자 하신다.” 우리 인생사에서 이러한 하느님의 부지런한 개입은 놀라우면서도 불안하고 두렵다. 성경은 이를 두고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 서서 가고 계셨다. 그들은 놀라워하고 또 뒤따르는 이들은 두려워하였다.”(마르 10,32)라고 기록한다. 예수님께서 나보다 항상 앞서 먼저 걷고 계신다.

기도만 하면 인간이 생각지도 못하게 틈새가 메꿔진다. 그래서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1테살 5,17)라는 말씀대로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걱정하기 때문이다.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살Hans Urs von Balthasar은 “성경이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얼마나 공개적으로 두려움과 걱정에 관하여 말씀하고 계시는지를 흘낏이라도 살펴본다면 하느님의 말씀이신 분께서는 두려움이나 걱정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신다는 결론에 금세 이를 것이다.(When one surveys even from a distance how often and how openly Sacred Scripture speaks of fear and anxiety, an initial conclusion presents itself: the Word of God is not afraid of fear or anxiety.)” 한다. 더 기도하면 덜 걱정하게 된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의심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그토록 놀라운 일을 행하셨는데도 여태껏 우리는 세상과 세속이라는 눈꺼풀을 뒤집어쓰고 하느님을 그리워한다. 쌍둥이라고 불리던 토마스, 우리의 또 다른 반쪽 쌍둥이인 토마스 사도에게도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리스도의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 보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을 고백할 때까지 의심이 계속되었다.(참조. 요한 20,24-29)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은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확신과 평화가 되기 전까지 우리 신앙이 의심과 갈등의 문제라는 사실을 너무도 자주 잊곤 한다.(We too often forget that faith is a matter of questioning and struggle before it becomes one of certitude and peace.)”라고 이를 새긴다. 더 기도하면 덜 의심하게 된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조급하기 때문이다. 우스개에 꿈에서 하느님을 만난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자기 뜻대로, 자기가 정한 때에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던 영악한 그가 하느님께 “하느님,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시편 90,4)라고 하였으니 하느님 당신의 1초는 수백 수 천 년이겠지요? 그렇듯이 수천만 달러 역시 1페니 아니겠습니까? 저에게 그 1페니만 주실 수 있겠어요?” 하고 여쭙자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미소를 지으시며 “맞아. 주고말고. 그런데 조금만 있다가.” 하셨다고 한다. 필립 얀시Philip Yancey가 말한 대로 “하느님의 타이밍은 완벽하고, 신앙이란 되짚어보았을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을 미리 믿는 것(God’s timing is perfect, and ‘faith’ means believing in advance what only makes sense in reverse.)”이다.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는 조급하게 서두르는 젊은 시인에게 “모든 것은 태어나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시간을 거쳐야만 한다.(Everything must be carried to term before it is born.)”라고 조언한다. 더 기도하면 덜 조급해진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너희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갚아주실 것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5.6-7.8)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 하신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면서 간절한 내면의 마음으로, 하느님을 온전히 믿어, 자주 기도하라 하신다.

프랑스의 가톨릭 소설가 조르주 베르나노스Georges Bernanos는 “기도하려는 마음 그 자체가 (이미) 기도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바라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실 수 없다.(The wish to pray is a prayer in itself. God can ask no more than that of us.)”라는 말을 남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부활의 민족이며 알렐루야가 우리의 노래!(We are an Easter people and Alleluia is our song!)”이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확인하여 주신 대로 “희망을 가진 이는 다르게 산다.(The one who has hope lives differently.)” 그리스도인은 그처럼 기쁨의 민족이요 희망의 민족이다. 때로 점근선의 간극을 느끼는 치열함 속에서도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서 당신 일꾼들에게 맡기신 열렬한 사명을 믿고, 희망하며, 사랑한다.(*이 글은 Tod Worner 박사가 쓴 <Praying to the God Who Overcomes the Gap>라는 글을 읽고 재구성하여 쓴 글임을 밝힙니다. 링크:  https://www.wordonfire.org/articles/praying-to-the-god-who-overcomes-the-gap/)

2 thoughts on “점근선漸近線

  1. 끊임없이 기도하라.
    기도하는 이유.
    기도해야만 하는 이유.

    오늘은 겸손한 마음으로
    골방에서 속삭이렵니다.

    제 남정네. 기일이랍니다.
    천사가 그와 함께 하길!
    평안하길.

    수학선생이었던 그가 점근선에 대해
    제게 가르쳐 줄 것을.

    분명 전 못 알아들었겠지만.

    신부님께로부터 말씀 들었으니
    또 다른 시각에서 접점을 찾을 수 있겠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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