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6,41-51(연중 제19주일 ‘나’해)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연중 제17주일부터 제21주일까지 다섯 번으로 나누어 듣게 되는 요한복음 6장의 내용 중 그 세 번째인 오늘 복음은 한 마디로 예수님 자신의 신원과 정체성(identity)에 관한 자기 계시이다. 오늘 복음은 지난 주 복음의 마지막 절을 반복하고 그에 이어지는 대목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빵”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주님 앞에 유다인들이 수군거리니 주님께서는 “너희끼리 수군거리지 마라.” 하시며 당신을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 하시고, 다시 한번 당신을 “살아 있는 빵”이요 “생명의 빵”이라 계시하신다.

우리는 여전히 카파르나움의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은 “유다인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당시 주류를 이루던 사고에 젖어있던 이들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두고 보이는 반응과 질문들 속에 있다. 민중의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이들은 결국 예수님을 적대시하고 로마 정치 지도자들이나 그 하수인들과 어울려 예수님의 고발과 판결, 그리고 처형에 관여한다.

1. “유다인들이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

오늘 복음의 첫 구절은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유다인들이 그분을 두고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요한 6,41) 이다. “유다인들”은 요한 복음사가가 77번이나 반복하여 기술하는 사람들이다. 마태오와 루카는 5번, 마르코는 6번 언급한다. 이들은 당시 이미 멸망한 민족으로 온 세상에 흩어져 다시 한번 독립국가를 도모하고 자신들이 누구인가를 깨우치고자 한다. 이로부터 훗날 모세 5경과 율법을 중심으로 탈무드가 생겨나고 유다이즘이 생겨난다. 당시 그리스도교 역시 예수님을 중심으로 태동하는 시점이라고 보면, 요한 복음사가는 당시의 분위기였던 유다이즘의 초기와 대비하여 그리스도교는 유다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 및 그 사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는 생각에 이를 자주 언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실 복음서를 통하여 볼 때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파, 바리사이파, 헤로데당, 열혈당, 세자 요한의 제자 등 여러 부류의 생각과 사상, 내지 행동 방식이 다른 “유다인들”의 와중에 계시고, 그들과 함께 회당에 모여 그들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며 가르쳐주고자 하시는 상황에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하늘에서참된 빵을 내려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2.33) 하고 말씀하셨고, 이어서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하셨다. 그러자 유다인들은 이를 두고 터무니없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한다. 그뿐만 아니라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요한 6,42) 하면서 예수님이 영원히 굶주리지 않을 빵을 어떻게 줄 수 있다는 말인지, 과연 빵을 줄 수나 있는 분인지 의심하고, 감히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요한 5,18) 말하는 것이 말도 안 된다면서 “하느님을 모독”(요한 10,33)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인성, 그분의 살과 피, 한없이 약하고 보잘것없는 땅의 육체가 어떻게 하늘에서 올 수 있다는 말이냐며 물의를 일으킨다. 더구나 유다인들에게는 자기들이 잘 알고 있는 조그만 시골 나자렛 출신인 예수님에 관한 배경이나 상황, 그리고 사실들 때문에 이런 생각이 더욱 가중되었다고 하겠다.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 하는데, 탈출기 16,2-8의 이야기에서처럼, 군중이 저희끼리 수군거리고 이렇다 저렇다 말함으로써 믿음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투덜’거리고 ‘불평’ 하였다. 종살이에서 목숨만 건지게 해 주라던 사람들이 쓴 물 말고 단물을 찾고(탈출 15,24), 단물을 마시고 나서는 배고프다며 빵과 고기를 찾고(탈출 16,3), 만나와 메추라기로 빵과 고기를 해결하고 나서는 급기야 하느님 대신에 금송아지라는 신神을 찾았던(탈출 32,4-6)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을 바라보는 모세의 심정으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을 바라보시면서 영원히 목마르지도 않고 배고프지도 않을 그런 생명의 양식을 찾으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끼리 수군거리지 마라” 하신다. 주님께서는 너희끼리 투덜대지 말라 하시고 불평하지 말라 하신다.

2.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반발과 멸시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우선 “너희끼리 수군거리지 마라.” 하시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 6,44) 하고 선언하신다. 바로 여기에 믿음의 신비가 있다. 인간의 지적 능력이나 탐구로 예수님이 진정 누구신지를 알 길이 없다. 예수님께서 알려주시는 바에 따라 우리는 예수님을 알게 된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라고 지칭하시는 하느님의 이끌어 주심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하느님 아버지의 이끌어 주심이라는 공짜 선물인 이 선물, 하느님의 힘, 은총으로써만 인간은 예수님께 다가갈 수 있다.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의 삶에 참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제자 자신의 인간적인 노력이라기보다 은총이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에게 다가오는 은총과 계시의 종교이다. 하느님 아버지의 이끌어 주심 앞에 선 인간은 예수님의 사랑에 자유롭게 다가가 예수님에 대한 인식과 믿음으로 나아갈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 거부와 폐쇄로 응할 수도 있다.

하느님의 이끄심에 따라 예수님을 향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면서 인간의 결정적인 한계요 장애인 죽음도 넘어가고 이겨내는 삶을 산다. 실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이 당신을 믿고 당신 생명에 참여한 모든 이들을 되살리실 것이다. “너의 아들들은 모두 주님의 제자가 되리라. 또 네 아들들의 평화가 넘치리라.”(이사 54,13)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줄 계약…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때에는 더 이상 아무도 자기 이웃에게, 아무도 자기 형제에게 ‘주님을 알아라’ 하고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예레 31,33-34)라고 예언자들이 일찍이 예언했던 내용이 이제 이루어진다. 예언자들이 하느님께서 몸소 당신 백성을 가르치시겠다고 하신 그 예언이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임이 드러나고 이루어진다.

모든 사람, 옛(구약) 언약의 백성뿐만 아니라 아담의 자손이라면 누구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며 예수님께로 나아올 수 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 한 것처럼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아직 그 누구도 외아드님처럼 하느님을 면대면으로 얼굴을 맞대고 볼 가능성은 없다. 하느님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는 필립보 사도에게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야말로 참으로 독특하고 진실한 말씀이어서 우리는 그분이 알려주시는 바에 따라 하느님을 직접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 역시 또 다른 하나의 스캔들이 될 수 있지만, 이 부분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만난다. 예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온전한 인간성이자 육체성을 지닌 한 인간, 인간의 감정을 지닌 분, 인간의 언어를 말씀하시는 분, 인간을 만나는 분, 인간을 가르치시고 낫게 하시며 어루만지시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 중 한 분을 만난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한 인간을 통해 하느님을 볼 수 있고,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따르며 그분의 길을 선택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요한 6,45-46) 하신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하신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이다.

3. “믿는 사람나는 생명의 빵이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 6,47) 하고 선언하신다. 예수님께서 거듭하여 세 번째(33.35.47.51절)로 당신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살아 있는 “생명의 빵”이심을 선포하신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모세에게 계시해 주시면서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 하신 “나는 ~이다.”(Egó eimi) 하는 표현 그대로 당신을 정의定義 하신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하신다. 1독서에서 하느님의 예언자였던 엘리야가 우상 숭배에 빠진 왕 아합에게 직언하여 미움을 받고 그를 죽이려던 아합 왕의 왕비 이제벨을 피하여 방황하다가 지쳐 죽기를 간청하였으나(1열왕 19,4) 천사의 음식으로 힘을 얻어 마침내 하느님의 산 호렙(=시나이산),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당신 백성과 새로운 계약을 맺으신 산에 이른 것처럼(1열왕 19,8) 그렇게 우리도 예수님의 살을 먹어 하느님의 산에 이르게 된다. 엘리야는 견딜 수 없는 괴로움에 죽음을 찾기까지 하였으나 그 순간에도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1열왕 19,4)라면서 주님을 찾는다. 다윗도 그렇게 기도하였다. “주님, 당신께 제가 부르짖습니다. 저의 반석이시여, 제 앞에 말없이 계시지 마소서. 당신께서 제 앞에서 침묵하시어 제가 구렁으로 내려가는 이들처럼 되지 않게 하소서.”(시편 28,1) 우리도 우리 인생 안에서 그렇게 믿음으로 주님을 찾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40년을 갔듯이, 엘리야 예언자가 밤낮으로 40일을 걸어갔듯이 그렇게 우리 인생길을 걸어가야 한다.

한편, 우리는 당신을 “생명의 빵으로 선언하신 예수님사람이 되신 사람의 아들 예수님을 분리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외아드님이신 분, 그리스도를 그분의 말씀과 분리해서도 안 되며 세상에 주신 당신 몸으로서의 생명의 빵을 분리해서도 안 된다. 그러한 분리는 예수님의 온전하면서도 충만한 신원과 정체성에 대한 잘못된 이해이며 심지어 훼손이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고 선언하신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요한 6,49-50) 하신다.

만나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사실과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오셨다는 표현에서 그저 하늘에서 왔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생명의 빵”과 “만나” 사이의 유사성만으로 단순 비교를 해서는 안 된다. 만나는 이집트에서 빠져나와 굶주림에 허덕이던 광야 백성들의 허기를 면해주시려고 보내주셨던 음식이었을 뿐 그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보내신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만나를 먹었던 그 백성들은 많은 이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어갔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은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며 영원한 생명을 위해 결정적인 분이시다. 이 빵의 잔치에 참여하는 이를 두고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의 기도문에서는 『panis vivus et vitalis』, 곧 ‘살아 있는 생명의 빵’을 먹는 이가 영원한 생명을 산다고 정의한다. 예수 그리스도이신 빵을 먹는 이는 죽음의 해독제를 받아 모셔, 죽을 육신의 삶과는 다른 생명, 곧 하느님 아드님의 생명을 산다.

제4복음서를 통해서 듣는 오늘 복음의 내용은 듣기 여하에 따라서 논쟁거리나 스캔들, 혹은 불쾌하고 거북한 내용으로만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들으면 마음 깊은 곳에서 비밀스러운 은총으로 받아들여 한없이 아름다운 말씀이 된다.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를 결코 옥죄거나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다.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선물로) 내주신”(요한 3,16) 분이다. 온전한 자유와 사랑으로 그분께 대답하도록 그저 당신을 내어주시는 분이다. 그분께 올바로 대답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선물로 우리에게 오신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시기 위해 당신의 몸과 살, 당신의 피, 당신의 숨과 정신을 모든 이에게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그저 내어주시는 분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그분을 믿고 경배하며 예수님만이 유일한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고백하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없는 성체성사, 또 성체성사가 없는 그리스도론을 추구할 위험, 그 어떤 형태로든 신비를 위축할 수 있는 위험을 경계해야만 한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하신다. “살”에 해당하는 희랍어 원어는 sarks(σάρξ)로 문자 그대로 “살”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빵”이 상징적인 얘기가 아니라시며 당신 육체적인 살의 실재를 의도적으로 강조한다. 성체성사에 다가갈 때,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을 들을 때, “그리스도의 살”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 복음이 담겨있는 요한 복음사가가 전해준 복음의 제6장은 우리 믿는 이들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아버지의 아들이신 분,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믿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이신 분을 믿는 믿음에 더욱 깊이 빠져들게 하고, 동시에 성체성사에 관한 믿음을 더해 준다. 『우리는 우리가 먹는 대로의 사람이 된다.(* ‘You are what you eat.’ 이 말은 1920~30년대에 등장했고, Victor Lindlahr 라는 생화학자가 1942년에 ‘You are what you eat ; How to win and keep health with diet’라는 책을 쓰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유행된 말이다) 우리는 과연 가톨릭Catholic이 될 것인가, 아니면 가타볼릭catabolic(생화학)이 될 것인가?(저자는 여기서 유사한 단어를 연결하여 말장난을 한다)

우리도 우리가 영성체로 받아 모신 예수님의 살과 피로 우리 영혼의 다이어트가 제대로 되고 있는지 점검할 것이며, 참으로 그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 또한, 영성체가 아닌 육체적인 굶주림이나 배부름을 위해 육신적인 양식에만 몰두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한다.(토마스 로시카Thomas Rosica 신부, 바실리오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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