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 5,21-43(연중 제13주일 ‘나’해)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마르 5,23)

오늘 복음에서는 백방으로 딸을 살려보려 했던 회당장 딸의 소생 이야기와 남모르게 눈물 흘리며 철저한 냉대와 외로움 속에서 자신의 치유를 갈망하던 한 여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전자가 자기 밖에서 치유를 찾던 딸과 아버지의 이야기라면, 후자는 숨어서 자기 안에서 번민과 갈등으로 치유를 모색하던 여인의 이야기이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공관 복음사가들이 공통으로 전하는 내용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가부장적인 관습에 따라 중요하지 않은 자들로 취급되던 두 여성(부인과 소녀)에게 건강과 존엄성과 생명을 회복시켜 주신다.

하혈하는 여인은 예수님을 믿어 건강을 되찾고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라는 축복과 구원의 말씀을 듣는다. 예수님께서는 살았어도 죽은 듯이 살고 있었던 여인에게 다시 “건강해져라.” 하시어 건강한 삶을 되찾아 주시고, 이미 죽은 소녀에게는 “일어나라.”(41절) 하시어 죽음에서 일으켜 걸어 다니게 하신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를 다시 살아있는 사람들의 공동체로 돌려 보내주셨으니 앓던 여인에게는 “평안히 가거라.”(34절) 하셨고, 죽은 소녀에게는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43절)

여인은 피를 쏟으며 사람들로부터 불결하다고 취급받아 평생 불행했다. 불결하고 불순하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불결과 불순을 규정하는 데에 있어 동물이나 인간 생명의 상징인 피(血)는 그 자체로 대단히 중요한 요소로 자리매김하였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어머니의 자궁에서 흐르는 피 속에서 생을 시작하고, 그 피가 더 흐르지 않게 될 때 죽는다. 이런 이유들을 두고 구약의 율법은 여성이 아이를 출산하게 될 때, 월경할 때, 부정하게 된다고 생각했고 이를 가르쳤다. 또한 피로 더럽혀진 몸이 정결하게 될 때까지 일정 기간 격리해야 하고, 거룩한 것에 몸이 닿거나 성소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며, 기간을 채우고 나서 속죄 제물을 드려 속죄 예식을 거행해야만 정결하게 된다고 가르쳤으며, 여성이 피를 흘리는 기간에는 그와 어울리거나 접촉하는 모든 사람이나 사물도 부정하고 불결해질 수 있으니 특히 주의해야 한다고 가르쳤다.(참조. 레위 12,1-8;15,19-30) 특별히 여성을 두고 정상적인 출산과 생리 현상 안에서조차 소위 종교의 이름으로 직무를 수행하는 남성들이 ‘피’로 불결과 부정을 규정한 것은 여성을 옭아매고 수단화하며 노예화하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를 흘리는 여성을 마치 접촉할 수 없는 나병 환자처럼, 또 절대 만져서는 안 되는 시체처럼 대해야 한다는 법이 아닌 법은 잔인하다.

이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장벽과 분리, 배제와 배척과 소외의 강요가 설정되고 규정된다. 물론 공동선을 위하여 전염을 피하고 면역 체계를 세우기 위해 불가피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이로 인해 일부 사람들에게 낙인을 찍어 그들이 특정 울타리 안에 갇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마는 것은 분명하다. ‘예방’이라는 명분일지라도 이것이 특정인이나 집단을 단죄하고 마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불과 얼마 전까지 ‘코비드-19’의 역기능으로 이를 체험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와 같은 모든 장벽을 허물기 위해 오신 분이시다. 예수님께서는 동물을 잡아 바치는 동물의 피가 사람의 죄를 없애고 사람을 정결하게 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여성이 생리 현상으로 정기적으로 피를 흘리는 것이 불결한 것이 아니며, 시체가 어떤 특정한 불결과 부정 자체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며 이러한 이유들로 사람이 하느님 앞에 설 수 없는 것이 아님을 알고 계셨다. 이런 이유로 복음은 예수님께서 아프고 병든 이들, 부정한 이들이라고 알려진 이들, 하혈하는 여인을 고쳐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손수 만지시고그들이 당신을 만질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예수님께서는 소위 거룩함을 빙자한 모든 인위적인 논리라는 것을 허무시고 없애고자 하셨다. 그분께서는 거룩한 무리로 자처하는 사제들과는 진정 다른 사제이셨으며, 거룩함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율법이라는 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사랑에는 모순되는 것임을 간파하신 분이었다. 진정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 12,33=1사무 15,22) “주님은, 주님은 자비(히브리어 רַחוּם rachum, 영어 compassionate)하고 너그러운(히브리어 חַנּוּן channun, 영어 gracious)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탈출 34,6 시편 86,15;116,5) 한 대로 우리도 그렇게 자비, 자애, 진실을 살아야만 한다.

1.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개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마태 14,36)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지려고 하였고, 예수님 역시 손을 내밀어 나환자에게 대시었고(마르 1,41),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만나서는 그의 귀에 손가락을 넣으시고 혀에는 손을 대셨으며(마르 7,33), 눈먼 이의 손을 잡고 두 눈에 침을 바르시며 손을 얹어주셨고(마르 8,23.25),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으며(마르 10,13.16), 과부의 외아들의 주검이 담긴 관에 손을 대시어 그를 살리셨다.(루카 7,14) 사람들이 당신을 만지도록 하신 주님께서 사람들을 만지셨다.

아프고 병든 사람들, 매춘부들, 제자들, 군중들, 수도 없이 많은 이들이 당신을 만지도록, 손을 대도록 허락하신 분이 우리 주님이시다. 접촉, 살과 살이 마주치고 맞닿는 체험, 이는 너와 나 사이에 이루어지는 상호 친교와 소통의 체험이다. 나를 너에게 전달하고 네가 나에게 건네어지는 체험이다. 나를 느끼고 너를 느끼는 체험이다. 살이 맞닿는 것은 우리 각자가 표출되고 너와 나의 친밀과 관계가 드러나는 기본 감각이다. 친밀감, 상호성, 관계, 너와 나 사이의 파장이며 진동이다.

회당장은 예수님께 어린 딸을 위해 “손을 얹으시어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니, 예수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말씀하시어” 아이를 살려주시고, “숱한 고생을 하며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진” 여인은 예수님의 “뒤로 (몰래) 가서 그분의 옷에 을 대었다.”

2.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만난 야이로의 딸과 하혈하는 부인이라는 두 이야기이지만, 두 이야기는 ‘상호 접촉’, ‘서로 만짐’, ‘서로 맞닿음’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 하나의 이야기일 수 있다. 하혈하는 여인이수님을 만지고, 예수님께서 죽은 소녀를 만진다. 모두 법으로 금지된 행적들이지만, 모두 해방과 사랑의 행적들이 된다. 예수님을 만지고 예수님께서 만진다는 행위는 어떤 마술적인 동작이라기보다 ‘내가 당신과 함께 여기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지극히 인간적인 동작들이다. 거룩함의 힘을 지니신 예수님께서 군중 속에서 지나가실 때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며 고생하)는 여자”는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마르 5,28) 생각하며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기도를 위해 걸치는 숄)에 손을 대었다.”(마르 5,27) 여인이 생각한 대로 여인은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마르 5,29) 그러나 여인은 두려웠다. 예수님께 부정을 타게 한 행위였고 율법이 금지한 행위였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제자들에게 “물으시고” “사방을 살피시자” 여인은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마르 5,33) 여인은 자기가 지은 ‘죄’를 고백한다. 이를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온화하고 자비로운 음성으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마르 5,34) 하신다. 율법이나 인간적인 규범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시는 주님이시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구하시고 해방하시기 위해 이집트 땅, 불결한 이교도들이 살아가는 땅에 내려오셨다면, 예수님께서도 불결한 이들 가운데에 내려오시어 그들을 만나시고 구하시며 해방하시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를 두고 복음은 예수님께서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마르 5,30)라고 기록한다. “힘”은 에너지요 역동δύναμις(dunamis, 영어 power, might, strength)이다. 예수님의 거룩함이 불결한 여인에게로 건네어진다.

딸아”라고 하심은 애정 어린 호칭이다. 예수님께서는 “딸아,”라고 다정하고 자애롭게 부르심으로써 단순히 병만 낫게 하신 것이 아니고 당신, 그리고 다른 이웃과의 관계를 정상화해 주신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표현은 예리코에서 눈먼 이를 고치실 때(마르 10,52 루카 18,42), 예수님 발을 씻겨드린 죄 많은 여자를 용서하실 때(루카 7,50), 야이로의 딸을 고쳐주실 때(루카 8,48),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치시고 다시 돌아온 사마리아인에게 말씀하실 때(루카 17,19) 등에도 등장한다. 믿음은 예수님 안에서 불가능한 것이 가능케 하고 죽음에서 생명을 창조하게 한다.

3. “일어나라!”

이러한 일이 진행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마르 5,35), 예수님은 즉시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열두 살 먹은 어린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시고 그곳으로 가신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따라오지 못하게”(마르 5,37) 하시고 회당장의 집에 이르신 주님께서는 귀여운 딸을 잃은 슬픔에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마르 5,38)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말씀하셨다. 이를 “비웃는사람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아이의 손을 잡으시고…(아람어로) ‘탈리타 쿰!(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5,40-41) 여기서도 예수님의 거룩함이 시체의 부정不淨과 부패의 가능성을 압도하고 이긴다. 예수님께서 어린 소녀에게 다시 살아날 힘, 자기 두 발로 설 가능성, 생명을 다시 얻을 힘을 전하신다.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다녔다.”(마르 5,42) 그러자 예수님께서 마치 소녀가 예수님의 거룩함에 응하느라 기진맥진했으리라는 듯이, 소녀가 하느님의 힘을 감당하기 위해 모든 것을 해낸 듯이, 세심한 인간적 배려를 담아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마르 5,43)

오늘날에도 이처럼 어린 소녀가, 그리고 젊은이들이, 살았어도 살았다 할 것이 없게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도무지 들어보지도 못한 아토피, 소아비만, 청소년 우울증, ADHD를 비롯한 각종 정신적·육체적 질병에 시달리는 너무 많은 어린이나 청소년들이 있고, 마음과 영혼이 병들어 죽은 것처럼 살아가는 신세대들도 많다. 너무나 많은 청소년이 온전치 못한 가정의 구조 안에서 살아야 하고, 인생 안에 돌아보면 별것도 아닌 공부라는 것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으며, 두려움과 슬픔, 비극과 상실감 속에서 방황하며 살아간다. 젊은 나이에도 마약과 알코올에 찌들어 살아야 하는 상황, 낙태로 세상에 나오지도 못하고 죽어 가는 수많은 어린 생명(세계 1위의 낙태 국가인 한국), 성적性的 노리개로 전락하거나 성매매에 나서야 하는 소녀들, 음란물과 포르노에 중독되거나 희생되는 청소년들, 폭력에 시달리거나 조직과 집단의 하수인 노릇으로 젊음을 탕진해야 하는 젊은이들, 세계 1위를 자랑하는 청소년 자살률과 유행처럼 번지는 자살 클럽, 청소년들의 괴로움, 염세주의, 냉소주의,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는 의미상실, 성취동기를 상실한 무기력은 일일이 다 열거할 수가 없이 심각하다.…세계적으로 전쟁이나 가혹한 노동에 동원되어야 하는 어린이나 청소년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이 모든 것이 어쩌면 살았어도 죽은 듯이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이다.

이런 소년 소녀들, 이런 젊은이들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며 주님께서는 “탈리타 쿰!”, 곧 “일어나라!” 하신다. 인생은 그런데도 살만한 가치가 있으니 다시 살라 하시고, 다시 사랑하라 하시면서 여러분이야말로 『젊다는 이유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사랑받을만하여(돈 보스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는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신다.

「누군가를 만진다는 것은 자비의 동작이다.

누군가를 만진다는 것은 그와 함께 소망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만진다는 것은 나의 몸과 손으로 그에게 조용히 말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만진다는 것은 내가 여기 너와 함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만진다는 것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만진다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그에게 알리고 그가 누구인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누군가를 만진다는 것은 존중, 인정, 존경의 행위이다.(엔조 비앙키)」 터치To touch http://benjikim.com/?p=2904

오늘 복음을 함께 묵상하면서 우리의 몸과 살이 감히 하느님의 사랑을 입을만한 가치가 없지만, 그런데도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한다. 하느님께서 어느 특별한 방식이나 모습이 아닌, 우리의 실제 현실적인, 우리와 똑같은 살과 몸이 되셨다. 이것이 육화의 신비이다. 그렇게 우리의 몸과 살이 하느님의 몸과 살이 된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지만, 죄 말고는 우리와 똑같이 여느 사람처럼 되시고, 우리의 형제가 되시어 우리를 만나러 오시고 우리를 만지신 분이 우리의 주님이시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살과 몸을 지니신 예수님 덕분에 우리도 그분을 만질 수 있고 그분께서도 우리를 만지실 수 있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애로우심과 자비를 만져볼 수 있게 해 주셨고,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우리 몸으로 느끼게 해 주셨다. 그분의 제자인 우리도, 교회도, 고통 중에 있고 아픔 중에 있으며 죄 중에 있는 모든 이들의 몸과 살을 만질 수 있어야 하고, 또 그들이 우리의 몸과 살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과 부드러움과 자비, 자애로우심을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어야만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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