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 4,35-41(연중 제12주일 ‘나’해)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이미지-studiocreativity.com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의 초반부에 위치한다. 마르코 복음의 초반부는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 시절 이야기로서 그분께 대한 사람들의 믿음과 그분의 능력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성경에는 성난 바다나 두려운 큰물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다.(참조. 탈출 15,8 시편 89 이사 51,9-10) 오늘 복음에서도 호수는 거칠고 두려우며 위험한 곳이다.

오늘 복음이야기는 요나서와 그 얼개가 매우 흡사하다. 『요나는 주님을 피하여 타르시스로 달아나려고 길을 나서 야포로 내려갔다.(=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마침 타르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 뱃삯을 치르고 배에 올랐다.(=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주님을 피하여 사람들과 함께 타르시스로 갈 셈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바다 위로 큰 바람을 보내시니, 바다에 큰 폭풍이 일어 배가 거의 부서지게 되었다.(=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러자 뱃사람들이 겁에 질려 저마다 자기 신에게 부르짖으면서, 배를 가볍게 하려고 안에 있는 짐들을 바다로 내던졌다. 그런데 배 밑창으로 내려간 요나는 드러누워 깊이 잠들어 있었다.(=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선장이 그에게 다가가 말하였다.(=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당신은 어찌 이렇게 깊이 잠들 수가 있소? 일어나서 당신 신에게 부르짖으시오. 행여나 그 신이 우리를 생각해 주어, 우리가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소?’(=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그러고 나서 그들이 요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자, 성난 바다가 잔잔해졌다.(=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사람들은 주님을 더욱더 두려워하며 주님께 희생 제물을 바치고 서원을 하였다.(=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참조. 요나 1,3-6.15-16)”

1.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호숫가 해변에서 약간 떨어진 배 위에 올라앉으셔서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몇 개의 비유와 그 해설을 통해 가르침을 주신 예수님께서 저녁이 되자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마르 4,35) 하고 말씀하신다. 이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땅으로부터 ‘나와’ 이방인들이 사는 땅으로 건너가 그곳에 들어가시기로 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어찌 보면 무모할 수도 있는 이런 결정을 왜 하신 것일까? 예수님께서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마태 15,24)이라고 느끼시면서도 하느님의 자비를 이방인들에게도 전하시고자 하신 것이며, 이방인들의 지역에서도 사탄과 싸워 그들을 쫓아내고 싶으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동하고자 하시는 이유이다. 이교도들이 많은 이방 민족의 땅 니네베로 가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요나는 이를 피해 도망치고 반대 방향으로 갔지만(참조. 요나 1,1-3), 하느님께로부터 파견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이방인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신다.

『주님께서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마르 4,35) 하십니다. 저녁이 되어 뒤바뀐 상황이 인간 지성을 넘어 무엇보다도 마지막 때와 최후의 시간을 알려 줍니다. 지상의 것에서 천상의 것으로, 현재의 것에서 미래의 것으로 건너가자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것은 언제나 인간의 것과 맞서며, 인간의 것은 나약함에 복종하고 하느님의 것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덕을 향하여 일으켜 세우므로, “호수 저쪽으로” 건너갈 필요가 있습니다.(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380~450년)』

제자들은 “군중을 남겨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마르 4,36)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간다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가시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참조. 마르 9,2;10,32;14,33)에 비해 상당히 이례적인 표현이다. 온종일 사람들을 만나시고 말씀하시느라 피곤하신 예수님께서는 배 위에서 다소 쉴 공간을 찾아 한숨 돌리며 휴식을 취하시려 한다. 하지만 호수는 예수님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마르 4,37) 유다인들이 이집트의 종살이를 벗어나기 위해 빠져나오다가 주님의 힘으로 패하고 말았던 가장 큰 원수는 바로 바다였다.(참조. 탈출 14,15-31)

바다는 바다의 괴물인 레비아탄(참조. 욥 3,8 시편 74,14)의 주거지요, 시편 저자가 “배를 타고 항해하던 이들 큰 물에서 장사하던 이들. 그들이 주님의 일을 보았다, 깊은 바다에서 그분의 기적들을. 그분께서 명령하시어 사나운 바람을 일으키시자 그것이 파도들을 치솟게 하였다. 그들이 하늘로 솟았다가 해심으로 떨어지니 그들 마음이 괴로움으로 녹아내렸다. 술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고 흔들거리니 그들의 온갖 재주도 엉클어져 버렸다.”(시편 107,23-27)라고 노래한 곳이다. 악마는 돌풍의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며 배에 탄 모든 이를 죽일 듯이 덤빈다. 어두운 밤이었고, 이미 배의 통제권을 상실한 제자들에게 바다는 크나큰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꼼짝없이 배가 뒤집히고 모두가 죽고 말리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마르 4,38)

『주님과 함께 배를 타고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는 제자들의 모습은 세상을 항해하는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이다. 뿐만 아니고 그 배는 우리들의 교회의 상징이기도 하고 세상 모든 사람이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라는 의미에서는 마음이 갈라지고 난파되어 부서짐 없이 온전히 유지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각 사람의 마음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심한 욕설과 모욕을 들어 마음이 심란해질 때면 마치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된”(37절) 상황이 될 때도 있다. 이럴 때 눈에 불꽃이 일고 복수심에 불타게 되어 앙갚음했다면 바로 이것은 내 마음의 배가 부서져 난파하고 만 것이 아니더냐? 주님께서 주무신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을 잊고 내가 잠들어버린 것이 아니더냐?…내 마음 안에 그분을 기억하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고 그분의 계명을 기억하는 것이니, 누군가에게 복수심에 찬 증오와 미움의 순간에 그분의 말씀을 떠올리다 보면 ‘도대체 나라는 인간이 어떤 인간인가? 나의 미움과 증오의 칼날을 뽑아보기도 전에 그 칼에 오히려 내가 맞아 죽고 말리라.’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며,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7-38)” 하신 말씀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단순히 분노와 복수라는 거센 돌풍에 관해서만 말하였으나,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비슷한 유혹들(참조. 마태 26,38-“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이 많을 것이니 그럴 때마다 너의 마음 안에 주님을 찾아 흔들어 깨우고 그분께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38절)” 하고 간곡히 청할 일이다.(성 아우구스티누스, 354~430년)』

2.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제자들이 (거칠게, 그러나 예의를 갖춰)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마르 4,38) 제자들은 예수님을 “스승님”이라 부르면서도 대들고 항의하면서 ‘다 죽게 된 마당에 당신은 도대체 뭐 하시는 것입니까?’ 하는 듯한 어투로 대한다. 같은 상황을 마태오는 “주님, 구해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마태 8,25) 하였다 하고, 루카는 “스승님,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루카 8,24) 하였다 한다. 어찌 보면 격이 없이 예수님께 다가가는 제자들의 모습을 기록하는 마르코의 표현에서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마르코 복음만의 투박하고 소박한 표현이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상실하고 당황하는 제자들 앞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마르 4,39)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 기적은 인생을 살아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돌풍”과도 같은 상황을 맞아 다급했던 체험들을 해 보았을 것이기에 대단히 상징적인 의미를 담은 사건으로 읽힌다.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나 제자들의 공동체 역시 미칠 듯이 날뛰는 거센 바람과 파도로 존재 자체를 위협해오는 상황과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을 맞이할 때가 있다. 인생의 모든 고통, 우리 눈에는 허무한 패배로 보이는 폭력의 현장, 미움과 전쟁의 잔혹함, 사랑을 믿는 것이 우습게만 여겨지는 상황, 모든 것이 거꾸로만 되어가는 듯한 상황이 있다. 이러한 상황, 특별히 이러한 상황이 오래가는 상황에서는 하느님이 느껴지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으며, 우리의 고통과 신음, 울음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어디 한쪽에서 마치 나 몰라라 하고 잠들어 계시지나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그럴 때 우리는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끊임없이 물어야 하고 주님께 여쭈어야만 한다. 그럴 때 그분의 대답은 우리가 만질 수 있고 우리 손에 닿을 만큼 작은 불꽃으로, 지극한 겸손으로, 생각지도 못한 연약함으로 다가오신다.

시편 저자가 기록한 것처럼 우리네 작은 믿음은 “주님, 잠자코 계시지 마소서. 주님, 제게서 멀리 계시지 마소서. 저의 권리를 위하여 깨어 일어나소서. 저의 하느님, 저의 주님, 제 송사를 위하여 일어나소서. 당신의 의로움에 따라 제 권리를 되찾아 주소서, 주 저의 하느님. 그들이 저를 두고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시편 35,22-24 참조. 시편 44,24;59,6 등등) 하고 외친다. 소리 지른다. 설령 우리가 성숙하고 든든한 믿음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어떤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우리가 믿는 우리의 구세주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허물어지고, 그분께 대들게 되며, 그분의 능력을 의심하게 된다는 사실을 솔직히 고백해야만 한다. 고통과 번민, 두려움과 위협의 상황에서 돌풍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우리를 배 위에서 죽게 되었다고 느낀 제자들의 모습이 되게 한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엄한 어조로 꾸짖으시듯이 “왜 겁을 내느냐?” 하시지만, 나아가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하신다. 믿음이 없는 제자들, 예수님께 붙어있지 않은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전적으로 그분을 믿지는 않는다.

3.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실제로 듣고, 그분께서 일순간에 바다를 고요하게 하신 것을 목격한 제자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르 4,41) 어떤 의미에서 제자들은 자기들이 직접 보고 들은 이 사건 앞에서도 그리 큰 가르침을 얻었다거나 믿음을 얻었을 것 같지는 않다. 장차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또 다른 거센 폭풍이 몰아칠 때, 믿음이 없는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마르 14,50) 하는 대로 뿔뿔이 도망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호수 위에서 몰아치던 돌풍과 거센 파도는 사실 장차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는 예고편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마 안 있어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무덤 앞에서 주님의 실패와 주님과 함께 도모했던 공동체의 실패를 확인하게 될 것이었다. 빈 무덤을 목격하고, 죽음에서 되살아나신 예수님,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바라보면서 비로소 믿음을 싹틔우게 될 것이고 마침내 악과 죽음에 대한 승리자이신 예수님을 고백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야 제자들은 비로소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이 되고, 예수님의 이름과 예수님께 둔 믿음과 신앙 때문에 닥쳐올 모진 박해라는 폭풍에서도 끄떡없이 견뎌내고 그 모든 것을 이겨낼 것이다.

마르코 복음사가가 자기 복음을 기록하여 로마 교회에 이 복음을 전달했을 무렵을 생각해보면, 이는 마치 아주 작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로마 제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그야말로 바다 한가운데에 뒤집힐 듯 흔들리는 일엽편주와도 같은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엄청난 두려움에 휩싸여 있으면서도 그 작은 공동체는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 하나로 버텼을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살아야 했던 마르코 복음사가의 공동체는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30)라는 예수님 말씀에 희망을 두고 온갖 시험과 두려움 속에서도 예수님처럼 “저쪽으로 건너”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갔을 것이다. 모진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주무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에 계신다.

갈릴래아 호수의 거센 폭풍은 악의 세력과 싸워 승리를 거두시는 주님에 관한 메타포metaphor, 곧 은유이며 전이轉移이다. 주님께서는 요나처럼 등장하시지만, 요나와는 정반대로 행하시는 분이시다. 내키지 않는 걸음을 마지못해 걸으시는 분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위해 아버지의 뜻을 좇아 기꺼이 앞으로 나아가시는 분이시다. 그런데도 요나와 예수님은 모두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는 사명에 충실하여 비싼 대가를 치른다. 둘 모두 거센 바다 한복판, 밑바닥까지 들어가(참조. 요나 2,1-11) 그 파도와 맞서서 마침내 그 악을 쳐부순다. 악은 그렇게 그 안에 들어가야만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마태 12,39-40 참조. 마태 16,4 루카 11,29-32)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오늘 복음은 너무나도 사람을 사랑하신 나머지 죽음의 심연에 이르기까지, 밑바닥에 이르기까지 내려가시는 값을 치르시는 하느님 자비의 비유일 수도 있다.

‘Naufragium feci, bene navigavi.’(난파를 당했으나, 잘 항해했다)라는 라틴말의 관용적 표현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온갖 풍랑에 시달리며 부서지고 깨지더라도 마침내 하느님의 나라에 도달할 수 있어서 잘 항해했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아멘!

One thought on “마르 4,35-41(연중 제12주일 ‘나’해)

  1. 마침내 하느님 나라에 도착할
    그 날을 위해
    두려움 없이
    믿고
    맡기는
    용기와 신념을
    가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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