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걸음

아우구스티누스 성인(St. Augustinus Hipponensis, 354~430sus)께서 “오, 저의 하느님! 켜켜이 깊게 쌓이고 끝없이 잡다한 기억의 힘은 실로 위대하면서도 두렵습니다.(Great is the power of memory, a fearful thing, O my God, a deep and boundless manifoldness.)”(고백록 10권, 17.26)라고 말씀하시던 순간이 있었다. 그 순간 혹시 성인께서 ‘하느님께서 주셨다’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던 아들 아데오다투스Adeodatus를 생각하고 있지나 않았을까? 설령 아무리 그랬어도 열일곱에 얻은 아들을 향한 그의 애정이 손주의 손주뻘도 훨씬 넘는 이사악을 얻은 아브라함의 기쁨에 견줄 수 있었을까 싶기는 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아들을 기억하며 「육체적으로 제 죄에서 난 자식인 아데오다투스…아이는 열다섯 살쯤인데도 불구하고 재능은 상당수의 무게 있고 유식한 어른들을 능가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선물을 놓고 당신께 아뢰는 말씀이니, 주 저의 하느님, 만물의 창조주시여, 당신은 저희의 일그러진 것들에 제 모습을 갖춰주실 만큼 크게 능하십니다. 그 아이 안에 제 것이라고는 죄악 말고는 없습니다. 비록 아이가 당신의 규율 속에서 저희 손에 자라기는 했지만 저희더러 그렇게 기르도록 영감을 주신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이십니다.…저는 그 아이의 다른 많은 신통한 일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의 대단한 재능이 두렵기까지 했습니다. 당신 말고 그 누가 그런 신통한 것들을 지어냈겠습니까? 그의 생명을 당신께서는 일찍 지상에서 거두어가셨으니 차라리 저는 마음 놓고 그 아이를 떠올리면서 그의 소년기도 청년기도 어른으로서도 전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고백록, 성염 역, 제9권, 6.14)」라고 쓴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그런 마음일 것이다. 아기가 처음으로 뒤집기를 했던 순간을 넘어 첫걸음을 떼던 순간을 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경이로움일 것이다. 그 순간의 시각時刻과 햇빛, 바람, 냄새까지도 온통 기억에 남아 자신의 생애를 관통하는 기쁨일 것이다.

밀레, 첫걸음, 1858, Cleveland Museum of Art, OH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 1814~1875년)는 강한 인상으로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담아 1858년에 파스텔화를 남긴다. 그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급하게 스케치하면서 색상과 그 효과에 대한 인상을 얻는 데 집중하였다가 나중에 캔버스를 완성하였다. 그는 중요하지 않은 세부 사항은 과감하게 버리고 기억할 만한 가치에 집중한다. 마음에 와닿는 것들을 그대로 화폭에 담으려고 했다. 6월의 풀밭에 노을이 지는 모습, 농부와 아내가 고개를 숙여 삼종기도를 드리는 모습,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 위를 가로지르는 무지개…이런 것들이 밀레가 애착을 가졌던 일상의 낭만이자 기억이었다.

밀레의 <첫걸음>에서 그는 아버지와 아기의 한순간을 잡아 시간을 멈추게 한다. 예술가가 농부를 영웅적인 예술 작품의 소재로 삼는 것조차 드문 일이었던 시대에 밀레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장면이 지닌 특별함을 포착하려 한다. 엄마의 손에 붙들리지 않으면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는 한 아기가 아빠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디디려 한다. 아빠는 땅바닥에 삽을 놓고 무릎을 굽힌 채 아기 키만큼 웅크리면서 그저 어서 오라는 듯이 온 세상을 안을 듯한 품을 펼친다. 오직 아이를 안는 것만이 소원인 아빠는 거친 농부의 손을 지녔어도 한없는 부드러움 그 자체이다. 밀레의 소묘와 파스텔화를 처음 접하면서 “나는 내가 서 있는 곳이 성스러운 땅이기에 신을 벗어야 한다고 느꼈다.”(1875년 6월 29일)라고 말할 정도로 밀레를 스승처럼 흠모하던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년)는 훗날 죽기 얼마 전인 1890년 1월쯤 이 그림을 모사摹寫하면서 “친숙하면서도 장엄(familiar and yet solemn)”이라는 말로 표현한다.(*빈센트는 1889년과 1890년 사이에 생 레미 정신병원에서 밀레의 작품을 바탕으로 21점에 달하는 작품을 남긴다)

빈센트 반 고흐, 첫걸음, 1890, Metropolitan Museum of Art, NY

그리움은 시간을 압축하여 당기고 밀어내면서 현재의 어느 구석에 보석으로 남지만, 어느새 고통이 되기도 한다. 기억이란 슬픈 특권이어서 아버지가 아기의 첫걸음을 뿌듯해하면서도 아이의 걸음 수만큼 아기가 멀어지리라는 것을 직관으로 아는 것처럼 기억은 시간과 함께 고통이 된다. 기억은 폰 발타살(Hans Urs von Balthasar, 1905~1988년)이 “시간을 느끼면서도 아직 그리스도의 마음은 느끼지 못하는가?(You sense Time and yet have not sensed Christ’s Heart?)”라고 묻는 것처럼 존재의 중심에 있는 고통받는 사랑에 도달하는 여정이다.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손뼉 치며 대견스러워하던 첫걸음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달 표면에서 한 걸음을 내디디면서 인류를 위한 첫걸음이라고 했던 닐 암스트롱(Neil Alden Armstrong, 1930~2012년)처럼 그런 걸음마의 순간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두 발로 걸어서 비로소 인간이 되었다고 하면서도 하늘을 향해서는 단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는 존재여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로 걸음을 내디디셨다는 것을 잊고 산다. 앞으로 걷는 듯해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랑이 나를 오라 손짓하지만, 죄로 더럽혀진 존재의 뒷걸음”(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 1593~1633년)을 치는 것이 인간이다. 멋있게 걸어보자고 뒤뚱뒤뚱하다가 뒤죽박죽 엉킨 걸음이다. 한 걸음만 내디디면 모든 것을 다 쥘 수 있을 것만 같아 앞으로 걸어도 그 밑이 심연이고 나락으로의 추락임을 모른 채 걸음을 뻗고 마는 것이 인간이다. “천사들보다는 못하게 만드셨어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신”(시편, 최민순 역, 8,6) 천사 같은 인간은 기억하고 인식하며 의지로 원해야 한다. 양심의 거품을 씻어주시도록 은총을 청하여 죄의 기억은 씻고 선의 기억을 새롭게 하여 앞을 내디뎌야 한다.

3 thoughts on “첫걸음

  1. 아름다운 글 잘 읽었습니다. 을 통해 아버지와 아이의 순간을 아름다움으로 표현한 장면이 참 인상적입니다. 농부의 거친손이 세상에서 제일 부드러운 손이란걸 느낄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벤지신부님의 글 덕분에 일상의 감동과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2. 이 아침.
    다시 새겨볼 귀한 말씀 접합니다.

    하느님의 섭리와 계획으로
    만나게 된 제 반 아이들.

    오늘도 그들 속에서
    설렘과 기다림을 만나겠습니다.

    아버지의 마음!

  3. 하루하루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음 또한 큰 선물인 듯하다. 평범한 농부가 아이의 첫걸음을 반기며 잠시 밭농사를 멈추며 기뻐하는 밀레의 그림을 보니, 6월의 한뼘한뼘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채소를 식탁에 올려, 짧게 주어진 점심시간을 딸과 특별한 얘기도 아닌 얘기로 함께하며 서둘러 식사를 마치는 평범한 시간이 순간 비교되었다. 팬데믹 이후 잦아지는 재택 근무로 예전과 달리, 가족들이 함께 가정에서 식사를 하는 경우가 많아진 지금, 또 한걸음 한걸음 변하는 사회 안에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의 중심을 잃지 않고 기도하며, 글을 통해 우리의 영성을 키우는데 도움주심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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