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중들의 환호 속에 예루살렘 성에 입성(마태 21,1-11)하신 예수께서 성전에 가셔서 장사꾼들을 내쫓으신(마태 21,12-17) 사건이 있었고, 이후 성전에 다시 돌아오셔서 하늘 나라의 도래에 관한 세 개의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 그 두 번째 비유를 듣는다. 이 비유들은 사실 예수님께서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행하시는가 하고 따져 묻는 “백성의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을 향해서 하신(참조. 마태 21,23-27) 말씀이다. 두 아들에 관한 비유(마태 21,28-32) 뒤에 예수님께서는 “다른 비유를 들어보아라.”(마태 21,33) 하는 말씀으로 두 번째 비유를 시작하신다. “들어보아라” 하는 말은 오랜 세월 동안 모세와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인간들을 향하여 수도 없이 소리 높여 반복하셨던 말씀이다.
“들음”은 단순하게 귀에 들리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 들어서 배워 익히고, 마음에 받아들여,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진지하게 물어 그분과 거룩한 계약을 맺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바를 실행에 옮기는 것을 말한다.
오늘 복음의 비유 역시 지난주 비유(마태 21,28-32)와 마찬가지로 “포도밭”을 그 배경으로 한다. 지중해 지역에서 포도밭은 일정하게 몇 년을 두고 개간하고 가꾸어야 하며, 많은 노동과 정성, 그리고 애정을 쏟아부어야만 한다. 포도 농사를 지으려고 작정하여 한번 포도나무를 심으면 매년 갈아엎고 다른 작물을 심어 수확하는 땅과는 달리 일정 기간 해를 넘기며 보살펴야 하는 땅이 된다. 이처럼 포도 농사를 위해서는 땅과 그 땅을 일구는 사람 간에 끈끈한 애정 관계요 유대가 형성되어야만 한다. 이 때문에 예언자들은 포도밭과 포도밭 주인 간의 관계를 들어 종종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 간의 계약이며 동맹이요 관계로 표현하곤 했다. 성경에는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애정이 가득 담긴 하느님과 하느님의 “소유”이며 보물인 당신 백성 간의 관계를 묘사하는 대목이 많다.(참조. 탈출 19,5 신명 7,6 등) 특별히 이사야 예언자는 “내 애인이 자기 포도밭을 두고 부른 노래”(이사 5,1)를 통해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내어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네.…탑을 세우고 포도 확도 만들었네…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들포도를 맺었다네…”(이사 5,1-7 *오늘 제1독서)라는 이야기를 전해준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예언자들을 박해한 역사, 그들이 예수님을 처형한 악행, 예수님의 놀라운 부활,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인 교회의 출현 등 일련의 구원사를 포도원 소작인들의 이야기로 초대교회가 엮어 만들어 전한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예수님 친히 발설하신 종말 심판 비유(마르 12,1-9=마태 21,33-40)가 깔려 있다는 설도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종말 심판 비유를 초대교회가 구원사 우화로 바꾸었다는 가설도 가능하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소작인들의 못됨이 드러나는 비유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 인내와 자애로우심이 여실히 드러나는 비유임도 사실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들어서 신‧구약 성경 전체를 요약 정리하신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1. “어떤 밭 임자가…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특별히 이사야 예언자의 ‘포도밭 노래’(이사 5,1-7)는 예수님이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청중들에게 아주 익숙한 노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노래 한 구절을 인용하시며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마태 21,33) 하시며 비유를 시작하신다. 이렇게 시작하는 비유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당신 백성 이스라엘 간의 역사를 말씀하고자 하신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사야 예언자의 ‘포도밭 노래’는 하느님의 바람과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희망과 바람, 그리고 정성과 애정을 저버리고 말았다며 이스라엘을 고발하는 내용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대대로 전해져 왔다. “밭 임자”의 행동을 잘 살펴보면 포도밭에 대한 밭 임자의 사랑이 애틋하다. 그는 “믿음의 행위…사랑의 노고…희망의 인내(1테살 1,3)”를 아끼지 않는다. “내 포도밭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더 해야 했더란 말이냐?(이사 5,4)”하는 오늘 제1독서의 말씀이 그대로 들어맞는다. 하느님께서도 우리 인간을 위하여 그렇게 하신 분이시다.
비유를 들으면서 우리는 즉시 하느님의 사랑과 기대를 저버렸던 그 이스라엘 백성을 손가락질하며 그 포도밭을 소유하기에 자격 미달이어서 그들로부터 빼앗아 이제 주님의 백성인 우리 차지가 되었다고 말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복음의 맥락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이요 원로들이며 사제들을 상대로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 분명하지만, 이 비유가 오늘날 우리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울타리를 둘러치고”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천사들이 그들을 보호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지켜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분께서 파신 “포도 확”은 의로움과 성덕의 열매를 모으는 거룩한 교회를 나타냅니다. 많은 수고와 노력을 통해 포도를 짜는 것처럼, 거룩한 순교자들도 엄청난 박해와 고문을 통해서 포도처럼 으깨어지고 피를 흘립니다. 포도밭 한가운데 세워진 “탑”은 성모님을 통해 거룩한 교회 한 가운데 굳건한 탑처럼 모습을 드러내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분의 현존 때문에 모든 성인과 순교자들은 지극히 사악한 원수인 악마로부터 영적 무기로 보호를 받습니다.(라틴 교부 에피파니우스, AC 5세기 말이나 6세기 초, 라틴말로 ‘복음서들의 주석서’를 썼던 분이다. 베네벤토Benevento나 세비야Seville의 주교로 추정된다)』
비유의 포도밭 임자는 포도밭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도록 애써서 일군 다음 그 포도밭을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마태 21,33) 포도밭은 여전히 주인의 소유이고 주인이 멀리 떠나도 계속 가꾸고 보살펴 수확을 기대한다. 시간이 흐르고 포도가 익는 계절의 시작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주인은)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마태 21,34)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마태 21,35) 주인이 엄연히 있는데도 소작인들이 포도밭을 차지하고 싶은 욕심에서였다. 아마도 너무 오랜 시간 멀리 떠난 주인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욕심이고 유혹일뿐이다.
이 유혹은 주인이 몸소 자기 포도밭을 믿고 맡겨준 사람들이 그 포도밭을 자기들의 것인 양 생각하면서 그것을 차지해보려는 유혹이다. 그러한 생각과 유혹은 단순히 생각으로만 끝나지 않고 주인이 보낸 종들을 거부하면서 폭력적으로 대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종들이 시야에서 사라지도록 때리고 죽이고 돌을 던진다. 그래도 참을성 많은 주인은 계속하여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마태 21,36) 주인이 보낸 종들은 여전히 거부를 당한다.
2. “내 아들이야 존중해주겠지”
주인은 한 번 더 큰 인내를 발휘하여 마지막 시도를 한다.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마태 21,37) 주인의 마지막 희망은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면 소작인들이 주인을 보듯 그 아들을 보며 존중해주고 내야 할 “소출”을 내 주리라는 것이었다. 주인이 바보처럼 멍청한 것일까? 주인 편에서는 애초에 자기가 소작인들과 맺었던 계약을 어떻게 해서라도 복원해보려는 시도였다. “믿음의 행위…사랑의 노고…희망의 인내”(참조. 1테살 1,3)를 아끼지 않으시는 분이 우리 주인이신 하느님이시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자기들이 주인이 되려는 욕심이 더욱 치솟아 오르면서)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버렸다.”(마태 21,38) 소작인들이 주인의 아들에게 한 행동은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버렸다.”인데, 이 말은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루카 4,29)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나갔다.”(마르 15,20 마태 27,31) “(스테파노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서는”(사도 7,58) 하는 구절을 연상시킨다.
오늘날로 치면 비유에 등장하는 나쁜 소작인들은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으로 취하려는 이들, 교회를 독차지하려는 일부 몰지각한 교회의 지도자들, 공동체 안에서 눈에 보이는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을지라도 거부, 소외, 욕설, 비방, 멸시, 조작, 심리적인 압박으로 누군가를 울타리 밖으로 끌어내려는 사람들, 하느님 것이 하느님 것인 줄을 모르는 이들이다.
예수님께서 오늘 들려주신 이 비유의 말씀은 당신 수난 전날 저녁에 당신을 거부하여 그렇게 도성 밖으로 ‘끌고 나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사람들에게 하신 셈이 된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어 이스라엘이라는 포도밭에 오셨다는 것을 분명히 아시고, 당신의 그러한 사명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마감될지 아셨음을 암시한다. 불의한 세상에서 의인은 오직 거부를 당할 뿐이며 제거되고야 말 것이라는 인간 역사의 어두운 필연이 이렇게 기록되고 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당신을 그렇게 폭력적인 죽음을 맞으라고 보내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신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어떻게 해서라도 인간이 아들을 알아주고 한 번 더 당신과의 관계를 복원해보자는 희망으로 당신을 보내셨다는 것을 아신다. 아드님 예수께서는 비록 고통스러운 결말이 있을지라도 마지막 말씀은 결국 아버지께 달려 있다는 것도 아신다. 예수님께서는 사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시편 118,22-23)라는 거룩한 성경 말씀을 알고 그 말씀으로 기도하면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노래하며 기억하던 오래전 이 기록과 예언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그 계획을 믿고 실행에 옮기신다.
3. “포도밭의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예수님의 오늘 비유는 마지막에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하며 예수님께서 물으시고, 예수님의 이 물음에 백성의 원로들이나 수석 사제들이 즉시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마태 21,40-41) 하고 대답한 것처럼 기록한다. 예수님을 거부하고 죽음으로까지 내몰았던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속내를 감추듯 뻔뻔스럽게 대답하는 것을 들으면, 하느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도 들린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최후 장면을 기록할 때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고 싶었지만, 군중이 두려워 적당한 기회를 모색하며 이 궁리 저 궁리 끝에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없었던 겟세마니 동산에, 밤 중에 기습적으로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다고 한다.(참조. 마태 26,47-56) 사실 이 비유를 들었던 백성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살인이 자행되는 포도밭의 소작인으로 비유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넘어 오늘 이 비유를 읽는 교회, 특별히 그 교회의 지도자들도 자신들에게 다가올 엄중한 심판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포도밭은 처음에 맡겼던 이들에게서 되찾아져 “다른 소작인들에게” 내주게 될 것이다. “다른 소작인들”이란 “가난한 이들은 땅을 차지하고 큰 평화로 즐거움을 누리리라.”(시편 37,11)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마태 5,3.5)이라는 주님의 약속에 따라서 그런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게 겸손하고 온유하며 가난한 이들이 주님의 영원한 상속자가 된다.(참조. 스바 3,12-13 이사 60,21 예레 30,3)
물론 이들 가운데에서도 목자가 있을 것이고 지도자들이 있을 것이며 첫째 자리를 차지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지만, 비유의 나쁜 소작인들처럼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 소작인들은 모든 포도밭을 다 차지하고 그곳에 자기들의 계획을 세워 그 계획대로 포도밭을 좌지우지해 보려는 것이었다. 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으니 이는 소작인이 아니라, 곧 종들의 종이 아니라 주인이 되어보려는 것이었다. 오늘날 교회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역사적으로 포도밭에서처럼 실제 물리적인 폭력과 살인이 자행된 불행한 시대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교회에는 그런 일이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주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고 거부하려는 폭력으로부터 시작하여 소외, 비방, 경멸, 조작, 각종 심리적인 압박과 같은 다른 형태의 폭력이 아직도 교회 안에 자행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여기 오늘의 교회 안에서도 권위를 행사하는 이들이 항상 경계해야 할 일이다. 이 비유가 예수님을 배척하고 붙잡아 죽였던 당시의 이스라엘에만 해당하지 않고 오늘날 교회라는 포도밭을 두고 하신 비유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밭 임자는 불충실한 소작인들을 그들의 운명에 따라서 가차 없이 없애 버렸으나 (꼴도 보기 싫을) 그 포도밭은 없애지 않고 다른 충실한 소작인들을 찾아 그들에게 그 밭을 맡깁니다. 여기서 우리는 누군가가 헛된 것에 사로잡혀 믿음이 약해질 때, 또 다른 한쪽에서는 항상 그 믿음을 껴안을 준비가 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비유의 끝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시편 118,22-23)”라는 성서 말씀을 인용하시는 이유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죽음이 결코 패배가 아닐 것이라는 내용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줍니다. 그분께서는 죽임을 당하셨으나 무덤에 머무르시는 분이 아니시고 그러한 완전한 패배가 결정적인 승리의 시작일 것임을 알려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맞으신 십자가상 참혹한 죽음에는 찬란한 부활의 영광이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도밭은 계속하여 소출을 낼 것이며, 주인은 그 포도밭을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내줄 것입니다.(마태 21,41)”(교황 베네딕토 16세, 2008년 10월 5일 ‘교회의 생명과 사명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주제로 열린 제12차 주교 시노드 개막 미사 강론 중에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