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애론(2-12)

제12장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을 따르든지 물리치든지 우리 마음대로 하도록 온전한 자유에 우리를 맡기셨다
사랑하는 테오티모여, 나는 여기서 한순간에 늑대들을 양으로, 바위를 샘물로, 박해자를 강론가로 변화시키는 그러한 기적적 은총에 대하여 말하려 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전능하신 성소에 대한 것은 한편으로 제쳐놓겠으니, 즉, 거룩하고도 맹렬한 부르심 같은 것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작용으로써 어떤 선발된 영혼들을 극단적인 악습에서 은총의 극단까지 데려가시기도 하는데, 이러한 것은 그들 안에 어떤 윤리적이며 영신적인 체질변화體質變化(a certain moral and spiritual transubstantiation)가 일어나게 하시는 것이다.
박해의 도구였던 사울을 선택의 그릇으로, 즉 위대한 사도로 만드신 것 같은 경우가 그렇다.(참조. 사도 9,15) 그래서 이렇게 뛰어난 은총을 받은 영혼들은 특별한 등급에 올려놓고 볼 필요가 있으니, 하느님께는 이러한 영혼들을 불러 쓰시는 데 있어서 은총을 그냥 부어주심으로써가 아니고 폭포처럼 쏟아 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단순한 자유와 은총의 유출流出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하느님 사랑의 세차고 충일한 유입流入에 의한 것이다. 하느님의 정의는, 현세에서 가끔 우리를 엄책嚴責하시고 벌하시는데, 그것은 흔히 있는 벌이기 때문에 벌 받는 이들이 대개는 이를 모르고 무감각하기가 일쑤다. 때로는 하느님께서는 징벌의 홍수와 징벌의 심연을 쏟아부으실 적도 있으시니 그것은 당신 분노의 엄중함을 알리시고 두려워하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하느님의 자비는 영혼들을 지극히 감미롭고, 부드럽게 또 아늑하게 회개시키시고 은혜들 입게 하시므로 그 은총의 움직임은 거의 뚜렷이 깨닫기 어려운 것이다. 더구나 매로는 이 최상의 자비가 마치 홍수가 넘쳐흘러 온 들판을 마구 삼켜 버리듯이, 당신의 맹렬한 사랑의 은총을 쏟아부으심으로써 잠깐 사이에 영혼을 축복으로 온통 적셔 주시고 덮어 버리시어 당신 사랑의 풍요로움을 드러내신다. 그리고 당신의 정의를 흔히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나타내시지만, 때로는 비상한 방법으로 나타내시는 것처럼 당신의 자비력慈悲力도 일반인들에게는 보통 방법으로 베풀어 주시고, 때로 어떤 이에게는 아주 비상한 방법으로 행사하신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섭리가 우리 마음을 당신 사랑으로 잡아당기실 때 흔히 사용하시는 동아줄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곧 당신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와 광야로부터 약속된 땅으로 이끌어 들이실 때 사용하신 방법이다. 호세아를 통하여 이르시기를, “나는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 그들을 끌어당겼으며…!”(호세 11,4)라고 하셨으니, 이는 우정의 유대를 이르시는 것이다. 테오티모여, 의심없이 우리는 쇠사슬에 묶여 들소나 사나운 황소처럼 다루어지면서, 하느님께로 이끌려 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은근한 유인과 달콤한 매력, 거룩한 영감에 의해서 끌려간다.
즉 “아담의 끈”(cords of Adam, 불어-les liens d’Adam은 인간성humanity을 뜻함)으로써 이끄시니, 이것은 인간의 마음에 적응되는 비례성에 따라 이루어지며, 인간의 마음에는 본성적으로 자유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인간적인 의지의 띠(the band of the human will)는 기쁨과 즐거움이다. 성 아우구스티노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린이에게 호의를 보이면, 어린이는 그것을 사랑하여 그것에 끌려간다. 이것은 육체의 줄로써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줄로써 끌려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영원하신 아버지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당신께로 이끄시는지 살펴보자.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친애를 가르치시지, 필연적으로 의무를 지워주지 않으시며, 우리의 마음속에 영신적인 기쁨과 상쾌함을 던져 주시며 이런 것을 거룩한 미끼로 삼으심으로써 우리를 부드럽게 이끄시어 당신 교훈의 감미를 맛보고 누리게 하신다.
사랑하는 테오티모여,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의 자유의지는 은총에 의해서 결코 강압을 받거나 필연성을 띤 취급을 받지 아니하며, 오히려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손의 전능하신 힘은 무수한 영감과 초대와 매력으로써 그 영혼을 어루만져 주시고 감싸 주시며 묶고 동여매 주신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인간의 의지는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로 머물러 있는 동시에, 온갖 종류의 억제나 강요에서 면제되고 해방되어 있는 것이다. 은총은 이렇듯 은혜로운 것이어서 우리의 마음을 따스하게 잡아 부드럽게 이끌므로, 결코 어떤 면으로도 우리의 자유의지를 손상치는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은총이 우리 정신의 발로發露를 힘차게 접촉하여 주고 있으나 동시에 매우 우아하고 아늑하게 다루고 있으므로 우리의 자유의지는 아무런 폭력을 겪지 않는 것이다. 은총은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힘으로 강요치는 않는다. 다만 마음은 유유히 이끌 뿐이다. 또 은총은 거룩한 폭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자유를 폭력으로 침범치는 않는다. 오히려 사랑이 충만케 할 따름이다. 은총은 강하게 활동하는 동시에 또한 너무나 감미롭게 움직이므로 우리 의지는 그렇듯이 힘찬 활동 밑에서도 결코 압도되지 않는다. 은총이 우리에게 압력을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자유를 강압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은총의 힘이 작용하는 참된 활동 밑에서 우리는 마음에 맞는 대로 동의하든가 반대하든가, 자유로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경탄스럽고 또한 진리다운 사실은 바로 이것이니, 우리의 의지가 은총의 매력을 따라서 하느님의 충동에 동의하게 될 때, 의지는 은총에 반대한 때와 마찬가지로 자유로이 동의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은총에 대한 동의는 의지에 의해서보다 은총에 의한 것이며, 또한 반대로 은총에 대한 반항은 오히려 우리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마음을 다루심에 있어서 하느님의 손길은 이처럼 감미로우시다. 그리고 우리의 자유를 빼앗지 않으시고도 당신의 능력을 우리에게 통해 주시는 하느님의 오른손다운 그 놀라운 솜씨여! 우리 의지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고도 은총의 힘 있는 충동을 우리의 마음에 주입시키는 그 솜씨여!
하느님은 이처럼 당신의 권능을 당신의 인자와 융합하시어, 그 인자로운 감미가 인간 의지의 자유를 힘차게 유지하게 하시고 보장하시니 하느님의 능력은 감미롭게 우리에게도 힘을 주시는 것이 사실이다. 구세주께서는 사마리아 부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요한 4,10)
테오티모여,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으니 당신의 매력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우리 구세주의 태도를 살펴보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당신이 알았더라면……”이란 말로써 구세주께서 뜻하시는 것은 그 부인이 의심 없이 감동을 받고 영생의 물을 청하게끔 되었으리라는 것이니, “아마” 너는 그것을 청하였으리라고 하셨다. 구세주께서는, “너는 힘이 있을 터이고 청하도록 자극을 받았을 테지만 달리 강요되거나 제한을 받지는 않았으리라”라고 하시는 말씀이며 또, “청했을 것이라”라고 하신 것은 즉 그 부인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어, 청할 수도 있고 안 청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대중판 성경에 의한 구세주의 말씀과 성 아우구스티노가 성 요한 복음을 주해 한 것이기도 하다.(성 아우구스티노의 서간, In Joannem 24의 5)
종합해 볼 때, 만일 우리의 자유의지가 하느님이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은총에 동의하여 협조할 수 없다거나 또는 은총을 거절하여 거부할 수도 없다고 누가 말한다면, 이런 사람은 성경 말씀과 모든 교부들과 우리의 경험까지 반대하는 자이며, 트리덴티노 공의회에 의해서 단죄될 자일 것이다.(트리덴티노 공의회, Sess. VI C-an. IV)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의 영감과 권유를 거부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감을 주시지 못하도록, 또 우리 마음과 접촉하시지 못하시게 우리가 하느님을 막는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은 우리 안에서 되는 일이요, 또 우리 없이, 즉 우리의 작용이 없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입혀주시는 은혜란, 바로 우리가 그것을 생각하기 전에 되는 것이니, 우리가 잠들었을 때 그는 우리를 깨워 주시는데 결국 우리가 깰 것을 생각하기 전에 벌써 우리는 자신이 깨어 있음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하면, 깨고 나야 비로소 깸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깬 후에, 일어나든지 말든지 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가 우리 없이 우리를 깨어 놓을 수는 있었으나, 우리 없이는 일어나게 못 하신다. 그런데 일어나지 아니하는 것과 다시 잠자려 하는 것은 부르심을 반대하는 것이니, 우리가 부르심, 곧 일깨움을 받은 목적을 봐서도 우리는 일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영감이 우리에게 도달치 못하도록, 또는 우리에게 충동을 주지 못하도록 우리가 방해할 능력은 없으나, 그 영감이 우리를 몰고 가려 하느니만큼 우리가 거기에, 즉 충동에 따르지 않고 굴복하지 않을 수는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저항하고 반대할 수는 있다. 바람이 일어서 아포데스 새를 들어 올리면서도 바람은 그 새들을 그리 멀리까지 올리지는 않는다. 새들이 제 날개를 펴고 제 나름대로 협력해야만 멀리 날을 수 있다. 바람은 공중으로 약간씩 들어 올려 주는 역할만 할 따름이다. 반대로 이 새들이 만일 땅 위를 뒤덮은 녹음에 정신을 잃고 멍하니 있다거나, 바람이 일고 있는데도 거기엔 무감각한 듯 그대로 머물면서, 접힌 날개를 펴려 하지도 않고 그냥 땅에 처박혀 있으면, 비록 바람의 충동을 받았으나 헛되이 되어 버렸을 것이니, 스스로가 해야 할 몫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테오티모여, 영감이란 것은 우리에게 미리 오고, 우리가 생각하기 이전에 이미 우리는 그것을 느끼게 되는데, 우리가 영감을 느낀 후에 남은 일은 우리 차지뿐이니, 그 영감에 동의하여 따르든가 아니면 거절하고 따르지 않으며 물리쳐 버리든가 하는 것이다. 영감은 우리가 느끼기는 하나 우리에 의한 것은 아니며, 우리가 거기에 동의하는 것은 우리에 의하지 않고는 못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없이 느끼게 된 영감이 우리 없이는 우리를 거기에 동의시키지 못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