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례력으로 새해 첫 주일이다. 대림 제1주일을 라틴어로는 ‘레바비 주일’(Levavi, 들어올리다)이라는 명칭으로 불렀다. 그 이유는 이날 부르는 그레고리안 성가 입당송 구절이 “Ad te levavi animam meam.”(주님, 당신께 제 영혼을 들어 올립니다)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가’해의 대림절 4주 동안 제1독서는 이사야 예언서에서 취한다.(이런 의미로 이사야를 ‘대림시기의 예언자’라고 부를 수도 있다) 기원전 7∼8세기의 암울한 시기에 이사야 예언자가 메시아께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고자 했었기 때문이다. 제2독서는 1·2·4주일에 로마서에서 취하고, 3주일에는 야고보 서간에서 취한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의 교우들에게 주님께서 오실 때를 대비하여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만 구원될 수 있는지를 설파하고, 야고보서는 농부가 추수를 기다리듯이 끈기 있게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복음은 4개 주일 모두 ‘가’해의 말씀인 마태오복음에서 취한다.
오늘 복음은 ‘종말론적 담화’라고 일컬어지는 마태오 복음 24장의 한 대목으로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와”(마태 24,1) 예루살렘 동편 “올리브 산에 앉아 계실 때에 제자들이 따로 예수님께 다가와 여쭈어보니”(마태 24,3) 사형 판결과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해주신 말씀이다. 인간들이 거룩한 도시라고 하는 예루살렘과 그 성전을 두고 성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 예고하시고, 재난이 뒤따를 것이라 하시며,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에 있을 징조들이 있을 것이지만,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신다. 종말은 확실하고, 그때는 불분명하다는 두 가지 사실에 관한 비유적 말씀이다. 그러니 깨어있어야 하고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잠으로부터” “어둠으로부터” “준비” “깨어있음” 등의 개념이 사순시기와 같은 주제어들이지만 사순시기가 ‘보속’을 위한 어두움이요 암울함이라면, 대림시기는 ‘기쁨’ ‘기대’의 어두움이고 암울함이라는 차이가 있다. ※참조. 깨어 있음: https://benjikim.com/?p=16264
전례력의 첫 주일이든 마지막 주일이든 사람의 아들이신 우리의 주님과 우리의 만남을 기다리는 우리의 미래라는 시간 속에 놓여 있다.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 분!”(묵시 4,8)이 바로 우리 주님이시다. 성모 마리아의 아드님으로서 죽을 육신을 취하여 오심으로 죽었다가 부활하신 분, 매 순간 당신의 제자들을 당신께로 이끄시고자 오시는 분, 우리가 이 세상을 마감하고 빠져나갈 때, 그리고 시간의 끝에 평화와 생명이 충만한 당신의 나라에 결정적으로 모든 이를 인도하러 오실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시다.
예수님은 “오실 분(오 에르코메노스, ὁ ἐρχόμενος, ho erchómenos, 영어로 who is to come)”(묵시 1,4.8;4,8)으로서 당신의 날, 바로 그 ‘주님의 날, 주일主日, 주간 첫날(히브리말로 욤 아도나이, יום יהוה, jom ‘Adonaj, 그리스말로 키리아케 에메라, κυριακῇ ημέρα, kyriakè heméra, 영어로는 the Lord’s Day, the first day of the week 등으로 번역)’은 재림(그리스어로 파루시아, παρουσία, parousía, 영어로 a/the coming, an/the arrival, advent<대림待臨 등으로 번역)의 날, 최종적이고 결정적으로 당신을 드러내시는 날이다.(참조. 묵시 1,7.10;16,15 사도 20,7)
1. “사람의 아들의 재림”
“예수님께서 올리브 산에 앉아 계실 때, 제자들이 따로 예수님께 다가와 여쭈었다.”(마태 24,3)라는 구절로 미루어 불 때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일반 군중에게 하신 말씀이라기보다 체포와 사형선고 및 죽음으로 이어지는 공생활의 끝부분에 이르러 당신의 “작은 양 떼”(루카 12,32)인 제자들에게 “따로” 하신 말씀으로 보인다. 예루살렘 동쪽 찬란히 빛나는 성전 건너편 올리브 산에서 예루살렘을 보며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로지 아버지만 아신다.”(마태 24,36) 하면서 하신 말씀이다. 종말과 사람의 아드님께서 오시는 날이 언제일지 “모른다” 하시는 인간 편에서의 이 무지無知와 함께 그때에는 혼란과 이를 생각지도 않는 무관심이 함께할 것이다.
복음의 문맥으로 보아 지상 생애를 마무리하시는 시점에서 예수님께서는 슬픔에 잠겨 이 말씀을 하신다. “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마태 24,37-39) 하시는 것처럼 인간이 노아 때처럼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재림의 날을 맞이할 것임을 예수님께서는 아신다.
2.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후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신”(창세 6,5-6) 나머지 “세상에 홍수를 일으켜, 하늘 아래 살아 숨 쉬는 모든 살덩어리들을 없애버리”(창세 6,17)셨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노아(의 홍수)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마태 24,37-38) 하고 말씀하시는 내용은 폭력적이고 비윤리적인 행태, 존엄성과 형제애를 상실한 인간의 모습을 목격하는 오늘날까지도 인간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인간의 선택이 온 세상을 가득 메우게 되었다는 사실을 “홍수”와 함께 실감 나게 듣는다. 또한 이러한 사태에 직면한 인간은 책임을 느끼고 경각심을 가져야 할 텐데도 “홍수가 닥쳐 모든 것을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마태 24,39ㄱ) 한 그대로 끝까지 이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 역시 보게 된다. 창세기의 인간은 홍수를 만났었지만, 오늘날의 인간은 지구라는 별 이곳저곳에서 엄청난 속도로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라는 말씀에 이어서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마태 24,39ㄴ) 하시면서 ‘주님의 날’이 그렇게 닥칠 때 인간이 부도덕하거나 비뚤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시기보다는 단지 인간의 무관심을 지적하신다. 인간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태어나고 자라며, 사랑하고 결혼하며, 먹고 마시며…그렇게 오늘을 살아간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금욕적인 삶의 프로그램을 제시하시지 않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탓하시지도 않는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οὐκ ἔγνωσαν, ouk égnosan, 영어로 knew nothing) 하시면서 준비하지 않았다 하시고, 무엇보다도 먼저 챙겨야 할 것들, 창조주의 뜻과 부르심에 응답해야만 하는 진정한 인간으로서 마땅히 알아야 할 필수적인 내용에 무관심했다는 사실을 지적하신다.
그러니까 하느님 편에서 인간을 벌하시고자 한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람의 아드님”의 오심 앞에 서게 된 인간의 처지를 계시하시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인간은 불행하게도 종말적 재앙에 관한 예고와 그 사건에만 집착하고, 어떻게 하면 그 재앙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인가 하는 사실에만 매달리면서 우리의 본질적인 무관심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이 종말을 어느 시점으로 연기하고 말고 할 수 없으며 지금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죽음을 통해서 건너가는 “저세상”에서 우리 각자는 영광중에 다시 오실 사람의 아드님 앞에 반드시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마태 24,40-41) 하신 것처럼 어떤 이는 다른 이보다 먼저 죽음을 맞이할 것이고, 또 다른 어떤 이는 다른 이보다 뒤에까지 남겨질 것이며, 그렇게 모든 것이 일어나고 소멸해갈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같은 시간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나 같은 기회가 있을 것도 아니지만, 누구에게나 종말은 있을 것이다. 이 또한 중요한 가르침이다. 하느님의 심판에 관한 거의 예언적인 가르침이다. 다른 이들과 사랑스러운 이웃으로 살아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이들과 이웃이 되지 못하였고 이웃을 아랑곳하지 않고 살면서 이기적인 사랑이자 자기만 아는 필라우티아(φιλαυτία, philautía, 영어로 self love, 참조. “자신과 돈만 사랑하고 허풍을 떨고 오만하며, 남을 중상하고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으며, 감사할 줄 모르고 하느님을 무시하며, 비정하고 매정하며, 남을 험담하고 절제할 줄 모르며, 난폭하고 선을 미워하고 배신하며, 무모하고 교만하며, 하느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면서 겉으로는 신심이 있는 체하여도 신심의 힘은 부정할 것”-2티모 3,2-5)를 먹고 살아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이들과의 분리가 있을 것이다.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처럼(참조. 묵시 2-3장) 주님께서 오시고, 주님의 오심은 매 순간 심판이다.
3. “깨어있어라”
“그러니 깨어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4,42) 하신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알아 깨어있어야 하며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24,43-44) 하신 대로 제자의 자세는 사람의 아드님께서 오신다는 것을 알고, 설령 그분께서 언제 오실지 모른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오실 것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깨어 기다린다. 이리저리 산만하게 왔다 갔다 하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며 인간적으로 착하게 잘 살아 주님께서 오실 때 언제라도 문을 열어드리려고 준비된 사람이 바로 주님의 제자이다.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오실 것이므로 우리를 놀라게도 하실 것이지만, 그 놀라움은 거대하고 충만한 기쁨의 놀라움일 것이다.
오늘 복음을 만나면서 한편에서 당혹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고백해야만 한다. 주님께서 영광중에 반드시 오신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데 주저하고, 시간의 끝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은연중에라도 못 본 척, 모르는 척 도외시하며,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뵙고자 하는 열망으로 불타오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는 오늘 복음 앞에서 당황할 수밖에 없다. 이냐시오 실로네(Ignazio Silone, 1900~1978년)는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기다리면서 버스 기다리듯이 한다』라고 말한다. 종말의 시기를 따지고 계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일’, ‘내일’ 그리고 ‘다음에’ ‘다음에’ 하다가 낭패를 보고야 마는 것이 인간의 우둔함이다.
아마도, 자기 자신의 삶과 주변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인생과 삶을 꼼꼼히 주의를 기울여 읽어내면서 흐트러지지 않고, 결국 나 자신의 삶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주님과의 만남을 위해 매일매일 이끌려가고 있음을 의식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렇게 저렇게 이 땅 위에서 걸식하며 방랑자로 한 줌 인생을 살지만,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 년, 근력이 좋아서야 팔십 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이오니 덧없이 지나가고, 우리는 나는 듯 가버리나이다.”(시편 89,10-최민순 역) 한 말씀 그대로이다. 그날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주님의 자비일 뿐이다.
복음에서 “깨어있어라” 하고, 제2독서인 로마서에서 바오로 사도 역시 우리가 “잠에서 깨어날 시간”(로마 13,11)이라 한다. “깨어있음”에 반대되는 개념인 “잠들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ὕπνος, hypnos이다. 이는 영어로 hypnotize가 되는데 ‘최면에 걸리다’는 뜻이 된다. 세상의 거짓 유혹에 취해 최면에 걸리는 것을 경계하라는 말씀이다. 그런 의미로 바오로 사도께서는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로마 13,13)-이 부분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과 관련된 유명한 구절이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내일 또 내일입니까? 왜 지금은 아닙니까? 어째서 바로 이 시각에 저의 추잡을 끝내지 않으십니까?”…집어 들었습니다. 폈습니다. 그리고 읽었습니다. 제 눈이 가서 꽂힌 첫 대목을 소리 없이 읽었습니다. ‘술상과 만취에도 말고, 잠자리와 음탕에도 말고, 다툼과 시비에도 말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에 빠져 육신을 돌보지 마시오.’(로마 13,13-14) 저는 더 읽을 마음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 구절의 끝에 이르자 순간적으로 마치 확신의 빛이 저의 마음에 부어지듯 의혹의 모든 어둠이 흩어져 버렸습니다.(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성염 역, 경세원, 2016년, 제8권 12.28-29)』
잠은 죽음의 연습이다. 그리스도인의 “깨어있음”은 공포와 두려움의 깨어있음이 아니고 열렬한 대망大望의 깨어있음이다. 그리스도인들의 “깨어있음”과 “준비”는 두려움에 의한 걱정스러운 깨어있음과 준비가 아니다. 오히려 이는 주님께서 어서 빨리 오시기를 기다리는 기쁨에 찬 희망의 “깨어있음”이요 “준비”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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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오실 때를 준비하라고 권고하십니다. “그러니 깨어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4,42). 깨어있는 것은 물리적으로 눈을 뜨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올바른 방향을 향해 자유로운 마음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기꺼이 은사를 받고 섬기려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깨어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나야 하는 잠은 무관심, 허영,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는 무능력, 소외되고 버림받았거나 병든 형제에 대해 책임지지 못하는 무능력입니다. 따라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은 깨어있어야 할 의무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활동, 그분의 놀라우심 앞에서 놀라는 것이고, 그분을 으뜸으로 삼는 것입니다. 깨어있음은 구체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우리의 이웃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요구하게 하는 것도 의미합니다. 그가 우리에게 도움을 청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하느님께서 항상 우리에게 행하시는 것처럼,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 먼저 손을 내미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교황 프란치스코, 삼종기도 훈화, 2019년 12월 1일, 바티칸 뉴스-한국어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