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3주일 ‘다’해(루카 21,5-19)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5-19)

전례력으로 한 해가 저물고, 다시 새로운 한 해가 대림절로 다가온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궁극적 기다림인 종말의 현실을 묵상한다. 전례 복음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마치시려는 시점, 곧 수난과 죽음을 앞둔 시점에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 쪽에 계시던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마태오나 마르코 등 공관 복음사가들은 오늘 복음의 내용을 공동으로 전한다. 복음의 ‘성전파괴의 예고’는 예수님 공생활의 마지막 설교인 셈이고, ‘재난의 시작’과 ‘예루살렘의 멸망’(20-24절) 역시 예루살렘을 두고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된다. 종말에 관한 예고는 한편에서 하느님의 심판이요, 또 다른 한편에서는 하느님의 구원이라는 점에서 양날 칼이다. 

복음의 오늘 장면으로부터 대략 50년쯤 전에 헤로데에 의해 이미 재건축을 시작하였던 예루살렘 성전은 호화로운 건축물이 되었고, 당시 예루살렘을 찾는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당시 예루살렘은 수도로서 이 성전과 함께 여느 도시와 달리 “대왕님의 도성”(시편 48,3),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마태 5,35)이 되었으며, 주님을 포함하여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유다인의 목적지이자 바빌로니아로부터 로마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의 목적지였으며, 유다인의 거점이었고, 그 안의 성전은 하느님 현존의 셰키나Shekinah(거처居處)였다. 누구나 ‘예루살렘의 찬란함을 보지 않은 사람은 진정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고, 그 거룩함을 보지 못한 자는 장엄 그 자체를 보지 못한 자다.’하고 말하던 것처럼 성전은 그 자체로 빛나는 표징이었다.

루카 복음사가는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가 “성전”에서 분향을 하는 것으로 복음을 시작한다. 루카복음에서 “성전”은 중요한 곳으로서 예수님께서 봉헌되신 곳이고(2,22-24), 시메온과 한나가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한 곳(2,25-39)이며, 소년 예수를 사흘 만에 다시 찾은 곳일 뿐 아니라(2,41-52), 성전이 있는 그 도성 예루살렘을 보고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곳이고(19,41-44),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장사꾼들을 쫓아내신 곳이며(19,45-48), 오늘 복음의 대목에 이르러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가 이루어진 곳이다. ※더 읽기: 인내(忍, 마크로쑤미아) https://benjikim.com/?p=13981 

1. “성전…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요한 18,1) “올리브 산”(마태 21,1;24,3;26,3 등) 쪽에서 성전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그때 (제자들)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5-6) 엄중한 신성모독처럼 들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훗날 유다인들의 지도자 중 한 사람에 의해서 최고 의회(산헤드린)에 예수님을 고발하는 구실이 된다.(참조. 마르 14,58 마태 26,61)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성전의 아름다움을 부정하려 하셨다거나 파괴를 바라셨던 것이 아니라 단지 제자들에게 경고하시기 위함이었다. 성전이 하느님의 집이며 위풍당당한 집이라 할지라도 그 성전 자체로 믿음의 대상이나 담보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불행하게도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그 자체로 많은 유다인들에게 이미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유다인들이 성전에 간 것은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하느님이 아닌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낸다는 집 자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말았던 것이다.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이다!’ 하는 거짓된 말을 믿지 마라.…너희는…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 안에 들어와 내 앞에 서서, ‘우리는 구원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이런 역겨운 짓들이나 하는 주제에! 너희에게는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이 강도들의 소굴로 보이느냐?…” “너희 길과 행실을 고쳐라” 하고 이미 수 세기 전 성전에서 외치던 예레미야의 심정으로(참조. 예레 7,1-15)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지당하고 합당한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의 통교를 위한 수단이나 도구를 우상 숭배의 장소나 구원의 거짓 보증으로 변형하여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할 수 있는 위험을 지적하시면서 이미 오래전 예언자들이 수도 없이 외친 바를 시종일관 강조하신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성전 자체가 파괴되어 허물어질 것을 미리 내다보시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의 표징이 될 수 없음을 지적하신다.

2. “그런 일이 언제…조심하여라…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무서워하지 마라”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놀라면서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루카 21,7) 제자들은 의도하였든 그렇지 않았든 “언제”라고 하면서 ‘주님의 날’(히브리말-욤 아도나이, יום יהוה, jom ’Adonaj, 라틴어-Dies Domini, *참조-1998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교서), 곧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에 관한 질문을 하는 셈이다.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인 시간으로 예언하지 않으시면서 다가오는 ‘그 날’을 준비해야 한다고 경고하시듯이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루카 21,8-9) 하고 경고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역사적으로 늘 누군가가 지정하려고 시도하면서 거짓 예언자 흉내를 내고 신앙인들 사이에 물의를 일으키곤 했던 날짜나 표징이 되는 구체적 내용을 밝히시지 않는다. 깨어있으면서 시대와 역사의 표징을 깊이 숙고하여 읽어내야 하고, 주님의 약속을 거듭 기억하면서 그 약속이 온전히 성취될 날을 기다리라는 듯이 말씀하신다.

사람들은 항상 이 세상의 역사와 시간의 끝이 있기나 할 것인가, 있다면 그때가 언제일 것인가, 설마 나의 일생에야 그때가 올 것인가 하는 숨겨진 내심의 의문들, 혹은 애써 피하고 싶은 의문들 속에서 살아간다. 세상의 끝에 대한 궁금증을 물으면서, 동시에 우리 인생의 끝은 분명히 있고야 말 것이라는 두려움 담긴 분명한 사실을 피하면서, 그렇게 사는 것이 인간이다. 현대인들은 ‘현재만을 고집하면서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현재는 ‘이미 오신(과거) 주님앞으로 오실(미래) 주님을 모시고 사는현재의 삶이어야만 한다. 사람들은 종말의 “때”에 관하여 알기를 원하지만, 결국 이는 불확실하다. 종말이 온다는 것을 확실히 알지만, 언제인지는 모른다. 종말을 분명히 믿지만, 종말의 날짜와 시간은 믿지 않는다. 종말이 ‘인간들의 날이 되려 할 때 이는 참으로 재앙이다.

예수님의 첫 번째 경고는 그리스도의 이름 사칭詐稱, 곧 ‘에고 에이미(Εγώ εἰμι, Egó eimi)’ 하신, 하느님의 이름 사칭으로서 오직 주님께만 속한 권위와 우선권의 거짓 행세이다. 세례자 요한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고백하였듯이(참조. 요한 1,20-21) 예수님의 참다운 제자는 행여 ‘나다!’ 하는 말을 할세라 삼가면서 ‘나는 아니요!’를 거듭 외치고,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만을 가리키는 표시가 되어야 한다.(참조. 요한 1,23-36) 불행스럽게도 인간은 늘 믿음을 두기 위한 우상, 뭔가를 보장해 줄 것만 같은 일종의 성전을 찾는다. 역사는 슬프게도 주님을 찾는다면서 주님께 와서 주님의 일꾼으로 열성을 다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주님의 반대편에 서 있게 되는 사람들, 인간적인 어떤 제도나 전례, 신학적, 법적, 정치적 장치 같은 것을 만들어 주님께서 이를 원하신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그 자체에 함몰되면서 참된 신앙을 거스르는 추문과 모순, 자가당착에 빠지고 마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오너라.…내 뒤를 따라…”(마태 4,19;16,24;19,21 등) 하신다. ‘뒤’는 영어의 back, behind, after 등에 해당하는 ‘오피소(ὀπίσω, opisó)’라는 중요한 말이다. 예수님 몸소 가리키시고 복음이 증언한 ‘예수님 뒤’만 따라가야 한다. 루카 복음사가가 이 복음을 기록했을 기원후 80년경 이미 수도 없이 많은 거짓 예언자와 사기꾼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참조. 사도 5,36-37;21,38)

예수님께서는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루카 21,10-13) 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적으로 늘 있었던 전쟁, 혁명, 지진, 기근, 예루살렘과 같은 도시들의 함락과 침공…과 이 세상이 끝나게 될 최종적인 재림을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시대부터 이미 교회 초기부터 교회가 가혹한 박해를 살아왔다는 사실도 고려해야만 한다.(참고. 사도 4,1-31) 

예수님께서 몸소 죽음의 처형을 당하시기까지 박해를 받으셨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수많은 고초를 겪어야만 했으니, 이는 소위 종교적인 지도자들이나 권위를 가졌다고 하는 이들이 복음의 기쁜 소식, 율법의 최종적인 지향점, 유다 자손들이 져야 하는 숙명, 성전의 궁극적인 존재 이유와 같은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정치적 권력 체계가 예수님께서 살아내시고 설파하신 정의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오늘의 현실에서도 성실한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인 교회에 “손을 대어 박해하는” 이들이 많다. 비록 내놓고 종교적 탄압과 박해를 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조직적으로 교회를 부서뜨리려는 은밀한 세력이 존재하고, 그리스도교적인 문화의 박해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것이 사실이다.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가치가 중요하다면서, 우리 신앙인의 삶은 현실도피일 뿐이라면서,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고 미워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지만 박해는 다른 면에서 그리스도를 “증언(증거)”할 기회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루카 6,26) 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고, 그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루카 6,22 참조. 마태 5,11) 하신 분이 우리 주님이시라는 것을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루카 22,25) 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일상을 넘어 못된 종교적인 권위 앞에 체포되고 재판받으며, 세속의 권세 앞에 끌려가는 때와 장소가 있을 것이고, 감옥에 갇히고 모욕을 받는 때가 있을 것이다. 

2세기의 성 테르툴리아노는 『순교자의 피는 씨앗(The blood of the martyrs is seed.)』이라 하였고, 3세기의 주교인 성 치프리아노는 『박해가 닥쳐올 때 하느님의 군사들은 시험에 들게 됩니다. 그리고 순교자들에게는 하늘이 열립니다. 우리는 그저 평화만을 생각하거나 싸움에 지기 위하여 하느님의 군사가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주님께서 우리 싸움의 맨 선봉에 서십니다.』 하였으며, 4세기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순교자들은 압제당하고, 포박당하며, 벌을 받고, 매달리며, 불에 태워지고, 잘려지며, 학살당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수는 계속 늘어만 갑니다.』라고 하였다. 증언자이고 증거자이신 순교자들은 박해를 당하면서도 그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원수인 그들을 사랑하였다. 순교자들은 그들의 극심한 고통과 죽음 속에서도 복음의 진리, 곧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아들인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사실(참고. 요한 3,16)을 증언하였다. 오늘 우리들이 피에 젖은(wet) 순교를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일상생활 안에서 건조한(dry) 순교를 할 수는 있다. 이는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는 일, 고통 속에서도 기뻐하는 일, 미움과 적대감을 인내하는 일, 내게 상처를 입히는 사람들을 용서하는 일, 희망도 도움의 손길도 없이 살아가는 이들에게 평안과 공감을 주는 일 등일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증언증거”라는 한마디 말로 요약이 가능하다.

3.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환난, 역경,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 투옥, 심지어 죽음까지도…그 무엇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없다”(참조. 로마 8,35)라는 사실을 안다.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루카 21,14-15) 하셨으니 우리 시련의 때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세상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할 “언변과 지혜”를 주실 것임을 안다.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루카 21,16-18) 하셨으니 우리는 그 무엇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 하신 말씀은 우리 주 예수님의 약속이니 우리는 계속 주님을 믿어 견딘다. ‘견딤’은 그리스도인의 덕 중의 덕이라고 할 수 있는 ‘우포모네(ὑπομονή, hupomoné, 영어로는 remaining, to bear up under)’, 참아내는 것이며, 항구함이고, 머무름이며, 인내이다.(참조. 루카 8,15;21,19 로마 2,7;5,3 2코린 1,6 2코린 6,4 2티모 3,10 티토 2,2 야고 1,4 2베드 1,6 묵시 1,9;13,10;14,12) “인내”는 “이 세상에서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요한 13,1) 주님의 모범을 따라 실망하지 않고, 환난과 어려움 속에 흔들리지 않으며, 세월이 흘러가도 끝까지 남아 있는 것이고, 함께 있는 이를 붙들어 주며, “끝까지 견뎌내는”(마태 10,22;24,13) 능력이다. 

실로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한순간의 경험이나 인생의 한 계절로서가 아니라 인생 전체를 끝까지 받아들여 사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오늘 복음은 세상의 종말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지금, 오늘 여기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형제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끈기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사실 우리는 끝까지 견디어 낸 이들을 행복하다고 합니다.”(야고 5,10-11) 한 그대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일상은 힘든 고난의 연속이어도 구원을 얻으려는 항구함으로행복한 이들의 날들이다. 아멘!

One thought on “연중 제33주일 ‘다’해(루카 21,5-19)

  1. 건조한 순교를 위하여.
    제가
    지금
    경험하는 고난이 헛되지
    않도록 일깨움을 주시는 말씀이네요.
    감사합니다.
    기쁘게 인내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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