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캐년

미국 생활을 청산하기 전, 나를 오랫동안 잘 아시는 미국 신부님께 내가 미국을 떠나기 전 꼭 했으면 좋을 것 같은 것이 무엇일까를 여쭤보았다. 신부님의 망설임없는 대답은 ‘그랜드 캐년 방문’ 권고였다. 그래서 설레임 속에 말로만 듣던 그랜드 캐년으로 향했다. 캐년으로 들어서는 길에 머리에 떠오른 것은 문득 가톨릭성가 2번이었다. 그랜드 캐년 앞에 서면 그 노래를 불러야만 할 것 같았다. 우리가 잘 아는 가톨릭성가 2번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1,2절은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저 수풀 속 산길을 홀로 가며 아름다운 새소리 들을 때 산 위에서 웅장한 경치 볼 때 냇가에서 미풍에 접할 때 …… (후렴) 내 영혼 주를 찬양하리니 주 하느님 크시도다. 내 영혼 주를 찬양하리니 크시도다 주 하느님」

미국에만 있는 그랜드 캐년 앞에 서면 그 노래가 자연스레 나와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아주 가까이서 바라다 보다가 떠나야 할 그랜드 캐년, 경비행기로 전체를 조망하는 그랜드 캐년 앞에서도 왠지 선뜻 그 성가 2번은 흥얼거려지지 않았다. 자연의 위대함 앞에 선 왜소한 인간의 말 없음표 때문만은 결코 아니었다. 아마도, 사전에 인터넷을 통해 사진과 영상 등으로 너무도 많이 학습된 정보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그랜드 캐년은 말로만 전해 듣던 장엄함 앞에 사전 정보 없이 어느 순간 덜컥 서서 내 몸과 눈으로 마주쳐야만 마땅했다.

나의 그랜드 캐년 체험은 자연의 경이로움 앞에 선 개인의 한 사례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지만 세상이 변했고, 예전 같지 않다는 것에는 많은 이가 공감한다. 옛날에는 자연과 인간, 그리고 신(神)이 긴밀하게 연결된 신비로운 질서 안에 세상이 있었으나 과학의 발달, 합리적 사고, 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세상 모든 이치는 과학적 논리로 설명할 수 있고, 이성으로 풀어낼 수 있으며, 세상 어느 구석일지라도 가만히 앉아서 속속들이 선명하게 보고 알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이제 세상은 계산과 예측을 할 수 있는 세상이고, 통제가 가능한 세상이다. 이해할 수 없는 세상, 경이로운 세상, 신비로운 세상, 합리적 가치보다 초월적 가치가 우선하던 세상, 하느님의 현존을 훨씬 더 체감하며 살던 세상, 그렇게 ‘주 하느님 지으신 세상’은 그저 나이 든 이들의 ‘옛날’과 ‘왕년(往年)’에 대한 향수나 시대 한탄 정도로 전락하고 말았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생각을 한 이들은 유사 이래 인간의 역사 안에 늘 있어 왔다.

막스 베버의 엔차우베룽(Entzauberung)

베버는 ‘Entzauberung der Welt(세계의 탈주술화 / 탈마법화)’라는 개념을 말한다: 그는 “우리는 더 이상 마법과 신비의 세계에 살지 않는다. 모든 것이 계산되고, 예측되고, 통제되는 과정으로 세상이 신비로움에서 분리되고 말았다.(요약)”(Max Weber, <Science as a Vocation>, 강연 1917; 여러 판본)라고 안타까워 했다. 독일의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년)가 사용한 ‘엔차우베룽(Entzauberung)’이라는 말은 영어로 ‘disenchantment’라고 곧잘 번역되고, 우리말로는 ‘탈(脫)주술’ 혹은 ‘탈(脫)매혹’, ‘탈(脫)마법’ 정도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신비스러움과 초월성을 잃고, 합리화와 도구적 이성이 지배하게 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는 종교적·초월적 의미가 사회에서 점점 밀려나게 된 과정을 단순히 “진보”로 보지 않았다. 그는 탈주술화의 시대에 들어서 인간이 잃어버린 것들을 깊이 우려했다. 그는 합리화가 세상을 효율적으로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그만큼 인간의 삶에서 의미, 신비, 초월, 가치는 사라졌고, 그 결과, 인간은 “도구적 이성”의 세계에서 “의미 상실”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개탄한다.

프리드리히 실러의 ‘신을 잃어버린 자연’

막스 베버보다 한 세기 앞서, 이와 유사한 통찰을 남기며 그에게 영감을 주었을 법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프리드리히 실러(Friedrich Schiller, 1759~1805년)이다. 그는 1788년에 발표한 시 <그리스의 신들(Die Götter Griechenlands)>에서, 고대 그리스의 자연과 신비가 사라지고 과학적·기계적 세계관이 지배하게 된 근대적 감각을 비판했다. 실러는 이 시에서 신성(神聖)과 마법이 제거된, 이른바 ‘신이 제거된 자연’(entgötterte Natur, the godless Nature)을 노래한다. 즉, 자연이 더 이상 신성하거나 신비로운 존재로 인식되지 않고, 단지 물리 법칙에 종속된 ‘무신(無神)의 자연’으로 전락한 현실을 탄식한 것이다.

실러는 이렇게 노래한다: 「그녀가 베푸는 즐거움을 깨닫지 못하고, 그녀의 영광에 결코 감탄하지 않으며, 그녀를 이끄는 정신을 인식하지 못한다. 나의 행복을 통해서도 결코 축복받지 않는다. 예술가의 영예마저 마음으로 느끼지 못하고, 시계추의 무감각한 진동처럼, 노예처럼 중력의 법칙에 복종한다 — 신(神)을 잃은 자연이여!」 이어서 그는 잃어버린 세계를 향해 깊은 그리움을 토로한다.

「너희가 미소 짓는 대지를 다스렸고, 황홀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행복한 민족들을 이끌던, 우화의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존재들이여! 너희의 복된 예배가 세상을 미소 짓게 하던 그날은 얼마나 달랐던가! … 아름다운 세상이여, 어디로 가 버렸느냐? 오, 자연의 꽃다운 젊음이여, 다시 돌아오라! 이제는 오직 노래의 요정들이 사는 시의 영역에서만 너의 옛날 사랑스러운 자취가 남아 있구나. 평원은 슬픔에 잠기고, 어떤 신성도 나의 그리운 시선을 맞이하지 않는다. 이제는 단지 그림자만이 남았을 뿐, 저 밝고 살아 있던 형상들은 사라졌도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며, 밝고 아름다운 모든 것을 함께 가져갔도다 — 모든 빛깔, 모든 생생한 음향을. 그리고 이제 남은 것은 오직 ‘영혼 없는 세상’일 뿐이로다.」

실러는 이렇게 “신을 잃은 자연” 속에서 인간의 상실감을 노래하며, 신성과 조화, 아름다움이 공존하던 세계가 사라진 시대의 황량함을 깊이 성찰했다.

로드 바이런의 우파스 나무

로드 바이런(Lord Byron, 1788~1824년)은 실러가 말한 ‘신을 잃어버린 자연과 세상’을 살펴보면서, 1812년에서 1818년 사이에 출판된 그의 시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Childe Harold’s Pilgrimage)>에서 탈마법화의 본질과 영향에 대해 더 개인적이고 훨씬 더 어두운 견해를 제시한다:

「세월은 팔다리의 활력처럼 마음에서 불을 훔쳐 간다. 그리고 삶이라는 마법의 잔은 가장자리 근처에서만 반짝일 뿐이다. 나 자신이나 타인에게 희망이 없다. 우리의 삶은 거짓된 본성이다. 그것은 사물의 조화 속에 있지 않다. 그것은 그 뿌리가 땅이고 그 잎이 하늘인 모든 것을 죽이는 우파스 나무와 같아서, 그 독(毒) 이슬을 인류에게 뿌린다. 우리는 젊음으로부터 시들어간다. 우리는 얻을 수 없는 선(善)에 대한 풀리지 않는 갈증으로 헐떡인다. 처음부터 끝까지 환영에 유혹된다. 사랑, 명성, 야망, 탐욕 들 – 그저 모두 헛되고, 모두 해롭다 – 죽음의 연기 속으로 사라지는 수많은 이름의 유성 중 하나일 뿐이다.」

*바이런은 1812년에 발표한 시 <Childe Harold’s Pilgrimage> 제4편에서 ‘all-blasting upas’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우파스나무(Upas tree)’ 또는 ‘안티아리스 톡시카리아(Antiaris toxicaria)’를 가리킨다. 이 나무는 자바섬과 인도네시아 지역에서 자생하는데, 치명적인 독(毒)을 지닌 수액이 있다고 알려진다. 18세기 유럽에서 탐험가들이 “이 나무 주변 수 마일 내에서는 아무 생명도 살 수 없다”는 과장된 이야기를 퍼뜨리면서, ‘upas tree’는 “모든 것을 죽이는 나무”, 즉 “죽음의 나무”라는 전설적 상징이 되었다. Byron이 말한 “all-blasting upas”는 문자 그대로는 “모든 것을 불태우고 죽이는 독나무”라는 뜻이다.

슬프게도, 비극적이게도, 오늘날 많은 사람은 바이런이 표현한 절망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삶, 세상, 그리고 미래에 대한 절망 말이다. 결혼이 깨지는 것은 일상이 된지 오래고, 가족 관계, 우정, 사업 파트너십은 무너지라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쉽게 우리 곁을 떠나고 직업은 실망만을 안겨줄 뿐 결코 만족할 수 없는 목구멍이다. 어떤 사람들에게 삶은 그저 돈, 소유물, 지위, 권력, 쾌락 등 끝없이 이어지는 무의미한 추구만으로 남는다. 그중 어느 것도 깊고 지속적인 방식으로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삶이라는 잔이 마법에 걸린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단지 아주 잠깐 동안, 젊음, 힘, 건강, 어쩌면 희망이 절정에 달했을 때 “가장자리 근처에서만” 그럴 뿐이다. 바이런에 따를 때, “삶이라는 마법의 잔”은 가슴 아픈 환상이다. 삶은 극적이지만 기만적으로 아주 잠시 반짝이다가 결국 우리 모두를 차지하고마는 죽음 말고는 그 어느 곳으로도 이끌지 않는 “유성”이다.

절망…, 그래도 삶은 경이로움

무의미하고 희망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삶에 대한 반응으로, 어떤 사람들은 우울증에 걸리고 어떤 사람들은 불안해 한다. 어떤 사람들은 불안과 우울증을 모두 겪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느끼는 고통과 공허함을 지우기 위해 술이나 마약에 의존한다. 어떤 사람들은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반출생주의 운동), 심지어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음으로써 자발적인 인류 멸종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깊은 절망이 폭력·자살·중독 등 심각한 결과와 연계되기도 한다.(관련 정신건강 연구 참조 필요)

그래도, 그래도 아닐 것이다. 삶과 세상은 여전히 마법에 걸려 있을 것이다. 삶은 여전히 아름답고, 신비로우며, 끝없이 흥미롭고 매력적이며 경이로움으로 가득할 것이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우리는 이 진실을 부정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 우리 스스로 세상을 탈마법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면, 현재의 상황에 대해 우리는 우리 자신 외에 그 누구도 탓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주 전체가 무작위적인 물질과 에너지의 소용돌이에 불과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해 온갖 노력으로 최선을 다해 왔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잊었거나 또는 의도적으로 부정했다. 우리가 우리의 영혼 자체를 부정하면서, 세상이 우리에게 “영혼 없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 그리 놀랄 만한 일일까? 하느님을 애써 부정하면서 하느님 없는 세상이 되었다고 개탄한다는 것 자체가 우습지 않을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유한한 피조물이면서도 우리의 욕망은 여전히 무한하다. 유한한 세상은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다. 정확히 그 욕망이 무한한 것은 그 욕망이 가장 깊은 수준에서 무한한 선(善), 곧 하느님을 향한 욕망이기 때문이다. 하느님보다 덜한 것은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철학자 로저 스크러턴(Roger Scruton, 1944~2020년)이 주장했듯이, 어쩌면 하느님만이 우리의 “형이상학적 곤경(metaphysical predicament)”에 대한 유일하고도 가능한 해결책이다. 하느님이 없다면, “삶이라는 마법의 잔”은 기껏해야 “가장자리 근처에서만 반짝일 뿐”이다. 하느님과 함께여야만, 그 잔은 위에서 아래까지 반짝이며 넘치도록 채워질 것이다.

※Richard Clements 가 wordonfire.org에 2025년 10월 30일에 기고한 <The Disenchantment Dilemma for Today’s Culture>라는 글을 읽고, 편집하고 가필하여 재구성하여 쓴 글이다. 원문은 다음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wordonfire.org/articles/the-disenchantment-dilemma-for-todays-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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