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2주일 ‘가’해(마태 3,1-12)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마태 3,8)

대림 제2주일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만나도록 인도한다. 복음서가 전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은 ‘선구자’인데, 이는 자기 “뒤에 오시는 분”(마태 3,11), 곧 메시아에 앞서 와서 이 세상에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거의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참조. 마태 4,19;10,38;16,24) 제자처럼 비치는데도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비교해 세례자 요한이 더 큰 힘을 지니고 있으며, 훨씬 더 급진적인 사명을 수행하는 것처럼 말씀하시기도 한다.(참조. 마태 11,11-12 루카 7,33) 세례자 요한이 “그분(예수님)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하고 말한 것처럼 그는 스스로 작아질 줄 알고 다른 이에게 양보할 줄 아는 이다.

1.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유다 광야에서회개하여라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이렇게 선포하였다.”(마태 3,1) 마태오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에 관해 언급하는 첫 구절이다. 세례자 요한이 말 그대로 느닷없이 나타난다. 세례자 요한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시작이다. “그 무렵”은 문맥상으로 보아 아기 예수가 이집트에서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돌아와 정착하는 때처럼 보이지만, 어떤 특정한 시점時點을 나타내던 표현 방법(참조. 창세 38,1 탈출 2,11.23 이사 38,1)처럼 결정적인 때로서 구약의 예언자들이 언급하는(즈카 8,23 예레 38,28-39장 첫줄, 요엘 4,1) “그날과 그때”, 메시아의 때, 시간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때, 그리고 은유와 신학적 의미를 담은그때’이다.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이사 40,3)’”(마태 3,3) 하고 기록된 대로 세례자 요한의 등장은 성경 기록의 성취이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세례자 요한이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라고 “선포하였다.” 하면서 “선포”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마르 1,4) 하면서 세례가 “선포”를 위한 것이라는 듯이 마르코 복음사가가 기록한 것처럼 마태오 역시 세례자 요한이 세례자라기보다는 말씀의 사람임을 더 강조한다.

이처럼 마태오는 말씀의 선포와 설교에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한다. 마태오에게 세례자 요한은 한 예언자요, 말씀의 사람이며, 말씀을 엄격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요한은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마태 3,4)라고 하면서, 요한의 복장이 예언자들처럼 단순하고 거칠었으며 그의 음식은 본질적이고 가난한 이의 것으로서 말씀의 수행자다운 삶이었다고 알려준다. 거친 광야로 나가 본질을 추구하고자 하는 이들, 고독과 침묵 안에서 가르침을 얻으려는 이들, 자신의 몸을 위해서는 최소의 것만을 취하려는 이들은 말씀을 위해 살고자 하므로 인간적인 삶을 위해서는 본질적인 것만을 구한다.

청빈과 엄격한 삶으로 사는 이들의 말은 용감하고 힘이 있으며 거침이 없다. 가난과 금욕이 용기와 자유를 준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세례자 요한의 특징은 용감함이다. 용감함은 시작하는 용기이며, 시작의 덕德은 생명의 위험까지도 감수한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선택을 완수하기 위해 용감하게 끝까지 자신을 밀어붙인다. 그는 과감하게 시작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불투명함 속에서도 시작한 것을 저항하고 견디면서 계속 나아가는 용기를 발휘한다.

일상의 용기도 있고 순간적인 용기가 있지만, 이런 용기는 꾸준한 지속적 용기와는 관련이 없다. 세례자 요한은 고통스럽지만 값진 선택, 내쳐지는 소외의 선택, 광야로 나가는 선택을 한다. 그는 아버지가 성전에서 직무를 수행하는 사제 가문이었으므로(참조. 루카 1,5-25) 괜찮게 살 수 있었음에도 더욱 중요하고도 본질적인 것을 찾아 광야로 나아간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뒤로하고 떠났는지 분명히 알 수 있는 선택을 위해 자신을 던진다. 꿈란Qumran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예루살렘을 뒤로하고 『불의한 자들과 멀리 떨어지기 위해 광야로 들어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주님의 길을 준비하면서 하느님의 “길을 곧게 내기” 위해』 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에 따른 프로그램에 따라 치열하게 살았던 것처럼 같은 지역에서 세례자 요한도 복음을 준비한다.

용기 있는 모든 결정이 늘 그러하듯이 세례자 요한의 결정도 암흑과 어둠, 캄캄한 밤중에 이루어졌지만, 예루살렘과 온 유다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마태 3,5-6) 한 것처럼 많은 이들에게 빛이 되고, 많은 이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비추는 강력한 신앙의 빛이 된다. 세례자 요한의 용기가 이렇게 많은 이들 가운데에서만 빛을 발한 것은 아니다. “헤로데는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붙잡아 묶어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요한이 헤로데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마태 14,3-4) 한 것처럼 그가 고독 속에 있을 때도, 힘 있는 권력자 앞에 있을 때도,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될 때까지도 빛을 발한다.

세례자 요한은 침묵 속에서 자신의 선택이 무르익어 단순하고도 분명한 말로 ‘확신에 차 절로 터져 나오는 말’(파레시아, παρρησία, parresia, 영어로 free speech, confidence)이 되게 한다. 세례자 요한은 실로 ‘말의 순교자’이다.(그의 출생 전에 아버지도 말을 잃는다) 이런 부분에서도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서 드러내실 ‘파레시아’와 용기의 길을 마련해드린 셈이다. 예수님의 솔직하고도 자유로운 말씀을 듣는 이들이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요한 7,46) 하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말의 순교자’ 세례자 요한에게는 자기가 했던 ‘말’ 때문에 그를 죽이는 이가 있다. 마르코 복음사가가 훌륭하게 기록해준 것처럼 헤로데는 잔치를 벌여 술에 취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젊은 소녀 앞에서 내뱉은 말을 차마 거두어들일 수가 없어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라고 명령한다.(참조. 마르 6,17-29) 세례자 요한은 실로 자기 “뒤에 오실 분”의 길을 준비할 뿐만 아니라, 비극적인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기의 온 생애가 메시아께서 따르실 궤적이 되고자 한다. 그렇게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삶 안에서 구약과 신약을 통합한다.

2. “독사의 자식들아

세례자 요한의 용기와 ‘파레시아’는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마태 3,7ㄱ)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마태 3,7ㄴ-8) 하는 장면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세례자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오지만 내적인 마음의 회심과 함께 그 회심의 표시로 받는 외적인 세례의 모습이 일치하지 않는 이들의 가식을 구별한다. 세례자 요한의 말은 직설적이고 인상적이다. 세례자 요한이 바리사이와 사두가이의 마음속 깊은 비밀을 어떻게 알아낸 것일까? 세례자 요한은 복음서가 여러 번 증언하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신바 있는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생각을 읽어내며 사람들의 마음속 생각을 밖으로 드러내게 하는 은총을 받은 예언자로서 행동하고 말한다.

세례자 요한이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들에게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마태 3,9)라고 한 말은 우리 인간이 지닌 ‘자기 정당화(합리화)’라는 사고의 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세례자 요한은 조상을 잘 둔 조상 덕에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안이하게 생각하면서 실제로는 회개하지 않고 회개의 행실을 보이지 않는 태도를 지적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다시 한번 시작한다.’라는 “회개를 사는 존재들이다. 니싸의 성 그레고리오(335?~395년)의 말씀에 따르면 『시작의, 시작 안에서, 결코 끝이 없는 시작을 통하여 사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진실한 “회개”는 “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살아 계신 참 하느님을 섬기게 되는 것”(1테살 1,9)이고, “우상을 조심”(1요한 5,21)하는 것이다. “회개”는 하느님을 위하여 내 안에 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자유를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나의 이기적이고 못된 습관을 타파하는 것이다. “회개”는 오늘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따라 “인내와 위로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뜻에 따라 서로 뜻을 같이하게 하시어 한 마음 한 목소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로마 15,5-6)이다. 그러기 위해 오직 진심으로 형제들을 사랑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약점을 참아주시듯이 형제들의 약점을 견뎌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일”이다.(※더 읽기. 회개(메타노이아, μετανοία): https://benjikim.com/?p=16283)

회개한 사람의 열매로서 아주 작은 애덕도 실천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태도는 의외로 우리 삶의 일상에 깊이 파고들어 와 있다. 이는 실제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정직하지 않고 실제적이지 않은 까닭이다. 나에 대한 나의 이해가 객관적인 나의 이해와 맞지 않아서이다.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정직하게 보지 않고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이고 다른 이들을 속인다. ‘환상적’이라는 말로 적절하게 포장하여 우리의 인간관계와 인생을 하나의 게임이요 ‘루두스’(라틴어 ludus, 그리스말로 파히니디아-Παιχνίδια로 옮기기도 하며 영어로는 playful love, 곧 유희적 사랑을 가리킴)가 되게 하고 만다.(※참조. 사랑의 형태 https://benjikim.com/?p=3008)

3.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세례자 요한은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마태 3,10) 하면서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이들의 마음속 ‘자기 합리화’에 대한 생각이 터져 나오도록 내려친다. 어두운 땅속 나무뿌리에 꽂힌 종말론적 심판을 나타내는 도끼의 표상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에게 내려치는 말씀의 도끼가 되어 그들의 못된 뿌리를 끊어내는 쌍날칼이 된다. 세례자 요한의 이 말을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질책하시면서 “너희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지옥의 판결을 어떻게 피하려느냐?”(마태 23,33) 하고 말씀하신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엄한 심판관이 아니라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마태 11,29) 메시아께서 오시겠지만, 그 메시아께서도 강하고 예리한 말씀으로 엄하면서도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마태 10,26 참조. 마태 13,35)이라 말씀하실 것이다. 심판관이 정죄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이 심판을 가져오는 말씀, 진리를 이루는 말씀, 거짓과 자기 합리화의 틀을 깨트리는 말씀이 될 것이다.

진리가 진리로서 효력을 지니도록 하기 위해서는 세례를 받는 이들이 물에 잠겨 죽는 것처럼 자신의 마음을 올바로 읽어내고 자신의 죄를 인식하여 죄를 물에 잠기도록 하여 죄를 죽이고 진리에 사는 회개가 필요하다. 자기 합리화에 익숙한 이들은 참다운 의로움이 자신에게서 나오는 줄 알고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모른다.

오늘 복음의 끝에 세례자 요한은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태 3,11) 한다. 요한이 물로 세례를 주면서 ‘나의 물 세례를 거부하면 하느님의 불 세례로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내 뒤에 오시는 분,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란 당연히 예수님이다. 요한은 감옥에 갇혔을 때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마태 11,2) 하고 물었으며, 예수님을 두고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자기보다 앞서신 분”(요한 1,15)이라 한다. 요한은 스스로 “파견된 사람”이며, 자신의 사명이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는 것이고, 예수님이 신랑이시다면 자신은 “신랑의 친구”이고(참조. 요한 3,25-30),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라는 노예의 행동으로 자신을 묘사하면서 그분 앞에 선 자신을 노예보다 더 못한 존재라 하고, 자신이 주인공이 아님을 밝힌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데려가고자 애쓰며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손가락 같은 사람’(※참조. 세례자 요한의 손가락 https://benjikim.com/?p=8121)이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독사의 자식들을 아브라함의 자식으로 만드실 수 있고, 늑대를 어린 양으로 바꾸실 수 있으며, 쭉정이마저도 알곡으로 변화시키실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이시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이라 한다. 세례나 불은 정화하시는 하느님의 행위를 상징한다.(참조. 말라 3,2 즈카 13,9 1베드 1,7) 그러나 여기 이 구절에서 “불”은 “하느님의 진노”(7절)를 가리킨다고도 하겠다. 예수님의 세례를 성령의 세례와 불의 세례로 나누어 이해할 수도 있다. 성령께서는 온갖 불의와 증오를 집어삼키시고 정화하실 불이시다. 하느님의 불은 우리를 정화하고 깨끗하게 하시며 우리 안에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끝으로 세례자 요한은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마태 3,12) 한다. 예수님 몸소 추수하실 것이다. “키”는 나무 연장이다. 도리깨 같은 것으로 곡식을 두드린 다음 바람을 등지고 서서 이 연장으로 곡식을 위로 던져 낱알만 남기고 쭉정이는 날려 보낸 다음 날아간 쭉정이를 모아 불에 태워 타작마당을 청소한다. 좋은 곡식과 나쁜 곡식이 가려지는 “수확”은 세상 종말에 이루어지는 심판의 표징이다.(참조. 이사 27,12-13 요엘 4,12-13 묵시 14,14-16 마태 13,30) 그러나 하느님의 심판은 인간들의 심판과는 다를 뿐만 아니라 정반대이기까지 하다. 인간들의 심판정인 법정이 해당 인간의 죄상과 죄의 유무를 낱낱이 따지거나 변론하는 것이라면, 하느님의 심판정선행과 애덕을 따지는 곳이다. 매일 각자가 선과 악 사이에서 어느 것을 선택했는지로 판정받는 곳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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