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리는 대림절 동안 우리를 동행했으며 지난주 월요일 ‘주님 세례 축일’에 만났던 세례자 요한을 오늘 전례에서 다시 만난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어린양”이요 하느님의 종이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기꺼이 자신을 내놓는다. 성탄 시기를 마감한 교회는 연중 시기를 시작하면서 연중 제2주일 복음을 요한복음에서 취한다. 연중 시기 ‘가, 나, 다’ 해의 복음은 마태오, 마르코, 루카에서 각각 취하는데, 연중 제2주일의 복음만큼은 모두 요한복음(‘가’해-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34 / ‘나’해-첫 제자들;요한 1,35-42 / ‘다’해-카나의 혼인잔치;요한 2,1-11)에서 취한다. 참고로, 교회는 ‘나’해의 연중 제17주일부터 21주일까지도 요한복음을 취하도록 배려한다.
제4복음서의 서문에서부터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파견을 받아 “빛을 증언하러 왔으며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이”(요한 1,7)로 등장한다. 종교계의 지도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세례를 주고 있는)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으며 “그리스도(메시아)”냐고 물어도 아니라 하고, 시대의 마지막에 다시 올 “엘리야”냐고 거듭 물어도 아니라면서 이를 “서슴지 않고 고백”하며, “아니다”, “아니다” 하면서 자신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부득부득 부인한다.(참조. 요한 1,19-22)
세례자 요한이 ‘~이 아니다’라고 부인하다가 ‘~이다’라고 할 때는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이사 40,3)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라고 자신을 정의한다. 파견하신 분의 거짓 없는 “소리”, 망설임 없이 순종하는 “소리”이다. 자신을 두고 그 어떤 말도 하기를 꺼리는 세례자 요한의 유일한 관심사는 오로지 자기가 가리켜야 할 분을 가리키는 것뿐이다.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요?”(요한 1,25) 하면서 고집스럽게 물어대는 사제들과 레위인들에게 세례자 요한은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6-27) 하고 단호하게 대답한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께서 이미 숨은 모습으로 와 계시며, 제자가 되어 세례자 요한의 뒤를 따르는 이, 심지어 세례자 요한 자신마저 그 메시아의 종이 되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는 것으로 말한다.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요한 1,28)
『…신약성경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통해 자기애의 해체를 전적으로 살려고 했던 모습을 만난다. 세례자 요한은 선구자로서 메시아보다 먼저 등장하면서 하느님께서 오신다는 사실을 알리는 메신저가 되어 사람들 앞에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내고 가장 먼저 말하는 이가 된다. 그렇지만 그는 사람들이 정작 들어야 하고 보아야 하는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누누이 강조하면서 자기가 외치는 회개에로의 초대가 사람들의 시선과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밝힌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마르 1,17 마태 3,11 요한 1,15.30)고 하는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내 뒤에(ὀπίσω μου, opíso mou)” 오시는 분,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의 일개 제자에 불과할 뿐임을 거듭 강조하고,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마태 3,14) 하고, 심지어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마르 1,7) 하면서 자신은 가당치 않은 존재임을 공공연하게 선언한다.
제4복음서에 따를 때 세례자 요한은 심지어 자기의 제자들에게마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아니다”(요한 1,20-21) 하면서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님”(요한 1,25)을 세 번이나 되풀이한 후에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보고 따라가 그분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 자기 제자들더러 예수님의 “뒤에” 따라가라고 하면서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라는 말로 자신의 처지를 요약한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자기애의 해체에 성공하면서 항상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만을 중심에 둔다.…(※더 읽기: 세례자 요한의 손가락 https://benjikim.com/?p=8121)』
1.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
“이튿날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요한 1,29-30) 하고 외친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두고 “어린양”이라고 표현한 말속에는 이사야 예언자가 기록한 ‘주님의 종의 노래’에 나오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이사 53,7)이라는 표현과 함께 “파스카 축제 준비일”(요한 19,14)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상기하는 표징으로서의 어린양,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위해 청하며 “온전한 번제물”로 바치는 “젖먹이 어린양”(1사무 7,8-9)과도 같은 세 겹의 의미가 담겼으니, 주님의 종으로서의 어린양, 언약의 표징으로서의 어린양, 그리고 죄 사함을 위한 희생제물의 어린양이다. 예수님께서는 일방적인 사랑으로 인간의 종이 되시고 당신의 생명을 바치고자 하셨다. 예수님의 그 사랑은 “끝까지”(요한 13,1) 가는 사랑이며,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마태 26,28)라고 하신 바로 그 사랑이다.
『제단에 바쳐지는 동물은 암양, 암염소, 숫양, 산비둘기, 집비둘기 다섯 가지였습니다. 세 가지는 땅 위의 짐승이고 두 가지는 날개 달린 것이었습니다.(참조. 레위 5,6-7.18) 그런데 구세주를 두고 세례자 요한이 다른 어떤 동물도 아니고 “어린양”이라 한 것을 두고 곰곰이 되새겨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어린 숫양은 “일일번제물이며 주님을 향한 향기로운 화제물”입니다.(탈출 29,38-44)…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따라 우리 인성을 취하시고 하느님 앞에 우리를 위하여 번제물이 되실 분, 말씀이신 분, “도살장에 끌려갈 어린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던”(이사 53,7) 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예레 11,19)이셨던 바로 그분을 두고 세례자 요한이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 하지 않고 어찌 달리 표현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어린양께서는 참으로 “사람들을 속량하시어 하느님께 바치셨습니다.”(묵시 5,9) 인간에 대한 성부의 사랑에 따라서 세상을 위하여 살해당하신 어린양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죄로 우리 자신을 팔아넘겼을 때 당신의 피로 우리를 다시 사신 분이십니다.…(오리게네스, 200~254년)』
2.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성령이 내려와”
세례자 요한은 이미 예수님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요한 1,31) 하면서 자기의 경험을 담아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견해를 밝힌다. 몰랐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예리하게 관찰하며 마음이 지적으로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모실 정도가 되었고, 그분 앞에 나섰으나 그분 뒤를 따르게 되었으며, 특별히 그분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요한 1,32)라고 증언한다. 그리고 한 번 더 강조하듯이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요한 1,33) 한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 안에서 “어린양”과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온 성령”이라는 두 가지 이미지가 예수님께서 살아가실 비폭력과 온유의 사명을 상징하듯이 드러난다.
세례자 요한은 “알지 못하였다.…나에게 일러 주셨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 “과연 나는 보았다.”(요한 1,34) 한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것을 성령의 계시와 일러주심으로 알게 되면 보게 되고, 보게 되면 믿게 된다. 이것이 신앙의 리듬이고 패턴이다.
3. “나는 보았다…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
예수님을 힘주어 소개한 세례자 요한은 오늘 복음의 끝 절에서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4) 한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모습을 두고 최종적이고도 결정적으로 증언하는 세례자 요한 때문에 결국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두 사람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게 된다.(참조. 요한 1,35-37) 바로 이 부분이 세례자 요한의 위대함을 발견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요한이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하고 스스로 말한 것처럼 세례자 요한은 시종일관 자신을 작게 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커지시도록 한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도록 인도하면서 자신은 물러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례자 요한처럼 나를 내세우지 않으면서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내세우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주도권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일까? 이렇게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주님이 주님이심을 확실하게 증언할 수 있을 것이다.(※더 읽기: 광대 https://benjikim.com/?p=5265)
“증언”은 자기가 본 것으로 변화된 사람의 말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의 인도로 자기가 본 그리스도로 변화되어 “증언”하는 것을 궁극적인 인생의 목적이요 목표로 삼는다. 참된 증언은 세례자 요한처럼 올바르고 현실적이며 겸손한 자기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증언은 자신과 타인, 그리고 현실에 관하여 진실을 말하는 예술이요 기술이다. “증언”은 누군가에게 무엇을 말할 때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 인생의 기원을 묻고 질문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답을 얻고, 내가 어떻게 이런 인생을 살게 되었는지를 누군가에게 밝히는 것이다. 그래서 “증언”하는 사람은 의문을 제기하고 인생이 가야 할 길을 일관성 있게 가리키는 사람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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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첫 번째 증인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부르셨고 이를 위해 그를 준비시키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려는 절실한 열망을 억누를 수 없어 이렇게 밝혔습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4) 요한은 무엇인가 획기적인 것을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사랑하시는 아드님이 죄인들과 연대하는 것을 본 것입니다. 성령이 요한에게 전대미문의 새로움을, 그야말로 완전히 뒤바뀐 반전을 이해시켜 주었습니다. 사실 모든 종교에서 인간은 신에게 무엇인가를 바치며 제사를 지내는 데 반해, 예수님의 사건에서는 하느님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당신 아드님을 바칩니다. 우리가 미사 때마다 되풀이하는 함축적인 표현을 통해, 요한은 예수님이 가져다주신 이 새로움에 동의하며 놀라움을 표현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우리 신앙의 여정에서 항상 다시 출발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곧, 성부께서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자비로 충만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에서 다시 출발하는 겁니다. 또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우리가 우리 편에 서시고, 우리 죄인과 연대하시며, 세상의 짐을 완전히 짊어지면서, 악에서 세상을 구하시는 하느님의 선택에 다시 놀라게 해 줍니다.
이미 예수님을 알고 있다고, 그분에 대한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다고 과신하지 않도록 세례자 요한에게서 배웁시다.(요한 1,31 참조)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거룩한 얼굴” 성화를 관상하면서, 복음에 잠시 머무릅시다. 눈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마음으로 관상합시다.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가르치실 수 있도록 내어 맡깁시다. ‘그분이시다! 사랑을 위해 제물이 된, 어린양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 그분은, 오직 그분만이 우리 죄를 짊어지셨고, 그분 홀로 고통을 겪으셨으며, 우리 각자의 죄, 세상의 죄, 그리고 나의 죄까지 속량하셨습니다. 모든 죄를 말입니다. 우리가 마침내 자유인이 될 수 있도록, 더는 악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모든 죄를 스스로 짊어지시고 우리에게서 죄를 없애주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불쌍한 죄인이지만, 노예는 아닙니다. 아닙니다. 종이 아닙니다.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입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20년 1월 19일 삼종기도 훈화, 출처-VaticanNews 한국어 사이트)』
늘 좋은 글 잘 읽고 있는데, 새해 인사가 늦었네요….. 신부님께서도 2026년 영육간 건강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