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이 되면 진한 붉은빛의 포인세티아라는 원산지가 멕시코인 식물의 화분들을 여기저기에 장식으로 놓는다. 더불어 성탄 장식에서 자세히 보면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곳에서 자라는 호랑가시나무도 많이 등장한다. 교회의 전통에서 볼 때 성탄절 장식을 위해서는 포인세티아보다 호랑가시나무(Holly)가 훨씬 더 교회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할리’라는 이 나무를 성탄 시기의 여러 장식에서 자주 보면서도 사람들은 의외로 이 나무가 예수님의 탄생을 기리는 캐럴에 등장할 만큼 성탄 나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미국 영화 산업의 중심지인 할리우드(Hollywood)라는 지역 이름 역시 ‘할리(호랑가시나무) 숲’이라는 뜻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설說도 있다. 4절로 구성된 할리를 주제로 한 <The holly and the ivy(호랑가시나무와 아이비)>라는 영국 캐럴의 노랫말은 다음과 같다:
The holly and the ivy(호랑가시나무와 아이비)
「The holly and the ivy / When they are both full grown / Of all the trees that are in the wood / The holly bears the crown / (후렴) O the rising of the sun / And the running of the deer / The playing of the merry organ Sweet singing of the choir — 호랑가시나무와 담쟁이덩굴 / 모두모두 무럭무럭 자라지요 / (그래도) 숲에 있는 모든 나무 중 / 호랑가시나무가 왕관을 쓴답니다 / (후렴) 오, 떠오르는 태양 / 사슴이 뛰놀고 / 기쁜 오르간 연주에 맞춰 / 합창단이 감미로운 노래를 부른다네.
The holly bears a blossom / As white as lily flower / And Mary bore sweet Jesus Christ / To be our sweet Saviour / (후렴) — 호랑가시나무가 피운 꽃 / 백합처럼 하얀빛 / 마리아께서 귀여운 아기 예수 그리스도를 낳으시고 / 우리의 감미로운 구세주가 되시죠 / (후렴)
The holly bears a berry / As red as any blood / And Mary bore sweet Jesus Christ / To do poor sinners good / (후렴) — 호랑가시나무는 열매를 맺고 / (그 열매는) 핏빛처럼 붉어요 / 마리아께서 귀여운 아기 예수 그리스도를 낳으시고 / 가련한 죄인들을 착하게 하시죠 / (후렴)
The holly bears a prickle / As sharp as any thorn / And Mary bore sweet Jesus Christ / On Christmas Day in the morn / (후렴) — 호랑가시나무에는 가시가 있고 / (그 가시는) 여느 가시처럼 날카롭지요 / 마리아께서 귀여운 아기 예수 그리스도를 낳으신 / 성탄절 아침 / (후렴)」
노랫말은 호랑가시나무의 생김새를 두고 예수님의 탄생을 노래한다. 그런데, 우리가 성탄절에 흔히 듣는 성가나 캐럴의 즐거움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듯 성탄의 기쁨을 노래하면서도 어느새 1절의 왕관이나 2절의 백합처럼 고운 흰색(성모님의 동정성)을 넘어 3절에서 핏빛, 4절에서 날카로운 가시를 언급한다. 예수님의 탄생을 두고 곧바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연상하도록 노랫말이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성탄절에 예수님의 탄생을 기리며 서로 기쁨을 나눈다. 구세주 강생의 거룩한 즐거움을 노래하기에도 벅찬 이 절기에, 굳이 어둠과 고난을 함께 떠올릴 필요가 있겠느냐며 이를 애써 자제하고 피하려는 태도는 일정 부분 현대의 감수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의 전통은 성탄의 기쁨을 노래하면서도, 그 기쁨을 곧바로 우리를 위해 겪으실 구세주의 고난과 죽음에까지 이어지게 하며 묵상해 왔다. 마구간의 나무를 십자가의 나무로, 구유를 무덤으로, 아기 예수를 감싼 포대기를 장차 그분을 감쌀 수의壽衣로, 베들레헴을 골고타와 나란히 놓고 함께 바라보며, 교회는 성탄의 환희를 노래해 온 것이다.
이러한 전통 안에서 우리는 감히 예수님께서 ‘죽으러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죽음 그 자체를 목적 삼았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랑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시라는 고백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은 곧 파스카의 신비이며, 성탄의 기쁨은 이미 십자가와 부활의 빛을 품은 기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