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공현 대축일 ‘가’해(마태 2,1-12)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마태 2,11)

교회의 전례는 주님의 탄생으로부터 공현까지, 주님의 현존으로부터 현시顯示까지의 역동성力動性을 기념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예수님께서는 요셉과 약혼한 나자렛의 처녀 마리아를 통하여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심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목자들은 천사의 알림을 듣고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를 찾아냈다.”(루카 2,12.16) “목자들은 아기(예수님)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주었다.”(루카 2,17) 그렇게 예수님, 구세주, 주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마태 2,1) 한 대로 베들레헴에서 나신 다윗의 후손, 유다인의 왕이라는 메시아이시다. 유다인의 배경을 안고 있는 마태오복음은 특별히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세상의 모든 종족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12,3) 하면서 오래전 약속하신 바가 성취되고 있음을 강조하려 한다. 예수님이야말로 태어나면서부터 이교도들과 온 백성이 애써 찾았으며 인정을 받으신 분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1.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 와서”(마태 2,1ㄴ)라고 한다. 하느님을 찾는 땅 동방에서 몇몇 현자들, 점성가占星家인 듯한 “박사들”이 유다인들의 성읍 예루살렘에 온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에 속하지 않는 자들로서 참되고 살아계신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이므로 율법과 예언서를 비롯한 하느님 말씀의 인도를 받지 못한 이들이다. 그러나 우상을 거부하고 숙고하며 생각을 따라, 그리고 본성을 따라 별빛을 통해 징조들을 파악하는 상상과 환상의 독서를 통해 이끌림을 받는다.

“나는 한 모습을 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가깝지는 않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민수 24,17) 한 것처럼 박사들은 자기들이 보고 따라온 그 별빛이 메시아를 가리키는 것이었음을 아직은 모른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렇게 길을 따라왔고, 사람들에 앞서 의미를 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박사들이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 한다. 박사들은 탐구 정신으로 얻어진 내용을 바탕으로 타국의 예루살렘이라는 곳에까지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시된 지혜를 묻는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마태 2,3-4)

메시아를 찾는 물음 앞에서 두 가지 다른 태도가 보인다. 수석 사제들과 성경을 해석하는 율법 학자들은 헤로데의 물음에 유다의 임금 메시아가 나실 곳이 “유다 베들레헴입니다.”(마태 2,5)라고 대답하면서 “유다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마태 2,6 미카 5,1)라는 예언서의 기록을 근거로 내놓는다. 그렇지만 헤로데를 비롯한 그들은 이러한 예언을 알고 확인하면서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 예언에 순종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2. “더없이 기뻐땅에 엎드려 경배

반면에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찾는 자기들의 탐구에 열중하여 이에 순종하고, 예루살렘에서 듣게 된 성경의 말씀에 순종하며 계속 길을 가는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동방에서부터 따라온 “별이 그들을 앞서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자”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마태 2,9-11ㄱ)한다. 박사들도 목자들처럼 눈 앞에 펼쳐진 단순하고도 지극히 인간적인 현실을 목격한다. 그렇지만 들을 마음이 준비된 그들에게 그 현실은 기쁨과 경배를 불러일으키는 공현公顯(공변될 공)이자 공현恭顯(공손할 공)이었다. 박사들은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마태 2,11ㄴ)

전통적으로 교부들은 황금은 왕권을, 유향은 신성神性을, 몰약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가리키는 상징으로 보았다. 『황금은 위대하신 임금을, 유향은 참 하느님이심을, 몰약은 그분의 묻히심을 상징하는 것이로다. 알렐루야(공현 후 월요일 성무일도 아침기도 즈카리야의 노래 후렴)』 『오늘, 동방박사들은 자신들 앞에 누워 계신 신비를 바라보고 몹시 놀랐습니다. 땅에서 하늘을, 하늘에서 땅을, 하느님 안에서 사람을, 사람 안에서 하느님을 보고, 또 온 우주가 담을 수 없는 그분이 어린 아기의 작은 육신 안에 들어가 계신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들은 어린 아기를 보고 나서 의심을 품지 않고 그를 믿으며, 그 믿음을, 그 믿음을 세 가지 상징적 선물로 보여주고, 유향으로 하느님을, 황금으로 임금님을, 몰약으로 죽음의 운명에 놓여있는 사람을 고백합니다.(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주교, 380~450년경, 공현 후 월요일 성무일도 독서기도)』 칼·라너Karl Rahner(1904~1984년)는 황금은 우리의 사랑, 유향은 우리의 그리움, 몰약은 우리의 고통을 상징한다고 풀이한다. 이는 동방박사의 예물이 구세주 아기 예수님 신비의 상징이라고 해석될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 드리는 합당한 우리의 희생과 인간으로서의 우리의 자세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범한 한 아기의 탄생이라 해도 이는 모든 이들에게 더없이 기쁜 일임이 틀림없다. 하물며 메시아가 탄생하신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일 것인가? 그러나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과 탐욕에 사로잡힌 헤로데와 수석 사제들, 백성의 원로들, 그리고 율법 학자들에게는 기쁜 일이라기보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일이 된다. 대도시에 살던 사람들, 배웠다 하는 사람들, 특히 권력을 쥐고 있었던 헤로데 임금까지도 박사들의 여정을 뒤로 돌리고 싶었고, 훼방하고 싶었으며, 기쁜 소식을 숨기고 싶었다. 주의 깊게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한 아기의 탄생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아기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사악한 어른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탄 시기 동안 우리는 이미 죄 없는 아기들의 순교를 들었고, 스테파노의 첫 순교에 관한 이야기도 들었다. 어떤 이에게는 기쁜 소식이었으나 어떤 이에게는 두려움이었던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이쪽일지 저쪽일지를 분명히 요구하는 초대이다. 현대사회인간의 생명과 인간적인 삶에 기쁨을 갖는 사회라기보다는 두려움과 공포마저 조장하는 사회이다. 한 아기요 생명이 태어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회이다. 당장 세계 최저의 출산율을 자랑하는 사회가 바로 대한민국이라는 사회가 아닌가? 우리 사회는 한 생명이 탄생할 때 “더없이 기뻐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동방에서 온 이방인 박사들을 통하여 이방인에게까지 드러나게 된 예수님의 공현이라고 해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미리 선택하신”(1베드 1,2) “이스라엘 사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 영광, 여러 계약, 율법, 예배, (메시아에 관한) 여러 약속”(로마 9,4)을 받은 선택된 백성들의 우선권을 침해하거나 무효화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메시아의 탄생이 모든 인류를 위한 축복이라는 것을 강조할 뿐이다. 메시아에 관한 복음이요 기쁜 소식은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통해 예수님의 탄생 때부터 즉시 교회의 역사 자체가 온 인류와 모든 문화에 열린 하느님 말씀의 씨앗이요 성령의 숨으로서 보편성을 지녔으며 그렇게 성취되어야 할 예언임을 확인한다.

공현 대축일은 메시아 예수께서 온 인류를 위해 예정된 분이시며, 이를 알아모실 때 하느님의 축복인 아브라함의 유산에 참여하는 것임을 밝혀 주는 축제이다. 그런데도 이 축제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한편으로 일련의 경고를 담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고 묵상하며 해석까지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역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새로움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귀먹고 눈먼 존재들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신앙의 확실성에 긍지를 지니고 자부하며 산다고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 안에 활동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낯선 이들, 우리가 이방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보다 먼저 우리를 대신하여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 모시고, 우리보다 먼저 하느님께 경배드릴지도 모른다.

3.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절은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마태 2,12)는 구절로 끝난다. “꿈”은 하느님께서 인간과 소통하시는 한 수단이다.(참조. 마태 1,20;2,13.19) 이 구절을 전례에 맞추어 읽을 때 공현 대축일이면서도 마치 하느님 편에서는 하느님이신 분이 당신을 숨기신 것처럼 보일 소지가 있는 내용을 전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아, 구원을 베푸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 정녕 당신은 자신을 숨기시는 하느님이십니다.”(이사 45,15) 그러나 하느님 자신이 자신을 숨기시지는 않는다.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보이는 하느님을 보지 못할 뿐이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두려워하는 이들만 볼 수 있고 찾을 수 있도록 자신을 감추신다. 교황 대大 그레고리오(590~604년 재위) 성인께서는 “다른 길로”라는 말을 그리스도인이 『믿음과 회개로 여느 사람들과는 달리 살아, 잃었던 낙원으로 돌아가야 하는 길』로 해설한다. 이 구절은 박사들의 여정에 관한 담담한 기술로서 신앙인의 여정을 돌아보게 하는 구절이다. 박사들은 끊임없이 별을 관찰하며 하늘의 뜻을 찾던 마음이 순수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하늘에 순명하며 끊임없이 “다른 길”을 걷고자 하였으며, 그렇게 걸었던 이들이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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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작음에서 위대함을 발견하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축일을 축하합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인 오늘, 복음은 베들레헴에 도착해 보물 상자를 열고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바치는 동방박사들에 관해 들려줍니다(마태 2,11 참조). 이 동방의 현자들은 그들이 아기 예수님께 드린 선물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들이 먼저 ‘세 가지 선물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세 가지 선물, 우리와도 관련된 세 가지 귀중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는데 도대체 무슨 세 가지 선물을 받았다는 말일까요?

첫 번째 선물은 부르심의 선물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성경을 읽거나 천사의 환시를 통해서가 아니라 별을 연구하면서 이를 감지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알려줍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큰 열망과 소망을 통해 우리를 부르십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의 새로움에 놀라고 당황스러워하며 미지의 세상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학식 있고 지혜로웠던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알고 있던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에 더 매료됐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것에 마음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더 멀리 나아가라’는 부르심을 느꼈습니다.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만으론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더 멀리 나아가도록 부름받았다고 느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중요합니다. 곧, 우리는 만족하지 않고 우리의 안락한 영역에서 벗어나 다른 이들과 함께 주님을 향해 걸으며 현실에 뛰어들어 주님을 찾도록 부름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매일, 지금 여기에서 우리를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매일 부르시고, 이 세상 바로 여기에서 우리를 부르시며, 지금 우리를 부르십니다.

동방박사들은 두 번째 선물, 곧 식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을 찾고 있었기에 예루살렘으로 가서 헤로데 임금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하지만 헤로데는 권력에 굶주린 사람이며 권력을 이용해 아기로 태어나신 메시아를 없애려 합니다. 하지만 동방박사들은 헤로데에게 속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정의 목표와 여정 중에 만나는 유혹을 식별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헤로데의 궁전에서 편안하게 머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들은 헤로데의 궁전을 떠나 하느님의 표징에 주의를 기울이며 다시 그곳으로 가지 않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가게 됩니다(12절 참조). 형제자매 여러분, 인생의 목표와 여정의 유혹을 식별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인생의 목표와 여정의 유혹은 서로 다릅니다. 유혹하고 나쁜 길로 인도하는 것을 포기할 줄 안다는 건 하느님의 길을 깨닫고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식별은 위대한 선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기도할 때 식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지치지 않고 청해야 합니다. 이 은총을 청합시다! 주님, 저희에게 선한 것과 악한 것, 최선의 것과 최선이 아닌 것을 식별할 수 있는 역량을 주소서.

마지막으로 동방박사들은 세 번째 선물, 곧 놀라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기나긴 여정 끝에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은 이 사람들이 무엇을 발견했나요? 어머니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게 됩니다(11절 참조). 분명 정감은 있지만 놀랄만한 장면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목동들처럼 천사를 보지는 않았지만 가난 속에 계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아마도 그들은 강력하고 경이로운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아기를 발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분을 알아보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놀라움을 받아들이고, 놀라움으로 그분과의 만남을 체험하며 그분을 경배합니다. 그들은 작음 안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알아봅니다. 인간적 측면에서 우리 모두는 큰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진정으로 큰 것을 찾을 줄 아는 법, 곧 하느님께서 무척 사랑하시는 작음 안에서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을 이런 식으로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겸손 안에서, 침묵 안에서, 경배 안에서, 작은 이들 안에서, 가난한 이들 안에서 말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첫 번째 선물은 부르심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 선물은 식별입니다. 우리는 모두 식별할 수 있고, 그분의 현존을 식별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선물은 놀라움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분의 ‘놀라움’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선물들, 곧 우리가 이미 받은 부르심, 식별하는 법, 놀라움이라는 선물을 기억한다면 유익할 것입니다. 인생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깨달았을 때를 되돌아봅시다. 혹은 많은 고통을 겪은 후에 그분의 목소리를 식별할 수 있었을 때를 되돌아봅시다. 혹은 그분께서 선사하신 놀라움, 우리를 놀라게 한 그 잊을 수 없는 놀라움을 되돌아봅시다. 우리가 받은 선물을 기억하고 간직할 수 있도록 성모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길 빕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23년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 삼종기도 훈화, VaticanNews 한국어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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