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말로 ‘죽음의 춤’ 혹은 ‘죽음의 무도舞蹈’라고 불리는 표현이 있다. 시대와 문화권에 따라 라틴어 ‘코레아 마카배오룸(Chorea Machabæorum)’, 불어 ‘라 당스 마카브흐(La Danse Macabre)’, 독어 ‘토텐탄츠(독어. Totentanz)’ 등으로 불려온 이 말은, 인간이 절대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불가피성과 대체 불가능성, 그리고 예외 없는 보편성을 넘어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저항과 그 저항의 부질없음을 일깨우기 위한 예술적 알레고리이자 비유이다. ‘죽음의 춤’에는 역사 속에서 문화·예술적 소재에 때로는 풍자와 유머, 심지어 신성모독적 요소가 더해지기도 했지만, 그 본질은 결코 허무주의적 탐닉이 아니었다. 오히려 신분의 지위고하와 부귀영화를 가리지 않고 예기치 않게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라틴어.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의 경고였다.
이 ‘죽음의 춤’이 던지는 상징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전쟁, 파괴의 소식, 심지어 해외에서 악행을 일삼다 전세기로 무더기 송환되는 동족의 비극적 이야기들까지 보고 들을 때면, 세상이 마치 광기에 휩쓸린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름 없이 스러진 영혼들, 존중받지 못한 죽음을 떠올리면 불안하고 한없는 어둠이 마음을 덮는다. “기우는 담, 쓰러져가는 울같은” 사람의 생명을 밀어내고, 훔쳐 가기를 일삼으며, 거짓말을 즐기고, 입으로는 축복을 한다면서도 속으로는 악담을 퍼붓는 악은 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참조. 시편 61/62,4-5 최민순 역)
도대체 무엇이 이들의 정체성을 그렇게 왜곡하여 자신을 죽음과 파괴의 문화 속 전사戰士로 만들었을까? 그들이 상상하는 불만과 합리화의 논리, 두려움과 편견은 어떤 과정을 거쳐 타인을 공격하는 명령이 되었을까?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어떤 실패가 그들의 내면에 어둠을 불러들였으며, 무엇이 그들을 마치 처형자의 소명이라도 받은 양 행동하게 만들었을까? 나아가, 이러한 폭력에 직접 가담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조롱과 비웃음으로 지지하며 그를 통해 돈벌이하는 이들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러한 질문들 앞에서 시편은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지를 기억하고 상기하라고 초대한다:
“내 백성아, 듣거라 내 가르침을, 내 입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라 나는 입을 열어 격언을 말하고, 옛날의 숨은 일들을 이야기하리라 이미 우리 들어서 아는 일들을, 조상들이 우리에게 알려준 일들을 그 자손들에게 숨겨두지 않으리니, 미래의 세대에게 전하려 하노라-야훼님의 영광을 그의 능하심을, 당신이 이뤄주신 묘한 일들을. 주께서 야꼽 안에 한 계율을 정하시고, 이스라엘에 한 법을 세우시어-우리 조상들에게 명하신 것을 그 자손에게 알리라 하시었었느니라 다음 세대에 태어날 자손들도 이를 알면, 그들은 또 그 후손에게 이야기하여 그들의 희망을 하느님께 두고, 하느님이 하신 일들을 아니 잊으며, 당신의 계명을 잘 지키게 하시고, 그들의 조상처럼 고집이 세고, 항거하는 세대가 되지 않게 하셨으니,-그대는 마음을 바르게 아니 가지고, 하느님께 충성된 마음이 없었느니라”(시편 77,1-8 최민순 역)
시편은 인간의 어둠을 지적하면서도 절망으로 내몰지 않는다. 오히려 반복된 죄와 실패의 역사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일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다시 세우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한다. 지금 우리의 시대가 흔들리고 혼란스러울지라도 여전히 희망이 있다는 근거를 제시한다. 인간의 불신실함과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어둠의 위험을 직면하라고 하면서도, 하느님의 변치 않는 사랑과 구원의 약속을 잊지 말라 한다. 그래서 시편으로 기도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누구인지”를 되찾는 과정이다.
시편의 기억과 상기想起의 여정은 신약에서도 이어진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루카 6,45)이라 하시고, 인간 내면의 진실이 겉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라 하셨다. 인간 마음의 왜곡, 악의 뿌리는 어떨 때 단순한 심리적 현상을 넘어 신비로 다가온다. 인간의 마음이 한편에서 분명 성 바오로가 말한 “무법의 신비”(2테살 2,7)에 닿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구약의 예언자 예레미야가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예레 17,9)라고 한탄하였다고 하지만, 신약의 바오로 사도는 시편의 기억과 상기의 여정을 강조하며 치유의 길을 역설한다. “형제 여러분, 굳건히 서서 우리의 말이나 편지로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2테살 2,15)라고 말한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처음 새겨주신 본래의 진실에 뿌리를 두라고 호소한다.
오늘 우리의 세상은 죽음의 춤과 비슷한 리듬 속에서 흔들리고, 수많은 목소리는 불협화음처럼 뒤엉켜 서로에게 소리친다. 무도곡의 악보는 정돈되지 않은 듯 보이고, 연주의 지휘자마저 사라진 것처럼 혼란스러울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추는 춤의 스텝을 잃지 말아야 한다. 비록 그 스텝이 빠르게 미쳐 돌아가는 군중의 분노를 불러일으킬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소란 속에서도 참된 음을 찾기 위해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다. 그 음만이 우리의 삶과 시대를 조율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 음 안에서만 우리 세상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들었던 목소리와 다시 연결될 수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이 희망의 연주곡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자 특권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세워진 어머니의 목소리다. 그 목소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상기시키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스러운 눈길 아래서 우리가 구원의 약속이라는 완전한 음높이에 맞춰 조율되도록 이끈다. 바로 이것이, 두려운 불협화음과 요동치는 군중 속에서 우리가 지킬 수 있는 유일한 평화이며, 삶의 춤을 다시 생명의 춤으로 바꾸는 은총의 길이다. 앞서간 이들의 죽음을 위로하고 우리의 죽음을 묵상하는 11월 위령성월慰靈聖月은 어느새 하순이다.(*이미지 출처: www.danceofdeath.info-이 사이트에서는 ‘죽음의 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나 다양한 이미지들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