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6주일 ‘다’해(루카 10,38-42)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루카 10,42)

루카가 세 번째 복음을 기록할 때 그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경험을 지닌 교회의 사람으로 자신을 의식하면서 이를 복음의 2부라고 할 수 있는 사도행전에서 묘사하려 한다. 루카는 당시 교회에 오늘날의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예배 방식이나 생활 양식에 다양한 모습이 있고, 이들 사이에 일정한 긴장이 있음을 기록한다. 예를 들어, 루카는 사도행전에서 식탁 봉사와 말씀 봉사 사이에 어느 정도 갈등이 있었는데, 사도들은 말씀 봉사에 전념하고 다른 일곱 봉사자를 선정하여 식탁 봉사 직무를 수행하도록 이를 재 조정했음을 증언해 준다.(참조. 사도 6,1-6) 이러한 해결책이 교회에 유일한 모범이라거나 권위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단지 하나의 해결책이었을 뿐, 또 다른 방식의 해결책이 있을 수도 있다. 당시의 해결책은 존중되어야 할 우선순위, 곧 하느님 말씀이 반드시 전해져야 하고 선포되어야만 하며 이러한 말씀의 우선권이 무시되면 그리스도인 공동체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해결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공관복음에서 루카만이 전해 주는 오늘 전례의 복음에서도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겸손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1.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그들(예수님과 제자들의 일행)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을 가다가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루카 10,38) 예수님께서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 근처의 베타니아라는 곳에서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라자로라는 남매가 사는 집에 숙식을 위해 초대를 받으신다. 이런 일은 특별히 예수님의 수난 전前 주간에 자주 발생한다.(참조. 마르 11,11 마태 21,17 요한 12,1-11) 넷째 복음(특별히 요한 11,1-43)은 예수님께서 무척 사랑하신세 남매에 관해 많은 정보를 제공해준다. 오늘 복음인 루카 복음의 전후 맥락으로 보자면, 사마리아인들로부터 냉대를 받으신(참조. 루카 9,51-55)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가정, 다정한 우정을 느낄 수 있는 곳에서 휴식도 취하시고 당신의 사명에 대하여 숙고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자 하신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의 영접으로 그 집에 들어가신다.

성경에서 누군가를 “자기 집에 모셔 들이는” 환대(hospitality)는 자비의 행위이며 동시에 이웃에 대한 의무이다. 중동의 유목민들에게 있어 누군가를 손님으로 모셔 들이고 환대하는 것은 그를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하며, 이는 광야를 떠도는 유목민들의 처지에서 자기를 보호해 줄 누군가 울타리가 생길 수 있고 서로 힘을 합칠 수 있는 사람이 생긴다는 의미에서 생존의 방식이기도 했다. 롯에게 환대를 받아 롯의 집안에 들었던 두 천사는 소돔의 멸망에서 롯을 구하여 주었고(창세 19,1-29 참조), 기브아의 노인이 맞아들인 길손이 입은 비극으로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기브아인들의 만행에 맞서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며(판관 19,11-20,1이하 참조), 욥은 “언제나 길손에게 문을 열어놓아 나그네가 밖에서 밤을 새운 일이 없다(욥 31,32)”라며 자랑하였고, 열왕기 하권 4장에 나오는 4가지의 일화들은 하나같이 예언자 엘리사를 통하여 절망적인 상황이더라도 환대가 어떻게 희망과 후한 보상으로 갚음을 얻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오늘의 제1독서(창세 18,1-10)에서도 아브라함과 사라가 세 분의 손님을 모셔 들여 얼마나 관대하게 대접하였으며 그 결과 사랑스러운 아들 이사악을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 보여준다.

신약에서도 ‘환대’는 중요한 개념이다. 예수님 친히 최후의 심판을 말씀하시며 이를 강조하셨고(마태 25,35이하), 예수님께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에서 신세를 지거나(마르 1,29 이하) 세리나 죄인들이 예수님을 대접한 경우가 많았으며(마르 2,15이하), 여러 가지 비유를 말씀하실 때 환대라는 주제는 예수님께 중요한 주제였다.(루카 14,16이하;12,37;13,29 등) 예수님께서는 집이 없으셨고, 자주 많은 이들의 손님이셨다.(루카 7,36이하;9,51이하;10,38이하;14,1이하) 바오로 사도의 3차에 걸친 전도 여행도 시종일관 환대와 거절의 연속 안에서 이루어진다.(사도 14,28;15,33;16,15.34;17,1이하;18,3.27;21,16)

교회의 급속한 발전에 따라 4세기 안티오키아 교회가 무려 3,000명에 달하는 과부와 병든 이와 나그네를 돌보고 있었다는 기록처럼 환대는 초대교회에서도 중요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누군가를 “자기 집에 모셔 들이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수많은 보안 장치와 소위 cctv 카메라의 감시망과 두려움 속에서 맞아들인다. 과연 소위 문명화된 사람들의 모습은 이러해야만 하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모두 너무나도 가진 것이 많고, 행여 잃을 것이 생길까 두려워하는 존재들이다. 또한,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코라도 베어갈 듯이 두려운 세태 속에 살아간다.

현대인들환대의 덕에서 멀어지게 하는 적敵은 바로 ‘이기심과 교만’이다. “예수님께서…‘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 하셨다. 머무를 곳이 없어 외로운 예수님이셨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항구한 손님이시기를 바라고 그분을 우리 집으로 모셔 들여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집에 들어오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손님이시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브라함은 “나리,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시어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십시오. 제가 빵도 조금 가져오겠습니다. 이렇게 이 종의 곁을 지나게 되셨으니, 원기를 돋우신 다음에 길을 떠나십시오.(창세 18,3-5)”라고 청하였고, 이내 아들을 얻는다.

복음의 장면으로 다시 돌아온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루카 10,39-40ㄱ)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여성인 마르타는 자기 집에 모신 라삐 친구를 만나 그분께 맞는 음식을 준비하고 식탁을 차리는 등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다. 다소 수동적이고 조용한 성격이랄 수 있는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는 복음에서 예수님의 방문에 스승이며 예언자이신 예수님의 발치에서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가르침을 받는 것을 선호하는 관조적인 여성으로 등장한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현존 안에 그분 앞에서 전형적인 제자의 자세를 취한다.(참조. 루카 8,35 사도 22,3 – “발치”, “문하”)

라삐의 전통에서 『너의 집이 지혜로운 자들이 모이는 곳이 되게 하라. 그리하여 그들 발끝의 먼지라도 붙들고 그들이 하는 말씀을 허겁지겁 마셔라.(미쉬나Mishnah, Avot 1,4)』라는 말이 있지만, 이는 여성들이 아닌 남성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같은 미쉬나에 『자기 딸에게 토라를 가르치는 이는 그녀에게 지저분한 것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소타Sotah 3,4)』라는 말도 있는 것으로 보아서 여성이 그러한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상당히 물의를 일으킬만한 내용이었다.

그런 배경 안에서 마리아의 태도를 본다면 마리아가 상당히 주체 의식이 강하고 자의식이 강한 용감한 몸짓을 진지하게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라는 라삐가 자기를 내치지 않으실 것이며 남성들에게만이 아니라 여성에게도 제자의 직분을 수행하도록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아는 듯이 행동하고 있다. 사실 루카는 이미 복음의 앞장에서 여자들이 예수님을 따랐으며 예수님의 활동을 도왔다고 하는 사실을 기록하였는데(참조. 루카 8,2-3), 여성 제자들이 그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8,3ㄴ)라는 사실을 넘어 오늘 복음의 대목에 이르러서는 다른 남성 제자들처럼 동등하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는 대상으로서 여성(마리아)을 묘사하는 것이다.

2. “보고만 계십니까?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바로 이 부분에서 갈등이 발생한다. 그러한 마리아를 본 마르타가 어느 정도 화가 난 듯이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만 들으면서)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루카 10,40ㄴ) 우선 마르타가 예수님을 “주님(Κύριος, Kýrios)”이라 부르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을 두고 “주님”이라 하는 칭호는 “주님이십니다.”(요한 21,7)에서 보듯이 예수님 앞에서 교회가 그분의 부활을 고백하는 칭호이다. 넷째 복음에서 마르타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9) 하는 베드로의 신앙고백보다도 오히려 더 높은 경지에서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27) 하면서 예수님께 가장 최고의 신앙고백을 한 사람으로 드러난다.

그렇지만 동생 마리아를 두고 예수님께 다가온 마르타는 거의 짜증을 내면서 동생과 자기 사이에 예수님의 개입을 밀어붙이는 듯한 인상을 준다. 사실 마르타의 열성에는 예수님께 그저 하나라도 더해드리고 잘해드리고만 싶은 마음이 앞선 나머지 초조한 근심이 담겨 있다. 예수님을 위한다고는 했지만, 어떻게 하면 더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 나머지 잠시라도 주님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누군가가 듣지 못하게 가로막는 태도와 감정을 보인 것이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개입하신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아무런 꾸지람이나 책망이 없이)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루카 10,41) 하신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을 두고 교회 안에서 수 세기 동안 반복되어온 그런 내용으로 알아들어서는 안 된다. 그동안 교회는 이 말씀을 마치 ‘관상 생활’을 미화하는 말씀으로, 소위 신新플라토니즘neo-platonism의 독毒에 감염되어 ‘관상 생활’을 ‘활동 생활’보다 우위에 두는 듯한 격언처럼 받아 들여온 경향이 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하신 말씀에는 예수님을 잘 맞이하는 것과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 사이의 가벼운 긴장과 염려에 대한 우정 어린 부드러움이 담겨 있을 뿐이다. 굳이 지적하자면 예수님께 더욱 가까이 가고 예수님과 더욱 좋은 관계를 맺는 일이라는 목적보다도 여러 다른 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마르타를 순간적으로 사로잡았을 뿐이다. 상대방을 생각한답시고 흥분하고 걱정을 많이 하면, 오히려 상대방에게서 떠나 자신에 대해 더욱 많이 생각하게 되고, 상대방을 생각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더 생각하면서 그것이 상대방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것이 되고 만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당신 때문에 고발을 당하게 될 때 “너희는…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루카 12,11-12) 하시고, “무엇을 먹을까…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루카 12,22) 하신다. “걱정”이나 “근심”(루카 21,34), ‘걱정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마디는 ‘메림나오μεριμνάω, merimnáo=to be anxious’라는 동사이고, “근심” 역시 그 동사에서 나온 명사형 mérimna이다. 일상의 동요이다.

여러 가지를 종합할 때, 오늘 복음을 기록한 루카는 바오로 사도가 기록한 코린토 1서 7장에서 영감을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과의 관계를 말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흔들리거나 시선을 빼앗겨 산만해지거나 헷갈리지 말고(1코린 7,35 아페리스파스토스ἀπερισπάστως, aperispastós = without distraction), “품위 있고 충실하게주님을 섬기라고 당부한다. 이러한 당부가 우리 각자에게 유효한 것처럼 마르타에게도 유효하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당신을 위해 분주하게 일하면서 바쁜 마르타를 꾸짖지 않으신 것만큼은 분명하다.

주님께서는 여럿이 함께 둘러앉은 식탁을 사랑하셨고, 좋은 음식과 좋은 포도주를 남녀 친구들과 즐겁게 나누는 것을 좋아하신 분으로서 마르타에게 당신의 현존과 존재를 잊어버릴 만큼 시중드는 일과 식탁 봉사를 너무 염려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걱정하는 것과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다르고, 일을 한다는 것과 흥분한다는 것이 다르며, 누군가를 섬기고 봉사하는 것이 서둘러 일을 해치우는 것과는 다르다. 누군가를 염려하며 차분하게 그에게 봉사하는 마음가짐과 태도는 ‘환대’를 위해 참으로 중요한 일임이 분명하다.

3.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좋은 몫

복음의 끝 절에서 주님께서는 마르타에게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2) 하신다. 진정 “필요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결정적인 것은 무엇일까? 제자로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 바로 그 “한 가지뿐”이다. 예수님께서 당신과의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는 당신을 “배었던 모태와…젖을 먹인 가슴”조차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더 행복하다.”(루카 11,27-28) 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예수님을 잉태한 태胎가 행복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 특별한 음식을 대접한 것이 행복한 것이 아니며, 예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많이 해 드리는 것이 행복한 것이 아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만이 행복이다.

우리는 곧잘 할 일이 많고, 해야 할 봉사가 쌓여있다고 생각하거나, 심지어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는 핑계나 구실을 발명해내기까지 하므로 ‘말씀의 경청’이라는 이 우선권을 지키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사실 우리 내면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거스르려는 저항이 있고, 말씀을 듣게 되면 지켜야만 한다는 강박으로 아예 듣지 않으려는 유혹도 있으며,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고,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결정하고 싶어 하며, 듣고 순명하려 하기보다 우리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유혹을 산다. 오늘 복음을 읽다 보면 어느새 나 역시 마리아보다는 마르타 쪽에 가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되면서 부끄러움에 반성하게 된다.

오늘 복음에서 한 여인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으며, 그것이 “제가 받을 몫이며 제가 받을 잔이신 주님”(시편 16,5) 이라는 말씀 그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빼앗기지 않을 좋은 몫”이었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여성들도 부르심을 받은 것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남성 제자들처럼 사목디아코니아diakonía(섬김),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청’으로 부름을 받았다. 어찌 보면, 마르타와 마리아와의 사이에 긴장이나 대립처럼 여겨지는 부분은 활동과 관상의 대립이나 긴장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안 듣고의 대립과 긴장이다. 아멘!

※더 읽기: 거룩한 독서, 어떻게 하는가? 읽기와 묵상의 실제(이연학) https://benjikim.com/?p=14609 / 환대 https://benjikim.com/?p=5925 / hospitality(환대) https://benjikim.com/?p=3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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