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독서, 어떻게 하는가?

읽기와 묵상의 실제

이 글은 ‘거룩한 독서’의 4단계 중 특별히 <거룩한 독서 ‘읽기’와 ‘묵상’의 실제>를 아름답고 체계적으로 서술하여 주신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이연학 신부님의 글이다.(이연학, 성경은 읽는 이와 함께 자란다, 성서와함께, 2010년 6쇄, 39-52쪽)

루카 10,38-42 <마르타와 마리아를 방문하시다>

마르타, 마리아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Cristo con Marta y María, by Johannes Vermeer, 1655년

(38)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1)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읽기 단계의 몇 가지 요령

읽기 단계에서 보통으로 본문의 문맥, 구조, 시간과 공간의 배경, 등장인물과 그 행위 등을 주의 깊게 살피면 도움을 받습니다.

우선 문맥을 살펴봅시다. 모든 구체적인 단락은 반드시 그 전체 맥락에서 이해되어야만 합니다.[1] 루카 복음의 경우 예수님의 활동 무대를 기준 삼아 대체로 세 부분으로 나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먼저 갈릴래아 시절, 다음으로 예루살렘 상경기(9,51-19,28).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입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앞에 소개한 단락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여정 중에 있었던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앞 단락을 살펴보면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5-37)로서, 이 단락은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는 한 율법 교사의 질문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율법 교사의 질문은 물려받을 ‘유산’으로서의 영원한 생명에 관한 것이고, 우리 본문의 결론도 이와 유사한 ‘몫’(42절)에 관한 것임을 관찰하게 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우리 본문은 (참되고 영원한) ‘유산’이라는 주제를 놓고 문맥상 서로 통하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문맥을 자세히 살피는 독자의 눈에 걸려드는 또 한 가지는, 마르타와 마리아 일화가 분명히 부활 전에 생긴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본문의 주님 모습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부활하신 후의 모습이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특히 훈련이 좀 된 사람에게는, ‘예수’라는 호칭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 데 비해, 이 짧은 단락에 ‘주님Κύριος, Kyrios’라는 호칭이 세 번이나 나오는 것이 눈에 띌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배경이 부활하신 부님을 체험한 초대 교회 공동체의 삶과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추측하게 됩니다. 과연 학자들은 이 단락의 ‘배후’로 사도행전 6,1-4을 지목하고 있습니다.[2] 물론 이러한 관찰은 학자로 훈련된 이에게나 가능한 것이므로,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너무 멀리 가는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지적도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떻든 사도행전 6장으로 우리 단락을 비추어 보는 일은 나름대로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로써 적어도 ‘관상과 활동’의 저 흔한 이분법이 아니라, 사도행전 6장에 묘사된 초대 교회 공동체의 구체적인 문제들이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를 올바로 해석하게 해주는 배경이 된다는 사실이 밝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는, 이 단락의 ‘구조’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두세 번 읽다 보면 본문의 얼개는 절로 마음에 와닿게 마련입니다. 이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한마디로 이 본문의 ‘메시지’가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41-42절)이라는 것은 누구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제일 중요한 부분이 파악되면 보통으로 한 본문의 구조는 절로 파악되기 마련입니다. 우리 본문의 경우, 비교적 긴 앞부분은 42절의 단 한 말씀을 부각하려는 긴 서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우스운 말로, 한 송이 국화꽃(“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는 말씀)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가 울어대는(38-40절) 형국의 구조라고 할까요. 혹은 더 단순히, 마르타라는 앞면과 마리아라는 뒷면으로 구성된 동전 한 닢의 구조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이 단락에서는 그렇게까지 중요하다고 여겨지지는 않지만 ‘언제’와 ‘어디서’(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에 대해서도 살펴봅니다. ‘언제’에 해당하는 표현은 8절에서만 발견됩니다. ‘그들이 길을 가고 있을 때’ 그 길은 당연히, “마음을 굳히시고”(9,51)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여정을 일컫습니다. ‘어디서’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길’(10,38 여행 중이므로 ‘여로’), ‘어떤 마을’(38절), ‘자기 집’(38절), 그리고 ‘주님의 발치’(39절) 등의 표현이 눈에 띕니다. 이 네 장소를 가만히 일직선으로 연결시키며 마음으로 따라가 보십시오. 혹시 절로 마음이 고요히 한 군데로 수렴되는 것을 느끼시는지요?

다음으로 ‘누가’(등장인물)와 ‘무엇을 어떻게’(‘행위’)에 해당하는 요소들을 살펴봅시다. 대체로 이 순간이 읽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지닙니다. 눈에 당장 띄는 등장인물들은 물론 예수님, 마리아, 마르타이지만, 38절의 ‘그들’ 즉 예수님의 일행도 있군요. 각 등장인물들의 행위는 그 인물들에 할당된 동사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 ‘들어가시는’(38절) 행위와 ‘말씀하시는’ 행위 외에는 뚜렷한 것은 없군요. 그러나 마르카=타에 해당하는 동사들은 상당히 많습니다. 모셔들이다(38절), 시중들다 혹은 섬기다, 분주하다, 다가가다(40절),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다(41절) 등, 그중 특기할 만한 것은, 40절의 ‘다가갔다epistasa’라는 동사입니다. 그리스말로 ‘에피스타사’는 ‘스스로를 남들 위에 내세우는 사람’, ‘나서는 사람’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마르타는 나서는 사람, 혹은 더 심하게 말해서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군요. 집안 사람들한테 늘 나서는 나머지, 주님한테도 나서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주님께도 청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지시’하는 모습이니까요(40절, ‘일러주십시오’라는 명령형). 이렇게 마르타에게 해당된 동사들만 모아서 자세히 살펴보아도 머릿속에 하나의 인간 유형이 뚜렷하게 그려집니다. 그는 우선 시중드는 사람, 혹은 섬기는 사람이군요. 섬기느라 정신이 없는 사람입니다. 시중드느라 정신없는 것은 종들에게 해당하는 일이지요. 그런데 그는 동시에 언제나 주도권을 쥐는 사람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중요한 손님이신 주님을 자기 집에 모셔 들이는 주체로 표현되고 있으니까요(38절). 그러니까 ‘안방마님’ 혹은 ‘장상’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그는 또한 자신이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자면 자신의 이러한 지위를 의식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40절의 ‘불만 표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결과적으로, 한편으로는 섬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주도권을 쥐고 있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섬기는 주인’이라는 이상한 조합이 탄생되는군요.

마르타에 대해서는 이쯤 해 두고, 이제 마리아를 봅시다. 단 두 마디뿐입니다. ‘주님 발치에 앉아있다, 말씀을 듣다’(39절). 엄청난 대조입니다. 마리아는 그 신원도 매우 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마르타와는 달리 주체로 소개되지도 못하고 마르타와 관련지어서만(‘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하고 비중 없는 마리아야말로 이 단락 전체의 중심으로 느껴집니다. “무거움으로써 가벼움의 뿌리를 삼는다(중위경근重爲輕根)”는 도덕경의 말씀이 바로 마리아를 두고 한 듯싶습니다. 42절의 예수님 말씀은 더욱 확연히 그런 심증을 굳히게 해좁니다. 읽기가 이쯤만 와도 이미 ‘묵상’의 단계로 진입해 계신 분들이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자기 안의 마르타가 슬슬 보이기 시작하는 까닭이지요.

이렇게 제 나름대로 읽기 단계의 몇 가지 기초적인 요령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몇 군데만 빼면 이런 정도는 누구나 그리 어렵지 않게 스스로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해석의 기법들은 물론 이 외에도 많이 있고, 그것들에 숙달되는 만큼 우리는 큰 도움을 입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전문적인 기술을 잘 구사할 줄 모른다고 해서 거룩한 독서가 안 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믿습니다. 반복하여 말씀드리지만, 중요한 것은 ‘듣는 마음’이니까요.

읽기의 심화 혹은 묵상

이어서,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한”(루카 10,40) 마르타를 좀 더 가까이서 들여다봅니다. 시중들기(섬김)는 종 혹은 노예에게 해당하는 일입니다. 과연 마르타는 섬기러 오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형제자매들의 시중을 드는 사람입니다. 그가 온 집안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안주인’(혹은 ‘장상’ !)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 정확히 그런 위치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 20,28).* –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처럼 섬기고 시중들라고 교회 안에서 크고 작은 단체나 공동체의 ‘장’의 직무를 위임받은 사람에게 ‘권력’이 시나브로 따라붙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은지요? 자기도 모르게 목이 뻣뻣해지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은지요? ‘지도’의 임무에 열중한 나머지, ‘하느님의 생각’이신 성령마저도 지도하려는 경우가 교회 역사상 한 번도 없었다고 자신할 수 있을런지요? 마르타처럼 교회의 주님이신 분께도 자기도 모르게 ‘지시’하게 되는 것이(40절) 과연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인지요?[3]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6-27).* – 예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섬기러 오신 분으로 하여금 섬기시도록 해 드리는 것, 내가 먼저 그분의 섬김을 받도록 마음을 여는 것, 이것이야말로 주님을 주님으로 대접해 드리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면 이치가 정말 그러합니다. 그런데 마르타는 오히려 주님 앞에서 자신의 섬기는 직분을 내세우고 있지 않은지요? 그럼으로써 자기가 슬쩍 주님의 자리에 가 앉아있는 것은 아닌지요? 최후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기려고 하셨을 때, 베드로가 발을 빼며 ‘절대로 안 됩니다’(요한 13,8 참조) 하고 대답하던 장면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러고 보니 베드로는 주님 앞에서 ‘그러시면 안 된다’고 자주 ‘영성지도’를 해 드린 사람이로군요!(마르 8,31-33 참조). 이런 베드로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은 이러합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8 공동번역;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이제 나와 아무 상관도 없게 된다.”)* – 과연, 우리의 섬김이 진정한 섬김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분께서 나를 섬기시도록 해드려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남을 섬긴다고 하면서 자기를 섬기고 있는 경우를 종종 겪습니다. 우리 모두는 열병에 걸려 누운 베드로의 장모와도 같아서, 주님께서 먼저 당신 손을 우리 손에 대시지 않는 이상 ‘자기 섬김’의 ‘열’이 가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먼저 올바로 섬기라고 내 손을 만져 주시고 내 발을 씻어주신다면, 비로소 나도 베드로의 장모처럼 “일어나 그분의 시중을 들게”(마태 8,15) 됩니다. 사실 주기보다 받기가 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정녕 가난한 사람만이 받을 줄 알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받는 위치에 나를 둠으로써만 참으로 줄 수 있게 됩니다.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것이 그 어떤 조언보다 큰 위로의 힘을 발휘할 때가 많습니다. 마리아의 모습이 참으로 신비스런 광채로 싸여 우리 앞에 빛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루카 10,39)** – 마리아는 지금 주님으로 하여금 자신을 섬기도록 허용해 드리고 있는 셈입니다. 그는 주님을 섬기되, 자기 위주로 하지 않고 주님 위주로 섬기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사는 사람 마리아는, ‘이러이러한 것을 해야 이분을 돕는다’고 예단하여 무턱대고 움직이기 전에, 주님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그저 함께 있고 싶어 하시는 그분 마음의 움직임에 마리아의 마음결이 예민하게 감응합니다. 마리아의 이런 듣는 자세는 그 자체가 이미 복음 선포입니다. 복음이 살과 피를 입고 그에게서 육화되어 있습니다.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 서한 한 구절이 생각나는군요.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하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이, 실천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중요하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이다.”[4] 상대방이 있는 자리에 동일한 처지로 함께 현존하기! 하느님께서 사람을 ‘돕는다’는 것도대개 이런 것이 아니던가요? 강생의 깊은 이치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니던가요? 강한 마르타, 도움이 되어 주겠다며 분주한 마르타는 사실 그리 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정작 약하고 가난한 마리아가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도움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신을 작고 가난하게 하기에, 심김에 있어서도 주도권을 쥐기보다 주도권을 넘겨주기에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루카 10,39).** – 마르타는 여기서 제법 심각한 심리적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힘든 일은 내가 다 하는데, 정작 행복하고 충만한 쪽은 왜 마리아인가?’ 그가 주님께 던진 항의성 발언(‘보고만 계십니까?’)에서 독자가 생색뿐 아니라 질투의 기운까지 감지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잘 읽어보면 마르타 역시, 서운한 느낌을 잔뜩 담고 있긴 해도, 주님께 자신의 약함을 고백하고 비로소 도움을 청하고 있는 듯이 느낍니다.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 10,40). – 그리고 바로 여기가 마르타가 위기에서 벗어나는 실마리인 것 같습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41-42). – 정작 필요한 것 꼭 한 가지, 그것은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섬김의 직무, 모든 사도직의 진정성을 보장하는 ‘반석’(마태 7,25 참조)입니다. 그리고 이 반석 위에 설 때에만 모든 걱정 근심과 두려움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사도 6,2).*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마태 6,33-34). – 우리의 ‘독서’가 서서히 ‘묵상’으로 옮겨감을 느끼시는지요? 내 안에 숨은 마르타의 여러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말씀께서 이를 통해 나에게 도전해오고 계심을 느낀다면, 우리의 묵상은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이나 내 주변에서 발견되는 마르타를 비판하고 있다면, 이것은 ‘거룩하지 못한 독서’의 전형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진도가 빠른 분은 마르타처럼 주님께 스스로의 약함과 위선을 고백하고 도움을 청하면서 이미 ‘기도’의 단계에 접어들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 기도의 끝, 어느결에 마리아처럼 주님의 발치에 머물며 앉아있는 자신을 발견하며 ‘관상’의 문지방을 넘어서고 있는 분도 계실 것이고요. 정작 필요한 것은 하나뿐입니다. 그 ‘하나’의 지점, 말씀 경청의 그 지점을 우선적으로 선택한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정작 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는 저 신령스런 무위無爲의 도道에 통하게 될 것입니다.[5]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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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로 표시된 지점은 ‘연상’의 방법, 즉 말씀으로써 말씀을 해석하는 ‘미드라쉬’ 독서법의 적용이고, **표는 되새김 즉 반복 암송 방법을 적용하여 묵상할 수 있는 지점입니다. 이 두 방법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장들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여기서 기도와 관상의 과정에 대한 설명을 생략하는 이유는, 읽기와 묵상까지만 제대로 되면 기도와 관상은 절로 뒤따라오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독자 여러분께서 직접 기도해보시고, 마치 부활날 아침 빈 무덤에서와 같이 이 단락에 신령스레 고여 있는 말씀의 빛 아래 머물러 계셔 보시기를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을 기록하셔서 위에 제시된 제 알량한 묵상에 덧붙여 보신다면, 이 장은 독자 여러분과 저의 공동 저술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 여기서 큰 철학자 E. 레비나스의 명쾌한 한마디를 늘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구절이 온전한 의미를 지니고 울리기 위해서는 전체 성경이 그 구절의 맥락이 되어 있어야 한다. 한 구절을 충만히 해석하기 위해서는 책 전체가 필요하다”(E.Levinas, De Dieu qui vient à l’ idée, Paris 1982, 144). [2] 예컨대 I. Gargano, Lectio divina su il Vangelo di Luca/1, Bologna 2000, 125 참조 [3] 이 지점에서 헨리 나웬이 ‘그리스도교 지도력’을 주제로 하신 말씀 한 구절을 상기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의 가장 큰 모순 중의 하나는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이 끊임없이 권력의 유혹에 굴복하였다는 점입니다. 정치적 권력, 군사적 권력, 경제적 권력 혹은 도덕적 권력입니다.…교회의 고통스러운 오랜 역사 역시 사랑보다 권력을, 십자가보다 통솔을, 인도되기보다는 인도하는 것을 선택하려는 유혹을 끊임없이 받은 사람들의 역사입니다. 이 유혹을 끝까지 이겨내고 우리에게 희망을 준 사람들이 진짜 성인들입니다.”(헨리 나웬,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리스도교 지도력에 관한 성찰’, 한현 옮김, <참사람되어> 2001년 1월 별책부록, 36-38.) [4]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돌베개 1998, 313 [5] <노자老子> 37장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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