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금의 시대에 우리는 우리의 ‘환대’를 되돌아보고 쇄신해야 한다. ‘환대’는 ‘나 자신 안에 무엇인가를 받아들인다’라는 뜻이면서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고 개방성이며 관대함이다. ‘환대’라는 말이 병든 이를 보살피는 ‘병원(hospital)’, 그리고 여행자와 가난한 이, 외국인들에게 도움과 안식처를 제공하는 ‘피난처(hospice)’라는 말과 뿌리가 같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환대는 우리의 일상에서 다른 사람을 환영하는 일이다. 과거에 고아와 과부, 가난한 사람들을 환영하는 것이 오늘날에는 특별히 외국인, 난민, 이민과도 같이 존엄성을 잃을 위험에 처한 이들을 환영하는 것이다. (* 역자 주-우리나라 개신교에서는 이를 ‘영접’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환대는 사실 나와 너의 관계,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는 누군가와의 만남, 내 자아나 내가 속한 집단의 중심에 위협이 되는 상황이다. 그런 의미로 사르트르Sartre(1905~1980년)는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단언했다. 그렇지만 타인은 인간에게 구원이고 생명이며 생명의 탄생이다. 물론 우리 각자가 누군가에게 다가간다는 것은 서로 얼굴을 보아 알게 된다는 것이고, 서로 질문과 도전을 받는다는 것이며, 서로 취약점을 알게 된다는 것이고, 상호 이해의 부족에서 발생할 수도 있는 폭력을 서로 감당해야 한다는 책임을 말한다. 폴 리쾨르Paul Ricœur(1913~2005년)는 『타인이 나를 형성하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타인으로 생각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사실 우리의 운명은 부모의 사랑을 얻기 위해 나와 경쟁하는 타인의 존재를 고통스럽게 받아들여야만 하고, 내 안에 그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야만 하는 것처럼, 태어나면서부터 항상, 타인의 존재로 특징지어지는 존재이다.
낯선 이를 위한 환대가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위대한 미덕으로 여겨져 진정한 환대를 위한 규범이 되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 낯선 이를 만나 반갑게 인사를 시작하는 것으로부터 손을 잡고 그를 집으로 데려가 그가 발을 씻을 수 있도록 하고, 음식을 대접하며 밤을 보낼 수 있도록 하는 등, 이렇게 사람들은 사람을 환대하면서 신神을 영접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낯설고 모르는 이, 거지를 받아들이는 것을 신이나 천사들을 모실 가능성으로 여긴 것이다. 유다이즘이나 그리스도교에서 낯선 이를 환대하는 것은 항상 그 낯선 이의 얼굴에 하느님께서 당신 얼굴을 숨기고 계신다는 신학적인 의미를 담는다.
조나탄 색스Jonathan Sacks(1948~2020년)라는 거장은 환대라는 개념을 두고 『낯선 이의 얼굴에서 하느님을 보는 사람은 유령이나 귀신에게서 하느님을 보는 사람보다도 훨씬 위대하다. 아브라함 때로부터 우리의 임무는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환대와 우정의 몸짓으로 하늘을 땅으로 내려오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
적대적이며 의심의 눈초리로 이주민들을 대하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유다이즘이나 그리스도교의 뿌리가 우리의 뿌리라고 어떻게 감히 말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람들이 정말 무엇인가를 알고나 하는 말일까, 알고 있을까, 아니면 그냥 단순하게 무식한 것일까?(*번역 글, 엔조 비앙키Enzo Bianchi, 자유를 찾는 사람들Chi cerca una vita nella libertà, 이탈리아 일간지-라 레푸블리카, 2021년 9월 6일 *이미지-영문 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