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비하(self-deprecation)는 자기 자신을 과소평가(belittling), 저평가(undervaluing), 경멸(disparaging)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비난(reprimanding)하는 행동, 혹은 과도하게 겸손한, (겸손 아닌 겸손의) 행동을 말한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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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 화목하지 못한 믿음이 있다. 그런 믿음의 소유자는 자신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으로 대치하려 한다. 이런 믿음에서 하느님은 부족한 자존감을 메꿔주는 이(로 전락하고 만다.)
자신을 보잘것없고 하찮다고 여기는 것이 겸손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자신에 대한 믿음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겸손은 스스로를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중시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경시하는 것과 다른 사람을 중시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고 비하하는 것을 하느님이 좋아하실까? 겸손은 좋아하시지만, 비굴함이나 굴종은 좋아하지 않으실 것이다. 겸손은 하느님의 본질에 부합한다. 억지로 강해질 필요는 없다. 우리의 약함 속에 하느님의 힘이 거한다. 하지만 우리 안에 하느님이 강해지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하찮다고 폄하할(깎아내리거나 자학할) 필요는 없다.
성령은 우리가 겸손하면서도 당당한 자로 나아가길 원한다. 자신의 약한 섬유결을 보며 자신이 정말 못났고, 약하고, 별 볼 일 없고, 병들고, 무능하고, 죄 많고, 무가치하며, 상처받았고, 믿음도 없고, 망가졌다며 의기소침해하는가? 성령은 그런 의기소침을 극복하도록 격려한다. 성령을 의지함으로 종교적 열등감에 맞서라! 성령의 부드러움과 힘을 신뢰하라. 나무와 잎은 막 돋아날 때는 연하다. 그러나 죽을 때는 바싹 마르고 거칠다. 하느님의 영은 우리 안에 연한 마음을 창조한다. 젊고 늘 새롭게 그를 신뢰하도록 해 준다.(시편 103,5) 현이 공명판을 자극하듯이 하느님은 우리의 마음에 이렇게 호소한다.
「‘나 자신이 이렇게 의기소침해 있는데 어떻게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고 위로하겠어? 나 스스로가 이렇게 약하고 자신이 없는데 어떻게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겠어?’라고 말하는가? 그런 말을 입에 담지 말라. 나는 너의 의심, 질병, 의기소침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너를 위로하고, 북돋우고, 세우는 자로 불렀다.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더 강하고 건강하고 확신 있는 자가 너보다 내게 더 잘 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의 친밀함을 구하라. 나를 의지하여라. 내 영이 네게 머물 것이다. 네 약함 속에서 성령이 너를 통해 일할 것이다. 너는 네가 받은 위로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것이고, 함께하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도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게 오라. 너 수고하고, 짐 지고, 병들고, 불안하고, 의기소침하고, 의심하는 친구야. 강건하라. 일어나라. 내게 배우고, 네 소명을 받아들여라!」(참조. 즈카 4,6 이사 30,1-7 마태 11,28-30)
사랑에 대한 가장 강한 응답은 바로 그 사랑을 믿는 것이다! 사랑은 믿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시각으로 삶을 보면 우리의 삶은 달라진다. 소명을 무겁고 부담되는 것으로 이해하지 말고, 오히려 소명과 더불어 춤춘다고 상상하면 어떨까. (힘든 날들을 보내던 때 어느 날 밤 정말로 그런 꿈을 꾸었다. 꿈에서 나는 소명과 더불어 춤추고 있음을 깨달았다!) 능력을 발휘하는 자가 아니라 사랑받는 자는 삶이 달라진다!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로마 8,37)라는 말씀처럼 말이다.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삶은 완고한 태도로 이를 악물고 사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지혜를 더 깊이 이해하고, 그 지혜가 삶을 인도하도록 삶을 내어드리지 않겠는가. 다른 이들이 망가짐, 손상, 침체를 보는 곳에서 사랑은 발전 가능성을 본다. 사랑은 ‘지금까지 이루어진 것들’을 지각하고, ‘앞으로 이루어질 것들’을 소망한다. 시간의 이 두 차원 안에서 비로소 거룩한 현재가 생겨난다. 되어가는 과정으로서의 현재다.
*소명이 먼저인지 사랑이 먼저인지를 묻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 소명이 곧 사랑인 것을 너무 먼 훗날에야 어렴풋이 안다.
종교적인 방식으로도 소명에서 멀어질 수 있다. 적법성 [칸트 철학에서 외형상 도덕률에 일치하는 일]만을 강조하는 ‘율법주의’를 통해서 그럴 수 있다. 율법적인 삶은 계명에 대한 사랑이 과도하다기보다는 삶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 것이다. 그래서 율법주의는 삶의 가치를 훼손한다. 율법적인 사람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 대해 삶 자체에 대해 실망한다. 그리고 법칙을 하느님으로 만든다. 이런 삶에서 법칙은 돌처럼, 죽어버린 하느님 사랑의 무덤 앞으로 굴러가 머문다.
뮌헨 국립독일박물관에는 독특한 악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어떤 피아노는 외양은 여느 피아노와 다를 것 없어 보이지만, 사실 펀치테이프에 의해 자동으로 연주되는 악기다. 내부에는 도르래바퀴가 돌고 있어서, 감겼던 기계장치가 풀리면 건반이 자동으로 움직인다. 단추를 누르기만 하면 건반이 저절로 움직이며 똑같은 멜로디를 반복한다. 완벽한 연주다. 그러나 영감이 없는 연주다. 이 기계는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이 단순히 미리 입력된 기계장치로부터 나온다. 그럴싸하지만 진짜 악기는 아니다. 이런 악기를 보며 생명으로 채우지 못하고 그저 기계적으로 주어진 일을 반복하는 소외된 인간이 떠올랐다. 기계적으로만 움직이는 날들에 우리는 그런 악기와 닮아있지 않을까.
살아 있는 악기는 다르다. 살아 있는 악기는 주어지는 자극과 사건을 해석할 수 있다. 그러려면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들어야 한다. 영감과 해석, 들음과 행함, 이것이 우리의 삶에 ‘내적 음악성’을 부여한다.
우리의 믿음 역시 자동 피아노처럼 변질될 수 있다. 그럴 때 모든 것은 기계적으로, 미리 프로그래밍 된 대로 돌아갈 따름이다. 가만히 들어보면 내적 생명 없이 기계적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서는 종교적 펀치테이프가 우리와 더불어 연주를 한다. 만약 세계가 그런 자동 피아노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세계는 하늘의 장난감에 불과할 것이다. 영감도, 해석도 없이, 기술적으로는 완벽하지만, 생명은 결여된 상태일 것이다. 우리는 탄식할 이유가 없겠지만, 살아갈 이유도 없게 될 것이다.
예수는 율법주의에 신랄하게 맞선다. 예수를 참을 수 없어 한 것은 종교적으로 해이한 사람들이 아니라 독실한 신앙인들이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마태 12,14) 예수는 삶을 피폐하게 하는 종교권력을 비판한다. 그런 종교성 안에서 인간의 본질이 왜곡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악기이지 자동연주기계가 아니다. 예수도 율법주의의 건반기계장치에 기름칠을 하는 대신, 인간의 마음에 하느님 나라의 울림에 대한 예감을 불어넣어 주셨다. 우리는 자동연주 기계가 아니라, 하느님이 만지는 악기여야 하기 때문이다.(마틴 슐레스케, 울림, 유영미 옮김, 니케북스, 2022년, 194-198쪽 *스크랩과 사족蛇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