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 13,24-32(연중 제33주일 ‘나’해)

“그 날과 그 시간”(마르 13,32) by B. Facundus, The Last Judgment, 1047년, Wikimedia

오늘 복음으로 ‘나’해의 전례에서 마르코복음 낭독을 마감한다. 오늘 복음 말씀은 ‘종말에 관한 예고문’ 형식인 13장의 마지막으로서 예수님의 공생활 말기, 수난과 죽음이 임박한 중에 가르침과 위로 및 당부를 하시는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13장의 서두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마르 13,1) 성전이 대단하다고 말씀드리자 예수님께서는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하시며 성전이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뒤이어 “성전 맞은 쪽 올리브 산에 앉아 계실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아가…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마르 13,4) 하고 여쭙자, 열두 사도 중에서도 특별히 가깝게 여기신 것으로 보이는 부르심을 받았던 처음 네 제자(참조. 마르 1,16-20)에게 따로 답해주시는 과정이 오늘 복음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당시 유다인들에게 자랑스러웠던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는 말씀은 실로 세상 종말처럼 인식이 될만했다.

오늘 복음이 위치한 마르코복음 13장, 예수님의 ‘종말’에 관한 말씀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묻는 물음에 대한 답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서를 통하여 알려진 생각들과 이미지를 이용하시면서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 앞에 장엄하게 서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마르 13,2) 하시고, 재난과 고통의 때가 올 것이라고 선언하신다.(참조. 마르 13, 5-23) 그리고 마지막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마르 13,24) ‘최후의 심판’을 위해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참조. 마태 25,31-46)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일종의 묵시문학의 형태를 띠고 있으면서 계시적이고 예언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진다. 때로는 모호할 수 있고 해석에 어려움을 느낄 수도 있는 대목이다.

1. “하늘의 세력들

그 무렵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을 흔들릴 것이다.”(마르 13,24-25)라는 구절로 복음은 시작한다. “성전”이 파괴되고 “전쟁”과 “박해”, “지진”과 “기근”, 그리고 “황폐”나 “거짓 그리스도”와 같은 역사의 시대가 지난 다음에 사람의 아들이 오신다. 온 인류, 이스라엘 백성, 주님의 교회에 닥칠 무서운 시련이 닥쳐 창조된 우주의 전체 질서에 격변이 있을 것이다. 무서운 말씀이지만 다른 한편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원하셨으며 유지하셨지만 결국 끝이 있고야 말 이 세상에 대한진리’를 담고 있는 말씀이다. 한 인간에게 죽음으로 끝이 있듯이 이 세상에도 끝이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실재와 현실에 대해 말씀을 하시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창조는 소멸의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다. 우리로서는 이를 “한처음으로의 회귀이자(참조. 창세 1,1-2) “새로운 창조”이며 “새 하늘과 새 땅”(참조. 이사 65,17;66,22 2베드 3,13 묵시 21,1)의 마련으로 여긴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그저 물질적인 것들의 소멸이요 분해이며 사라짐이나 파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 창조의 종말은 고통과 죽음과 악에서 벗어나는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하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으며 선뜻 이해할 수도 없는 완전히 새로운 창조이며 변형이다.

“해”, “달”, “별”, “하늘의 세력”에 관한 말씀은 인간이 볼 수 있는 천체를 두고 묵시적 이미지들로 하시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변화와 변형의 과정일 것이므로 생명 자체를 없애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과학에 근거하여 영원처럼 확신하는 우주 구조 역시 처음이 있었을 것이고 마지막이 있을 것이다. 바오로 사도께서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로마 8,22)라고 통찰력 있게 표현한 것처럼 주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원하셨던 우주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구하실 것이며 마침내 당신 나라의 처소로 삼으실 것을 안다.

2.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우주적 위기의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사람들이 볼 것이다.”(마르 13,26) 하시며 예수님께는 다니엘 예언서 7,13-14을 인용하여 말씀하신다. 하늘로부터 영원히 어둠을 정복할 결정적인 빛으로 오실 메시아의 영광스러운 재림에 관한 내용이다. 예수님의 재림은 역사의 거부와 부정否定이 아니라 인간 역사의 변화요 변형을 위한 그분의 원하심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해할 수 없고 형언할 수 없는 이와 같은 내용을 사도들이 알려주는 대로 “전능하신 주님”(2코린 6,18),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느님”(묵시 1,8),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 분!”(묵시 4,8), 그분 주위에 “무지개가 둘려 있는”(묵시 4,3;10,1) 분으로 찬양하면서 세상의 왕들이나 황제의 모습을 따라 인간적인 영광의 모습으로 그리고자 했다. “전능하신 주님” 혹은 “전능하신 주 하느님” 모두 ‘판토크라토르, Παντοκράτωρ, Pantokrátor’라는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실제로는 어떤 모습으로 묵상해야 할지 잘 모른다. 단지 한 가지, 우리가 우리 인생을 사는 동안 ‘굶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헐벗은 자’, ‘병든 자’, ‘감옥에 갇힌 자’(참조. 마태 25,31-46)들, 우리가 알아보지 못했던 사람들, “그분을 찌른 자들”뿐만 아니라 그 ‘찌름’에 희생당한 가난한 사람들조차도 모두 그분을 알아볼 것이며, “땅의 모든 민족들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묵시 1,7)임을 알 뿐이다. 그리고 형제나 자매를 찌른 것이 자비로우시나 엄하신 재판관으로 오시는 그분을 찌른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다시 오실 주님의 오심은 선택받은 자들, 의로운 이들, 다른 이들을 믿어주고 함께 소망하며 사랑의 행동으로 이웃을 섬겼던 모든 이들이 주님 앞에 모시는 때가 될 것을 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마르 13,27) 하신다. 그렇게 주님 곁에 모인 이들은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이사 35,10) 한 대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과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묵시 21,4) 한 대로 다시는 죽음도, 슬픔도 없는 즐거움만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언제 다시 오실까? 제자들은 예수님께 “저희에게…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마르 13,4) 하고 직접 여쭈었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그날이지만, 그날은 반드시 이루어질 하느님의 약속에 의한 날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언제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 내가 곧 간다.”(묵시 22,20) 하신 주님께서 반드시 오신다고 하셨으니 그 말씀을 믿고 기다리는 확신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언제를 묻는 것보다 오히려 구원의 그 재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 인내를 가지고 그날을 항구하게 기다리면서 기쁘게 맞이하려는 사람인지가 중요하다. “그날과 그 시간은” 비밀에 감추어진 시간이라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또 천사들도 알지 못하고 “오로지 아버지만 아신다.”(마태 24,36)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식별의 영으로 역사를 잘 관찰하고 “시대의 표징을” 읽어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징은 분별하지 못한다.”(마태 16,3) 하고 우리를 지적하신 바 있다. 이러한 예수님의 지적은 우리의 우둔한 식별력을 두고 우리가 책임 있게 행동해야 한다고 부추기는 말씀이다.

3. “무화과나무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줄 알아라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마르 13,28) 하시면서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때와 관련하여 겨울이 지나 잎이 무성해지면서 열매를 준비하는 여름철의 무화과나무를 예로 드신다. 이 말씀은 단순히 절기를 가늠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자연은 하느님의 첫 번째 책이다. 우리는 과연 그 책의 페이지마다 깊게 감동하며 묵상하는가? “내가 곧 간다.”(묵시 22,20) 하신 분을 기다리며 시대의 표징을 읽어내고 있는가?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마르 13,29-31) 하신다. “아,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시편 95,7) 하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역사를 읽어낼 줄 알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오늘 나의 현실 안에서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그는 자비로우시면서도 엄중한 그분의 오심에 준비된 사람일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우리 각자의 개인적인 역사처럼, 의미 없는 말과 사건으로 이어지는 단순한 결과로만 이해될 수 없습니다. (또한) 참된 결정의 결과인 선택을 할 수 없도록 막으면서, 마치 모든 것이 모든 자유 공간을 없애려는 운명에 따라 이미 정해진 것처럼, 운명론적인 관점으로 해석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백성의 역사와 각 개인의 역사가 도달해야 할 목표란 바로 예수님과의 결정적인 만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만남이) 이루어질 시간과 방식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정말 중요한 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날, 우리 각자는 하느님 아드님의 말씀이 자신의 개인적 실존을 밝혀 주었는지, 혹은 자기 자신의 말에만 신뢰를 두면서 (말씀에) 등을 돌렸는지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날은) 우리 자신을 아버지의 사랑에 결정적으로 맡기고 그분의 자비에 신뢰를 둬야 할 최고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아무도 그 순간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그 순간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보이고 싶어 하는 이미지를 (상대방이) 믿게 하도록 우리의 행동에 가끔 사용하는 교활함이 더는 필요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돈과 경제적인 수단의 권력을 통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과신하며 주장하는 것도 더는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며 우리가 이 (지상) 삶에서 실현했던 것만 우리는 지니게 될 것입니다. 곧, 우리가 살아왔던 모든 것과 그렇지 않은 것, 혹은 실행을 소홀히 했던 것만 지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우리가 주었던 것만 가져가게 될 것입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8년 11월 18일 삼종기도)』

오늘 복음에 바로 이어지는 대목(마르 13,33-37)은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마르 13,33) 하는 구절로 시작한다. 마르코복음 13장 전체 ‘종말에 관한 말씀’의 결론부에 해당하는 말씀으로서 ‘나’해를 시작하는 대림 제1주일의 복음 말씀으로 들었던 말씀이다. 잠들어 있거나 영적으로 무뎌져 있지 말고 주의를 게을리하지 말고 예민한 분별력으로 깨어 있어야만 한다는 말씀이다. 과연 끝이고, 끝이 있을까? ‘그렇고말고’ 이다. 그러나 그 끝날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신”(필리 2,6-7) 하느님의 아드님, 사람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라는 이름을 지닌 날이다. “아드님께서도 모든 것이 당신께 굴복할 때에…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1코린 15,28)라는 말씀대로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 영광에 싸여 오실 그날에 그분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이다. 그날에는 인간이 하느님 안에 있을 것이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어 우리 각자는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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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와 시간

『‘너희에게는 시계가 있지만, 우리에게는 시간이 있다.’ 인도의 한 노인이 굉장히 바쁜 백인 사업가에게 한 말이다.

그리스인들은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를 구분한다. ‘크로노스’는 측량·측정할 수 있는 시간, 즉 세월이다. 배에서 쓰이는 정밀한 시계 크로노미터가 여기서 나온 말이다. 서구인들은 측량할 수 있는 시간에 구속되어 있다. 분 단위로 약속을 잡고, 끊임없이 시계를 보며, 상대가 약속 시간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이 약속 시간에 제대로 도착할 수 있는지 등을 생각한다. 모든 것이 정해진 시간 내에 해결되어야만 한다. 계량할 수 있는 시간은 우리에게 인생을 좁은 코르셋 안에 꼭꼭 쑤셔 넣으라고 강요한다. 크로노스의 신은 폭군이다. 크로노스의 명령을 따르는 사람은 시간을, 기쁘고 즐거운 것이 아니라 폭력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인도인들은 카이로스의 신을 더 숭상한다. 카이로스는 좋은 순간, 환영받는 때를 말한다. 크로노스가 양적 시간을 의미한다면 카이로스는 시간의 특별한 질을 가리킨다. 카이로스는 내가 나에게 몰입하는 순간, 완전히 나로 존재하는 순간이다. 인도인들은 시간을 ‘결정적인 순간’으로 이해하고 스스로에게 시간을 준다. 그리고 시간을 즐긴다. 내가 완전히 ‘순간’에 존재하게 되면 그때 시간은 멈춘다. 그리고 나는 ‘지금’이 바로 멈추어야 할 가장 적절한 때 또는 일해야 할 때, 생명을 번성시켜야 할 때,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시간에 대하여 코헬렛의 저자는 그리스와 이스라엘의 지혜를 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고칠 때가 있으며 부술 때가 있고 지을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 뛸 때가 있다.”(코헬3,1-4)(안셀름 그륀, ‘삶의 기술Buch der Lebenskunst’, 59-61쪽)』

2 thoughts on “마르 13,24-32(연중 제33주일 ‘나’해)

  1.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를 지금까지 시간(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알고 미래를 구하며) 묵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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