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자 성 요한(6월 24일)

St. John the Baptist by El Greco, 1610년경, 부분화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통해 이루시려는 소명만을 생각하며 거친 광야에서 모진 생활로 극기의 삶을 살았다. 그의 삶은 여태껏 누려보지 못한 풍요의 삶을 사는 오늘날의 인류에게도 시대를 초월해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무엇보다 그는 진실했다. 사는 대로 말하고 말하는 대로 살았다. 예수님께서도 요한을 두고 사람들에게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고운 옷을 걸친 자들은 왕궁에 있다.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7-11) 하셨다. 요한은 이처럼 꾸미거나 부풀리지 않으며, 소박하고 정직한 삶, 그 누구도 아닌 그만의 삶을 온전히 살았다.

그는 겸손했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태 3,11) 하면서 한사코 자기가 가리켜야 하는 분만을 강조했다.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마태 3,5-6)라는 기록에서 보듯이 나름대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면서도 세례자 요한은 조용한 겸손을 산다. 거창한 겸손도 아니고, 가식적인 겸손도 아니며 감동적인 겸손을 끝까지 산다. 지나는 사람들에게 깜박이는 신호가 아니라 신호가 가리키는 바로 그분,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그분을 보아야만 한다고 힘차게 깜박거렸다.

그렇지만 그는 구체적인 현실주의자였다. 무수히 몰려오는 죄인들을 공감과 안타까움, 눈물로 안아주며 그들에게 세례의 물을 부으면서도 본질에서는 타협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세례를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세례의 의미를 구체적인 삶으로 바꾸어야만 한다면서 낙타 털옷을 입고 최소의 음식으로 연명하는 자신을 가리키며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3,11) 하였고, 남들에게 요구해야만 하는 직분이나 권력을 위임받아 이를 행사할 수 있었던 이들에게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루카 3,13.14) 하고 일렀다.

그는 의로움에서 거침이 없고 불굴의 신념을 살았다. 앞뒤가 안 맞는 이들에게는 “독사의 자식들아!”(마태 3,7 루카 3,7)라는 호된 질책으로 그들이 깨우치기를 호소했고, 동생의 여자를 빼앗았던 왕에게마저 “여러 차례” 경고하다가 결국 감옥에 갇혀 수난하고 어처구니없이 목이 잘리고 말았다.(참조. 마태 14,3-12) 피터 볼프강Peter Wolfgang이라는 이는 「오늘날까지 온 세상 곳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는 까닭은 그리스도와 복음을 선포하기 때문이라기보다 언제 어디서나 (여러,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 ‘불법적인 간음’을 자행하는 이들을 고발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유혹에 빠진 약한 이들에게 질 것이 뻔한 싸움을 걸어 끝내 지고 만 세례자 요한 같은 이들이 오늘날 진정 강한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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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마누엘 주앙 페레이라 코레이라(P. Manuel João Pereira Correia)신부의 글을 번역한 것이다. 그는 근위축성 측삭 경화증(ALS·루게릭병)을 앓으면서도 눈동자 인식 컴퓨터를 통해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포르투갈 출신의 콤보니 선교 수도회(mccj) 소속 가톨릭 신부이다. 원래의 이탈리아말 본문은 다음 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https://comboni2000.org/2024/06/23/san-giovanni-battista-cinque-tappe-luoghi-e-tempi-della-sua-vocazione/

세례자 요한: 그의 성소를 이루는 다섯 가지 단계, 장소, 시간

세례자 요한은 구약(첫째 계약)의 기슭에서 옛 약속의 완성이자 새로운 약속의 시대인 새로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다리다. 그는 주님 앞에 앞서 보내져 그분의 길을 닦는 ‘가장 높으신 분의 예언자’다.(루카 1,68.76.79) 그는 스스로를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마태 3,2)이자 ‘신랑의 친구’(요한 3,29)라고 선언한다. 예수님은 그를 향해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라는 최고의 찬사를 보낸다.

이러한 사명은 지극히 특별한 성소(부르심)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는 우리 자신의 그리스도인 소명을 비추어 주는 모범이 되기도 한다. 요한의 소명이 연결된 다섯 가지 장소인 성전, 집, 광야, 요르단강, 헤로데의 궁전(감옥)을 이정표 삼아 그 다섯 단계를 살펴본다.

1. 성전 생명과 소명이 잉태되는 하느님의 자리

즈카르야가 자기 차례가 되어 하느님 앞에서 사제 직무를 수행할 때였다. 사제직의 관례에 따라 제비를 뽑았는데, 그가 주님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때 주님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분향 제단 오른쪽에 섰다.”(루카 1,5-25 참조)

세례자 요한의 성소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의 탄생이라는 기쁜 소식이 선포되면서 시작된다. 가브리엘 천사가 이 소식을 전했을 때 즈카르야는 당황하고 불신한다. “즈카르야야, 두려워하지 마라. 하느님께서 네 기도를 들어주셨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요한이라는 이름은 ‘하느님은 자비하시다’라는 뜻이다. 우리의 모든 이름 역시 하느님의 자비를 암시하고 있다.

삶은 존재의 원초적 거처인 ‘성전’에서 시작된다. 우리 모두는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마음속에서 잉태된다. 부르심을 받은 이의 생명, 선택, 축성, 사명은 바로 그곳에서 흘러나온다. “모태에서 너를 형성하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고, 네가 태어나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너를 세웠다.”(예레 1,5)

존재의 근원과 연결된 이 탯줄을 끊어버린 삶은 생명력을 잃고 시들 수밖에 없으며, 인생의 수많은 음침한 미로 속에서 별 없는 밤의 어둠을 헤매는 신세로 전락한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의 유대를 가꾸지 않고, 자신의 내면 성전을 자주 찾지 않는 성소(소명)는 얼마 못 가 사방에서 소리치는 수많은 소음, 환상과 망상, 가시 돋친 상황들에 짓눌려 숨이 막히게 된다.

예언자 하까이는 우리 내면에서부터 먼저 재건되어야 할 하느님의 성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 집은 허물어져 가는데, 너희가 지금 벽널을 댄 집에서 살 차례냐? 이제 만군의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희의 길을 돌이켜 보아라. 너희는 씨를 많이 뿌려도 거두는 것이 적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다. 품삯을 받아도 구멍 뚫린 주머니에 넣는 꼴이다!… 어찌하여 그러냐? 나의 집은 허물어져 가는데, 너희는 저마다 제 집 일에만 바쁘기 때문이다.”(하까이 1장 참조)

2. 집 생명과 소명이 자라나는 양육의 자리

“즈카르야는 봉직 기간이 차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 뒤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였다. 엘리사벳은 다섯 달 동안 숨어 살았다.”(루카 1,23-24)

삶은 매 걸음마다 우리를 경탄하게 만드는 놀라운 아름다움과 힘, 풍요로움을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지극히 취약하다. 생명은 대지의 품에 안겨야 하고, 거주할 집을 찾아야 하며, 자신을 먹이고 다독이며 보호해 줄 태중에 머물러야 한다.

요한의 태동하는 생명과 예언자적 소명은 즈카르야의 집과 엘리사벳의 태중이라는 아늑한 요람을 만났다. 이처럼 모든 부르심에는 ‘집’, 즉 우호적인 환경이 필요하다. 그 집은 가정이 될 수도 있고, 그리스도인 공동체나 지지해 주는 그룹이 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소명이 태어나고 자라는 데 필요한 조건을 제공하는 일종의 ‘온실’이다. 특별한 부르심은 일종의 희귀한 식물과 같아서 특수한 환경조건을 요구한다. 시편 128편은 그 환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주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길을 걷는 이 모두 복되어라. 네 손이 애쓴 만큼 네가 먹으리니, 너는 행복 가득 복을 받으리라. 너의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풍성한 포도나무 같고, 네 밥상에 둘러앉은 네 자식들은 올리브 햇순들 같으리라. 보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이렇듯 복을 받으리라.”

3. 광야 정화와 단련의 자리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루카 1,80)

사람이 온실 속에서 영원히 살 수는 없다. 식물이 자신의 모든 잠재력을 발휘해 성장하고 발전하려면 어느 시점에는 외부 환경, 즉 공기, 바람, 태양, 비와 상호작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바람을 견뎌내고, 혹독한 겨울 추위를 버티며, 여름의 무더위를 이겨내야 한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정착한 이유는 그곳이 자신을 사명으로 이끌어 줄 영적 환경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는 광야에서 엘리아 예언자의 경험과 40년 동안 탈출기를 겪은 이스라엘 백성의 경험을 몸소 체득한다. 그는 철저히 하느님의 섭리에 의존했기에 광야가 제공하는 메뚜기와 들꿀만으로 만족했다. 그곳에서 하느님은 그의 마음에 대고 말씀하셨고(호세 2,14), 그를 당신의 ‘소리’가 되도록 준비시키셨다.

부르심을 받은 모든 이의 여정이 이와 같다. 광야의 시험, 즉 고독, 침묵, 소박함, 어려움, 역경의 시간이 없다면 단련된 소명이란 존재할 수 없다. 작은 장애물만 만나도 태양이 그것을 시들게 하고 가시덤불이 숨을 막아버린다. 예수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루카 복음은 이렇게 전한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마흔 날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 그 기간이 끝났을 때에 시장하셨다.”(루카 4,1-2)

4. 요르단강 사도직과 파견의 사명지

광야에서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내렸다. 그리하여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를 용서받기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이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만들어라.’”(루카 3,2-4)

광야는 예언자의 사명을 위해 거쳐 가는 기능적인 단계이기도 하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을 만나 자신에게 맡겨진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광야를 떠난다. 그리고 광야와 가나안 땅의 경계인 요르단강 가에 자리를 잡는다. 그의 외침은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수많은 군중이 세례를 받기 위해 요르단강으로 모여들었다. 이는 새로운 여호수아이신 메시아 예수의 인도 아래,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 성경 속의 그 강을 새로이 건너는 것과 같았다.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때, 요르단강에는 이미 종말론적인 ‘생명의 물이 흐르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천사는 또 수정처럼 빛나는 생수의 강을 나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성문의 넓은 거리 한가운데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의 이쪽저쪽에는 달마다 열두 번 과일을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다달이 열매를 내어놓습니다. 그리고 그 나뭇잎들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 쓰입니다.”(묵시 22,1-2)

5. 감옥 순교와 영적 결실의 자리

그때 헤로데는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었다 (마르 6,17-29 참조)

세례자 요한에게 그러했듯, 부르심을 받은 모든 이에게도 감옥과 순교의 단계가 찾아온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하기” 때문이다(요한 3,30). 이 순간은 사랑과 사도적 결실을 증언하는 최고의 순간이다. 우리를 가두는 ‘헤로데’는 질병, 노환, 박해, 실패 등 다양한 형태로 찾아올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감옥에 갇히는 상황’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감옥 안으로 파스카 신비의 빛이 들어오게 하는 일이다. 다니엘 콤보니 성인은 자신의 선교사들에게 아프리카 땅에 묻히는 ‘숨겨진 주춧돌’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우리 위에 세워질 건물의 기초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듯, 그때 비로소 우리의 삶과 소명은 진정한 결실을 맺게 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더 읽을거리

세례자 요한의 손가락 http://benjikim.com/?p=8121

세례자 성 요한과 7음계 http://benjikim.com/?p=4615

3 thoughts on “세례자 성 요한(6월 24일)

  • 첼레스티노
    2024년 06월 22일 at 9:31 오전

    올바름을 생각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만이 올바름을 말할 자격이 있다고 해야겠지요? 우리는 어쩌면 올바름을 알기 위해 순례길에 나선 나그네일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우설이ㆍ
    2024년 06월 22일 at 11:40 오전

    의로움에 거침없는 불굴의 신념을 지닌 성인.
    세례자 요한의 행적에
    살짝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주말입니다.

  • Asella
    2024년 06월 22일 at 1:57 오후

    세례자 요한, 딱 대쪽같은 양반. 슬렁슬렁 사는 삶을 부끄럽게 하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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