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1주일 ‘가’해(마태 16,13-20)

오늘 말씀의 전례에서 듣는 말씀들은 ‘열쇠’라는 이미지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제1독서에서는 엘야킴에게 “다윗 집안의 열쇠”가 맡겨지고,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고 말씀하신다. 제2독서는 ‘열쇠’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인간에게 맡겨진 모든 권한과 사명의 궁극적인 근원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밝혀준다.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가기” 때문이다.

1독서(이사 22,19-23)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히즈키야 임금 시대에 궁궐의 높은 직책을 맡고 있던 세브나가 그 자리에서 물러나고, 힐키야의 아들 엘야킴이 그 자리를 이어받게 될 것이라고 선포한다. 하느님께서는 엘야킴에게 권한을 맡기시며 그를 “예루살렘 주민들과 유다 집안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다윗 집안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메어 주신다.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열쇠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맡겨진 권한과 책임의 상징이다.

2독서(로마 11,33-36)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스라엘과 이민족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묵상하며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얼마나 깊습니까!”라고 말한다. 인간으로서는 그분의 판단과 길을 다 헤아릴 수 없으므로 바오로는 결국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서 나오고, 그분을 통하여 존재하며, 그분을 향하여 나아간다고 고백한다. 이 말씀은 오늘 복음의 ‘열쇠’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인간에게 맡기시지만, 인간이 받는 권한은 언제나 하느님에게서 비롯되며, 하느님을 향해 사용되어져야 한다.

복음(마태 16,13-20)에서 예수님께서는 카이사리아 필리피에서 제자들에게 여론조사를 하시듯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신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 예레미야, 또는 예언자 가운데 한 분으로 생각한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거기서 멈추지 않으신다. 이제 질문을 제자들에게 돌리신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사람들의 생각을 묻던 질문이 이제 제자들의 고백을 요구하는 질문으로 바뀐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단순한 구경꾼으로 남겨두지 않으시고, 당신과 함께 걸어온 그들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대답을 요구하신다. 피에르 루이지 리치Pier Luigi Ricci의 표현처럼, “답은 우리를 만족시키고 제자리에 머물게 하지만, 질문은 앞을 바라보게 하고 우리를 걸어가게 만든다.”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한다. 이것은 예수님에 관한 정보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뜻만이 아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이신가?”라는 질문 앞에서 자신의 삶을 내어놓는 신앙의 고백​이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내 삶의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그분과 함께 걸어가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신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신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의 “다윗 집안의 열쇠”를 떠올리게 한다. 다윗 집안을 관리하는 권한을 상징했던 열쇠가 이제 예수님께서 세우시는 교회를 섬기도록 베드로에게 맡겨진다. 성경의 ‘열쇠’ 이미지는 권한을 상징하지만, 그것은 자기 마음대로 행사하는 특권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집을 섬기기 위해 맡겨진 책임이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열쇠뿐 아니라 “매고 푸는” 권한도 맡기신다. 교회를 가르치고 돌보며, 사람들을 하느님과의 친교 안으로 인도하는 사명이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다. 복음의 바로 다음 대목에서 그는 예수님의 수난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수님께 꾸지람을 듣는다. 장차 수난의 밤에는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연약한 베드로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랑과 자비로 품어주시며 부활하신 뒤 다시 찾아오셔서 “내 양들을 돌보아라.” 하고 당신의 양 떼를 다시 한번 거듭 맡기신다.(요한 21,15-17 참조) 그러므로 교회의 열쇠를 맡는다는 것은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그분의 양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열쇠는 특권이 아니라 봉사이며, 지배가 아니라 책임이다.

우리도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매주 신앙 고백을 한다. “믿나이다. … 그리스도를 믿나이다.” 그러나 신앙 고백은 한 번 외우고 끝나는 문장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책처럼 대한다면 우리의 신앙 고백은 어느 순간 습관적인 문장이 되어 버릴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은 그렇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을 안다고 해서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할수록 새롭게 바라보고, 새롭게 묻고, 새롭게 알아간다.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사랑도 늘 순간순간이 새롭고, 시간 속에 깊어간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한다. 내 삶의 이 순간,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이신가? 어제의 대답으로 오늘의 신앙을 대신할 수는 없다. 어제의 고백으로 오늘의 사랑을 대신할 수도 없다. 살아 계신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오늘 다시 그분을 바라보고, 오늘 다시 그분을 선택하며, 오늘 다시 그분과 함께 걷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때, 그 고백은 우리의 삶으로 이어져야만 한다.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 다른 이들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를 위해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품어 주신 성모님, 저희를 도우시어 저희의 신앙 고백이 날마다 새로워지고, 저희에게 맡겨진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따라 사랑으로 섬기게 하소서. 아멘!

***

– 내 삶의 이 순간,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이신가?

– 나는 어떤 방식으로 주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할 수 있는가?

–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고백하는 나의 신앙은 지금 살아 있는가?

– 내가 받은 권한과 책임을 나는 누구를 위해 사용하고 있는가?

– 나의 신앙 고백이 다른 이의 신앙 고백에 힘이 되고 있는가?

마태 16,13-20(연중 제21주일 ‘가’해)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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