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보스코의 아홉 살 꿈에 관한 구절별 묵상①

돈 보스코는 ‘꿈의 성인’이다. 꿈이 없이는 돈 보스코를 이야기할 수 없다. 실제 아홉 살 때 꾸었던 하나의 꿈으로부터 시작한 그의 부르심 여정은 수많은 꿈이 동반한 여정이었고, 꿈으로 마감된 생애였다. 하느님께서는 적어도 150편에서 160편 정도로 추산할 수 있는 수많은 꿈으로 돈 보스코를 통해 특별히 청소년을 사랑하고자 하시는 당신의 꿈을 꾸셨다.

1858년(43세) 돈 보스코를 만나 그의 아홉 살 꿈과 여러 일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신 교황 비오 9세께서는 그 내용이 예사롭지 않음을 간파하시고 이들을 반드시 기록으로 남기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이 명령을 1873년(58세, 사제 서품 후 32년)에야 수행할 수 있었던 돈 보스코는 30년 넘게 아이들과 함께 살았던 사목 생활의 체험과 그 과정을 농축된 세심한 필치로 기록하는 서두에 자신이 꾸었던 아홉 살 꿈을 놓는다. 그렇지만 돈 보스코에게 성흔聖痕이요 상흔傷痕처럼 새겨졌던 이 꿈 역시 하느님의 일이 늘 그렇듯이 아홉 살에 일어났던 일회성 꿈이 아니라 적어도 7회에 걸쳐 세부적인 내용이 반복되거나 확장되고 진화해가면서 돈 보스코의 일생을 관통하는 꿈이 되었으며, 다른 꿈들과 함께 죽기 몇 달 전인 1887년 5월 16일에 이르러서야 솟구쳐 흐르는 눈물 때문에 열다섯 번이나 미사를 중단해가며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던 꿈이었다.

돈 보스코의 아홉 살 꿈에 관해서 돈 보스코의 대가로 알려지는 피에트로 브라이도Pietro Braido는 “거의 50년 삶의 축적과 경험을 더해 원래의 꿈을 문학적으로 완성하여 기록한 꿈”(P. Braido, Don Bosco prete dei giovani nel secolo delle libertà. Terza edizione corretta e ritoccata, LAS, Roma 2009, I, 119쪽)이라고 표현한다. 그런 의미로 돈 보스코의 아홉 살 꿈은 청소년과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살레시안들에게 삶의 지침이자 영성 원리요 예방 교육 체계이다.

꿈이 없이 돈 보스코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비유 없이 복음을 읽는 것과 같다. 그리고 돈 보스코의 꿈을 읽는 중요한 열쇠는 성모님이다. (※ 돈 보스코의 아홉 살 꿈 본문에 이어 꿈의 구절들을 따라가며 매 구절에 묵상할 수 있는 꼬투리들을 ① ② 두 편으로 나누어 싣는다. 꿈 본문 구절의 앞에 있는 반 괄호의 일련번호는 편의상 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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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활짝 열어 주는 꿈

그 나이에 나는 평생토록 내 뇌리에 깊이 박혀 떠나지 않는 꿈 하나(un sogno, che mi rimase profondamente impresso nella mente per tutta la vita)를 꾸었다. 꿈에 나는 집 근처에 있는 아주 넓은 마당에(in un cortile assai spazioso) 서 있는 듯했다. 그곳에는 수많은 아이들이 모여서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어떤 아이들은 웃고 있었고 어떤 아이들은 놀고 있었는데, 적지 않은 아이들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 욕설을 듣고 나는 곧장 아이들 가운데로 뛰어들면서 주먹질과 고함으로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하려고 애썼다.(*그림-Pietro Favaro, Ilsogno dei nove anni-Alassio)

그때, 고상한 옷차림을 한 존귀한 남자 어른 한 분(un uomo venerando, in virile età, nobilmente vestito)이 나타났다. 그는 하얀 겉옷으로 온몸을 두르고 있었으며 얼굴이 너무 눈부셔서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는 내 이름을 부르면서 그 소년들의 선두에 서라고 하시면서 “주먹다짐으로 하지 말고 온유와 사랑으로(non colle percosse, ma colle mansuetudine e colla carità) 이들을 네 친구로 만들어야 한다. 그들에게 죄의 더러움과 덕의 고귀함(un’istruzione sulla brutezza del peccato e sulla preziosità della virtù)을 곧바로 설명해주어라.”라고 말했다. 당황하고 놀란 나는 그분께 내가 그 녀석들에게 종교(religione)에 대해서 말할 능력이라고는 도무지 없는 가난하고 무지한 아이(un povero ed ignorante fanciullo)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소년들은 말다툼과 고함과 불경한 말을 그치고 나와 말하고 있는 분 주위로 모여들었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그분에게 물었다.

“제게 불가능한 일을 하라고 하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렇지, 그처럼 네게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일이기 때문에 너는 순명과 지혜의 연마로(coll’ubbidienza e coll’acquisito della scienza) 이 일을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어디서 어떤 식으로 지혜를 연마하라는 말씀이시죠?” “내가 네게 여선생님을 주겠다.(Io ti darò la maestra.) 그분의 지도 아래 너는 슬기로운 사람이 될 것이며, 그분 없이는 지혜라는 모든 것이 어리석음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제게 말씀하시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나는 네 어머니가 하루에 세 번 인사드리라고 가르쳐 준 분의 아들이란다.” “제 어머니께서는 허락 없이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당부하셨어요. 그러니 당신의 이름을 말씀해 주세요.” “내 이름은 나의 어머니께 여쭤보아라.”

그 순간 나는 그분 곁에 별처럼 찬란히 빛나는 눈부신 겉옷을 입은 존엄한 여인(una donna di maestoso aspetto, vestita di un manto, che risplendeva tutte parti, come se ogni punto di quello fosse una fulgidissima stella)을 보았다. 여인은 질문과 대답으로 더욱더 혼란에 빠져드는 나를 보더니 당신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그리고는 다정하게 내 손을 잡고(presomi con bontà per mano) 말했다.

“자, 보아라.” 눈을 들어 바라보니 소년들은 모두 달아나고 그 대신 염소, 개, 고양이, 곰 등 다른 많은 동물이 나타났다. “자, 여기가 바로 네 일터, 네가 일해야 할 곳이다. 겸손하고 강하고 굳건한 사람이 되도록 힘써라. 지금, 이 순간 네가 보고 있는 이 동물들에게 일어나는 일을 너는 장차 내 자녀들을 위해서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다시 눈길을 돌리니 맹수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 숫자만큼의 온순한 양들이 나타났다. 양들은 그 남성과 여인을 반가워하듯 그분들 주위를 맴돌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꿈속에서 말씀하시고 알려주시는 내용이 무슨 뜻인지 몰라 울음을 터뜨리며 여인에게 알아듣게 말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부인은 내 머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A suo tempo tutto comprenderai.)”

그 말이 있고 나서 나는 어떤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으며 모든 것이 사라졌다. 나는 멍했다. 내가 주먹질을 해댄 손은 아팠고 얻어맞은 뺨은 화끈화끈 달아오르는 듯했다. 게다가 낯선 분과 여인에게서 듣고 말한 모든 것으로 머릿속이 꽉 차서 그날 밤에는 다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산적 두목?

아침에 즉시 형들에게 꿈 이야기를 했더니 형들은 웃어넘겼다. 어머니와 할머니에게도 이 이야기를 하자 식구들은 제각각 해몽을 해줬다. 요셉 형은, “너는 염소나 양이나 다른 동물들을 치는 사람이 되겠다.”라고 말했고, “사제가 될 꿈인지 누가 알겠니!”라고 어머니가 말씀하시자마자 안토니오 형이 심술궂게 대꾸했다. “너는 도둑 우두머리가 될 거야.” 마지막으로 전혀 읽고 쓸 줄도 모르면서도 상당히 많은 것을 알고 계시는 할머니가 “꿈같은 것에 신경 쓸 일 없어요.” 하고 최종적인 단언을 내렸다. 나도 할머니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꿈을 결코 내 머리에서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앞으로 기록하게 될 일들이 그 사실을 설명해 줄 것이다. 나는 그 얘기를 더는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가족들도 그 사실을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그러나 1858년, 살레시오회에 관한 문제로 교황님을 접견하려고 로마에 갔었을 때, 교황님은 내게 초자연적인 기미가 보이는 모든 것을 자세히 이야기해보라고 하셨고, 나는 그분에게 처음으로 어릴 적 그 꿈 이야기를 해드렸다. 교황님은 그 사실을 빠짐없이 상세하게 기록하여 살레시오 회원들을 격려하는 자료로 남겨 두라고 명령하셨다.(돈 보스코의 회상, 4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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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생토록 내 뇌리에 깊이 박혀 떠나지 않는 꿈 하나: 돈 보스코를 “떠나지 않는 꿈 하나”이다. 돈 보스코의 생애를 관통하는 꿈 하나이다. 돈 보스코에게는 이 꿈 하나만이 있었다. 다른 꿈은 없었다.

2) 집 근처에 있는 아주 넓은 마당에(in un cortile assai spazioso) 서 있는 듯했다: 살레시오회의 오라토리오가 있는 곳이라면 언제 어느 곳에나 해당이 될 ‘집 근처 마당’이다. 돈 보스코에게는 초막 셋을 짓고 싶었던 베드로의 타볼도 아니고, 요한 복음사가가 첫 장면으로 삼았던 성전도 아닌 곳에서 꿈이 시작한다. 집이 있는 곳, 우리가 친숙하게 잘 아는 곳, 익숙한 곳, 외로운 바닷가도 아니고 조용한 산책로도 아닌 그저 아이들이 모여 왁자지껄한 곳이다. 한 아이가 있는 고독한 곳이 아니고 다수가 어우러지는 곳, 천사들 같은 애들만 있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께 거침없이 욕설도 내뱉는 쌍스러움도 있는 곳이다. 다양한 아이들의 모습은 현실이고 실제이다.

꿈은 시종일관 아이들, 보스코, 예수님, 성모님이 모두 ‘함께 있는 곳’에서 진행된다. 성령강림도 그런 자리에서 이루어졌다.(참조. 사도 1,13-14;2,1-2) 우리가 함께하는 자리에 ‘항상’ 함께하시는 하느님,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는(마태 28,20) 임마누엘 하느님이시다. 형제들과 함께, 아이들 곁에, 아이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 은총이 함께 하신다. 살레시안의 성소의 식별도 바로 그 자리에서만 이루어진다.

살레시오회의 꿈, 돈 보스코의 꿈은 마당에서 일어난다. 모세와 산상설교, 타볼, 겟세마니, 칼바리, 부활하신 주님의 산에 이르기까지 복음에서 산이 언제나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였다면, 돈 보스코의 자리는 마당이다. 살레시안과 청소년이 만나는 자리이다. 별도의 공간이 아닌 일상의 공간이고 집 주변의 공간이다.

살레시오 회원은 마당에 주저앉아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항상 ‘서서’ 아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뛰어갈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오라토리오는 한 마디로 ‘마당’의 체험 자리이고, 여성적인 어휘라면 감히 ‘우물’이다. ‘마당’은 형식과 구조, 담장을 넘어 온갖 사람들과 세상사가 오가는 길과 연결되는 자리이면서 공식을 넘는 비공식을 개의치 않으며, 사람들이 있고 더구나 청소년이 있는 곳이라면, 현실과 가상假想까지도 거침없이 나아간다. 마당은 세상 한가운데에 있다. 우리의 마당이 진실한 것이라면 그 마당에 주님께서는 어느새 우리 곁에 계신다.

3) 그곳에는 수많은 아이가 모여서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어떤 아이들은 웃고 있었고 어떤 아이들은 놀고 있었는데, 적지 않은 아이들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고 있었다: 살레시안이 있는 자리는 성聖과 속俗의 공존이 있는 자리이다. 늑대도 있고 양들도 있는 곳이다.

4) 그때, 고상한 옷차림을 한 존귀한 남자 어른 한 분(un uomo venerando, in virile età, nobilmente vestito)이 나타났다: 항상 주도권을 쥐신 분은 주님이시다. 꿈속의 주님께서는 아이들이 뛰노는 가운데 성聖과 속俗, 거룩함과 상스러움이 함께 있는 공간에 먼저 다가오시고, 요한 보스코에게도 먼저 다가오시어 먼저 말을 건네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도 당황하고 의기소침하였으며 낙담과 실의에 빠졌고 두려움에 문을 닫아 잠근 제자들에게 먼저 다가오신다.(참조. 요한 20장)

5) 그는 내 이름을 부르면서: 누군가가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첫 번째로 하시는 일이 어떤 사명과 임무를 부여하시는 것이 아니다. 소년 보스코의 꿈에서 예수님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처음 하신 일은 “요한아!” 하고 어린 요한 보스코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시는 일이었다. 주님께서 나의 이름을 부르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우리 일의 처음 시작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자리에서 우리 인생의 중요한 변화가 시작된다. 주님께서는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거듭거듭 소년 사무엘을 부르셨다.(참조. 1사무 3,3-10)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소명의 시작이었다.

그리스도교는 무엇보다도 사람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느님을 믿는 종교이다. 사람을 이름으로 부르시는 분! 하느님께서 나의 이름을 지어 부르신다는 특별한 체험, 즉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유일하고도 반복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모든 변화의 진정한 원동력이다. 요한 보스코의 삶도 그러하였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실 때마다 그것은 이름 부르는 그 누군가를 인정하신다는 인정의 행위일 뿐 아니라 변화의 시작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나실 때 그를 눈여겨보시며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요한 1,42)라고 하시는 장면만 보아도 그렇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그의 이름만 바꾸시는 것이 아니다. 이름을 바꾸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인생과 그의 정체성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신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름 안에 베드로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하는 힘과 견고함을 담아 주신다. 예수님께서 “천둥의 아들들”(마르 3,17)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공생활 내내 예수님의 중요한 순간마다 동행하는 은총과 총애를 입는다. 천사가 성모님을 두고 “마리아야!”(루카 1,30) 하고 이름을 불렀을 때 그 이름에는 하느님의 어머님이 되라는 소명이 담겼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야!”(요한 20,16) 하시면서 마리아 막달레나를 부르셨을 때는 부활하신 주님과 그 주님을 만난 첫 제자의 감격 어린 만남이 되었다.

하느님께서 내 이름을 부르실 때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내가 아닌 내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는다. 예수님께서 이름으로 나를 부르실 때 이는 나를 아주 잘 아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며 나의 잠재적인 가능성과 참 나를 보시며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이름을 받는 것에 지나지 않고 나 자신도 몰랐던 나의 진정한 정체성을 발견하게 된다.

6) 그 소년들의 선두에 서라고 하시면서: 누군가의 ‘선두에 선다’는 것은 어느 때라도 두려운 일이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항상 두려움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 부르심 앞에 나를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두려움이다. 부르시는 분을 생각할 때 두려움을 떨치고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선두”라고 하여 소년들을 이끌어 강압적으로라도 어딘가에 끌고 간다는 것은 아니다. 솔선수범하여 소년들과 함께 걸으며 ‘동행(동반)’하는 것이 살레시오의 교육 원리이다.

모세가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광야를 통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것처럼 우리 각자도 같은 모습으로 내 존재를 안내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이러한 안내는 우리의 능력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마련하신 하느님을 향한 믿음에 기초한다. 그분께서 인도하시고 그분께서 지탱하시리니 오직 그분만을 온전히 신뢰하라는 부르심이다.

모세의 이야기는 우리의 두려움과 불확실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한다면, 그분께서 우리의 사명을 완수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주시리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우리의 부르심 여정에 우리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요한 보스코와 모세와 함께하셨듯이 우리의 부르심 여정에는 하느님께서 항상 함께하신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우리 인생에 어떤 책임을 어떻게 맡기시는 것일까? 우리가 겸손과 믿음으로 이 부르심을 받아들여 이 부르심이 우리의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데에 달려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일까?

내가 받은 사명이 크든 작든 나에게 주어진 부르심이라는 것을 용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하느님께서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켜 주시리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모세와 소년 요한처럼 내가 감당 못 할 일이라고 느끼면서도 우리는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니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위대한 일을 이뤄낼 수 있음을 안다.

7) 주먹다짐으로 하지 말고 온유와 사랑으로(non colle percosse, ma colle mansuetudine e colla carità) 이들을 네 친구로 만들어야 한다: 주먹다짐은 우선 쉽지만, 온유와 사랑은 “인내”를 요구하기에 어렵다. 이 구절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마주칠 수밖에 없는 다른 이들과의 관계나 세상에 관한 근본적인 가르침을 밝혀준다. 돈 보스코는 힘이나 공격성, 강압으로 다른 이들을 이기려 들지 말고 온유함과 자애로움으로 다른 이들을 얻어야만 한다고 가르친다. “온유와 사랑”은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두 가지 덕목이다.

온유, 다른 말로 유순함은 개방과 순응의 태도이다. 이는 융통성과 경청을 통해 누군가의 경험과 관점으로 배우려는 자세를 뜻한다. 온유는 내가 모든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의 교만을 내려놓을 수 있는 여유와 능력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내적인 힘을 드러내는 표지이다. 이러한 유순함은 다른 이들과 개인적으로 더 깊고 의미 있는 관계를 건설할 수 있도록 우리를 성장하게 한다.

사랑은 행동이다. 다른 이들을 부드럽게 대하고, 공감과 존중으로 대하는 것이다. 사랑은 우리의 이기심을 넘어가게 하고, 다른 이의 필요와 느낌을 숙고하게 하며, 다른 이들을 나보다 우선시하도록 한다. 사랑을 통해 우리는 진정으로 다른 이들의 마음을 얻고 진실하고 지속적인 유대감을 형성하게 한다. 사랑이 우리의 행동을 이끌도록 해야만 한다. 그렇게 대할 필요가 없게 느껴지는 이라 할지라도 친절과 존중으로 대해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조건 없는 사랑으로 다른 이를 대해야만 한다. 사랑은 우리에게 누군가를 용서하고, 인내하여, 담장을 둘러치는 대신 다리를 놓는 힘을 준다.

8) 그들에게 죄의 더러움과 덕의 고귀함(un’istruzione sulla brutezza del peccato e sulla preziosità della virtù)을 곧바로 설명해주어라: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뒤섞여 있는 혼란한 세상에서 선과 악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돈 보스코는 고귀하고 덕스러운 삶을 향한 교육이 복잡한 신학적 개념 분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동서고금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새겨주신 양심에 따라 우리 신앙과 도덕의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돈 보스코는 함께 살던 아이들이 윤리 신학의 전문가가 되기를 바랐던 것이 아니라, 올바른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기본적인 이해를 키워나가도록 바랬다. 그래서 돈 보스코의 교육 목표는 ‘천상 시민과 지상 시민’이었으며, ‘참다운 신앙인과 올바른 시민’이었다. 이러한 여정은 작은 미소, 부드러운 말 한마디, 필요한 곳에 뻗어준 말 없는 손길과도 같은 일상의 소소한 행동으로 시작한다. 이러한 작은 행동이 고귀하고도 덕스러운 삶의 토대를 구축한다. 우리의 신앙과 믿음은 중대하고 위대한 결정 안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작고 겸손한 몸짓에서도 온전히 드러난다. 거창한 신학적 담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통한 삶의 모범으로 나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죄의 추악함과 덕의 소중함을 보여 주도록 노력해야 한다.

살레시안의 자리는 “온유와 사랑”으로 “죄의 더러움과 덕의 고귀함”이 식별되는 자리이다. 어린 요한 보스코가 어렴풋이 체험한 ‘성聖과 속俗’의 공존은 훗날 <준비된 청소년Giovane provveduto>에서 “악마의 속임수 중 하나는 젊은이들이 즐겁고 기쁘게 지내려는 욕구나 넘쳐나는 생명력과 에너지가 거룩함과는 맞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라는 돈 보스코의 영적인 중요 가르침으로 완성된다. 거룩함은 기쁨, 즐거움, 생명력, 활기, 에너지라는 본질도 지녔다.

9) 당황하고 놀란 나는 그분께 내가 그 녀석들에게 종교(religione)에 대해서 말할 능력이라고는 도무지 없는 가난하고 무지한 아이(un povero ed ignorante fanciullo)라고 대답했다: 혼란스러운 소년 요한 보스코는 두려운 마음으로 대답한다. 혼란과 두려움은 우리 모두 살면서 경험하는 감정이다.

성 요한 보스코는 우리에게 겸손의 가치와 두려움에 맞설 용기의 가치를 가르쳐준다. 우리는 종종 자신이 부적절하다고 느끼며 그렇게 큰일을 감당하기에는 능력 부족이고 왜소하거나 충분히 똑똑하지 않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어찌 보면 당연하기까지 한 소년 요한 보스코의 반응은 우리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위대한 성인들조차 의심과 두려움의 순간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 인생에서 가끔 느끼는 부적절함이나 부족함, 두려움 등은 우리를 가로막는 장애가 아니라 우리를 성장시키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돈 보스코께서는 의심의 순간에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완벽한 이를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선택한 이를 완벽하게 만들어 가신다.

하느님께서는 완벽함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연약함과 한계를 지닌 우리 모습 그대로의 존재를 사랑하시고 받아들이신다. “말솜씨가 없는 사람…입도 더디고 혀도 무딥니다.”(탈출 4,10) 하던 모세를 하느님께서 선택하시고 당신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하도록 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불완전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도움을 요청하는 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두려움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하느님이 우리 편이시며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되어 자신감으로 두려움에 맞서야 한다.

우리는 어려움에 직면하여도 낙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우리 자신이 성장하고 하느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계기로 생각한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완벽할 필요는 없으며 겸손과 신뢰로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기꺼이 따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어린 요한 보스코는 “종교에 대해서”라고 말한다. 살레시오회가 추구하는 교육의 지향점이 단순한 인간 개발이요 인도주의적인 복지 활동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영혼 구원이요 ‘죄의 더러움과 덕의 고귀함’을 식별하여 예수님께 이르고자 하는 ‘종교’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거친 짐승들이 온순한 양들로 변화되는 변화의 가능성만을 추구하는 것이 살레시오회의 이상이 아니다. 요한 보스코는 이처럼 마당의 어린 만남에서 미래의 살레시오 오라토리오가 지녀야 할 교육적이며 영적인 마당의 본질을 미리 보고 체험한다.

10) 그 순간 소년들은 말다툼과 고함과 불경한 말을 그치고 나와 말하고 있는 분 주위로 모여들었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그분에게 물었다. “제게 불가능한 일을 하라고 하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당신이 누구시길래 제게 그렇게 어려운 일을 요구하십니까?” 하는 이 질문은 인생을 살면서 종종, 특히 잠 못 들게 하고 식욕마저 사라지게 만드는 사건들, 인생에서 도저히 맞아들어가지 않는 퍼즐 조각과도 같은 도전에 직면했을 때 갖는 질문이다. 우리도 어느 순간 내 앞에 놓인 어려움 앞에서 돈 보스코처럼 이렇게 질문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고 그동안의 터전을 떠나 정처 없이 길을 떠나야만 했던 아브라함처럼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

아브라함은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창세 12,1-2)라는 부르심을 받는다. 그러나 그 부르심은 일회성이 아니었다. 37년을 두고 계속되는 부르심이었다.(참조. http://benjikim.com/?p=4142) 그렇게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된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아브라함이 하늘의 별을 보게 하며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창세 22,17) 많은 후손이 번성하리라고 약속한다.

복음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넘어서는 특별한 행동을 요구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부분적으로라도 일부분에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사랑은 거창한 몸짓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 공감과 연민으로 행하는 작은 몸짓이다. 돈 보스코 역시 토리노라는 도시에 살던 젊은이들의 어려움에 부닥쳐 그 도시에 살던 모든 청소년을 도와줄 수는 없었을지라도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청소년에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음을 이해하고 이를 받아들였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순명 서원의 깊은 의미와 하느님께 믿음을 둔다는 것이 무엇인지 묵상하게 된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응답을 주시지는 않지만, 그분만이 아시는 더 큰 계획을 신뢰하도록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바라보게 된다. 인생을 살다 보면 결코 우리가 선택조차 하지 않았을 길에 들어섰다가 먼 훗날 그 길이 우리에게 옳고 바른 길이었다는 사실을 느끼곤 한다. 믿음은 어둠 속에서 우리를 인도하는 빛이 되며, 앞이 보이지 않을 때라도 걸을 수 있도록 용기를 준다.

삶의 어려움과 시련, 그리고 고통 속에서 우리는 고통과 의심의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가치와 성장을 인식하면서, 고통과 시련의 너머를 바라보도록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곤 한다. 휘몰아치는 인생의 폭풍과 비바람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마지막으로 느꼈던 때가 과연 언제였을까?

아브라함과 하늘의 별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희망의 별빛이 된다. 아브라함은 모든 의심과 모든 증거와 함께 하느님의 약속을 믿었고, 그 믿음이 마침내 의로움으로 인정을 받는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면서 감히 불가능할 것이라고 믿는 꿈을 향해 우리도 도전하고 있을까? 내 인생에서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나도 크다 싶은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한 때는 언제였을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시지 않고 가능한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만을 하도록 초대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의 빈곤을 일거에 없애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만나는 사람 중에서 가난한 이들을 진지하게 바라보라고 하신다. 인류의 고통을 위로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작은 이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라고 하신다.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전쟁을 종식할 수 있는 도구나 수단을 마련하라 하시지 않고 내가 처한 처지에서 서로 간에 분쟁의 원인이 되지 않도록 하라고 하신다. 우리가 행하는 조그만 가능성 안에 불가능하게 보이는 기적이 담겼다.

11) 그렇지, 그처럼 네게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일이기 때문에 너는 순명과 지혜의 연마로 이 일을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순명과 지혜의 “연마”는 다른 동사로 “배워라”이다.

단순한 인간적인 인식과 앎으로써가 아니라 “순명과 지혜”로만 갈 수 있는 신앙의 길을 배워야 한다. 꿈에서 만난 어른이 소년 요한 보스코에게 “순명”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흥미롭다.

「…레뮈엔 신부는 이렇게 기록한다: “요한은 마음과 정신이 위대했다. 그는 덕으로 순명했지 타고난 성향으로 순명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그는 자기 집에서 한 왕국의 왕처럼 주인으로 느꼈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하신 것처럼 그에게 하셨다. (……) 요한 역시 영웅적인 오랜 겸손의 수련을 통해서 준비되었다. 그는 자기 집을 떠나 약 2년 동안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하면서 굴욕의 모든 짐을 느꼈다.”(돈보스코의 회상, 67쪽-각주 12)」 「(첫영성체 때 “…순명을 잘하며…”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들은 후) 나는 언제나 어머니의 훈계를 명심하고 지키려고 힘썼다. 그날부터 내 생애는 진보하기 시작했다. 특히 타인에 대한 순종과 온순함에서 그랬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누가 내게 명령이나 충고를 하면 아주 비위에 거슬려서 늘 말대답하곤 했었다.(같은 책, 59쪽)」

이런 기록들에 비추어 볼 때 요한 보스코의 성격은 자기주장이 또렷하고 자기애가 강한 경향을 띠고 있었다. 그러한 기질이 순명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요한 보스코는 신앙과 모범적인 좋은 주변을 마련하신 하느님의 은총을 입었다고 할 수 있다.

돈 보스코에게 순명을 가르쳐주신 분은 누구보다도 그의 여선생님이신 성모님이다. 성모님께서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천사에게 응답하면서 아주 복잡하게 흘러갈 수도 있었던 상황을 잠자코 받아들인다. 마리아께서는 인간적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면서도 자신을 향한 하느님 계획을 신뢰하며 순명한다. 성모님의 응답 안에 우리 모든 인생이 걸어야 할 길이 있다.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인생길에서도 주님을 절대적으로 믿어야만 한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계획을 순순히 받아들이신 것처럼 요한 보스코도 신앙의 은총으로 자신의 인간적인 성품과 기질을 극복할 수 있었고, 또한 쥬셉페 카파쏘(1811~1860년) 신부님의 지도를 잘 따라갈 수 있었다.

자신의 선생님이신 성모님을 모시고 얻은 자기 생각에 고집스럽고 융통성이 없게까지 보이는 돈 보스코를 두고 몬시뇰 베르타냐는 “의심할 여지 없이 돈 카파쏘에게 언제나 순명했다”라고 증언한다. 돈 보스코는 자신의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훗날 “제가 토리노에 머물게 된 것은 카파쏘 신부님에 대한 순명 때문이었습니다. 매 주일에 애들을 광장에 모아 놓고 교리를 가르치게 된 것이 그분의 조언과 지시에 따른 것이었으며,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오라토리오에서 가장 버림받은 아이들을 모아 악으로부터 지키고 덕으로 나아가도록 시작하게 된 것도 그분의 지원과 도움으로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라고 말했다.

“지혜”는 단순한 정보 축적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지혜에 관한 은총을 말한다. 참 지혜는 인생의 모든 국면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의 계획을 펼쳐가시는 하느님을 보는 능력이다. 성령의 지혜는 우리에게 기쁨이든 도전이든 그 어떤 상황에서라도 하느님의 손길을 알아 모시면서 사랑과 믿음으로 응답할 수 있게 한다. 사랑에 빠진 10대 아이들이 언제 어떤 상황이나 그 무엇에서도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본다는 것과 비슷하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의 은총으로 인생의 모든 세세한 것에서도 하느님 사랑의 반영을 볼 뿐만 아니라 당신과 더욱 깊은 관계로 나아오도록 하는 초대를 발견한다. 하느님 지혜의 은총을 입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분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모든 순간이 창조주 하느님과 우리를 위한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는 기회가 된다.

하느님의 지혜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다. 그러한 지혜를 지닌 이는 모든 것이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님을 알고, 우주의 그 어떤 구석에서라도 하느님을 찾는 모습이 된다. 하느님의 지혜는 우리를 깊은 겸손과 경배로 나아가게 한다. 지혜이신 하느님께서는 창조의 모든 국면에서 모든 피조물 안에 당신의 사랑을 계시하신다. 하느님의 지혜를 얻지 못하면 인간은 이데올로기의 함정에 빠져 좁은 시야에 갇히게 되며, 여기에는 하느님과 멀어질 위험이 뒤따른다.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한계에 기반한 개념에 집중하는 한편 지혜의 은총은 우리에게 더욱 넓고 신성한 이해를 열어준다.

성모님께 우리도 사랑에서 나오는 순명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그리고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지혜를 얻을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빌어주시도록 청한다. 우리 인생의 모든 순간에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모시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열린 마음을 갖도록 기도한다. 우리도 성모님과 같은 믿음과 사랑으로 주님께 “보십시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우리 존재의 소소한 것들이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성장하게 하는 초대임을 발견할 수 있기를 청한다.

12) 내가 네게 여선생님을 주겠다.(Io ti darò la maestra.) 그분의 지도 아래 너는 슬기로운 사람이 될 것이며, 그분 없이는 지혜라는 모든 것이 어리석음이 되고 말 것이다: 여기의 “여선생님”은 우리의 성모 마리아이시다. 우리의 어머니요 인도자가 되시는 예수님의 어머니이시다. 꿈이 없이 돈 보스코를 이해하려 들면 예수님의 비유 없이 예수님의 복음을 이해하려 드는 것과 같을 수 있다. 이처럼 돈 보스코의 생애 역시 성모님 없이 이해할 수 없다. 돈 보스코의 꿈을 읽는 열쇠도 당연히 성모님이시다.

「마리아께서는 자상하고 사려가 깊으신 중에도 아들 예수에 대해 놀란다. 아들 예수와 대화하면서도 그 아들이 지닌 신비를 이해하지 못한다. 모든 일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묵상하면서 이를 칼바리 산과 성령께서 임하실 다락방에까지 가지고 간다. 마리아께서는 교육이라는 것이 옆에 있는 것이고, 듣고 묻는 것이며, 이를 깊이 숙고하고 답을 찾는 것일 뿐만아니라 실행에 옮겨가는 것임을 가르치신다. 교육은 하느님께서 아이 안에 세우신 소명과 신비를 이해하려 노력하며 존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류의 역사 안에서 우리가 지닌 독특한 은사 안에서 성모님은 우리와 청소년들을 위해 살아 숨 쉬는 분이셨고 활력을 주시는 분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린 소년 요한 보스코의 아홉 살 꿈에서 “내가 너에게 여선생님을 주겠다(Io ti darò la maestra)”라는 말로 성모님께서는 돈 보스코의 안내자로 예견되신다. 성모님은 돈 보스코의 영적인 여정을 알려주시고, 안내자로서 도와주시며, 교육과 복음화를 향한 임무를 지탱하게 해주시면서 희망을 주시고 용기를 북돋우시며 방향을 가리키신다. “겸손하고 강하며 굳세어라” 하신다. 성모님께서는 이때로부터 즉시 요한의 인생에 개입하시어 돈 보스코가 “모든 것을 그분이 하셨습니다.”라고 말하는 대로 과연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하신다. 성모님께서는 살레시오회의 영성과 사명 안에서 살레시안들의 신앙 성숙과 전인적인 인격 완성을 도모하신다. 성모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영적 삶은 미지근해지고, 우리의 교육 활동과 복음화를 위한 노력은 패기를 잃고 만다. 우리의 교육과 복음화를 향한 벅찬 도전에 맞서 용기를 내야 한다. 성모님을 모셔 우리의 사명에 역동성과 활력을 불어넣어야만 한다.」(파스칼 차베스 sdb 총장, 2004년 12월 27-30일 개최된 “Io ti darò la maestra내가 너에게 여선생님을 주겠다”라는 주제와 부제 – “Il coraggio di educare alla scuola di Maria마리아 학교에서 교육할 용기”로 열린 로마 교황청립 아욱실리움 대학 교육학부 주최 국제 마리아 학술대회의 인사말에서)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제자 요한에게 주신 당신의 어머니는 역사 안에 등장하는 그저 단순한 인물이 아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우리의 어머니로서 살아계시며 활동하시는 우리의 어머니이시다. 성모님의 소명은 예수님의 지상 생활을 동반하시는 예수님의 어머니를 넘어 우리를 품어 안아 주시는 우리의 어머니가 되시는 것이다. 성모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더욱 깊이 연결하시는 다리이시고,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우리의 일상에서 어떻게 살고 어떻게 실천할지 보여 주신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마리아를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영적인 삶에 모셔야만 하는 이유이다.

예수님을 찾는 우리를 성모님께서 인도하여 주시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성모님으로부터 어려움에 믿음으로 직면하는 법, 주저 없이 사랑하는 법, 더욱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꺼이 용서하는 법을 배운다.

성모님을 통하여 우리는 인생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표피적인 것을 넘어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라는 예수님의 복음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성모님의 중재와 모범은 갖가지 인생의 도전 앞에서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에 고정하여 잘 헤쳐나갈 수 있는 도움이 되신다.

13) “이런 식으로 제게 말씀하시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나는 네 어머니가 하루에 세 번 인사드리라고 가르쳐준 분의 아들이란다.”: 어린 소년 요한 보스코의 꿈에서 당황하고 혼란에 빠진 요한을 놀리기라도 하듯이 요한의 질문에 “고상한 옷차림을 한 존귀한 남자 어른”은 수수께끼처럼 몇 가지 단서만을 제공하고 직접적인 답을 하지 않는다. “하루에 세 번 인사”를 드리는 것은 당연히 들판이나 일터에 있더라도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에 맞추어 드리는 삼종기도를 가리킨다. 수수께끼처럼 들린 답 안에서 요한은 “하루에 세 번 인사드리라고 가르쳐준 분”이 즉시 성모님, 예수님의 어머니이시며 우리의 영적인 어머니, 우리를 아드님께로 인도하시는 성모님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성모님께서는 십자가 밑에서 결정적으로 우리 인생의 한 부분이 되신다. 죽어가시는 예수님께서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6-27)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정말 놀라운 일을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어머니 마리아의 모성을 인류의 어머니로 확장하여 성모님이 당신의 어머니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인간의 어머니가 되게 하신다.

이렇게 확장된 마리아의 모성은 인류의 어머니라는 소명에서 강력히 드러난다. 성모님은 우리의 삶 안에서 안내자이시고 인도자이시며 우리를 위해 빌어주시는 분이시자 우리 신앙의 어머니이시다. 성모님께서는 십자가 밑에서 지극한 슬픔과 고통을 품어 안으시면서 당신 아드님이신 예수님 죽음의 증인이 되시고, 우리의 영적인 어머니가 되신다.

성모님의 역할은 십자가의 순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카나의 혼인 잔치를 통해서 성모님께서는 예리한 감수성과 능력을 발휘하시면서 사람들의 도움이시며 중재자이신 당신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신다. 성모님께서는 잔치 마당에서 현장의 필요를 누구보다 먼저 감지하시고 염려하시면서 이를 아드님 예수께 알린다. 이러한 성모님의 중재와 믿음의 행동은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공생활 동안에도 그 존재와 역할이 얼마나 중대한 것이었는지를 능히 짐작하게 하면서 우리가 성모님을 통해서 어떻게 예수님을 알 수 있게 되는지를 보여 준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만이 아니다. 성모님은 구원의 전체 역사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성모님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로 인도되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영원한 생명에 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성모님의 사랑과 은총은 이러한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며, 성모님은 우리가 은총의 문을 열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시는 열쇠이다.

14) “제 어머니께서는 허락 없이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당부하셨어요. 그러니 당신의 이름을 말씀해 주세요.” “내 이름은 나의 어머니께 여쭤보아라.”: 과거에는 누군가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 단지 어떤 형식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이나 베드로의 경우처럼 새로운 사명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하시고 바꾸어주신 성경 속의 이름만을 생각해 보아도 이는 자명하다.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으로 마리아에게 알려주신 히브리어 “예수”라는 이름도 있다.

이러한 내용은 동양권의 문화에서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 준다. 적어도 동양권의 문화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라기보다 한 사람의 존재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누군가의 이름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과 깊고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라는 보편적인 이름이었으나 그 뜻이 아주 풍부한 이름을 선택하시면서 두 가지 위대한 진리를 드러내고자 하셨다. 첫째는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구원에 관한 역사가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될 것임을 나타내고자 하셨고, 둘째는 하느님께서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이름으로 누구나 부를 수 있고 누구나 접근이 가능한 이름을 취하고자 하셨다는 사실이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라고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가르쳐준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각자 곁에 계시는 사람이 되셨고 구원을 베푸셨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우리는 주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자비, 구원, 무한한 사랑이신 하느님의 참 얼굴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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