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보스코의 아홉 살 꿈에 관한 구절별 묵상②

15) 그 순간 나는 그분 곁에 (모든 곳이 최고로 빛나는) 별처럼 찬란히 (사방으로) 빛나는 눈부신 겉옷을 입은 존엄한 여인을 보았다: 루카복음에서 우리는 마리아의 인간성 전체를 만난다. 복음은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루카 1,29)라고 기록한다. 이 말씀은 하느님과의 만남이 처음에는 우리의 확신을 뒤흔들고 우리의 계획에 의문을 제기하는 불안한 것일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참된 신앙은 쉬운 것이 아니고 편안한 길이 아니다. 우리 자신의 종이(카드)로 만든 성城에서 나와 우리의 우선순위를 정리하라고 도전해 오는 여정이다.

성모 마리아는 이러한 여정의 완전한 모범이다. 그녀가 하느님의 뜻을 따른 것은 모든 답을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전적으로 믿고자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뢰는 하느님의 계획에 대한 완전한 이해에 기초한 것이 아니었다. 오직 하느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을 깊이 신뢰하였기 때문이다. 성모님은 하느님을 정말 따르기 위해서는 그분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한 걸음 한 걸음 두려움 없이 그분께 의탁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성모님의 이러한 가르침은 돈 보스코의 일생을 비추는 등대와도 같았다. 요한 보스코는 어려서부터 희망과 안내의 표징인 별처럼 빛나는 성모님의 모습을 만났다. 요한 보스코가 만난 성모님의 모습은 꿈만이 아니라 어머니요 인도자이시며 생생한 실제요 현실이며 사실이었다. 그의 성모님 신심은 단순한 성모님 공경의 신심 행위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방식이었다.

성모님은 돈 보스코의 사목과 영성의 중심이었다. 성모님께서는 살레시오회의 설립을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돈 보스코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에 따르는 수많은 도전에 영감과 용기를 주시는 분이었다. 돈 보스코에게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일 뿐만 아니라 안내자였고 선생님이었으며 인생의 모든 순간에 영감의 원천이었다.

16) 여인은 질문과 대답으로 더욱더 혼란에 빠져드는 나를 보더니 당신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그리고는 다정하게 내 손을 잡고 말했다: 돈 보스코는 꿈에서 그 손을 꼭 잡았고, 우리는 그때부터 돈 보스코가 일생을 통하여 그 손을 절대 놓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다.

“손을 잡고”라고 한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인간이 만져볼 수 있는 하느님이시며, 인간의 손을 실제로 잡으시는 하느님이시다.(예수님의 손http://benjikim.com/?p=8031) 살레시안의 현존은 아이들 가운데에서 아이들의 손을 잡는 현존이다.

17) “, 보아라.” 눈을 들어 바라보니 소년들은 모두 달아나고 그 대신 염소, , 고양이, 곰 등 다른 많은 동물이 나타났다: 꿈에서 만난 성모님의 첫마디는 “보아라”이다. 청소년들, 특히 가난하고 버림받고 위험에 처한 청소년들의 상황을 잘 보는 것이 살레시안의 첫 번째 일이다. 이는 살레시안의 눈매요 아씨스텐자이다. 돈 보스코가 평생을 두고 ‘보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성모님의 도우심과 섭리 속에 마련하신 수많은 의인들의 도움으로(예. 쥬셉페 카파소) 돈 보스코가 보게 된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돈 보스코가 아이들을 보는 방식(예, 미켈레 마고네, 도메니코 사비오, 프란치스코 베수코) 안에 살레시오 예방 교육의 원리들이 담겼다. 살레시안이 ‘본다’는 것은 자신의 지평을 넘어 성모님의 시선으로 보는 것, 내면의 시선으로 보는 것, 은총의 시선으로 보는 것이며, 인내의 시선으로 보는 것이다.

“염소, 개, 고양이, 곰 등 다른 많은 동물이 나타났다”라고 하는 꿈의 이 장면에는 아이들과 함께한 오라토리오에 있었던 특성이나 감성, 사고방식, 다양한 생활 방식 등에 관한 여러 상징이 강하게 묘사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다양한 모습들을 우리는 경직된 사고 안에서 양이 아닌 녀석들로서 모든 부정적이거나 나쁜 악의 모습으로 이해하려는 선입견이 있다. 돈 보스코는 그렇지 않았다. 이는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교회의 이미지를 반영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꾸리셨던 열두 사도가 각기 제 나름대로 살아갔던 공동체의 모습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선정하시면서 모두 하나같이 ‘예, 스승님! 예, 스승님!’ 하는 이들만으로 사도들의 공동체를 구성하시고자 하셨어도 이는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수많은 다양한 아이들로 가득했던 발도코의 오라토리오에서 많은 애들이 돈 보스코의 말을 잘 듣고 경청했지만 어떤 애들은 돈 보스코가 원하는 방식이 아닌 태도를 고집하기도 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염소, 개, 고양이, 곰, 그리고 많은 동물” 사이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우러진다. 다양성은 우리에게 풍요로움이고 성령 강림의 은총이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이 다양성을 부정적인 장애로 인식하면서 친구들이나 가족, 직장 동료들이나 교회 공동체 안에서 다양성 안에 숨겨진 여러 잠재력을 인식할 기회를 놓치고 만다.

돈 보스코는 어린이와 청소년의 성화聖化를 꿈꾼 교육자였다. 돈 보스코는 오라토리오의 아이들을 대개 3부류로 구분했다. 「첫째 산만한 애들dissipati(the frivolous boys)-지속적인 동반으로 죄에 떨어지거나 악행에 빠지지 않도록 하면서 ‘정직한 시민이고 착한 신자’가 되도록 이끌어야 할 아이들, 둘째 다소 어렵고 어떨 때는 통제가 안 되는 애들discoli(unruly boys)-소년원이나 감옥에 있었거나 출소한 경력이 있는 애들로서 이런 애들에게는 어떨 때 해줄 것이 별로 없는 애들이고 문제 상황에서 격리조치까지 해야 할 아이들이다. 그러나 돈 보스코께서 이 애들과 함께 그 자체로 큰 성공을 거두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셋째 착한 애들buoni(the good boys)-높은 성덕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아이들이다.」 이러한 구분은 20여 년의 사목 경험 후인 1862년 돈 보스코의 기술에서 보인다.(참조. P. 브라이도, ‘Don Bosco per I Giovani: l’Oratorio, una Congregazione degli Oratori document’, in Piccola Biblioteca dell’ISS, n.9 74-75쪽)

돈 보스코께서 이렇게 구분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아이들을 차별적으로 대하고 소위 ‘착한 애들’만을 애지중지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돈 보스코께서는 각각의 아이들의 단계와 수준에 맞춰서 그들이 성덕으로 나아가도록 하려는 시도를 절대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한 한 가지는 ‘착한 애들’ 안에 내재한 위대한 성덕의 잠재력을 꿰뚫어 보면서 이를 확신하였고, 그들이 더욱더 거룩한 길로 나아가도록 끊임없이 부추겼다는 사실이다.

돈 보스코는 온 일생을 통하여 똑같은 두 아이를 만난 적이 없다. 돈 보스코에게 모든 아이는 하나하나 독특했다. 염소, 개, 고양이, 곰… 돈 보스코는 그 아이들 하나 하나에게 어울리는 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접근했다.(참조. ‘The Met’ school – ‘One student at a time’) 모든 아이는 자신의 고유성을 인정받을 권리가 있었으며 한계가 받아들여졌고 잠재력으로 평가되었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발도코의 오라토리오 아이들은 ‘돈 보스코의 총애를 받는 아이(preferito di Don Bosco)’라는 타이틀을 놓고 경쟁했다 한다. 이러한 경쟁은 각자가 자신만이 지닌 능력을 나름대로 발전시켜 가며 증명하는 것이었다.

18) , 여기가 바로 네 일터, 네가 일해야 할 곳이다: 매일 뚜렷한 소임이나 직무가 없이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상태를 생각해 보자. 이런 상태는 자신의 존엄성이 해체되어 버린 듯한 느낌을 줄 수도 있다. 사실 “일”은 우리 스스로 자신이 공동체나 사회에서 뭔가 의미 있고 유용한 존재임을 인식하는 수단이다. 일이 없다는 것은 우리를 깊은 우울이나 불만족의 상태로 전락시킬 수 있다. 일이 없는 것뿐만 아니라 주어진 소임(일)에 어떤 마음가짐과 태도로 임하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는 일의 양量과 성과, 실적을 보지 않고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하느님만 보시는 일의 질質을 중시한다. 이런 의미로 ‘일’은 우리의 신앙과 거룩함의 추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모님의 남편이었던 성 요셉은 우리에게 노동자(일꾼, 장인匠人)의 주보로 알려져 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던 예수님도 당신의 양아버지로부터 장인의 일상을 배웠다. 일은 그 내용이나 성격과 관계없이 우리 삶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하찮고 보람이 없어 보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에 임하는 태도나 자세로써 우리는 우리의 활동에 더욱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좋아하지 않거나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단지 그 일을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왜 그 일을 하는지에 관한 목적의식을 찾는 데에 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성 요셉의 모습이 빛난다. 시골 목수로서 성 요셉의 일은 평범해 보일 수 있지만, 그 일에 임하는 자세와 태도 면에서 모든 것이 달라진다. 그는 아내 마리아와 당신에게 맡겨진 하느님의 아들을 위한 사랑으로 일했다. 바로 이 사랑이 가장 일상적인 평범한 활동을 가장 비범한 것으로 바꾼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통해 포도밭 주인과 각기 다른 시간대에 포도밭에 와서 일한 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말씀하신다.(참조. 마태 20,1-16) 이 비유는 하늘 나라가 단지 일만 하는 곳이 아니라 삶의 목표를 가져야 하는 곳임을 가르쳐준다. 각기 다른 시간대에 포도밭에 일하러 왔던 일꾼들은 자신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각기 다른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나타낸다. 마감 한 시간 전에도 일꾼을 데려오고자 했던 포도밭 주인은 우리 각자에게 당신의 포도밭에서 자기 나름대로 목적을 찾을 기회를 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이 비유가 강력하게 다가오는 것은 일과를 마쳤을 때 일꾼들이 일한 시간의 양은 달랐지만 모두 같은 임금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적인 관점에서만 볼 때 정의롭지 못한 처사라고 여겨질 수 있지만, 하늘 나라에서 포도밭 주인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내는 성과뿐만 아니라 일 자체의 목적과 의미를 찾는 진지한 열망까지도 보신다는 점을 가르쳐준다.

복음은 내적인 자유라고 하는 다른 중요한 점도 우리에게 알려준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하셨다. 이는 진정한 내면의 자유가 인정이나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사랑으로 행동하는 데에 있다는 점을 보여 준다. 진정으로 자유롭게 감사하며 사는 사람은 자신이 조건 없이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산다.

우리는 하느님 포도밭의 일꾼으로서 당신께서 하시는 일에 나만이 할 수 있는 이바지를 하라고 부르셨다는 것을 알기에 그저 감사와 기쁨으로 일한다.

19) 겸손하고 강하고 굳건한 사람이 되도록 힘써라.(Renditi umile, forte, robusto!): 우리말 번역에서는 세 가지 내용이 쉽게 다가오지 않으므로 말을 다소 풀어서 ‘겸손하고, 담대하며(용감하며), 흔들리지 않도록 하여라’로 읽을 필요가 있다.

“겸손”은 돈 보스코의 성덕을 형성해간 첫 번째 요소이다. 돈 보스코는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때로는 사람들 앞에서도 작은 이가 되었다. 그렇다고 돈 보스코가 야심이나 야망이 전혀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지만 돈 보스코는 적절한 때에 자신의 교만과 이기심을 제쳐놓고 삶의 중심에 하느님을 모시는 법을 배웠고, 성모님의 인도하심 아래 이를 맡겼다. 돈 보스코는 성모님처럼 겸손과 가난의 길만이 하느님의 은총이 자기에게로 오는 통로가 된다는 사실을 믿었다.

“강함”은 두 번째 요소이다. 돈 보스코는 무엇보다도 신체적으로 강했으면서도 믿음과 결정에 있어서는 더욱 강했다. 그의 영적인 강인함은 그를 도와 온갖 장애와 도전에도 불구하고 포기를 모르고 담대하게 나아가도록 했다. 요한 보스코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인식에서 모든 힘을 얻었다. 우리도 내가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인식에서 생겨난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강한 힘을 얻을 수 있으며 용감하게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해나갈 수 있다.

마지막으로 “굳건함”은 우리가 연마해야 할 세 번째 덕목이다. 돈 보스코는 인생의 온갖 시련과 고난에 맞서서 용기와 희망을 품고 절대 흔들리지 않았다. 인생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들로 가득하지만 결국 싸울만한 가치가 있는 기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 때만 견뎌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라고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돈 보스코의 흔들리지 않고 지치지 않는 굳건함은 바로 이 기쁨의 약속에 대한 믿음에서 생겨났다.

20) “지금, 이 순간 네가 보고 있는 이 동물들에게 일어나는 일을 너는 장차 내 자녀들을 위해서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다시 눈길을 돌리니 맹수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 숫자만큼의 온순한 양들이 나타났다: 살레시오회의 일반적인 교육학적 흐름이 이 부분을 살레시오 교육의 교육 원리로 삼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렇지만 과연 맹수나 늑대 같은 청소년이나 젊은이가 자기 안의 야수성을 길들여 온순한 양처럼 바뀐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런 적이 있기나 했을까? 사람은 착하거나 악한 존재로 양분되는 존재들일까? 꿈을 주의 깊게 읽다 보면 몇몇 늑대가 몇몇 양으로 바뀌고 그렇게 바뀌지 않는 늑대들도 있었다는 것이 아니고, “맹수들이 숫자만큼” 양으로 바뀐다. 어쩌면 우리가 나쁘거나 거친 야수와 같은 애들을 착하고 온순한 애들로 바꾼다는 식으로 너무 단순하게 선형線形적으로 도식화하지나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다. 인간의 삶은 빛과 어둠의 복잡한 그물망으로 얽힌 존재들이니 말이다.

돈 보스코는 어려서부터 유명한 마술사였지만 그 어떤 아이들도 양으로 바꾼 적이 없다. 돈 보스코로부터 도메니코 사비오를 거쳐 오늘 우리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계속 우리의 그림자, 우리 안에 숨어 살면서 그의 은신처에서 도무지 나오려고 하지 않는 늑대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돈 보스코가 자신의 결점을 없애려고 평생 노력해야 했지만, 그 결점을 결코 완전히 결정적으로 없앨 수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돈 보스코의 어떤 약점들은 약점들임에도 돈 보스코의 성덕을 훼손할 수 없었으며, 돈 보스코는 그런 면에서 성인도 불완전한 존재일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도메니코 사비오는 착하고 온유했으나 사춘기 이전에 마술처럼 하늘에서 툭 떨어진 존재가 아니었다. 우리는 모두 수많은 청소년이 순종하고, 경청하며, 말을 절제하고, 특별한 방식으로 행동하기 위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는지도 잘 안다. 살레시오회의 첫 번째 추기경이 되었던 죠반니 칼리에로가 파타고니아로 파견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돈 보스코의 첫 번째 후계자였던 돈 루아의 기질이나 항상 우아하지만은 않았던 성품 때문에 그가 숨을 쉴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이야기이다.

엄청나게 많은 소위 ‘어려운’ 아이들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물론 그러한 애들 가운데에서 가끔은 미켈레 마고네 같은 아이들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우리 모두 부름을 받아 성덕으로 나아가는 길은 우리에게 양만의 길도, 그렇다고 늑대만의 길도 바라지 않는다. 성덕으로 가는 길은 각자 자기만의 고유한 길로서 가식이나 모방이 용납되지 않는 자기 자신이 되라는 길이다.

돈 보스코가 성인이고 성덕의 모범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 안에 있었던 그만의 내적인 그늘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려고 노력했던 그의 능력 때문이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어두운 면을 인식하고 그에 따르는 온갖 도전을 성장의 기회로 삼아 끊임없이 개선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성덕은 완벽을 목표로 하면서도 개인적인 변화를 계속 도모하는 역동적인 여정이다. 성덕을 향한 우리의 여정에서 우리가 단순한 양들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내면에 이제까지 그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독특하고 유일한 걸작이 숨겨져 있는 차갑고 거친 대리석 덩어리 같은 존재들이다. 우리는 이 대리석 덩어리를 평생 끌과 정으로 쪼아가며 조심스럽게 다듬고 온 힘을 기울여 그 안에 숨겨진 걸작이 꼴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성덕은 망치로 정을 내려칠 때마다 불필요한 대리석 부분을 덜어내고 떨구어내면서 우리 각자 안에 세우신 하느님의 계획이 온전히 실현되도록 조금씩 조금씩 그 계획에 가까워지는 과정이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려고 하는 계속된 열망 안에서 이루어지는 매일의 우리 노력으로 우리는 진정한 성덕에 조금씩 가까워진다.

우리 안에 있는 늑대를 건강하게 분리하여 형제 늑대라고 부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한계, 우리의 수고, 우리의 그늘이 신비로운 방식으로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걸작을 빚는데 필요한 것들임을 인식해야만 한다.

21) 양들은 그 남성과 여인을 반가워하듯 그분들 주위를 맴돌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살레시안의 마당은 함께 모이는 곳이고, 주님과 성모님을 모시고 맴돌며 뛰는 축제의 자리이다. 함께 어우러지는 기쁨이 표출되는 자리이다. 어렵고, 버려진, 위험에 처한 청소년들은 함께 있는 물리적이고 영적인 자리에서 다시 생명력을 얻는다. 그 어떤 청소년도 혼자 있도록 해서는 안 된다. 외로움은 슬픔을 낳지만, 공감과 공유로 이루어진 인생은 행복하고 즐거운 삶의 조건이 된다. 살레시오회가 추구하고자 하는 ‘축제의 교육’이다. 온순한 양들로 바뀐 아이들이 예수님과 성모님 주변을 뛰며 맴도는 축제는 거룩한 전례의 예시豫示이기도 하다. 육체와 영혼, 정신의 원만한 균형과 평온이 이루어지는 성장이고 성숙이다.

22) 나는 여전히 꿈속에서 말씀하시고 알려주시는 내용이 무슨 뜻인지 몰라 울음을 터뜨리며 여인에게 알아듣게 말해 달라고 간청했다: 이 말씀은 돈 보스코의 인간성에 관해 깊은 내용을 밝혀준다. 돈 보스코처럼 위대한 성인에게도 혼란과 불확실성의 순간이 있었다. 돈 보스코에게도 꿈이 자신에게 알려준 내용과 꿈에서 자신이 보았던 것들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순간이 있었다. 과학자에게 의심은 기쁨과 탐구 그리고 모험의 순간이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의심은 괴리와 분열(divideness), 그리고 타락의 순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는 은총에 힘입어 도약하는 순간이다.

이 대목을 한 걸음 더 나아가 루카복음이 전해주는 예수님의 놀라운 탄생 예고 장면과 연관지어 묵사해볼 필요가 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라는 소식을 전했을 때 마리아는 아홉 살 꿈에서 소년 요한 보스코가 보이는 반응과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루카복음은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루카 1,29)라고 기록한다. 이처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해 듣고 고민과 의문에 빠진다.

이 두 이야기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진정한 믿음이란 모든 것을 질문 없이 맹목적이고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참된 신앙은 자주 질문을 낳고, 더 잘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도 의문을 가진다. 이런 것들은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다.

믿음에 대한 의심과 질문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혼란의 순간을 겪는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순간은 신앙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강화할 소중한 기회가 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의심과 질문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이다.

마리아는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천사의 말을 듣고 일단 하느님께 “예!”라고 대답한다. 아직 모든 답을 얻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받아들인다. 그런 의미에서 마리아는 하느님을 향한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인다.

의심과 질문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마리아처럼 우리도 경청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의 두려움과 불확실성을 당신 마음에 두실 것을 믿어야 한다. 은총을 간구해야 한다. 그리고 때가 되면 모든 답을 얻지 못했더라도 주님 앞에 “예!”라는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바로 이 “예!”가 마리아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 인생에서도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로 이어질 수 있다.

23) 그러자 부인은 내 머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에야 깨달을 수 있는 위대한 수수께끼와 비밀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다.

돈 보스코는 자신의 꿈과 경험이 지닌 보다 깊은 의미에 대한 계시를 기다릴 줄 아는 인내를 가지고 평생 살았다. 돈 보스코는 우리가 잘 아는 ‘눈물의 미사’라고 알려지는 죽기 몇 달 전 1887년 5월 16일 로마의 예수 성심 대성당에서 드린 미사 때에야 아홉 살 꿈과 그 꿈으로부터 이어진 자신과 함께 살았던 아이들, 모든 이의 생애를 관통하는 붉은 실을 보고 그 의미를 발견하며 이해하고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린다. 이러한 이해는 논리적인 설명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깊은 감정의 은총으로 이루어진다.

우리 인생은 전체 그림을 단번에 알아볼 수 없는 수많은 경험이 날줄과 씨줄로 얽혀 짜지는 카펫과 같다. “평생토록 진리와 선행의 길을 걸어왔다”(토빗 1,3)라고 말하는 토빗의 아들 토비야와 그의 아내 사라가 큰 환란을 겪으며 기도했던 것처럼 우리도 답을 알 수 없을 것 같은 어둠의 순간을 마주할 때가 있다.

헤아릴 길 없는 지혜의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신비들을 서둘러 밝히려 하시지 않는다. 라파엘 천사를 통해서 토비야와 사라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때때로 우리가 즉시 알아차리지 못하는 방식으로 당신의 현존과 위로의 신호를 보내신다. 하느님의 약속은 즉각적인 약속이라기보다 우리를 계속 동행하시고 우리를 지탱하시며 알맞을 때가 될 때 모든 것을 이해하도록 해주시겠다는 지속적인 현존에 대한 약속이다.

우리도 돈 보스코를 인도했던 것과 같은 인내와 믿음을 살아야 한다. 의심과 불확실성의 순간에도, 길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도, 우리는 우리가 내딛는 걸음걸음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보이지 않는 손이 함께 한다는 것을 안다. 우리의 삶은 경험으로 짜이는 옷감이다. 실 한 오라기에도 모두 제 자리와 그 목적이 있다.

이해는 오늘이 아니고 내일도 아닐지라도, 어쩌면 전혀 예기치 않았던 은총의 순간에 올 수 있으므로 인내해야 한다.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나를 향한 하느님의 계획이 작동하고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언젠가 내가 완전히 새로운 눈과 경이로움으로 가득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획으로 나라는 존재의 천을 짜고 계시므로 믿음을 가져야 한다.

돈 보스코가 인생 말년에 미사를 드리는 제대에서 순수한 감정으로 꾸었던 어린 시절 아홉 살 꿈의 열쇠를 발견한 것처럼 우리도 복잡다단한 삶의 여정에서 때가 되어 드러나는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침내 빛을 본 사람의 눈물로 “이제야 알았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러한 희망을 마음에 간직하고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현존에 항상 열린 마음으로 인내하며 믿음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계속 걸어가야 한다. 인내는 진정한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내는 우리의 생각이나 마음에서 원하는 대로가 아닌, 있는 현실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랑은 우리의 생각이나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선善이 존재하고 빛도 존재하지만, 우리에게 즉시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인내로 어둠 속에 머무르는 능력을 키울 필요가 있다. 우리가 어둠 속에 머물 힘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 끝까지 어둠이 아닐 것이라는 희망이다. 우리를 십자가 위에 머물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십자가가 끝이 아니라는 희망, 빛이 있다는 희망, 숨겨진 선善이 있다는 희망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어둠을 헤쳐나가는 데에 필요한 힘을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두움을 남겨 두시느라 인색하신 분이 아니시고, 다음 걸음을 위해 빛을 주시는 분이시다. 진정한 기적은 다음 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는 믿음이다. 치유를 받은 소경처럼 걸음을 내딛으면서 우리는 단순히 육체의 눈을 치유 받은 것뿐만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더 큰 은총, 곧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아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참조. 요한 9,1-41)

24) 그 말이 있고 나서 나는 어떤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으며 모든 것이 사라졌다: 꿈은 항상 하나의 출발점이다. 꿈을 현실로 바꾸기 위해서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소년 요한 보스코는 “어떤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어난다.” 소년 보스코를 깨운 소음은 사실 ‘거룩한 소음’이다. 침대에서 일어나 내려오게 하는 소음, 눈을 감고서만 볼 수 있었던 자신의 삶을 눈을 떠서 현실에서 실현하라는 초대이다.

소음에 대한 체험은 매우 중요하다. 어쩌면 우리가 너무 소음에 익숙해진 나머지 더는 소음의 생성과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소음을 우리 인생에서는 ‘예기치 않은(갑작스러운) 소음’이라고 한다. 예기치 않은 소음이 종종 돈 보스코의 문을 두드리곤 했다.

돈 보스코는 누군가의 꿈을 여지없이 억누르거나 없애버릴 가난과 고통의 소음을 들었다. 그렇지만 돈 보스코에게 그러한 소음은 단순하게 귀를 때리는 소음이 아니라 매일매일을 분주하게 살아가라는 부르심의 음악이 되었다.

가난의 그늘 아래 성장했고,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항상 마음 한쪽에 담고 살아야 했던 어린 보스코에게 황금빛 포장도로나 쉬운 길은 없었다. 날마다 전쟁이었고, 매 순간 힘을 내야 했으며, 언제나 시련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는 시련 속에서도 닥쳐오는 모든 사건과 장애를 더 높이 도약할 기회로 만들었고, 실제 더 높이 뛰어올랐으며, 가능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능력이라는 불꽃을 타오르게 했다.

우리 삶에서 상실, 절망, 실패와 같은 것들은 가혹하지만 올바른 스승이며 우리에게 더 큰 무엇인가를, 우리 존재를 뛰어넘는 뭔가를 깨닫도록 준비시킨다.

어떤 소음이 우리의 꿈을 방해하며 갑자기 우리를 깨어나게 할 때, 그 소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 소음은 일어나라는 신호이며 팔을 걷어붙이고 일하라는 신호이다. 예상치 못한 모든 사건은 우리 인생이라는 걸작을 빚어내는 장인匠人이 되는 기회이다.

깨어남이 없는 꿈은 ‘The End’가 없는 영화와 같다. 깨어남에 감사해야 한다. 그 누구도 그 영화가 어떻게 끝날지는 모른다.

25) 나는 멍했다. 내가 주먹질을 해댄 손은 아팠고 얻어맞은 뺨은 화끈화끈 달아오르는 듯했다: 소년 요한 보스코가 꾼 꿈은 현실처럼 너무도 생생해서 실제로 몸이 그 통증을 느꼈다.

돈 보스코는 자신의 회고록을 기록하면서 이처럼 자기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던 아홉 살 때의 꿈을 첫 장면으로 삼는다. 그리고 이어서 “주먹질”에 관해 공립학교 시절에 있었던 같은 반 친구들과 싸웠던 일화 하나를 전해준다. “친한 친구”요 “훌륭한 친구”라고 묘사하는 루이지 코몰로와 안토니오 칸델로를 괴롭히는 다른 아이들을 상대로(돈 보스코의 회상, 95-96쪽) 요한 보스코는 충동적으로 반응하며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 사건은 코몰로의 조언과 함께 요한에게 깊은 반성의 계기가 된다. 돈 보스코는 훗날 「루이지 코몰로는 단둘이 있게 되자 내게 아주 색다른 가르침을 주었다. 돈 보스코는 회고록에서 「“요한아, 네 힘에 놀랐어.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친구들을 해치라고 힘을 주신 것은 아니잖아. 그분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길 바라셔.” 참으로 경탄할 만한 애덕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받아들였고 그가 인도하는 대로 나 자신을 맡겼다. 루이지 코몰로와 굴리엘모 가릴리아노 그리고 나, 우리 셋은 자주 고해성사를 보고 영성체를 했다. 묵상과 영적 독서, 성체 조배 그리고 복사도 하러 갔다. 루이지의 초대는 하도 다정하고 친절해서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회상, 96쪽)」라고 이를 기록한다.

요한 보스코는 루이지 코몰로의 말을 통해서 자신의 의도가 좋았으나 그가 사용했던 방법과 수단이 사랑과 자비라는 복음적 가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요한 보스코의 이러한 경험은 우리의 행동을 돌아보게 한다. 때때로 우리도 요한이 친구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처럼 옳다고 생각하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잘못된 방법이나 수단을 써도 된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나 항상 복음적 가치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진정한 용기와 힘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사랑, 인내, 이해로 행동하는 데에 있다.

충동적인 젊은이로부터 지혜롭고 자애로운 교육자로 변화하는 요한 보스코의 이야기는 실수로부터 배워 영적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예가 된다.

복음의 가치를 온전히 반영하는 삶을 향한 여정은 도전과 실수로 얼룩져있지만, 그래도 이러한 모든 경험은 우리를 성숙하게 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가르침의 진정한 본질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기회가 된다.

26) 게다가 낯선 분과 여인에게서 듣고 말한 모든 것으로 머릿속이 꽉 차서 그날 밤에는 다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 구절을 읽을 때믄 구약의 야곱이 떠오른다.(참조. 창세 28,10-22) 야곱이 꿈에 보니 “땅에 층계가 세워져 있고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있는데,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라는 구절처럼 야곱은 불안하고 의미심장한 꿈을 꾼다. 이 꿈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야곱에게 그가 누워있는 땅, 그리고 그와 그의 후손을 위한 풍성한 축복과 지속적인 보호를 약속하신다.

이 꿈은 야곱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두려움에 차서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창세 28,16-17) 하며, “기념 기둥”을 세우고 그곳의 이름을 ‘하느님의 집’이라는 뜻으로 “베텔”이라 이름 짓는다. 야곱의 꿈은 야곱을 깨어 있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향후 살아갈 미래의 삶과 행동에 큰 영향을 끼친다.

마찬가지로 돈 보스코의 아홉 살 꿈은 그저 지나가는 단순한 꿈이 아니라 돈 보스코 자신이 “뇌리에 박혀” 평생 떠나지 않는 꿈이 되었고, 그의 행동과 사명을 이끄는 기준점이 되었다. 야곱이나 돈 보스코나 두 경우 모두 우연처럼 꾸게 된 특정한 꿈이나 경험이 우리 존재를 뒤흔들고 강렬하게 각인되면서 우리를 깊이 숙고하게 하고 삶의 방향을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단순한 꿈처럼 보일지라도 이러한 순간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삶에 개입하시면서 깊은 감동과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면서 더 높은 목표를 향해 운명을 이끄는 전환점이 된다.

27) 아침에 즉시 형들에게 꿈 이야기를 했더니 형들은 웃어넘겼다: 강렬한 꿈을 꾼 다음 날 아침 요한 보스코는 식구들과 꿈을 나누며 공유한다. 인간은 공유와 나눔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고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다. 나눔과 공유라는 예술 안에 ‘관계’가 설정된다. 우리는 타인과 나 사이에 나눔과 공유를 어떻게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를 훈련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존재이다.

나눔은 상대방을 알아보고, 그에게 특별한 자리를 내어주며, 우리 삶 안에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웃을 위한 시공간을 마련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가 된다.

내 인생에서 나를 흥분하게 하는 아이디어나 꿈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던 때가 몇 번이나 있었을까? 그러한 나를 두고 그들이 이해하지 못한 나머지 웃어넘기고 만 적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우리의 꿈과 경험을 누군가와 공유한다는 것은 우리 삶에서 무척 중요하다. 공유와 나눔을 통해 우리는 나를 개방하고 그들을 나의 세계로 초대한다. 때로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이 비웃을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입을 다물고 내 안에 내가 나만의 성을 쌓고 그 안에서 혼자 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만약 돈 보스코가 남들의 비웃음 때문에 자기 꿈을 믿지 않고 누군가와 나누지 않았더라면 인류는 그의 위대한 유산을 공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계속 꿈꾸었으며 그 꿈들을 믿었고 누군가와 끊임없이 나누었다. 그리고 그 꿈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셨고, 행동하셨으며, 당신의 꿈을 꾸셨고, 이루어가셨다.

누군가에게 나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것은 다른 한편에서 용기가 있어야만 할 수 있는 행동이다. 누군가에게 나를 드러내고 나의 두려움과 소망, 꿈을 통해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는 것은 용기와 겸손이 필요한 행동이다. 그런 행위를 통해 나는 인간이 되어가고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간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과 공동체의 중요성도 놓칠 수 없다. 돈 보스코가 자신의 꿈을 맨 처음 나눈 곳은 가족이었으며, 그 꿈을 점차 온 세상과도 나누었다. 가까운 사람들과 먼저 중요한 것을 나눌 때마다 이는 다리를 만들고, 유대를 형성하며, 나와 타인의 삶에 하느님을 현존하시도록 한다.

우리의 꿈과 아이디어, 생각을 공유하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가 그것을 비웃고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내가 믿고, 나와 동행하시는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세상과 역사의 위대한 변화는 항상 꿈을 공유하는 데서 시작한다.

용기를 내고, 꿈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꿈을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인생의 놀라운 이 여정에 우리와 함께하신다.

28) 어머니와 할머니에게도 이 이야기를 하자 식구들은 제각각 해몽을 해줬다. 요셉 형은, “너는 염소나 양이나 다른 동물들을 치는 사람이 되겠다.”라고 말했고, “사제가 될 꿈인지 누가 알겠니!”라고 어머니가 말씀하시자마자 안토니오 형이 심술궂게 대꾸했다. “너는 도둑 우두머리가 될 거야.” 마지막으로 전혀 읽고 쓸 줄도 모르면서도 상당히 많은 것을 알고 계시는 할머니가 꿈같은 것에 신경 쓸 일 없어요.” 하고 최종적인 단언을 내렸다: 어린 막내 요한의 꿈에 관하여 요셉 형이나 안토니오 형, 그리고 어머니 마르게리타와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식구들이 제각각 각자의 기대가 반영된 해석을 내놓는다. 그렇지만 모두 그 꿈에 관하여 이해가 충분했다고는 할 수 없다. 문맹이면서도 삶의 지혜를 지니셨을 할머니조차 “신경 쓸 일 없다”라고 결론을 내리신다. 그러나 이 말은 누구에게나 있을 꿈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말씀이라기보다 피상적인 해석이나 다른 사람들 말에 휘둘리지 말고 지혜와 분별력을 가지고 잘 생각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꿈의 해석은 다양하고 유동적이며 많은 경우 개인적인 경험이나 희망, 두려움의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꿈이 사라지거나 실현되지 않을까 봐 두려워하면서 그 꿈에 대해 뭔가 확인을 찾곤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꿈들이 우리의 인생에 많은 도움을 주며 우리 자신을 발견하도록 안내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결정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어떤 결정은 평생을 바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생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어딘가에 안전한 출구가 보장되어 있기를 갈망하거나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확보하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그런 증거가 우리의 자유를 속박할 수도 있고, 반대로 의심하면 자유로울 수도 있다. 다른 이의 해석에 의존하는 대신 내면의 목소리에 스스로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꿈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하느님께서는 꿈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꿈을 통하여 우리를 인도하신다.

한편 이 대목은 흥미롭게도 우리에게 꿈은 꼭 해석하고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번에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가르쳐준다. 먼 길을 걸은 뒤에야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우리에게 주신 꿈의 조각들을 짜 맞출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신다. 꾸준히, 성실하게 꿈이 보여 주는 길을 걸어 앞으로 나아가는 영적인 태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29) 나도 할머니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꿈을 결코 내 머리에서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돈 보스코의 아홉 살 꿈은 돈 보스코에게 하느님께서 예상치 못한 일을 통해 일하시는 분이심을 보여 주면서 인생에서 맞는 도전 속에서도 진정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그를 인도했다.

돈 보스코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하느님께 열린 마음으로 인생을 살았다. 우리도 그처럼 인생의 여러 사건 앞에서도 분명한 방향을 유지하면서 유연하게 남아 꿈을 꾸는 사람들인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 모든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해결책이 없더라도 분명하게 믿는 방향을 갖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우리가 올바른 길 위에 있음을 드러내므로 그 자체로 구원적이다.

우리의 꿈과 열망은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약속이며 하느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는 삶의 표징이다. 돈 보스코처럼 우리도 우리의 꿈이 특별한 길을 헤쳐나가는 지도地圖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꿈을 꾸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려면 세상에 의미 있는 흔적을 남기려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우리는 정직하게 우리의 꿈을 만나야만 한다. 언제라도 변화할 자세를 갖추면서도 우리 자신과 우리의 진정한 본모습에 충실해야 한다. 돈 보스코는 이러한 도전에 구체적인 행동으로 대응하며 변화 속에서도 자신의 꿈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준다.

꿈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우리 삶에 당신의 부르심과 현존을 나타내시는 표징이다. 그 꿈을 잘 들어야 한다. 그 꿈에 공간을 내어드려야 한다. 그리고 그 꿈을 용기와 신뢰를 두고 따라야 한다. 그 꿈이 현실과 부딪힐 때 하느님께서 우리의 걸음걸음마다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의 운명을 인도하고 계심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어린 요한 보스코를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란 시골 어린이로만 보지 않는다. 우리는 그를 점차 돈 보스코가 되어갔고 마침내 성 요한 보스코가 되어간 분으로 본다. 성장과 발견의 단계를 통해 주어진 모든 체험과 도전으로 그는 한 조각씩 한 조각씩 되어져 갔다. 어린 요한 보스코에게서처럼 우리에게도 예수님은 필수적이다. 예수님 없이는 우리가 왜 태어났고 왜 살고 있으며 왜 아직 여기에 이렇게 있는지 등에 관한 삶의 이유를 잃고 헤매게 된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 답을 알고 계신다. 그분만이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를 발견하는 열쇠이다.

꿈은 확실하고 그 뜻은 틀림없습니다.”(다니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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