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보스코의 아홉 살 꿈①

2024년은 살레시오회와 살레시오 가족들에게 매우 특별한 해이다. 돈 보스코가 아홉 살(1824년)에 꾸었다고 직접 증언하고 기록한 아홉 살 꿈의 2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살레시오회는 이 아홉 살 꿈으로부터 돈 보스코와 살레시오회의 모든 것이 시작되었음을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돈 보스코의 아홉 살 꿈은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 1,1)라는 성경의 첫 구절처럼 “한 처음에 돈 보스코에게 아홉 살 꿈이 있었다.”라고 살레시오회 안에서 읽힌다.

돈 보스코의 열 번째 후계자로서 추기경이 된 현 살레시오회의 총장 앙헬 페르난데즈는 2024년 돈 보스코의 아홉 살 꿈 200주년을 맞아 살레시오 가족의 2024년 생활 지표로서 “당신을 꿈꾸게 하는 꿈(Il Sogno che fa sognare)”라는 표어를 제시하고 그 부제로서 “늑대들을 양들로 바꾸는 마음(Un cuore che trasforma I ‘lupi’ in ‘agnelli’)”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이에 따라 살레시오 가족들에게는 특별히 올 한 해 돈 보스코의 아홉 살 꿈을 이해하고 묵상하는 것도 중요하고, 늑대들을 양들로 바꾸는 마음에 관하여 묵상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꿈은 확실하고 그 뜻은 틀림없습니다.”(다니 2,45)라는 성경 말씀처럼 살레시오 가족들에게 돈 보스코의 꿈은 역사와 시대를 넘어 자신의 꿈이기 때문이다.

“늑대”와 “양”이라면 무엇보다도 우선 이솝 우화와 같은 여러 우화에 등장하는 늑대와 양이 떠오르게 마련이다.(참고. 양의 탈을 쓴 늑대, 늑대와 거짓말쟁이 양치기 소년) 물론 아메리카 체로키 인디언 부족 우화에 등장하는 착한 늑대와 나쁜 늑대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한 인디언 아이가 부족 원로에게 물었다. “사람들은 왜 싸워요.” 원로가 대답했다. “그건 우리 마음속에 살고 있는 두 마리의 늑대가 서로 싸우기 때문이란다.” “우리 속에도 있나요.” “그럼 모두의 마음속에 살고 있단다. 한 마리는 하얀 늑대이고 다른 한 마리는 회색 늑대야. 하얀 늑대는 사랑·평화·희망·겸손·믿음으로 충만해 있단다. 회색 늑대는 분노·두려움·씁쓸함·탐욕·오만으로 가득 차 있지.” “그럼 어느 늑대가 이겨요.” “우리가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기는 법이란다.”」

※ 이하 글은 살레시오회의 안토니오 카리에로Antonio Carriero 신부가 2024년 1월 <Né lupi né agnelli(늑대도 아니고 양도 아니고)>라는 제목(부제 – Il sogno di Don Bosco a occhi aperti;돈 보스코의 꿈)으로 Elledici 출판사를 통해 출판한 ‘살레시오 영성과 교육 시리즈’ 소책자를 번역하고, 이에 부분적으로 필자의 내용을 추가하여 완성한 내용이다. 뉘여 쓴 「」 안의 내용은 돈 보스코 미디어에서 발행한 <돈 보스코의 회상> 번역본에서 따 왔으며 이미지들은 위의 소책자에서 따왔다.

***

도입

이름 붙이기 어려운 성인 돈 보스코

매일 수많은 관계 안에서 그 관계를 소비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관계 안에 살아가는 인간의 습관 중 하나는 곧잘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가장 먼 사람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에게 라벨을 붙이는 것이다. 꼭 어떤 나쁜 의도나 악의를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고, 때로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다. 누군가에게 붙이는 라벨링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아는 누군가를 그런 식으로 종합한다. 그렇게 보면 라벨링이라는 것이 긍정적이지만, 부정적으로 보아 그런 식으로 누군가를 그저 그런 사람이라고 한마디로 규정해버린다는 측면에서는 문제가 있다. 그런 식으로 그 사람을 안다고 생각하여 종합해버리면 이는 상당히 불공평할 수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사람, 친구, 어머니, 교수, 정치인, 운동선수들에게 라벨을 붙인다. 어찌 생각하면 라벨링이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놀이’ 같기도 하다. 우리는 거의 반드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머릿속에서 요약하는 경향이 있다.

살아 있는 누군가에게 라벨을 붙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라벨을 붙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성인聖人들에게도 그렇게 한다. 사람들이 사람들을 분류하여 라벨을 붙이듯이 교회도 성인들에게 이름들을 붙인다. 물론 악의로 그렇게 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교회가 어떤 성인을 두고 ‘가난한 사람들의 성인’이니 ‘마지막 성인’, ‘버림받은 성인’, ‘기쁨의 성인’이니 하는 것은 그러한 접두어들이 그 성인의 삶을 특징적으로 요약해주면서 다른 성인들과 구별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보다도 말씀을 잘 사용하고,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하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은사를 지니셨던 성인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를 두고 우리가 ‘황금의 입(금구金口, golden mouth)’이라 부르고,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를 두고는 ‘설교하는 성자’라고 부르는 식이다. 이 작은 책자에 2천 년의 역사 동안 그리스도교인들이 성인들에게 붙여 왔던 모든 수식어를 담자고 하는 것은 감당 못 할 일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성 요한 보스코는 어떤 성인일까? 공식적인 명칭인 성 요한 보스코를 두고 ‘돈 보스코’라고 부르기를 좋아하는 성인을 두고 ‘청소년들의 아버지요 스승이며 친구’라는 접두어에 많은 이가 익숙하다. 돈 보스코를 생각하면 즉시 애들과 청소년들, 운동장, 놀이터, 게임, 마술과 같은 것들을 연상한다. 그렇지만 돈 보스코를 좀 더 공부하고 그를 조금 더 알아가다 보면 그가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성인成人들, 그중에서도 노인들의 성인이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어렵지 않다. 로마의 살레시오 역사 기록 보관소는 돈 보스코가 경건한 생각을 나누거나 진지한 토론을 이어가고 기부를 요청하며 때로는 가족이나 영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안하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보낸 친필 편지가 수두룩하다는 것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돈 보스코는 또한 기본적으로 성인의 종교적 교육을 위해 고안된 수많은 책을 집필하기도 했으므로 ‘출판인들의 주보 성인’이기도 하다.

돈 보스코가 ‘젊은이들의 성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 틀린 말이 아니지만, 상당히 부분적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며, 조금 더 나아가 하느님 백성들의 구원에 관한 일이라면 청소년뿐 아니라 일반적인 남녀노소 누구라도 만났으며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젊은이들의 성인’이라는 말이 상당히 어폐가 있는 말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교회의 역사 안에서 돈 보스코가 역사적으로 젊은이들을 위해 헌신한 유일한 성인도 결코 아니었다. 어쩌면 비교적 ‘최근의 인물’이라고 하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할 것이다. 돈 보스코는 와인으로 유명한 피에몬테 지역 출신으로서 와인에도 정통했으므로 돈 보스코는 많은 이탈리아 와인 재배자들의 수호자이기도 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마술과 재주 부리기를 좋아했던 그는 마술사들의 수호자로 불릴 만큼 마술사들에게서 사랑받으며, 앞서 말한 편집인이나 출판인들의 수호성인, 견습공이나 실습공들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이러저러한 여러 접두어를 붙여서 돈 보스코를 부를 수 있겠지만 돈 보스코는 그러한 접두어 몇 마디에 국한된 분이 아니다. 분명 그 이상이다. 어쩌면 성인聖人은 누구나 어떤 접두어나 라벨이 말하는 것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식의 접두어나 꼬리표는 언제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를 그리 무시할 필요는 없다. 우리 각자에게도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꼬리표가 있다. 일부는 이미 공공연하게 드러나기도 했을 것이고, 일부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우리에게 붙어있기도 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어떤 꼬리표를 붙여서 돈 보스코를 기억하고 그분께 기도하는지 들으신다면 그분이 뭐라고 말씀하실지 궁금하다. 그는 아마도 훨씬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젊은이들의 성인이라고만 기억되는 것을 서운해하실지도 모른다. 돈 보스코는 당신이 실제로 예수님께 데려온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뜻에서라면 돈 보스코는 자신이 훨씬 더 많은 호칭으로 불리기를 요청할지도 모른다.

돈 보스코를 부르는 데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아주 특별한 호칭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꿈의 성인’이라는 수식어이다. 이 호칭은 바로 이 성인의 전 생애를 특징짓는 단어이다. 성 요한 보스코는 어렸을 때부터 임종 직전까지 평생 여러 꿈을 꾸었다. 그렇지만 이 호칭에는 다소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돈 보스코를 꿈과 연결할 때 즉시 초자연적인 현상과 연결되면서 우리 일상과 너무도 가까이 다가와 있는 돈 보스코를 조금 멀리 떼어 놓을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돈 보스코가 청소년들을 교육하고 가르치며, 도덕적으로 이끌기 위해 그때그때 편의에 따라 꿈이라는 것을 발명했다고 생각하면 우리에게는 소년들을 만나고, 환영하고, 교육하고, 가르치고, 복음을 전한 돈 보스코만 남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약간의 마술이나 저글링으로 소년들을 즐겁게 하고 움직이는 방법을 아는 돈 보스코만 남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와인에 대해 잘 알고 있거나 소년들과 살레시오회, 즉 그가 설립한 수도회를 위해 기부를 얻기 위해 부자들을 만나 여기저기서 계획을 세웠던 돈 보스코만 남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손으로 책을 쓸 여유조차 없었던 돈 보스코만 남게 될지도 모른다. 사실 돈 보스코는 여기저기서 듣고 알게 된 책의 부분들을 ‘편집’하고, 즉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복사와 붙여넣기’의 달인으로서 발도코 인쇄 공방에서 책을 찍어냈다.

아무튼 꿈이 없이 돈 보스코를 묘사하려 들면 지상의 돈 보스코만 남겨두거나 돈 보스코의 삶에서 편향된 차원에만 머무르는 삶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돈 보스코를 사랑하기 때문에 돈 보스코를 두고 최상의 의도와 최선으로 말하고 행동하고자 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이 성인의 삶에서 일어나도록 허용하신 모든, 그리고 아주 많은 초자연적인 체험에 대해서 우리는 조금 더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잔니 상갈리는 “꿈이 없는 돈 보스코의 생애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복음에서 비유 없이 예수님을 이야기한다는 것과 같다.”(Gianni Sangalli, I Sogni di Don Bosco-introduzione에서, 1987 초판, 2006년 4쇄, LDC)라고 말한다.

돈 보스코가 꾼 수많은 꿈 중에서 특별히 그가 평생 여러 번 반복해서 꾸었다고 말한 꿈이 있는데, 그것은 9세에서 10세 사이에 처음 꾸었던, 그리고 여러 번 연장되고 확장되었다고 말한 바로 그 꿈이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편의를 위해 간단히 ‘아홉 살 때의 꿈’으로 기억한다. 돈 보스코가 이 꿈을 자주 말한 이유는 그 꿈이 그의 삶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야기를 시작했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돈 보스코를 지칭하는 접두어에 대해서 결국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교회의 성인들 하나하나에 붙어있는 호칭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성인들이 하나같이 라벨을 초월한다는 것은 공통이다. 돈 보스코 역시 그의 후손들이 그에게 붙인, 사실이면서도 제한적인 꼬리표를 뛰어넘는다. 성인은 본질에서 사람들이 내리는 정의의 틀에 갇혀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성령을 틀에 가두는 셈이기 때문이다.

성 요한 보스코는 젊은이들의 성인이었고, 그들의 교육에 힘썼으며, 매일 매일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그가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을 가르치거나 발견한다고 주장하지 않는 이 단순한 책자가 독자들에게 꿈이 성화의 길에 있는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는 하나의 ‘표지’라는 것을 더 잘 인식하게 되기를 바란다.

매일 꿈을 꾸는 법을 배운다면 당신은 사람이다. 매일 꿈을 실현하기 위해 잠에서 깨어난다면 돈 보스코처럼 당신도 성인聖人이다.

1. 성인만이 꿈꾼다?

그 나이에 나는 평생토록 내 뇌리에 깊이 박혀 떠나지 않는 꿈 하나를 꾸었다. 꿈에 나는 집 근처에 있는 아주 넓은 마당에 서 있는 듯했다. 그곳에는 수많은 아이가 모여서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어떤 아이들은 웃고 있었고 어떤 아이들은 놀고 있었는데, 적지 않은 아이들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 욕설을 듣고 나는 곧장 아이들 가운데로 뛰어들면서 주먹질과 고함으로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하려고 애썼다.」

* 수면 연구에 따르면 두뇌 활동이 가장 활발한 시간의 꿈, 꿈이 너무도 생생하여 거의 현실이 되는 마법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REM(Rapid Eye Movement, 급속 안구 운동) 수면’, 성인에게서는 총 수면의 20~25% 정도로 나타난다. 렘 수면은 나이와 관련이 있다. 갓난아기는 총 80%가 렘 수면이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거의 구세주요 메시아이며 세상을 구해야 할 사명 같은 것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시인도 되고 소설가도 되며, 악을 물리치는 의로운 정의의 사도가 되었다가 화가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점차 우리의 본성과 한계를 인식해가면서 자기 정체성을 찾아간다.

살레시안 가족인 우리도 세상의 모든 청소년을 구원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가졌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빛을 따라가면서 청소년들을 인도하는 세상 한구석의 빛이 될 수는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의 진정한 임무는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그 길이 확실한 길이며 분명한 방향이고,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라도 이것이 믿고 따를 만한 길이며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다는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이다.

분명한 방향과 지침이 있다면 구원은 더 이상 먼 유토피아가 아니다. 구원은 단순히 성공이나 직업적 성취에 관한 것이 아니라 훨씬 더 깊은 차원의 어떤 것이다. 내면의 여정, 자기 이해의 여정에 관한 것이다. 어린 요한 보스코의 아홉 살 꿈은 그를 평생 따라다니며 그를 인도하고 비추는 빛이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는 그 꿈의 의미들을 이해했고, 그 꿈을 현실화했으며, 자기 존재의 가장 깊은 의미를 해독하는 열쇠임을 알아갔다.

돈 보스코의 아홉 살 때 꿈은 돈 보스코의 삶과 사고방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일생과 세상사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는 방식”(P. Stella, Don Bosco nella storia della religiosità cattolica. I. Vita e opere, LAS, Roma 1979, 31쪽)과 기준이 된다. 한 마디로 이는 청소년들과 함께 살아간 삶이라는 돈 보스코의 사명에 십자가의 오상五傷과도 같은 성흔聖痕이요 상흔傷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모두가 잘 알다시피 이 꿈은 돈 보스코의 일생을 관통하다가 1887년 5월 16일 아침 로마의 예수 성심 대성당의 도움이신 마리아 제단에서 드린 미사 때에야 그 전체적인 의미가 완성된 비밀 가득한 꿈이었으며 돈 보스코를 통하여 이루어져 간 하느님의 꿈이었다.

돈 보스코의 꿈은 우리에게 개인적인 방식으로 강력하게 말을 건넨다. 실로 그 꿈은 찬란한 기억이면서도 먼 지평선에서 떠올라 그의 인생을 인도했던 별이다.

그의 꿈은 그가 살았던 소명의 상징이자, 우리를 불러 온갖 장애를 넘어 나아가도록 우리를 밀어대는 운명의 상징이다.

우리는 우리의 꿈, 우리의 열렬한 바램, 희망, 우리가 사는 모든 이유와 목표에 의미를 부여하는 우리의 꿈을 생각하게 한다. 돈 보스코의 아홉 살 꿈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단순한 과거의 회상이 아니라 미래의 약속을 보는 것이며, 열정과 헌신으로 그려나갈 대작으로 가득한 삶으로 초대하고자 하는 초대장이다.

우리도 돈 보스코처럼 우리의 꿈을 인생의 사명으로 바꿀 수 있다.

우리의 꿈들을 먹여 키워나가야 한다. 온갖 장애와 유혹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꿈들을 현실로 만들어나가는 용기를 북돋워야 한다. 용기를 내고 결단하여 나의 꿈 앞에 서야 한다. 돈 보스코가 그 누구의 카피나 모방이 아니었듯이 우리는 돈 보스코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저마다의 마음에 품고 있는 오솔길을 따라 우리가 걸어야 할 우리만의 꿈이 있다.

지금 내가 어떻게 해서 여기에 이렇게 있는가를 생각하면 오묘하기도 하고 아득하기도 하다. 꿈이 처음에 우리 삶에 들어와 우리를 안내하기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 천지였으나 그를 따라가면서 점차 시간과 세월 속에서 우리는 그것들을 학습했고 아직도 배워나가고 있다.

때로는 주변의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나름의 계획을 잠시 뒤로 미뤄놓아야 하는 일도 있게 마련이다. 나의 기대치와 나의 계획을 엄격하게 고수하려다 보면 인생의 진정한 기회와 아름다움을 놓칠 수도 있다. 돈 보스코는 늘 시대의 징후를 그때그때 잘 파악했고, 구체적이고 의미 있는 행동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꿈을 좇기 위한 기본은 신뢰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뢰는 수학적 계산이 아니라 다른 이와 함께 엮어나간 경험과 견고한 관계에서 생겨난다. 이러한 관계들이 없다면 모든 것이 괜찮다고 하더라도 그 말을 그대로 곧이곧대로 믿기 어렵다.

어떤 꿈이 나의 일부가 된 것은 언제였을까? 몇 살 때쯤 그 꿈이 현실로 다가왔을까? 그럴 때 우리는 그때와 그 장소, 냄새나 색깔과 같은 그때의 감각적 요소들을 기억한다. 이런 것이 우리 여정에서 필수 좌표들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바꾸고 우리 인생에 새겨졌던 경험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어떤 상실, 불의, 어려움 중에서도 누군가를 돕기 위해 베풀었던 도움 같은 것들일 수도 있다.

모든 꿈은 우리를 뒤흔들고 우리 내면을 깊게 터치했던 순간에 태어난다. 그러나 꿈들은 일상의 도전들을 맞아 질식하기도 한다. 돈 보스코의 꿈에는 왁자지껄하게 뛰어놀고 웃으며 심지어 불경스러운 욕설까지 해대는 애들이 있다. 얼핏 보기에 희망적인 상황에서 제시된 도전이었으나 그 결과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우리 모두에게는 언젠가 어떤 꿈이 불타올랐던 순간이 있었다. 언젠가 상처 입은 동물을 보살피다가 맞았던 순간이었을 수도 있고, 끝없는 수평선 너머 바다를 보면서였을 수도 있으며, 상실 속에서 나에게 있었던 그런 상실이 다른 이에게는 다시 있어서 안 된다는 순간이었을 수도 있고, 누군가를 위해 평생 나를 바치겠다고 생각했던 순간이었을 수도 있다.

꿈들은 우리의 인생을 방향 짓는 나침반이다. 우리가 기적을 행할 수는 없지만 돈 보스코가 소년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청소년들이 방향을 찾도록 도울 수는 있다. 우리에게 맡겨진 임무는 청소년들에게 믿을 만한 방향을 제시하고, 어려움이 있더라도 평생 그 방향을 따라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정직해야 한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참 자아에 충실하기 위해 기꺼이 변화할 수 있어야만 한다. 돈 보스코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변화에 임했다.

우리는 진정한 관계를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인생을 풍요롭고 충만하게 만드는 신뢰라는 카펫을 짜아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꿈을 추구하고 실현할 영감과 용기는 진정한 관계를 통해서만 얻어진다.

인생은 끝없는 발견의 여정이며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에 품으신 꿈을 실현하는 여정이다. 돈보스코처럼 우리도 꿈을 현실로 만들고 세상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우리의 모든 걸음에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알기에 용기와 신뢰로 도전에 맞선다.

천사 가브리엘의 알림처럼 요한 보스코의 아홉 살 꿈이라는 예지몽으로 시작되었고, 발토로메오 가렐리와의 첫 만남, 피나르디 헛간의 첫 공동체로 이어져 정착하게 된 돈 보스코의 발도코 오라토리오는 실로 돈 보스코의 사목적 카리스마의 모체요 종합이며 요약으로서 초창기 살레시오 회원들, 협력자들, 조력자들의 성령 강림 체험이었다. 돈 보스코의 아홉 살 꿈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역사적인 기록의 되새김이나 독서뿐이 아니라, 젊은이들과 함께 만나 기쁘게 살면서 주님을 섬기는 원천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살레시오회의 교육적이고 사목적인 행동 방식에 관한 성찰이고 쇄신의 행동 결정이다.

***

꿈에 나는 집 근처에 있는 아주 넓은 마당에 서 있는 듯했다.

소년 요한 보스코의 아홉 살 꿈속 배경은 살레시오회의 오라토리오가 있는 곳이라면 언제 어느 곳에나 해당이 될 ‘집 근처 마당’이다. 돈 보스코에게는 초막 셋을 짓고 싶었던 베드로의 타볼도 아니고, 요한 복음사가가 첫 장면으로 삼았던 성전도 아닌 곳에서 꿈이 시작한다. 집이 있는 곳, 우리가 친숙하게 잘 아는 곳, 익숙한 곳, 외로운 바닷가도 아니고 조용한 산책로도 아닌 그저 아이들이 모여 왁자지껄한 곳이다. 한 아이가 있는 고독한 곳이 아니고 다수가 어우러지는 곳, 천사들 같은 애들만 있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께 거침없이 욕설도 내뱉는 쌍스러움도 있는 곳이다. 다양한 아이들의 모습은 현실이고 실제이다.

살레시오회의 꿈, 돈 보스코의 꿈은 마당에서 일어난다. 모세와 산상설교, 타볼, 겟세마니, 칼바리, 부활하신 주님의 산에 이르기까지 복음에서 산이 언제나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였다면, 돈 보스코의 자리는 마당이다. 살레시안과 청소년이 만나는 자리이다. 별도의 공간이 아닌 일상의 공간이고 집 주변의 공간이다.

돈 보스코의 오라토리오는 한 마디로 ‘마당’의 체험 자리이고, 여성적인 어휘라면 감히 ‘우물’이다. ‘마당’은 형식과 구조, 담장을 넘어 온갖 사람들과 세상사가 오가는 길과 연결되는 자리이면서 공식을 넘는 비공식을 개의치 않으며, 사람들이 있고 더구나 청소년이 있는 곳이라면, 현실과 가상假想까지도 거침없이 나아간다. 마당은 세상 한가운데에 있다. 우리의 마당이 진실한 것이라면 그 마당에 주님께서는 어느새 우리 곁에 계신다.

꿈은 시종일관 아이들, 보스코, 예수님, 성모님이 모두 ‘함께’ 있는 곳에서 진행된다. 성령 강림도 그런 자리에서 이루어졌다.(참조. 사도 1,13-14;2,1-2) 우리가 ‘함께’하는 자리에 ‘항상’ 함께 하시는 하느님,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실(마태 28,20) 임마누엘이시다. 형제들과 함께 아이들 곁에, 아이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 은총이 함께 한다.

***

그는 내 이름을 부르면서

누군가가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첫 번째로 하시는 일이 어떤 사명과 임무를 부여하시는 것이 아니다. 소년 보스코의 꿈에서 예수님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처음 하신 일은 “요한아!” 하고 어린 요한 보스코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시는 일이었다. 주님께서 나의 이름을 부르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우리 일의 처음 시작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자리에서 우리 인생의 중요한 변화가 시작된다. 주님께서는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거듭거듭 소년 사무엘을 부르셨다.(참조. 1사무 3,3-10) 그리고 그것이 사무엘 부르심의 시작이었다.

그리스도교는 무엇보다도 사람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느님을 믿는 종교이다. 당신을 부르시는 분! 하느님께서 나의 이름을 지어 부르신다는 특별한 체험, 즉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유일하고도 반복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모든 변화의 진정한 원동력이다. 요한 보스코의 삶도 그러하였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실 때마다 그것은 이름 부르는 그 누군가를 인정하신다는 인정의 행위일 뿐 아니라 변화의 시작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나실 때 그를 눈여겨보시며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요한 1,42)라고 하시는 장면만 보아도 그렇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그의 이름만 바꾸시는 것이 아니다. 이름을 바꾸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인생과 그의 정체성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신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름 안에 베드로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하는 힘과 견고함을 담아주신다. 예수님께서 “천둥의 아들들”(마르 3,17)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공생활 내내 예수님의 중요한 순간마다 동행하는 은총과 총애를 입는다. 천사가 성모님을 두고 “마리아야!”(루카 1,30) 하고 이름을 불렀을 때 그 이름에는 하느님의 어머님이 되라는 소명이 담겼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야!”(요한 20,16) 하시면서 마리아 막달레나를 부르셨을 때는 부활하신 주님과 그 주님을 만난 첫 제자의 감격 어린 만남이 되었다.

하느님께서 내 이름을 부르실 때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내가 아닌 더 나은 내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는다. 예수님께서 이름으로 나를 부르실 때 이는 나를 아주 잘 아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며 나의 잠재적인 가능성과 진정한 나를 보시며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이름을 받는 것에 지나지 않고 나 자신도 몰랐던 나의 진정한 정체성을 발견하게 된다.

어린 소년 보스코의 이름을 부르셨을 때 이는 요한 보스코를 향한 온전한 사랑의 부르심이었으며, 보스코가 용감하고 강하게 온 인생을 다하여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라는 사랑이었다.

***

그 소년들의 선두에 서라고 하시면서

이 부르심은 우리 신앙생활의 보편적인 주제, 곧 소년 요한 보스코에게서나 모세에게서나 늘 그렇듯이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을 수행하라는 부르심이다.

소년 보스코와 모세의 모습을 묵상해보자. 둘 모두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기에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평범한 교구의 한 사제에 불과했던 돈 보스코는 청소년들을 안내하고 육성하는 일이라는 도전을 맞았고, 겸손했던 목자에 불과했던 모세는 하느님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출하라는 도전을 맞았다. 이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누군가가 지닌 능력의 선택이 아니라 선택한 이를 사용하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능력이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장면에서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라는 보편적인 명령을 내리신다. 이러한 초대는 우리에게도 해당한다. 우리의 부르심은 안전한 우리의 울타리를 벗어나 세상과 피조물에 우리의 믿음을 나누라 하신다. 우리의 사명은 모세나 돈 보스코의 사명과 마찬가지로 내가 살고 알았던 나의 믿음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의 확장이요 연장에서 태어난다.

우리의 믿음에 수반되는 표징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참된 사명이 악에 맞서는 것이며 누구나 받아들일 만한 것임을 드러낸다. 우리의 사명은 고통과 절망으로 점철된 이 세상에 치유를 운반하고 하느님 사랑의 살아있는 표징이 될 것을 요구한다.

모세가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광야를 통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것처럼 우리 각자도 같은 모습으로 각자의 존재를 안내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이러한 안내는 우리의 능력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마련하신 하느님의 신뢰에 기초한다. 그분께서 인도하시고 그분께서 지탱하시리니 오직 그분만을 온전히 신뢰하라는 부르심이다.

모세의 이야기는 우리의 두려움과 불확실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한다면, 그분께서 우리의 사명을 완수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주시리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우리의 부르심 여정에 우리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요한 보스코와 모세와 함께하셨듯이 우리의 부르심 여정에는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우리 인생에 어떤 책임을 어떻게 맡기시는 것일까? 우리가 겸손과 믿음으로 이 부르심을 받아들여 이 부르심이 우리의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데에 달려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일까?

내가 받은 사명이 크든 작든 나에게 주어진 부르심이라는 것을 용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하느님께서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켜 주시리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모세와 소년 요한처럼 내가 감당 못 할 일이라고 느끼면서도 우리는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니 내가 생각하지 못한 위대한 일을 이뤄낼 수 있음을 안다.

***

주먹다짐으로 하지 말고 온유와 사랑으로 이들을 네 친구로 만들어야 한다. 그들에게 죄의 더러움과 덕의 고귀함을 곧바로 설명해주어라.”라고 말했다.

이 말씀은 우리 인생을 살아가면서 마주칠 수밖에 없는 다른 이들과의 관계나 세상에 관한 근본적인 가르침을 밝혀준다. 돈 보스코는 힘이나 공격성, 강압으로 다른 이들을 이기려 들지 말고 온유함과 자애로움으로 다른 이들을 얻어야만 한다고 가르친다. “온유와 사랑”은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두 가지 덕목이다. 돈 보스코의 자리는 “온유와 사랑”으로 “죄의 더러움과 덕의 고귀함”이 식별되는 자리이다.

온유, 유순함은 개방과 순응의 태도이다. 이는 융통성과 경청을 통해 누군가의 경험과 관점으로 배우려는 자세를 뜻한다.

온유는 내가 모든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의 교만을 내려놓을 수 있는 여유와 능력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내적인 힘을 드러내는 표지이다. 이러한 유순함은 다른 이들과 개인적으로 더 깊고 의미 있는 관계를 건설할 수 있도록 우리를 성장하게 한다.

반면에 사랑은 행동이다. 다른 이들을 부드럽게 대하고, 공감과 존중으로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은 우리의 이기심을 넘어가게 하고, 다른 이의 필요와 느낌을 숙고하게 하며, 다른 이들을 나보다 우선시하도록 한다. 사랑을 통해 우리는 진정으로 다른 이들의 마음을 얻고 진실하고 지속적인 유대감을 형성하게 한다.

우리 일상에서 이러한 덕목을 어떻게 작용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본다. 일상생활 안에서 종종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거나 누군가 싫고 멀게만 느껴지는 사람을 만날 때 불쑥 폭력이나 분노, 혹은 무관심으로 대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돈 보스코는 우리에게 이것이 우리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 대신 우리는 유순하고 이해심 깊게 열린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 다른 사람의 견지에서 사물이나 상황을 보려 하고, 갈등이나 비난보다는 접점을 찾으려 노력해야만 한다. 유순함은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고 공통점을 찾아 건설적인 대화를 촉진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사랑이 우리의 행동을 이끌도록 해야만 한다. 그렇게 대할 필요가 없게 느껴지는 이라 할지라도 친절과 존중으로 대해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조건 없는 사랑으로 다른 이를 대해야만 한다. 사랑은 우리에게 누군가를 용서하고, 인내하여, 담장 대신 다리를 놓는 힘을 준다.

이 가르침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어떻게 온유와 사랑을 실천하셨는지 보여주는 복음서의 다른 구절을 특별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고발을 당하시고 대사제 앞에 끌려가시게 되었을 때 심한 모욕을 당하셔야만 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분노와 복수로 응대하시는 대신 품위와 인내로 응대하셨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라는 감동적인 말씀을 남기신다. 이는 온유와 사랑의 정점이며 바로 여기에서 세상을 바꾸는 놀라운 하느님의 힘이 드러났다.

우리가 다른 이를 온유와 사랑으로 대할 때 우리는 다른 이들의 존경과 애정을 얻을 수 있다. 온유와 사랑이 인생의 도전을 이겨내고, 사랑과 이해, 그리고 평화를 바탕으로 하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에 가장 강한 무기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

그들에게 죄의 더러움과 덕의 고귀함을 곧바로 설명해주어라

이 말씀은 점점 더 바쁘고 복잡다단하게 살아가는 현시대의 삶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신앙을 이해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신중하게 생각하도록 우리를 자극한다.

살다 보면 뭔가 그때그때 결정들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몰두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우리가 내리는 결정들이 과연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결정인지 충분히 숙고하지 않은 채로 살아가게 마련이다.

돈 보스코처럼 우리는 청소년들을 안내하고 인도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포함하여 과연 덕스럽고 고귀한 삶이 어떤 삶인지, 죄가 우리의 삶에 얼마나 교묘하게 침투하여 있는지를 충분하고도 잘 식별해야 할 시급한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살레시오회가 추구하는 교육의 지향점이 단순한 인간 개발이요 인도주의적인 복지 활동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영혼 구원이요 ‘죄의 더러움과 덕의 고귀함’을 식별하여 예수님께 이르고자 하는 ‘종교’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거친 짐승들이 온순한 양들로 변화되는 변화의 가능성만을 추구하는 것이 살레시오회의 이상이 아니다. 요한 보스코는 이처럼 마당의 어린 만남에서 미래의 살레시오 오라토리오가 지녀야 할 교육적이며 영적인 마당의 본질을 미리 보고 체험한다.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뒤섞여 있는 혼란한 세상에서 선과 악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돈 보스코는 고귀하고 덕스러운 삶을 향한 교육이 복잡한 신학적 개념 분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동서고금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박아주신 양심에 따라 우리 신앙과 도덕의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아기가 복잡한 문장을 표현하기 전에 간단한 단어로 말하는 법을 배우듯이 우리도 우리 영혼에 영양을 공급하는 단순한 행동과 영혼에 해를 끼치는 행동을 구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과정은 일상의 선택에서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나 생각, 그리고 행동인지, 아니면 치유를 일으키는 말이나 생각, 그리고 행동인지를 구분하는 능력에서 시작한다.

돈 보스코는 함께 살던 아이들이 윤리 신학의 전문가가 되기를 바랐던 것이 아니라, 올바른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기본적인 이해를 키워나가기를 바랬다. 그래서 돈 보스코의 교육 목표는 ‘천상 시민과 지상 시민’이었으며, ‘참다운 신앙인과 올바른 시민’이었다.

이러한 여정은 작은 미소, 부드러운 말 한마디, 필요한 곳에 뻗어준 말 없는 손길과도 같은 일상의 소소한 행동으로 시작한다. 이러한 작은 행동이 고귀하고도 덕스러운 삶의 토대를 구축한다.

이러한 삶을 집을 짓는 것에 비유해 볼 수 있다. 견고하고 튼튼한 집을 짓는 일은 가장 기초적인 도구인 망치와 못을 다루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친절이나 정직, 작은 선행들은 우리 도덕적 삶의 구조를 엮어나가고 지탱하는 못들과 같다.

돈 보스코는 옳고 그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의 존재를 건설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그는 우리에게 분명하고도 확실한 부정적인 행동들과 모호하지만, 여전히 해로울 수밖에 없는 행위들에 민감한 양심을 개발하도록 권고한다. 거룩함을 향한 여정은 작지만 의미 있는 발걸음으로부터 시작한다.

살아가면서 뭔가 선택을 해야만 할 때 과연 이 행동이 나의 삶과 다른 이들의 삶에 선善을 도모하고 강화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질문해야만 한다. 이는 나의 일상에서 내가 과연 덕스럽고 고귀한 삶의 본보기가 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의 신앙과 믿음은 중대하고 위대한 결정 안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작고 겸손한 몸짓에서도 온전히 드러난다.

거창한 신학적 담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통한 삶의 모범으로 나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죄의 추악함과 덕의 소중함을 보여 주도록 노력해야 한다.

양심과 사랑에 따라 내리는 결정이라면 아무리 작은 행동일지라도 우리를 복음의 핵심에 더욱 다가서게 하고, 더욱 충만하고 거룩한 삶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