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보스코의 아홉 살 꿈②

2. 가능한 기적

예수님을 만난 소년 요한 보스코의 첫 번째 반응은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스스로 무식하다고 선언한다. 우리 인생에서 뭔가 큰 꿈을 만났으면서도 우리가 보이는 첫 번째 반응 역시 그 꿈에 압도당하면서 그것을 실현하기에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많은 경우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반응하면서 그 꿈을 놓아버리고 떠나가는 배의 노를 젓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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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에 대해서 말할 능력이라고는 도무지 없는 가난하고 무지한 아이

혼란스러운 소년 요한 보스코는 두려운 마음에 대답한다. 혼란과 두려움은 우리 모두 살면서 한 번쯤은 경험하는 감정이다.

성 요한 보스코는 우리에게 겸손의 가치와 두려움에 맞설 용기의 가치를 가르쳐 준다. 우리는 종종 자신이 부적절하다고 느끼며 그렇게 큰일을 감당하기에는 능력 부족이고 왜소하거나 충분히 똑똑하지 않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어찌 보면 당연하기까지 한 소년 요한 보스코의 반응은 우리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위대한 성인들조차 의심과 두려움의 순간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 인생에서 가끔 느끼는 부적절함이나 부족함, 두려움 등은 우리를 가로막는 장애가 아니라 우리를 성장시키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돈 보스코께서는 의심의 순간에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완벽한 이를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선택한 이를 완벽하게 만들어가신다.

하느님께서는 완벽함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연약함과 한계를 지닌 우리 모습 그대로의 존재를 사랑하시고 받아들이신다. “말솜씨가 없는 사람…입도 더디고 혀도 무딥니다.”(탈출 4,10) 하던 모세를 하느님께서 선택하시고 당신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하도록 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불완전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도움을 요청하는 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두려움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하느님이 우리 편이시며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이로서 자신감으로 두려움에 맞서야 한다.

우리는 어려움에 직면하여도 낙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우리 자신이 성장하고 하느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계기로 생각한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완벽할 필요는 없으며 겸손과 신뢰로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기꺼이 따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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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소년들은 말다툼과 고함과 불경한 말을 그치고 나와 말하고 있는 분 주위로 모여들었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그분에게 물었다. “제게 불가능한 일을 하라고 하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당신이 누구시길래 제게 그렇게 어려운 일을 요구하십니까?” 하는 이 질문은 인생을 살면서 종종, 특히 잠 못 들게 하고 식욕마저 사라지게 만드는 사건들, 인생에서 도저히 맞아들어가지 않는 퍼즐 조각과도 같은 도전에 직면했을 때 갖는 질문이다. 돈 보스코처럼 우리도 어느 순간 내 앞에 놓인 어려움 앞에서 이렇게 질문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고 그동안의 터전을 떠나 정처 없이 길을 떠나야만 했던 아브라함처럼 느끼는 순간들도 있다.

아브라함은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창세 12,1-2)라는 부르심을 받는다. 그러나 그 부르심은 일회성이 아니었다. 37년을 두고 계속되는 부르심이었다.(참조. http://benjikim.com/?p=4142) 그렇게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된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아브라함이 하늘의 별을 보게 하며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창세 22,17) 많은 후손이 번성하리라고 약속한다.

복음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넘어서는 특별한 행동을 요구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부분적으로라도 일부분에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사랑은 거창한 몸짓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 공감과 연민으로 행하는 작은 몸짓이다. 돈 보스코 역시 토리노라는 도시에 살던 젊은이들의 어려움에 부닥쳐 그 도시에 살던 모든 청소년을 도와줄 수는 없었을지라도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많은 청소년에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음을 이해하고 이를 받아들였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순명 서원의 깊은 의미와 하느님께 믿음을 둔다는 것이 무엇인지 묵상하게 된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응답을 주시지는 않지만, 그분만이 아시는 더 큰 계획을 신뢰하도록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바라보게 된다. 인생을 살다 보면 결코 우리가 선택조차 하지 않았을 길에 들어섰다가 먼 훗날 그 길이 우리에게 옳고 바른 길이었다는 사실을 느끼곤 한다. 믿음은 어둠 속에서 우리를 인도하는 빛이 되며, 앞이 보이지 않을 때라도 걸을 수 있도록 용기를 준다.

삶의 어려움과 시련, 그리고 고통 속에서 우리는 고통과 의심의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가치와 성장을 인식하면서, 고통과 시련의 너머를 바라보도록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곤 한다. 휘몰아치는 인생의 폭풍과 비바람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마지막으로 느꼈던 때가 과연 언제였을까?

아브라함과 하늘의 별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희망의 별빛이 된다. 아브라함은 모든 의심과 모든 증거와 함께 하느님의 약속을 믿었고, 그 믿음이 마침내 의로움으로 인정을 받는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면서 감히 불가능할 것이라고 믿는 꿈을 향해 우리도 도전하는가? 내 인생에서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나도 크다 싶은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한 때가 언제였을까?

겨자씨가 자라 큰 나무가 될 것이라는 하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 말씀(참조. 마태 13,31-32)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인생의 작은 일들 안에서 하늘 나라의 진정한 위대함을 발견한다. 사랑으로 행한 이러한 작은 행동들이 누군가를 위한 피난처가 되고 누군가를 성장하게 할 수 있다. 작은 행동에 기반을 두고 건설된 좋은 관계를 위해서는 진정으로 착한 양심 성찰이 요구된다.

앞서 반복하였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시지 않고 가능한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만을 하도록 초대하신다. 한 예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의 빈곤을 일거에 없애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만나는 사람 중에서 가난한 이들을 진지하게 바라보라고 하신다. 인류의 고통을 위로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작은 이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라고 하신다.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전쟁을 종식할 수 있는 도구나 수단을 마련하라 하시지 않고 내가 처한 처지에서 서로 간에 분쟁의 원이 되지 않도록 하라고 하신다.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조그만 가능성 안에 불가능하게 보이는 기적이 담겼다.

할 수 있는 것들은 우리가 하고, 할 수 없는 것들은 하느님께 맡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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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그처럼 네게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일이기 때문에 너는 순명과 지혜의 연마로 이 일을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 말씀은 단순한 인간적인 인식과 앎으로써가 아니라 “순명과 지혜”로만 갈 수 있는 신앙의 길에 관한 말씀이다. 꿈에서 만난 어른이 소년 요한 보스코에게 “순명”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흥미롭다.

「…레뮈엔 신부는 적절하게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요한은 마음과 정신이 위대했다. 그는 덕으로 순명했지 타고난 성향으로 순명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그는 자기 집에서 한 왕국의 왕처럼 주인으로 느꼈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하신 것처럼 그에게 하셨다. (……) 요한 역시 영웅적인 오랜 겸손의 수련을 통해서 준비되었다. 그는 자기 집을 떠나 약 2년 동안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면서 굴욕의 모든 짐을 느꼈다.”(돈보스코회상, 67쪽-각주 12)」 「(첫영성체 때 “…순명을 잘하며…”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들은 후) 나는 언제나 어머니의 훈계를 명심하고 지키려고 힘썼다. 그날부터 내 생애는 진보하기 시작했다. 특히 타인에 대한 순종과 온순함에서 그랬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누가 내게 명령이나 충고를 하면 아주 비위에 거슬려서 늘 말대답을 하곤 했었다.(돈보스코의 회상, 59쪽)」

이런 기록들에 비추어 볼 때 요한 보스코의 성격은 자기주장이 또렷하고 자기애가 강한 경향을 띠고 있었다. 그러한 기질이 순명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요한 보스코는 신앙과 모범적인 좋은 주변을 마련하신 하느님 은총을 입었다고 할 수 있다.

성모님께서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천사에게 응답하면서 아주 복잡하게 흘러갈 수도 있었던 상황을 잠자코 받아들인다. 마리아께서는 인간적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면서도 자신을 향한 하느님 계획을 신뢰하며 순명한다. 성모님의 응답 안에 우리의 모든 인생이 걸어야 할 길이 있다.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인생길에서도 주님을 절대적으로 믿어야만 한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계획을 순순히 받아들이신 것처럼 요한 보스코도 신앙의 은총으로 자신의 인간적인 성품과 기질을 극복할 수 있었고 쥬셉페 카파쏘(1811~1860년) 신부님의 지도를 잘 따라갈 수 있었다.

자신의 선생님이신 성모님을 모시고 자기 생각에 고집스럽고 융통성이 없게까지 보이는 돈 보스코를 두고 몬시뇰 베르타냐는 “의심할 여지 없이 돈 카파쏘에게 언제나 순명했다”라고 증언한다. 돈 보스코는 자신의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훗날 “제가 토리노에 머물게 된 것은 카파쏘 신부님에 대한 순명 때문이었습니다. 매 주일에 애들을 광장에 모아놓고 교리를 가르치게 된 것이 그분의 조언과 지시에 따른 것이었으며,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오라토리오에서 가장 버림받은 아이들을 모아 악으로부터 지키고 덕으로 나아가도록 시작하게 된 것도 그분의 지원과 도움으로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라고 말했다.

이러한 내용은 우리에게 단순한 정보 축적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지혜에 관한 은총을 생각하게 한다. 참 지혜는 인생의 모든 국면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의 계획을 펼쳐가시는 하느님을 보는 능력이다. 성령의 지혜는 우리에게 기쁨이든 도전이든 그 어떤 상황에서라도 하느님의 손길을 알아 모시면서 사랑과 믿음으로 응답할 수 있게 한다. 사랑에 빠진 10대 아이들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본다는 것과 비슷하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하느님 지혜의 은총으로 인생의 모든 세세한 것에서도 하느님 사랑의 반영을 볼 뿐만 아니라 당신과 더욱 깊은 관계로 나아오도록 하는 초대로 여긴다. 하느님 지혜의 은총을 입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분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모든 순간이 창조주 하느님과 우리를 위한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는 기회가 된다.

지혜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모습을 띤다. 모든 것이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고 우리 우주의 그 어떤 구석에서라도 하느님을 찾는 모습이 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를 깊은 겸손과 경배로 나아가게 한다. 우리는 실로 창조의 모든 국면에서 당신의 사랑을 계시하시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피조물이다. 하느님의 지혜가 충만하지 못하면 이데올로기의 함정에 빠져 우리만의 좁은 시야에 갇히게 되며 하느님과 멀어질 위험이 뒤따른다.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한계에 기반한 개념에 집중하는 한편 지혜의 은총은 우리에게 더욱 넓고 신성한 이해를 열어준다.

성모님께 우리도 사랑에서 나오는 순명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그리고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지혜를 얻을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빌어주시도록 청한다. 우리 인생의 모든 순간에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모시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열린 마음을 갖도록 기도한다. 우리도 성모님과 같은 믿음과 사랑으로 주님께 “보십시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우리 존재의 소소한 것들이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성장하게 하는 초대임을 발견할 수 있기를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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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어떤 식으로 지혜를 연마하라는 말씀이시죠?” “내가 네게 여선생님을 주겠다. 그분의 지도 아래 너는 슬기로운 사람이 될 것이며, 그분 없이는 지혜라는 모든 것이 어리석음이 되고 말 것이다.”」

여기의 “여선생님”은 우리의 성모 마리아이시다. 우리의 어머니요 인도자가 되시는 예수님의 어머니이시다. 꿈이 없이 돈 보스코를 이해하려 들면 예수님의 비유 없이 예수님의 복음을 이해하려 드는 것과 같을 수 있다. 이처럼 돈 보스코의 생애는 성모님 없이 이해할 수 없다. 당연히 돈 보스코의 꿈을 읽는 열쇠도 성모님이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공생활 동안 강력한 가르침과 놀라운 기적으로 많은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많은 이들이 구세주요 메시아이신 당신의 사명에 대한 진지한 이해가 없이 그저 말초적인 놀라움에만 이끌리고 있다는 것도 잘 아셨다. 예수님의 지혜는 약함을 강함으로, 패배를 승리로, 미움을 조건 없는 사랑으로 바꾸는 십자가의 지혜였다. 이러한 가르침은 실로 피상적인 것을 넘어 인간 존재의 핵심을 건드리는 가르침이었다.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처럼 우리도 예수님 가르침의 길이와 희생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앞의 유익함만을 쫓아 예수님을 찾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여기에 영적인 삶의 본질이 있다. 영적인 삶은 우리가 소비한 시간의 양이 아니라 우리의 개방성과 우리가 쏟은 주의력의 질質이다.

영적인 공간에서 우리는 일상의 유혹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메시지를 진정으로 듣고 묵상할 수 있다.

어린 소년 보스코의 꿈에서 성모님은 열쇠(핵심)로 등장하신다. 어머니로서 성모님의 사랑은 우리가 복음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신다. 우리의 영적인 여정에서 성모님의 현존은 우리의 신앙을 더욱 생생하게 만들어주며, 그리스도교의 신앙 진리를 보다 인간적이고 접근하기 쉬운 내용으로 바꾸어준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당신의 어머니는 역사 안에 등장하는 그저 단순한 인물이 아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우리의 어머니로서 살아계시며 활동하시는 우리의 어머니이시다. 성모님의 소명은 예수님의 지상 생활을 동반하시는 예수님의 어머니를 넘어 우리를 품어 안아 주시는 우리의 어머니가 되시는 것이다. 성모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더욱 깊이 연결하시는 다리이시고,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우리의 일상에서 어떻게 살고 어떻게 실천할지 보여주신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마리아를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영적인 삶에 모셔야만 하는 이유이다.

예수님을 찾는 우리를 성모님께서 인도하여 주시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성모님으로부터 어려움에 믿음으로 직면하는 법, 주저 없이 사랑하는 법, 더욱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꺼이 용서하는 법을 배운다.

성모님을 통하여 우리는 인생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표피적인 것을 넘어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라는 예수님의 복음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성모님의 중재와 모범은 갖가지 인생의 도전 앞에서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에 고정하여 잘 헤쳐나갈 수 있는 도움이 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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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제게 말씀하시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나는 네 어머니가 하루에 세 번 인사드리라고 가르쳐 준 분의 아들이란다.”」

어린 소년 요한 보스코의 꿈에서 당황하고 혼란에 빠진 요한을 놀리기라도 하듯이 요한의 질문에 “고상한 옷차림을 한 존귀한 남자 어른”은 수수께끼처럼 몇 가지 단서만을 제공하고 직접적인 답을 하지 않는다. “하루에 세 번 인사”를 드리는 것은 당연히 들판이나 일터에 있더라도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에 맞추어 드리는 삼종기도를 가리킨다. 수수께끼처럼 들린 답 안에서 요한은 “하루에 세 번 인사드리라고 가르쳐 준 분”이 즉시 성모님, 예수님의 어머니이시며 우리의 영적인 어머니, 우리를 아드님께로 인도하시는 성모님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보십시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신 성모님에 관하여 한 번 더 생각해 본다. 이 응답으로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하느님께서 구체적으로 우리 인간의 삶에 들어오시도록 했다. 성모님께서 거룩한 소명을 받아들이는 이러한 믿음의 태도와 몸짓은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여정에서도 필수적이다. 성모님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통로이시다.

성모님께서는 십자가 밑에서 결정적으로 우리 인생의 한 부분이 되신다. 죽어가시는 예수님께서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6-27)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정말 놀라운 일을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어머니 마리아의 모성을 인류의 어머니로 확장하여 성모님이 당신의 어머니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인간의 어머니가 되게 하신다.

이렇게 확장된 마리아의 모성은 인류의 어머니라는 소명에서 강력히 드러난다. 성모님은 우리의 삶 안에서 안내자이시고 인도자이시며 우리를 위해 빌어주시는 분이시자 우리 신앙의 어머니이시다. 성모님께서는 십자가 밑에서 지극한 슬픔과 고통을 품어 안으시면서 당신 아드님이신 예수님 죽음의 증인이 되시고, 우리의 영적인 어머니가 되신다.

성모님의 역할은 십자가의 순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카나의 혼인 잔치를 통해서 성모님께서는 예리한 감수성과 능력을 발휘하시면서 사람들의 도움이시며 중재자이신 당신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신다. 성모님께서는 잔치 마당에서 현장의 필요를 누구보다 먼저 감지하시고 염려하시면서 이를 아드님 예수께 알린다. 이러한 성모님의 중재와 믿음의 행동은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공생활 동안에도 그 존재와 역할이 얼마나 중대한 것이었는지를 능히 짐작하게 하면서 우리가 성모님을 통해서 어떻게 예수님을 알 수 있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이해하며, 예수님과 관계를 맺는 열쇠로 중심적인 역할을 하신다.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라는 거룩한 소명을 받아들이시는 성모님,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 예수님과 함께하고 십자가 밑까지 함께 걸으셨던 성모님, 모든 신자에게까지 어머니가 되신 성모님, 이런 점에서 성모님은 우리 신앙 여정에서 특별하고도 유일한 중요성을 지니신 분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 예수를 성모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기로 뜻하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모님께서는 성령의 은총을 입어 아드님 예수를 태중에 품으셨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받아 모신 것처럼 우리도 성모님을 통해 예수님을 받아 모실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성경이 예수님께서 여러 중요한 순간에 당신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과 함께 당신 모습을 드러내시면서 성모님의 존재가 구원의 역사와 어떻게 얽혀있는지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만이 아니다. 성모님은 구원의 전체 역사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성모님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로 인도되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영원한 생명에 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성모님의 사랑과 은총은 이러한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며, 성모님은 우리가 은총의 문을 열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시는 열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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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어머니께서는 허락 없이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당부하셨어요. 그러니 당신의 이름을 말씀해주세요.” “내 이름은 나의 어머니께 여쭤보아라.”」

과거에는 누군가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 단지 어떤 형식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이나 베드로의 경우처럼 새로운 사명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하시고 바꾸어주신 성경 속의 이름만을 생각해 보아도 이는 자명하다.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으로 마리아에게 알려주신 히브리어 “예수”라는 이름도 있다.

이러한 내용은 동양권의 문화에서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적어도 동양권의 문화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라기보다 한 사람의 존재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누군가의 이름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과 깊고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라는 보편적인 이름이었으나 그 뜻이 아주 풍부한 이름을 선택하시면서 두 가지 위대한 진리를 드러내고자 하셨다. 첫째는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구원에 관한 역사가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될 것임을 나타내고자 하셨고, 둘째는 하느님께서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이름으로 누구나 부를 수 있고 누구나 접근이 가능한 이름을 취하고자 하셨다는 사실이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라고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가르쳐 준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각자 곁에 계시는 사람이 되셨고 구원을 베푸셨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우리는 주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자비, 구원, 무한한 사랑이신 하느님의 참 얼굴을 발견한다.

성모님은 이러한 관계의 완전한 모델이시다.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복음을 가르치시며, 복음이 가능하게 하신다. 성모님께서는 항상 그리스도 뒤에 계시면서 우리에게 그분을 따라가도록 길을 가리키신다.

성 요한 보스코와 성모님을 우리의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 우리 신앙의 역사에 새겨진 이름들을 사랑하고 알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우리가 우리를 변화하게 하고 우리를 구원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예수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모님을 항상 따라야만 한다. 성모님에게서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사랑과 자비, 그리고 구원에 열린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도 이 세상에서 성 요한 보스코처럼 평화와 사랑의 도구가 될 수 있다.

3. 늑대와 양 사이에서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어린 요한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자질인 “겸손하고 강인하여 굳센 사람”이 되어야 한다. 복음화는 어떤 정보 전달이나 교리 문답의 암송이 아니다. 복음화는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증거를 나누는 것이다. 다른 이들이 나를 만날 때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한 무기는 그리스도의 겸손, 성령께서 주시는 담대하고 강한 용기, 인생의 어려움에 용기와 희망으로 맞설 줄 아는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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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나는 그분 곁에 (모든 곳이 가장 빛나는) 별처럼 찬란히 (사방으로) 빛나는 눈부신 겉옷을 입은 존엄한 여인을 보았다.」

루카복음에서 우리는 마리아의 인간성 전체를 만난다. 복음은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루카 1,29)라고 기록한다. 이 말씀은 하느님과의 만남이 처음에는 우리의 확신을 뒤흔들고 우리의 계획에 의문을 제기하는 불안한 것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참된 신앙은 쉬운 것이 아니고 편안한 길이 아니다. 우리 자신의 종이(카드)로 만든 성城에서 나와 우리의 우선순위를 정리하라고 도전해 오는 여정이다.

성모 마리아는 이러한 여정의 완전한 모범이다. 그녀가 하느님의 뜻을 따른 것은 모든 답을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전적으로 믿고자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뢰는 하느님의 계획에 대한 완전한 이해에 기초한 것이 아니었다. 오직 하느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을 깊이 신뢰하였기 때문이다. 성모님은 하느님을 정말 따르기 위해서는 그분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한 걸음 한 걸음 두려움 없이 그분께 의탁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성모님의 이러한 가르침은 돈 보스코의 일생을 비추는 등대와도 같았다. 요한 보스코는 어려서부터 희망과 안내의 표징인 별처럼 빛나는 성모님의 모습을 만났다. 요한 보스코가 만난 성모님의 모습은 꿈만이 아니라 어머니요 인도자이시며 생생한 실제요 현실이며 사실이었다. 그의 성모님 신심은 단순한 성모님 공경의 신심 행위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방식이었다.

성모님은 돈 보스코의 사목과 영성의 중심이었다. 성모님께서는 살레시오회의 설립을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돈 보스코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에 따르는 수많은 도전에 영감과 용기를 주시는 분이었다. 돈 보스코에게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일 뿐만 아니라 안내자였고 선생님이었으며 인생의 모든 순간에 영감의 원천이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는 성모님을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의 모델로 모시라는 뜻이다. 우리도 성모님으로부터 더욱 깊고 의미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방식을 배울 수 있다. 우리도 성모님께 우리 인생의 모든 순간에 길을 찾고, 두려움을 극복하며, 하느님을 신뢰하도록 도와달라고 간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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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은 질문과 대답으로 더욱더 혼란에 빠져드는 나를 보더니 당신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그리고는 다정하게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십자가 밑에서 성모님이 겪어야 했던 극심한 고통은 한 어머니로서 당신의 아들이 고통을 받으며 죽어가는 것을 보아야만 했던 것이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 끝나는 것과도 같았던 그 처절한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위대한 일 하나를 마저 하신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6-27)라는 복음에서 보듯이 제자 요한은 그 순간부터 성모님을 자기 어머니로 모신다.

마지막 숨을 거두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꼭 필요한 마지막 기적을 행하시기 위해 최선을 다하시면서 성모님께 새로운 임무와 사명을 부여하신다. 그 순간부터 성모님은 우리의 어머니가 되신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어느 성당에서나 어느 도시에서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회화와 조각, 노래와 행렬을 통해 성모님 공경을 만난다.

성모님은 무척 당황했고 무엇을 할지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몰랐으나 당신 아드님만을 믿었다.

꿈에서 어린 요한도 답이 없는 많은 의문 속에 길을 잃고 당황한다. 십자가 아래에 있던 성모님께서도 고뇌로 가득하셨다. 이러한 혼란과 고통의 경험들에서 우리가 배울 것들이 무엇일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절망과 고통, 의심을 무심하게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배운다. 하느님께서는 아들이 불의하게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어머니, 두 살배기 어린이가 아버지가 없는 아이가 된 상황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으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어머니께 인생의 새로운 비전을 주신다. 이제 그 어머니께서 어린 요한에게, 돈 보스코에게, 그리고 우리 인생의 순간에 우리 모두에게 손을 내미신다.

돈 보스코는 꿈에서 그 손을 꼭 잡았고, 우리는 그때부터 돈 보스코가 일생을 통하여 그 손을 절대 놓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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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은 질문과 대답으로 더욱더 혼란에 빠져드는 나를 보더니 당신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그리고는 다정하게 내 손을 잡고 말했다. “, 보아라.” 눈을 들어 바라보니 소년들은 모두 달아나고 그 대신 염소, , 고양이, 곰 등 다른 많은 동물이 나타났다.」

꿈의 이 장면에는 아이들과 함께한 오라토리오에 있었던 특성이나 감성, 사고방식, 다양한 생활방식 등에 관한 여러 강한 상징들이 묘사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다양한 모습들은 돈 보스코에게 일종의 부정적인 악의 모습이라기보다 교회의 이미지를 반영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꾸리셨던 열두 사도가 각기 제 나름대로 살아갔던 공동체 모습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선정하시면서 모두 하나같이 ‘예, 스승님! 예, 스승님!’ 하는 이들만으로 사도들의 공동체를 구성하시고자 하셨어도 이는 가능했을 것이다.

이 이미지를 우리 삶의 다른 영역으로 옮겨볼 필요가 있다. 대학 강의실이나 직장 동료들, 본당 공동체, 주일학교, 가족들에 이르기까지 우리와 함께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이들을 떠올려 볼 수 있다. 타인의 다양성을 마주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자유와 충돌할 수 있으므로 항상 우리에게 문제를 일으키게 마련이다.

수많은 다양한 아이들로 가득했던 발도코의 오라토리오에서 많은 애들이 돈 보스코의 말을 잘 듣고 경청했지만 어떤 애들은 돈 보스코가 원하는 방식이 아닌 태도를 고집하기도 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염소, 개, 고양이, 곰, 그리고 많은 동물” 사이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우러지고 있다. 다양성은 우리에게 풍요로움이고 성령 강림의 은총이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이 다양성을 장애로 인식하면서 친구들이나 가족, 직장 동료들이나 교회 공동체 안에서 다양성 안에 숨겨진 여러 잠재력을 인식할 기회를 놓치고 만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다양성을 우리의 성취나 실현을 가로막는 저주나 방해물로 여길 수 있다. “다른 이를 바꾸기 전에 너 자신을 먼저 바꾸라”는 옛 격언이 있다. 선의善意만으로는 부족하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내가 바뀌면 누군가의 결점, 특성, 약점들도 아름다움의 교향곡이 될 수 있음을 발견하기 시작할 것이다.

돈 보스코는 온 일생을 통하여 똑같은 두 아이를 만난 적이 없다. 돈 보스코에게 모든 아이가 하나하나 독특했다. 염소, 개, 고양이, 곰… 돈 보스코는 그 아이들 하나 하나에게 어울리는 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접근했다.(참조. ‘The Met’ school – ‘One student at a time’) 모든 아이는 자신의 고유성을 인정받을 권리가 있었으며 한계가 받아들여졌고 잠재력으로 평가되었다. 이를 증명해주기라도 하듯이 발도코의 오라토리오 아이들은 ‘돈 보스코의 총애를 받는 아이(preferito di Don Bosco)’라는 타이틀을 놓고 경쟁했다 한다. 이러한 경쟁은 각자가 자신만이 지닌 능력을 나름대로 발전시켜 가며 증명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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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가 바로 네 일터, 네가 일해야 할 곳이다.」

매일 뚜렷한 소임이나 직무가 없이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상태를 생각해 보자. 이런 상태는 자신의 존엄성이 해체되어 버린 듯한 느낌을 줄 수도 있다. 사실 “일”은 우리 스스로 자신이 공동체나 사회에서 뭔가 의미 있고 유용한 존재임을 인식하는 수단이다. 일이 없다는 것은 우리를 깊은 우울이나 불만족의 상태로 전락시킬 수 있다. 이런 의미로 일이라고 하는 주제는 우리의 신앙과 거룩함의 추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모님의 남편이었던 성 요셉은 우리에게 노동자(일꾼, 장인匠人의 주보로 알려져 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던 예수님도 당신의 양아버지로부터 장인의 일상을 배웠다. 일은 그 내용이나 성격과 관계없이 우리 삶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하찮고 보람이 없어 보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에 임하는 태도나 자세로써 우리는 우리의 활동에 더욱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좋아하지 않거나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단지 그 일을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왜 그 일을 하는지에 관한 목적의식을 찾는 데에 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성 요셉의 모습이 빛난다. 시골 목수로서 성 요셉의 일은 평범해 보일 수 있지만, 그 일에 임하는 자세와 태도 면에서 모든 것이 달라진다. 그는 아내 마리아와 당신에게 맡겨진 하느님의 아들을 위한 사랑으로 일했다. 바로 이 사랑이 가장 일상적인 평범한 활동을 가장 비범한 것으로 바꾼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통해 포도밭 주인과 각기 다른 시간대에 포도밭에 와서 일한 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말씀하신다.(참조. 마태 20,1-16) 이 비유는 하늘 나라가 단지 일만 하는 곳이 아니라 삶의 목표를 가져야 하는 곳임을 가르쳐 준다. 각기 다른 시간대에 포도밭에 일하러 왔던 일꾼들은 자신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각기 다른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나타낸다. 마감 한 시간 전에도 일꾼을 데려오고자 했던 포도밭 주인은 우리 각자에게 당신의 포도밭에서 자기 나름대로 목적을 찾을 기회를 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이 비유가 강력하게 다가오는 것은 일과를 마쳤을 때 일꾼들이 일한 시간의 양은 달랐지만 모두 같은 임금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적인 관점에서만 볼 때 정의롭지 못한 처사라고 여겨질 수 있지만, 하늘 나라에서 포도밭 주인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내는 성과뿐만 아니라 일 자체의 목적과 의미를 찾는 진지한 열망까지도 보신다는 점을 가르쳐 준다.

복음은 내적인 자유라고 하는 다른 중요한 점도 우리에게 알려준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하셨다. 이는 진정한 내면의 자유는 인정이나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사랑으로 행동하는 데에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진정으로 자유롭게 감사하며 사는 사람은 자신이 조건 없이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산다.

우리는 하느님 포도밭의 일꾼으로서 당신께서 하시는 일에 나만이 할 수 있는 이바지를 하라고 부르셨다는 것을 알기에 그저 감사와 기쁨으로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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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하고 강하고 굳건한 사람이 되도록 힘써라.(Renditi umile, forte, robusto!)

진실을 말하도록 하자. 우리는 한편에서 부러움으로, 또 다른 편에서는 체념으로 성인들을 바라본다. 출중한 성덕으로 우뚝 솟은 그들이 높은 곳에서 우리를 내려다보신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모순과 비뚤어진 형편 없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자괴감 속에서 되돌아보게 되고 어쩔 수 없다는 생각과 함께 부끄러움을 느끼기까지 한다. 성 요한 보스코,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캘커타의 마더 테레사, 도메니코 사비오 등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한 모든 성인의 삶은 감히 우리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독특하며 그 누구에 의해서도 되풀이될 수 없는 삶들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점 중 하나는 이미 그 성인들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누군가의 삶과 자신들을 견주어보았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지금 성인으로 알고 있는 그들도 언젠가는 다른 성인에 비교하여 행복하지 않은 삶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들도 자신이 부족하고 불완전함을 발견했다. 돈 보스코 역시 자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어떤 성인을 기억하며 그분께 기도하고 닮고 싶은 모델로 삼는다는 것은 단순하게 말해서 그 성인이 자신의 비뚤어지고 그릇된 삶의 여정 그 자체에 그대로 머물지 않았다는 사실을 되새기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 어디서도 돈 보스코가 삶의 여정에서 이건 내가 살고자 했던 삶이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어떤 면에서 위대한 성인들은 원래부터 의로운 삶을 쭉 영위해갔던 이들이라기보다 끊임없이 진보하고 전진해갔던 분들이라고 할 수 있다. 돈 보스코가 처음부터 완벽했던 성품의 소유자였던 것은 아니다. 돈 보스코는 우리처럼 무척 여러 번 속이 상했고 화가 났으며 울었다.

돈 보스코의 삶을 형성해갔던 세 마디 어휘는 바로 “겸손, 강함, 굳건함”이었다.

“겸손”은 돈 보스코의 성덕을 형성해간 첫 번째 요소이다. 돈 보스코는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때로는 사람들 앞에서도 작은 이가 되었다. 그렇다고 돈 보스코가 야심이나 야망이 전혀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지만 돈 보스코는 적절한 때에 자신의 교만과 이기심을 제쳐놓고 삶의 중심에 하느님을 모시는 법을 배웠다. 이는 교만과 사물이나 물질에 대한 집착이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돈 보스코는 오히려 겸손과 가난의 길만이 하느님의 은총이 자기에게로 오는 통로가 된다는 사실을 믿었다.

“강함”은 두 번째 요소이다. 돈 보스코는 무엇보다도 신체적으로 강했으면서도 믿음과 결정에 있어서는 더욱 강했다. 그의 영적인 강인함은 그를 도와 온갖 장애와 도전에도 불구하고 포기를 모르도록 했다. 악을 악으로 맞서는 데서 악이 힘을 얻는 법이므로 돈 보스코는 결코 악에 악으로 맞서지도, 또 반응하지도 않았다. 요한 보스코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인식에서 모든 힘을 얻었다. 우리도 내가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인식에서 생겨난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강한 힘을 얻을 수 있으며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해나갈 수 있다.

마지막으로 “굳건함”은 우리가 연마해야 할 세 번째 덕목이다. 돈 보스코는 인생의 온갖 시련과 고난에 맞서서 용기와 희망을 품고 절대 흔들리지 않았다. 인생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들로 가득하지만 결국 싸울만한 가치가 있는 기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 때만 견뎌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라고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돈 보스코의 지칠 줄 모르는 굳건함은 바로 이 기쁨의 약속에 대한 믿음에서 생겨났다.

이기심과 개인주의가 만연한 세상에서 돈 보스코의 아홉 살 꿈은 영혼의 겸손, 신앙(믿음)의 힘, 그리고 매일의 삶에서 우리 앞에 놓인 도전들에 맞설 수 있도록 우리를 지탱해주는 약속을 절대 놓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에 진정한 위대함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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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 네가 보고 있는 이 동물들에게 일어나는 일을 너는 장차 내 자녀들을 위해서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다시 눈길을 돌리니 맹수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 숫자만큼의 온순한 양들이 나타났다.

우리는 바야흐로 아홉 살 꿈에서 수많은 표어, 기념품, 연극의 장면, 노래, 그림과 삽화들…을 탄생하게 한 바로 그 장면에 도달했다. 늑대가 양으로 바뀌는 장면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사냥꾼이 빨간 모자 소녀와 할머니를 잡아먹은 늑대로부터 늑대가 삼킨 할머니와 소녀를 마침내 구한다는 장면이나 유리 구두가 여러 우여곡절 끝에 제 주인을 찾는 식의 해피 엔딩처럼 들린다.

이 꿈의 장면을 우스꽝스럽게 만들고자 하려는 의도는 없다. 단지 살레시오회의 일반적인 교육학적 흐름이 이 부분을 살레시오 교육의 교육 원리로 삼고 있다는 점은 지적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렇지만 과연 늑대 같은 청소년이나 어떤 젊은이가 자기 안의 야수성을 길들여 온순한 양처럼 바뀐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런 적이 있기나 했을까? 사람은 착하거나 악한 존재로 양분되는 존재들일까? 꿈을 주의 깊게 읽다 보면 몇몇 늑대가 몇몇 양으로 바뀌고 그렇게 바뀌지 않는 늑대들도 있었다는 것이 아니고, “맹수들이 숫자만큼” 양으로 바뀐다. 어쩌면 우리가 나쁘거나 거친 야수와 같은 애들을 착하고 온순한 애들로 바꾼다는 식으로 너무 단순하게 선형線形적으로 도식화하지나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다. 인간의 삶은 빛과 어둠의 복잡한 그물망으로 얽힌 존재들이니 말이다.

돈 보스코는 어려서부터 유명한 마술사였지만 그 어떤 아이들도 양으로 바꾸어놓지는 않았다. 돈 보스코로부터 도메니코 사비오를 거쳐 오늘 우리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계속 우리의 그림자, 우리 안에 숨어 살면서 그의 은신처에서 도무지 나오려고 하지 않는 늑대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돈 보스코가 자신의 결점을 없애려고 평생 노력해야 했지만, 그 결점을 결코 완전히 결정적으로 없앨 수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돈 보스코의 어떤 약점들은 약점들임에도 돈 보스코의 성덕을 훼손할 수 없었으며, 돈 보스코는 그런 면에서 성인도 불완전한 존재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도메니코 사비오는 착하고 온유했으나 사춘기 이전에 마술처럼 나온 존재가 아니었다. 우리는 모두 수많은 청소년이 순종하고, 경청하며, 말을 절제하고, 특별한 방식으로 행동하기 위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는지도 잘 안다. 살레시오회의 첫 번째 추기경이 되었던 죠반니 칼리에로가 파타고니아로 파견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돈 보스코의 첫 번째 후계자였던 돈 루아의 기질이나 항상 우아하지만은 않았던 성품 때문에 그가 숨을 쉴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이야기이다.

한편 엄청나게 많은 소위 ‘어려운’ 아이들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물론 그러한 애들 가운데에서 가끔은 미켈레 마고네 같은 아이들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우리 모두 부름을 받은 성덕으로 가는 길은 우리에게 양도, 그렇다고 늑대도 바라지 않는다. 성덕으로 가는 길은 각자 자기만의 고유한 길로서 가식이나 모방이 용납되지 않는 자기 자신이 되라는 길이다.

돈 보스코가 성인이고 성덕의 모범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 안에 있었던 그만의 내적인 그늘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려고 노력했던 그의 능력 때문이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어두운 면을 인식하고 그에 따르는 온갖 도전을 성장의 기회로 삼아 끊임없이 개선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성덕은 완벽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변화를 계속 도모하는 역동적인 여정이다. 성덕을 향한 우리의 여정에서 우리는 단순한 양들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내면에 이제까지 그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독특하고 유일한 걸작이 숨어 있는 차갑고 거친 대리석 덩어리 같은 존재들이다. 우리는 이 대리석 덩어리를 평생 끌과 정으로 쪼아가며 조심스럽게 다듬고 온 힘을 기울여 그 안에 숨겨진 걸작이 꼴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성덕은 망치로 정을 내려칠 때마다 불필요한 대리석 부분을 덜어내고 떨구어내면서 우리 각자 안에 세우신 하느님의 계획이 온전히 실현되도록 조금씩 조금씩 그 계획에 가까워지는 과정이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려고 하는 계속된 열망 안에서 이루어지는 매일의 우리 노력으로 우리는 진정한 성덕에 조금씩 가까워진다.

우리 안에 있는 늑대를 건강하게 분리하여 형제 늑대라고 부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한계, 우리의 수고, 우리의 그늘이 신비로운 방식으로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걸작을 빚는데 필요한 것들임을 인식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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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들은 그 남성과 여인을 반가워하듯 (잔치와 축제를 하듯) 그분들 주위를 맴돌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살레시안의 마당은 함께 모이는 곳이고 축제의 자리이다. 함께 어우러지는 기쁨이 표출되는 자리이다. 어렵고, 버려진, 위험에 처한 청소년들은 함께 있는 물리적이고 영적인 자리에서 다시 생명력을 얻는다. 외로움은 슬픔을 낳지만, 공감과 공유로 이루어진 인생은 행복하고 즐거운 삶의 조건이 된다. 살레시오회가 추구하고자 하는 ‘축제의 교육’이다. 온순한 양들로 바뀐 아이들이 예수님과 성모님 주변을 뛰며 맴도는 축제는 거룩한 전례의 예시豫示이다. 육체와 영혼, 정신의 원만한 균형과 평온이 이루어지는 성장이고 성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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