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보스코의 아홉 살 꿈③

4. 나는 여전히 무슨 뜻인지 몰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에베레스트와 같은 산을 오르라고 요구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꿈을 이루라고 요구하지도 않으신다.

인생에 도전과 어려움은 항상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돈 보스코는 오직 성모 어머님의 인도에만 의지하고 그분 목소리를 따르며 그분의 힘 있는 보호에 의탁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

나는 여전히 꿈속에서 말씀하시고 알려주시는 내용이 무슨 뜻인지 몰라 울음을 터뜨리며 여인에게 알아듣게 말해 달라고 간청했다.」

이 말씀은 돈 보스코의 인간성에 관해 깊은 내용을 밝혀준다. 돈 보스코처럼 위대한 성인에게도 혼란과 불확실성의 순간이 있었다고 상상해보는 것이 좋겠다. 돈 보스코는 꿈이 자신에게 알려준 내용과 꿈에서 자신이 보았던 것들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순간이 있었다. 이는 아직 어린 나이이더라도 신앙에 대한 의문과 의심이 생기는 것이 정상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이 대목을 한 걸음 더 나아가 루카복음이 전해주는 예수님의 놀라운 탄생 예고 장면과 연관지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라는 소식을 전했을 때 마리아는 아홉 살 꿈에서 소년 요한 보스코가 보이는 반응과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루카복음은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루카 1,29)라고 기록한다. 이처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해 듣고 고민과 의문에 빠진다.

이 두 이야기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진정한 믿음이란 모든 것을 질문 없이 맹목적이고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참된 신앙은 자주 질문을 낳고, 더 잘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도 의문을 가진다. 이런 것들은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다.

믿음에 대한 의심과 질문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혼란의 순간을 겪는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순간은 신앙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강화할 소중한 기회가 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의심과 질문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이다.

마리아는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천사의 말을 듣고 일단 하느님께 “예!”라고 대답한다. 아직 모든 답을 얻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받아들인다. 그런 의미에서 마리아는 하느님을 향한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인다.

의심과 질문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마리아처럼 우리도 경청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의 두려움과 불확실성을 당신 마음에 두실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때가 되면 모든 답을 얻지 못했더라도 주님 앞에 “예!”라는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바로 이 “예!”가 마리아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 인생에서도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의 신앙이 호기심, 진리 탐구, 하느님을 향한 신뢰로 이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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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부인은 내 머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에야 깨달을 수 있는 위대한 수수께끼를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다.

돈 보스코는 자신의 꿈과 경험이 지닌 보다 깊은 의미에 대한 계시를 기다릴 줄 아는 인내를 가지고 평생 살았다. 돈 보스코는 우리가 잘 아는 ‘눈물의 미사’라고 알려지는 죽기 몇 달 전인 1887년 5월 16일 로마의 예수 성심 대성당에서 드린 미사 때에야 아홉 살 꿈과 그 꿈으로부터 이어진 자신과 함께 살았던 아이들, 모든 이의 생애를 관통하는 붉은 실을 보고 그 의미를 발견하며 이해하고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린다. 이러한 이해는 논리적인 설명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깊은 감정의 은총으로 이루어진다.

우리 인생은 전체 그림을 단번에 알아볼 수 없는 수많은 경험이 날줄과 씨줄로 얽혀 짜지는 카펫과 같다. “평생토록 진리와 선행의 길을 걸어왔다”(토빗 1,3)라고 말하는 토빗의 아들 토비야와 그의 아내 사라가 큰 환란을 겪으며 기도했던 것처럼 우리도 답을 알 수 없을 것같은 어둠의 순간을 마주할 때가 있다.

헤아릴 길 없는 지혜의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신비들을 서둘러 밝히려 하시지 않는다. 라파엘 천사를 통해서 토비야와 사라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때때로 우리가 즉시 알아차리지 못하는 방식으로 당신의 현존과 위로의 신호를 보내신다. 하느님의 약속은 즉각적인 약속이라기보다 우리를 계속 동행하시고 우리를 지탱하시며 알맞을 때가 될 때 모든 것을 이해하도록 해주시겠다는 지속적인 현존에 대한 약속이다.

우리도 돈 보스코를 인도했던 것과 같은 인내와 믿음을 살아야 한다. 의심과 불확실성의 순간에도, 길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도, 우리는 우리가 내딛는 걸음걸음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보이지 않는 손이 함께 한다는 것을 안다. 우리의 삶은 경험으로 짜이는 옷감이다. 실 한 오라기에도 모두 제 자리와 그 목적이 있다.

이해는 오늘이 아니고 내일도 아닐지라도, 어쩌면 전혀 예기치 않았던 은총의 순간에 올 수 있으므로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나를 향한 하느님의 계획이 작동하고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언젠가 내가 완전히 새로운 눈과 경이로움으로 가득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획으로 나라는 존재의 천을 짜고 계시므로 믿음을 가져야 한다.

돈 보스코가 인생 말년에 미사를 드리는 제대에서 순수한 감정으로 어린 시절 아홉 살 꿈의 열쇠를 발견한 것처럼 우리도 복잡다단한 삶의 여정에서 때가 되어 드러나는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침내 빛을 본 사람의 눈물로 “이제야 알았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러한 희망을 마음에 간직하고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현존에 항상 열린 마음으로 인내하며 믿음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계속 걸어가야 한다. 인내는 진정한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내는 우리의 생각이나 마음에서 원하는 대로가 아닌, 있는 현실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랑은 우리의 생각이나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선善이 존재하고 빛도 존재하지만, 우리에게 즉시 보이지는 않는다. 인내로 어둠 속에 머무르는 능력을 키울 필요가 있다. 우리가 어둠 속에 머물 힘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 끝까지 어둠이 아닐 것이라는 희망이다. 우리를 십자가 위에 머물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십자가가 끝까지 십자가가 아니라는 희망, 빛이 있다는 희망, 숨겨진 선이 있다는 희망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생의 어둠을 헤쳐나가는 데에 필요한 힘을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두움을 남겨두시느라 인색하신 분이 아니시고, 다음 걸음을 위해 빛을 주시는 분이시다. 진정한 기적은 다음 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는 믿음이다. 치유를 받은 소경처럼 걸음을 내딛으면서 우리는 단순히 육체의 눈을 치유 받은 것뿐만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더 큰 은총, 곧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아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참조. 요한 9,1-41)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생의 매 순간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의 길을 비추시고 때가 되어 우리 인생의 더 깊은 의미를 밝혀주시리라는 것을 알기에 인내와 믿음으로 살아간다.

5. 거룩한 소음

소년 요한 보스코의 꿈이 끝나가면서 우리는 우리의 열망과 꿈을 공유하고자 하는 시점에 다다른다. 종종 반응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만큼 그리 폭발적이지 않고 시원치 않다. 그래도 항상 어느 정도 지지하는 이들은 있을 것이고 ‘건전하고 건강한 현실주의’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이기에 인생은 녹녹지 않고 꿈은 꿈일 뿐이고 현실은 항상 우리가 기대하고 상상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말하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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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이 있고 나서 나는 어떤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으며 모든 것이 사라졌다.」

꿈은 항상 하나의 출발점이다. 꿈을 현실로 바꾸기 위해서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소년 요한 보스코는 “어떤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어난다.” 소년 보스코를 깨운 소음은 사실 거룩한 소음이다. 침대에서 일어나 내려오게 하는 소음, 눈을 감고서만 볼 수 있었던 자신의 삶을 눈을 떠서 현실에서 실현하라는 초대이다.

소음에 대한 체험은 매우 중요하다. 어쩌면 우리가 너무 소음에 익숙해진 나머지 더는 소음의 생성과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소음을 우리 인생에서는 ‘예기치 않은(갑작스러운) 소음’이라고 한다. 예기치 않은 소음이 종종 돈 보스코의 문을 두드리곤 했다.

돈 보스코는 누군가의 꿈을 여지없이 억누르거나 없애고 말 가난과 고통의 소음을 들었다. 그렇지만 돈 보스코에게 그러한 소음은 단순하게 귀를 때리는 소음이 아니라 매일매일을 분주하게 살아가라는 부르심의 음악이었다.

가난의 그늘 아래 성장했고,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항상 마음 한쪽에 담고 살아야 했던 어린 보스코에게 황금빛 포장도로나 쉬운 길은 없었다. 날마다 전쟁이었고, 매 순간 힘을 내야 했으며, 언제나 시련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는 시련 속에서도 닥쳐오는 모든 사건과 장애를 더 높이 도약할 기회로 만들었고, 실제 더 높이 뛰어올랐으며, 가능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능력이라는 불꽃을 타오르게 했다.

우리 삶에서 상실, 절망, 실패와 같은 것들은 가혹하지만 올바른 스승이며 우리에게 더 큰 뭔가를, 우리 존재를 뛰어넘는 뭔가를 깨닫도록 준비시킨다.

어떤 소음이 우리의 꿈을 방해하며 갑자기 우리를 깨어나게 할 때, 그 소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 소음은 일어나라는 신호이며 팔을 걷어붙이고 일하라는 신호이다. 예상치 못한 모든 사건은 우리 인생이라는 걸작을 빚어내는 장인匠人이 되는 기회이다.

깨어남이 없는 꿈은 ‘The End’가 없는 영화와 같다. 깨어남에 감사해야 한다. 그 누구도 그 영화가 어떻게 끝날지는 모른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내가 꾸는 꿈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내가 그 꿈을 실현해가는 빛에 감탄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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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멍했다. 내가 주먹질을 해댄 손은 아팠고 얻어맞은 뺨은 화끈화끈 달아오르는 듯했다.」

소년 요한 보스코가 꾼 꿈은 현실처럼 너무도 생생해서 실제로 몸이 그 통증을 느꼈다.

돈 보스코는 자신의 회고록을 기록하면서 이처럼 자기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던 아홉 살 때의 꿈을 나누면서 첫 장면으로 삼는다. 그리고 이어서 공립학교 시절에 있었던 같은 반 친구들과 싸웠던 일화 하나를 전해준다. “친한 친구”요 “훌륭한 친구”라고 묘사하는 루이지 코몰로와 안토니오 칸델로를 괴롭히는 다른 아이들을 상대로(돈 보스코의 회상, 95-96쪽) 요한 보스코는 충동적으로 반응하며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 사건은 코몰로의 조언과 함께 요한에게 깊은 반성의 계기가 된다. 돈 보스코는 훗날 「루이지 코몰로는 단둘이 있게 되자 내게 아주 색다른 가르침을 주었다. 돈 보스코는 회고록에서 「“요한아, 네 힘에 놀랐어.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친구들을 해치라고 힘을 주신 것은 아니잖아. 그분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길 바라셔.” 참으로 경탄할 만한 애덕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받아들였고 그가 인도하는 대로 나 자신을 맡겼다. 루이지 코몰로와 굴리엘모 가릴리아노 그리고 나, 우리 셋은 자주 고해성사를 보고 영성체를 했다. 묵상과 영적 독서, 성체 조배 그리고 복사도 하러 갔다. 루이지의 초대는 하도 다정하고 친절해서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회상, 96쪽)」라고 이를 기록한다.

요한 보스코는 루이지 코몰로의 말을 통해서 자신의 의도가 좋았으나 그가 사용했던 방법과 수단이 사랑과 자비라는 복음적 가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요한 보스코의 이러한 경험은 우리의 행동을 돌아보게 한다. 때때로 우리도 요한이 친구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처럼 옳다고 생각하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잘못된 방법이나 수단을 써도 된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나 항상 복음적 가치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진정한 용기와 힘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사랑, 인내, 이해로 행동하는 데에 있다.

충동적인 젊은이로부터 지혜롭고 자애로운 교육자로 변화하는 요한 보스코의 이야기는 실수로부터 배워 영적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예가 된다.

복음의 가치를 온전히 반영하는 삶을 향한 여정은 도전과 실수로 얼룩져있지만, 그래도 이러한 모든 경험은 우리를 성숙하게 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가르침의 진정한 본질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기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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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낯선 분과 여인에게서 듣고 말한 모든 것으로 머릿속이 꽉 차서 그날 밤에는 다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 구절을 읽으면 즉시 구약의 야곱이 떠오른다.(참조. 창세 28,10-22) 야곱이 꿈에 보니 “땅에 층계가 세워져 있고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 있는데,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라는 구절처럼 야곱은 불안하고 의미심장한 꿈을 꾼다. 이 꿈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야곱에게 그가 누워 있는 땅, 그리고 그와 그의 후손을 위한 풍성한 축복과 지속적인 보호를 약속하신다.

이 꿈은 야곱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두려움에 차서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창세 28,16-17) 하며, “기념 기둥”을 세우고 그곳의 이름을 ‘하느님의 집’이라는 뜻으로 “베텔”이라 이름 짓는다. 야곱의 꿈은 야곱을 깨어있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향후 살아갈 미래의 삶과 행동에 큰 영향을 끼친다.

마찬가지로 돈 보스코의 아홉 살 꿈은 그저 지나가는 단순한 꿈이 아니라 돈 보스코 자신이 “뇌리에 박혀” 평생 떠나지 않는 꿈이 되었고, 그의 행동과 사명을 이끄는 기준점이 되었다. 야곱이나 돈 보스코나 두 경우 모두 우연처럼 꾸게 된 특정한 꿈이나 경험이 우리 존재를 뒤흔들고 강렬하게 각인되면서 우리를 깊이 숙고하게 하고 삶의 방향을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단순한 꿈처럼 보일지라도 이러한 순간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삶에 개입하시면서 깊은 감동과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면서 더 높은 목표를 향해 운명을 이끄는 전환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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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즉시 형들에게 꿈 이야기를 했더니 형들은 웃어넘겼다.

강렬한 꿈을 꾼 다음 날 아침 요한 보스코는 식구들과 꿈을 공유한다. 인간은 공유와 나눔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고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다. 나눔과 공유라는 예술 안에 ‘관계’가 설정된다. 우리는 타인과 나 사이에 나눔과 공유를 어떻게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를 훈련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존재이다.

나눔은 상대방을 알아보고, 그에게 특별한 자리를 내어 주며, 우리 삶 안에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웃을 위한 시공간을 마련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가 된다.

내 인생에서 나를 흥분하게 하는 아이디어나 꿈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던 때가 몇 번이나 있었을까? 그러한 나를 두고 그들이 이해하지 못한 나머지 웃어넘기고 만 적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우리의 꿈과 경험을 누군가와 공유한다는 것은 우리 삶에서 무척 중요하다. 공유와 나눔을 통해 우리는 나를 개방하고 그들을 나의 세계로 초대한다. 때로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이 비웃을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입을 다물고 내 안에 내가 나만의 성을 쌓고 그 안에서 혼자 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만약 돈 보스코가 남들의 비웃음 때문에 자기 꿈을 믿지 않고 누군가와 나누지 않았더라면 인류는 그의 위대한 유산을 공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계속 꿈꾸었으며 그 꿈들을 믿었고 누군가와 끊임없이 나누었다. 그리고 그 꿈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셨고, 행동하셨으며, 당신의 꿈을 꾸셨고, 이루어가셨다.

누군가에게 나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것은 다른 한편에서 용기가 있어야만 할 수 있는 행동이다. 누군가에게 나를 드러내고 나의 두려움과 소망, 꿈을 통해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은 용기와 겸손이 필요한 행동이다. 그런 행위를 통해 나는 인간이 되어가고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간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과 공동체의 중요성도 놓칠 수 없다. 돈 보스코가 자신의 꿈을 맨 처음 나눈 곳은 가족이었으며, 그 꿈을 점차 온 세상과도 나누었다. 가까운 사람들과 먼저 중요한 것을 나눌 때마다 이는 다리를 만들고, 유대를 형성하며, 나와 타인의 삶에 하느님을 현존하시도록 한다.

우리의 꿈과 아이디어, 생각을 공유하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가 그것을 비웃고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내가 믿고, 나와 동행하시는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세상과 역사의 위대한 변화는 항상 꿈을 공유하는 데서 시작한다.

용기를 내고, 꿈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꿈을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인생의 놀라운 이 여정에 우리와 함께하신다.

***

어머니와 할머니에게도 이 이야기를 하자 식구들은 제각각 해몽을 해줬다. 요셉 형은, “너는 염소나 양이나 다른 동물들을 치는 사람이 되겠다.”라고 말했고, “사제가 될 꿈인지 누가 알겠니!”라고 어머니가 말씀하시자마자 안토니오 형이 심술궂게 대꾸했다. “너는 도둑 우두머리가 될 거야.” 마지막으로 전혀 읽고 쓸 줄도 모르면서도 상당히 많은 것을 알고 계시는 할머니가 “꿈같은 것에 신경 쓸 일 없어요.” 하고 최종적인 단언을 내렸다.」

어린 막내 요한의 꿈에 관하여 요셉 형이나 안토니오 형, 그리고 어머니 마르게리타와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식구들이 제각각 각자의 기대가 반영된 해석을 내놓는다. 그렇지만 모두 그 꿈에 관하여 이해가 충분했다고는 할 수 없다. 문맹이면서도 삶의 지혜를 지니셨을 할머니조차 “신경 쓸 일 없다”라고 결론을 내리신다. 그러나 이 말은 누구에게나 있을 꿈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말씀이라기보다 피상적인 해석이나 다른 사람들 말에 휘둘리지 말고 지혜와 분별력을 가지고 잘 생각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꿈의 해석은 다양하고 유동적이며 많은 경우 개인적인 경험이나 희망, 두려움 등의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꿈이 사라지거나 실현되지 않을까 봐 두려워하면서 그 꿈에 대해 뭔가 확인을 찾곤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꿈들이 우리의 인생에 많은 도움을 주며 우리 자신을 발견하도록 안내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결정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어떤 결정은 평생을 바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생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어딘가에 안전한 출구가 보장되어 있기를 갈망하거나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확보하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그런 증거가 우리의 자유를 속박할 수도 있고, 반대로 의심하면 자유로울 수도 있다. 다른 이의 해석에 의존하는 대신 내면의 목소리에 스스로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꿈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하느님께서는 꿈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꿈을 통하여 우리를 인도하신다.

한편 이 대목은 흥미롭게도 우리에게 꿈은 꼭 해석하고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번에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가르쳐 준다. 먼 길을 걸은 뒤에야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우리에게 주신 꿈의 조각들을 짜 맞출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신다. 꾸준히, 성실하게 꿈이 보여주는 길을 걸어 앞으로 나아가는 영적인 태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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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할머니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꿈을 결코 내 머리에서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이 구절은 꿈이 신앙 여정에서 어떻게 나침반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오랫동안 나의 깊은 열망으로 나를 밀어대고 동반하고 있는 꿈을 생각해 본다. 돈 보스코에게 아홉 살 꿈은 단순히 반복되는 이미지들이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도록 영혼에 각인된 거룩한 부르심이자 그가 나아가도록 가리키는 방향이었다.

돈 보스코의 아홉 살 꿈은 돈 보스코에게 하느님께서 예상치 못한 일을 통해 일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면서 인생에서 맞는 도전 속에서도 진정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그를 인도했다.

돈 보스코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하느님께 열린 마음으로 인생을 살았다. 우리도 그처럼 인생의 여러 사건 앞에서도 분명한 방향을 유지하면서 유연하게 남아 꿈을 꾸는 사람들인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 모든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해결책이 없더라도 분명하게 믿는 방향을 갖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우리가 올바른 길 위에 있음을 드러내므로 그 자체로 구원적이다.

우리의 꿈과 열망은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약속이며 하느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는 삶의 표징이다. 돈 보스코처럼 우리도 우리의 꿈이 특별한 길을 헤쳐나가는 지도地圖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꿈을 꾸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려면 세상에 의미 있는 흔적을 남기려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우리의 계획을 거듭 다시 되돌아보고 끊임없이 진화하는 주변 현실에 적응할 준비도 되어 있어야만 한다. 우리의 기대치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진실하고 아름다운 것을 놓칠 수가 있다. 돈 보스코는 이를 잘 이해했으며 구체적이고도 의미 있는 행동으로 시대의 징표에 잘 대응했다.

확신은 하나의 꿈을 좇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확신과 믿음은 단순한 수학적 방정식이 아니라 의미 있는 경험과 견고한 관계를 통해 구축되는 인식이다. 이러한 관계가 없다면 설령 모든 게 원만한 것처럼 보여도 무엇을 믿는다는 것이 몹시 어렵다.

우리의 꿈이 우리의 일부가 된 것이 언제였을까? 우리의 꿈이 언제 피어올랐을까? 이러한 꿈, 이러한 체험들이 우리를 결정하고 우리를 안내한다. 우리의 꿈과 관련된 냄새, 장소, 느낌, 색깔과 같은 것들이 우리의 영적인 삶을 안내하는 좌표가 된다.

모든 꿈은 우리를 흔들고, 깊은 감동으로 다가온 순간에 태어난다. 상실, 불의, 혹은 어려움에 부닥친 누군가를 도와준 순간이나 경험들도 우리의 꿈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순간들이 우리의 꿈에 구체성과 방향성을 부여하는 전환점이 된다.

우리의 꿈이 일상의 어려움에 방해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돈 보스코의 꿈에 어떤 아이들은 장난을 치며 웃고 있었고 어떤 아이들은 욕설을 내뱉고 있기도 했다. 이는 어린 보스코에게 예상하지 못했던 도전이었고 희망차게 보였던 여정에서 만난 첫 번째 장애물이었다.

우리는 정직하게 우리의 꿈을 만나야만 한다. 언제라도 변화할 자세를 갖추면서도 우리 자신과 우리의 진정한 본모습에 충실해야 한다. 돈 보스코는 이러한 도전에 구체적인 행동으로 대응하며 변화 속에서도 자신의 꿈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준다.

꿈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우리 삶에 당신의 부르심과 현존을 나타내시는 표징이다. 그 꿈을 잘 들어야 한다. 그 꿈에 공간을 내어드려야 한다. 그리고 그 꿈을 용기와 신뢰를 두고 따라야 한다. 그 꿈이 현실과 부딪힐 때 하느님께서 우리의 걸음걸음마다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의 운명을 인도하고 계심을 기억해야 한다.

맺음

어느 무더운 여름날 밤, 소년 보스코는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식은땀으로 잠옷이 젖었으며 인근 헛간에서 나는 매캐한 냄새가 방에 스며들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가만히 천장을 응시했고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 소리를 다시 의식하며 조금 전에 너무도 생생하게 자신을 흔들어댄 꿈의 장면들과 소용돌이치는 감정들을 추스르고 있었다.

모든 애들과 마찬가지로 소년 보스코는 두려웠고 의구심이 일었다. 뭔가 예상치 못한, 그리고 자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무엇인가가 생겼다는 것을 직감하면서도 그 순간 요한은 인생에서 다른 이들이 늘 그러한 것처럼 자기가 작은 어린이에 불과하다고 느꼈다.

다른 사람들, 심지어 나를 깊이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마저도 나에게 붙여진 접두어나 대명사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많다. 돈 보스코는 예수님만이 진정 자기 마음을 이해해주시리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도 우리를 진정 알아주실 분은 오직 그분이실 것이므로 우리의 본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그분께로 향해야 한다.

돈 보스코는 우리 각자에게 운명이라는 것이 있고 최종 목적지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하나의 꿈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의 목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운명이라는 것이 이미 정해진 이야기나 틀이 고정된 인생 경로가 있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우리와 운명 사이의 관계는 신비로 둘러싸여 있으며 본질에서 우리의 자유와 연결되어 있다.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자유롭기 때문이다. 운명은 정해져 있을지라도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돈 보스코도 한 운명을 타고 태어났지만, 그 자신도 그 운명의 세세한 내용은 몰랐다. 그의 형제들이 그 꿈을 듣고 도적의 우두머리나 동물을 치는 목자가 될 것이라는 말 그대로 그런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우연처럼 주어진 길이었으나 이미 정해진 그 길을 따라가기로 했다.

우리는 어린 요한 보스코를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란 시골 어린이로만 보지 않는다. 우리는 그를 점차 돈 보스코가 되어갔고 마침내 성 요한 보스코가 되어간 분으로 본다. 성장과 발견의 단계를 통해 주어진 모든 체험과 도전으로 그는 한 조각씩 한 조각씩 되어져 갔다. 어린 요한 보스코에게서처럼 우리에게도 예수님은 필수적이다. 예수님 없이는 우리가 왜 태어났고 왜 살고 있으며 왜 아직 여기에 이렇게 있는지 등에 관한 삶의 이유를 잃고 헤매게 된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 답을 알고 계신다. 그분만이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를 발견하는 열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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