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 1,29-39(연중 제5주일 ‘나’해)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마르 1,32)

지난주 우리는 이른바 ‘카파르나움에서의 하루’(마르 1,21-34)라고 알려지는 대목의 전반부에서 예수님의 일과에 관해 듣기 시작했다. 예수님께서는 대중들에게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말씀을 선포하셨고, 그에 관한 표징을 일으키시어 사람들이 놀랐으며, 예수님의 소문은 갈릴래아 지역에 두루 퍼져나갔다. 오늘 복음은 그러한 말씀과 표징들의 연장이며, ‘카파르나움에서의 하루’ 중 후반부에 해당한다.

1.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예수님과 첫 번째로 부르심을 받은 네 제자는 회당에서 나와 그들 중 두 사람인 베드로와 안드레아의 집으로 간다. 예수님의 생활에는 대중들과 공개적으로 만나는 공적인 차원도 있었지만, 당신 제자들과 함께 서로 얘기를 나누고 서로의 얘기를 들으며, 먹고 마시며 쉬기도 하는 사적인 차원도 있었다. 이는 예수님의 인간적인 생활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이는 예수님의 현실적인 삶의 엄연한 일부이며 일상이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베드로의 장모 얘기를 듣는데, 과연 그가 결혼한 사람이었고 자녀들은 있었는지, 마누라가 일찍 죽어 홀아비였는지…등등, 우리는 그의 인생에 관해, 특별히 예수님을 만나기 전 삶에 관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아예 그의 상황을 잊어버리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어부 시몬이 예수님을 만난 뒤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고, 훗날 예수님 앞에서 의미심장하게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마르 10,28) 하고 말했다는 사실 한 가지만큼은 분명하다.

예수님의 일행이 베드로와 안드레아의 집에 들어서는데, 아무도 반겨주는 이가 없었다. 마땅히 베드로의 장모께서 반갑게 맞아줄 만도 하였지만 “열병으로 (몸져) 누워있던”(마르 1,29) 상황이었다. 사실 열이 나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끔 발생하는 일이고 그리 심각하거나 걱정할 만한 상황이 아닐 수도 있다.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마르 1,30) 그러자 이를 들으신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마르 1,31) 예수님께서는 그 부인을 만나고 싶어 하셨으며 말없이 단순하고 인간적이며 애정 어린 동작을 취하신다. 손을 맞잡고 애정이 가득한 관계 안에서 힘을 주시고 일으켜 세우신다. 예수님의 치유 동작이다. 전문적인 의료행위나 마술적인 동작이 아니다. 단순하고도 다정한 몸짓이다. 예수님의 동작에서 우리는 누군가 아픈 사람이 있으면, 먼저 다가가고, 그의 외로움을 달래주며, 구체적인 접촉으로 손을 맞잡고, 우리가 그의 곁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그가 널브러진 상태에서 일어나도록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운다.

예수님께서 부인의 열이 가시도록 해주신 이 사건을 별일이 아닌 것처럼, 혹자는 ‘낭비된 기적’이라고까지 하지만, “”이라는 것이 우리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모든 질병의 시작이고 신호라고 할 때 얘기는 달라진다. 우리는 covid-19 동안 수도 없이 “열”을 재고 또 쟀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몸과 우리 인생을 위해 항상 염려하시는 분이시다. 단순히 “열”이 있다는 사실에 불과할지라도 그 열로 인간 하나하나가 병이 들고 죽음에 이를 수 있으며, 당신께서 인간이 누리기를 원하시는 온전한 삶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시는 분이시다. 장황하게 예수님의 일상에서 일어난 한 사건에 머무를 필요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나라, 당신의 나라와 함께 인간을 찾아오시고, 악을 맞서 싸우시며, 악의 권세인 죽음을 물리치시고 마침내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일이다.

예수님은 “일으키시는이다. 여기에서 사용되는 ‘일으키다’라는 동사는 ‘에게이로ἐγείρω, egheíro(=to rise, to awaken)’라는 동사로서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되살리시면서 “탈리타 꿈!” “일어나라!” 하실 때(참조. 마르 5,41) 사용하는 동사이며 예수님의 부활을 묘사할 때(참조. 마르 14,28;16,6) 사용하는 동사와 같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몸져 누운 상황에서 누구를 막론하고 일으키시는 분이시다. 예수님께서는 다가온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드러내신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묵시 21,4 이사 25,8)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인 치유의 표징을 통해서 “라파엘”, 곧 “나는 너희를 낫게 하는 주님이다.”(탈출 15,26) 하는 하느님을 드러내시고,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하시며 몸과 영혼의 의사로서 당신을 드러내신다.

나에게 다가오시고 나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시려는 주님 앞에서 나의 모습은 어떤지를 되물어 볼 일이다. 『오, 주님. 우리 집에도 들어오시고 한 마디 명령으로 우리가 지은 죄의 열병을 고쳐 주소서. 우리 모든 사람 하나하나가 열병으로 시달리고 있습니다. 제가 얼마나 자주 열 받고, 얼마나 자주 화를 내는지요. 분노의 열병만이 아니라 수도 없이 많은 허물로 지어낸 수많은 열병이 저를 사로잡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도록, 그래서 당신 손으로 우리를 잡아 일으켜 주시도록 사도들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그분께서 우리 손을 잡아 일으키시면 곧바로 우리가 앓고 있는 열이 가실 것입니다.…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잡자마자 열이 가셨습니다. 그분께서 우리 손도 잡아주시어 우리의 행실을 깨끗이 해주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니 우리 집에 그분을 모십시다. 누워있지 말고 침상에서 벌떡 일어납시다.(성 예로니모, 347~420년)』

예수님께서 부인을 일으키시자 “(열이 가신)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마르 1,31) 예수님의 치유로 얻어진 열매는 즉각적인 봉사, 곧 ‘디아코니아διακονία, diakonía(=service)’, 섬김, “시중”이다. “일으켜져” 다른 이를 섬기고 사랑하는 것은 내가 다시 살았다는 표현이고 내 삶의 실현이다. 자리를 박차고 일으켜진 부인이 자기를 일으키느라 자신을 섬겼던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을 섬긴다.

2.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그렇게 날이 저물어 가면서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과 제자 일행이 머무르고 있던 집으로) 예수님께 데려왔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마르 1,32-33) “모두”와 “온 고을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복음사가는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이 상당했음을 시사한다. 그 많은 사람이 도대체 무엇을 찾아온 것일까? 우선 치유였을 것이고, 또한 분명히 기적을 보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당시 약은 너무 비쌌고 때로는 효과도 별로 없었다. 주술가들이나 마술사들, 구마자로 행세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예수님을 찾아온 이들은 그 어떤 약도 얻을 수 없었고 마술사들이나 기적꾼을 만나지도 못했다. 예수님을 찾아온 이들이 만났던 예수님은 아픈 사람을 만나시고 그들과 관계를 맺으시며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잃어버린 믿음의 회복을 간절히 바라는 분이었다. 예수님께서 그들 안에서 강한 믿음을 발견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죽음보다 강한 생명을 보여 주실 수 있으셨다.

『…카파르나움에서 보내신 예수님의 일과는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는 일에서 시작해, 모든 병자를 그분께 데려오려고 그분께서 머물고 계신 집 앞에 온 고을 사람들이 모여드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불행을 안고 살아가던 군중의 소위 ‘일상생활(the living environment)’ 안에서, 말씀과 행동을 통해 그들을 고쳐 주시고 위로해주시는 예수님의 사명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실험실(laboratory)에서 구원을 전하러 오신 게 아닙니다.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실험실에서 설교하시는 게 아니라, 군중들 가운데에서 설교하십니다! 민족들 가운데서 구원을 설파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상처를 치유하시기 위해, 공생활 대부분을 사람들 사이에서, 거리에서 보내셨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고통으로 일그러진 인류, 이러한 군중에 대해 복음은 여러 차례 언급합니다. 인류는 고통과 괴로움과 문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불쌍한 인류에게 예수님의 힘있고, 해방하고, 새롭게 하는 활동이 펼쳐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녁 늦게까지 군중들 가운데 계시는 중에 그렇게 안식일이 마무리됩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8년 2월 4일 삼종기도 훈화에서)』

이어지는 구절은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마르 1,34) 이다.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당신께 오는 “모든” 사람을 고쳐 주시지는 않은 것처럼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만나셨던 “많은” 사람을 그들이 앓는 질병에서 고쳐 주시고 죄와 마귀에 사로잡힌 이를 자유롭게 해방하셨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이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 나라의 표징이 되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와 관련하여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마태 8,17 이사 53,4)라고 기록하면서 예수님을 “주님의 종”으로 묘사하고 해석하려 한다. 예수님께서 악과 악마의 세력을 물리치며 질병과 싸우시지만, 이는 몸소 당신께서 그 고통을 짊어지시고 감내하시는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이를 두고 베드로 사도는 훗날 “나자렛 출신…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사도 10,38) 하고 술회한다.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죽음이 지배하는 모든 상황은 악과 악마의 행동이다.

3. “기도하셨다…모두…찾고 있습니다”

밤이 왔지만, 여전히 계속된 예수님의 일과였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 1,35) 일출을 기다리며 어둠을 이기는 빛을 찬양하고 주님을 찬미하는 예수님의 아침기도이다. 어둠 속에서 행하시는 예수님의 이 모습은 일과에 단순히 덧붙여진 부차적인 내용이 아니다. 예수님의 아침기도는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시는 당신 말씀과 행적의 원천이자 온종일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일상적인 리듬이요 힘이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 하는 대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려 주셔야” 하는 분이었기에 항상 하느님과 일치하시고 통교를 하셔야만 하였기 때문이다.

어둠 속 황량한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드리는 예수님의 기도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영적으로 준비하는 때에 이르기까지 복음에 여러 번 기록된다. 예수님의 기도는 하느님을 사랑스럽게 “아빠, 아버지!”(마르 14,36) 하고 부르면서 드리는 신뢰가 가득한 기도였으며, 사랑이신 아버지의 뜻을 식별하고 그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길을 찾는 기도였고, 예수님과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성령께서 예수님께 힘과 위로를 주는 기도였다. 어둠 속에서 밤중에 온몸과 정신을 모아 드리는 철야徹夜기도는 실제 참된 예수님의 기도로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활동 중 하나이다.

이어지는 구절은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마르 1,36) 이다. 첫 번째 제자들이자 작은 공동체로서 이제 막 출발한 공동체가 시몬의 주도로 예수님을 찾아 나선다.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라는 말에는 그저 단순하게 예수님이 어디 있는지 알아보았다는 정도가 아니라 좀 더 깊이 새겨야 할 부분이 있다. 사실 마르코복음에서 예수님을 찾는 것은 하느님을 찾는 것이다.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자 “시몬과 그 일행”은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에는 예수님을 보고 싶고, 듣고 싶으며, 만나고 싶고, 치유를 청하고 싶으며, 악마로부터 구해주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는 내용이 모두 담겼다. 이 표현을 두고 넷째 복음인 요한복음은 훗날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요한 12,21)라는 표현으로 기록한다.

모두 찾고 있다는 말에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 하고 대답하신다. 아직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기쁜 소식인 복음이 다다르지 못한 다른 곳으로 가야 하고 계속해야 하는 사명의 때라고 말씀하신다.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라는 말씀은 그래서 밤중에 그렇게 도시를 빠져나왔다는 것인지, 당신께서 그 사명을 위해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떠나왔다는 것인지 다소 모호한 표현이다.

『…오늘 복음의 결론 부분(35-39절)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장소를 바로 거리에서 찾으셨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분을 고을로 모시기 위해 찾아다녔던 제자들, 곧 그분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기도하셨던 곳으로 찾아다니며, 그분을 고을로 모시고 싶어 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38절)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 아드님의 여정이었으며, 당신 제자들의 여정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또한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여정이어야 할 것입니다. 복음이라는 기쁜 소식의 자리, 교회 사명의 자리는 결코 ‘게으름(idleness)’을 피우는 자리가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고(going forth)’, ‘여행하며(journeying)’, ‘움직이는(movement)’ 표징의 길입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8년 2월 4일 삼종기도 훈화에서)』

예수님께서 마을에서 마을로, 안식일에는 회당과 회당을 전전하며 가르치시고 악의 지배에 눌려있는 땅을 차지하셨으니,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마르 1,39) 아멘!

One thought on “마르 1,29-39(연중 제5주일 ‘나’해)


  1. 부지런한 예수님.
    그저 진실한 모습과 행동으로
    다가선 그 모습.
    선뜻 손 내밀기.
    부드럽게 다가가기.
    나의 작은 친구들에게.
    개학을 앞두고 준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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