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 1,21ㄴ-28(연중 제4주일 ‘나’해)

“조용히 하여라”(마르 1,25)

지난주 복음에서 네 제자의 부르심(마르 1,16-20)을 전한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제 예수님께서 더는 혼자가 아니시라고 강조한다. 바야흐로 예언자이자 교사였던 세례자 요한이 체포된 후에 그의 제자라고 추정되는 예수라는 라삐 한 분이 사해 해안을 따라 갈릴래아로 오셨는데, 그 라삐 예수님을 따르는 작은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 작은 공동체는 점점 커질 것이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그분 삶에 끝까지 동행할 것이었다.

복음사가 마르코는 바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라는 이 작은 공동체의 일상을 소개하듯이 ‘카파르나움에서의 하루’(참조. 마르 1,24-34)라는 식으로 복음을 계속 기록해간다. 갈릴래아 바다라고 알려지던 호수의 북쪽에 있는 작은 도시 카파르나움은 당시 팔레스티나와 레바논, 그리고 아시리아를 오가는 사람들이 거치는 상업 도시인데, 예수님께서는 이곳에 당신과 당신의 제자 공동체가 주거지 내지는 본거지로 삼을 만한 어떤 집이 있었던 곳(참조. 마르 1,29.35 등)으로 알려진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갈릴래아와 유다를 오가는 여정에서 이곳에 여러 번 묵으셨다. 과연 예수님의 하루는 어떠했을까? 예수님의 일과는 설교하고 가르치시며, 많은 사람을 만나 그들을 악에서 구하시고 치유하시며 기도하시는 것이 주된 일과였다. 물론 당신을 따르는 이들과 잡수시기도 하고, 다가오는 하느님의 나라를 맞이하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당신 공동체에 가르치시는 공간과 시간도 있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1.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이렇게 계속되는 일상의 어느 안식일이었다. 안식일은 주님의 날, 히브리 사람들이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지내라는 계명(참조. 탈출 20,8-11 신명 5,12-15)을 지키기 위해 일을 멈추고 회당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날이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안식일에 모세오경과 예언서의 한 대목을 낭독하고 그 선포된 말씀에 관하여 성인 남자가 해설을 할 수 있는 카파르나움의 한 회당에 들렸다. 예수님께서는 사제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이스라엘 사람의 한 성인으로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하신다. 예수님께서 강단에 올라가 사람들에게 말씀을 읽어주고 강론을 하신 셈인데, 루카가 예수님의 강론 내용을 비교적 상세하게 전해주는 것에 비해(참조. 루카 4,16-21) 마르코는 그 내용을 기술하지 않고 그저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마르 1,21)라고만 한다.

2. “몹시 놀랐다…권위”

그렇게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마르 1,22)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가르침 내용을 정확히 알려주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이 “몹시 놀랐다”라고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분명히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내용과 함께 회개하라는 요청(참조. 마르 1,15)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르코복음은 “그분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 1,22)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예수님이 성서학자들이나 율법 전문가들과는 남다른 “권위(ἐξουσία, exousía, 영어로는 authority, right, capacity 등)”를 가지셨다고 강조한다. 이 말은 듣는 이를 “새롭게”(참조. 마르 1,27) 감동하게 하고, 그들의 마음에 가 닿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다. 이는 다른 한편에서 율법 학자들이나 성서 전문가들이 모세로까지 가  닿는 다른 윗대의 선배나 스승이라는 사람들로부터 배운 바를 그저 답습하면서 그것을 소위 ‘권위’로 알고 그 권위를 행사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위”는 그런 가르침과는 달랐다. 마치 하느님께서 예언자로 삼아 백성들에게 보내신 모세 자신이 말하는 것과 같은 권위를 지니셨다. 오늘 복음이 아직 마르코복음 1장의 한 대목임을 잊지 말고 이 부분을 읽어야 한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제 막 예수님에 관해서 기록을 시작했으며, 그 예수님은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내려오셨고,…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와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0-11) 했다는 사실과 함께 세례자 요한마저도 자기 뒤에 오시는 예수님을 두고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마르 1,7)이라고 확인했었다는 사실을 불과 몇 줄 전에 기록하였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전례가 없는 귀한 “권위”를 지니고 계신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신 셈이다. 예수님의 권위는 종교 전문가들이나 성경을 공부하고 설명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이들과는 전혀 다른 권위였다는 것이다. 과연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이 어떻게 다른 것이었을까? 적어도 우리는 그분의 말씀이 그저 나오는 말씀이 아니라 깊은 곳에서 나오는 말씀이었으며, 오랜 침묵을 살아내고 그 침묵에서 터져 나오는 말씀이었고, 확신과 열정의 말씀이었으며, 사는 대로 말하고 말하는 대로 사시는 말씀이었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권위”는 생각하고 말하며 사는 것이 분명코 하나였음이 확실하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권위가 유려한 말솜씨나 해박한 지식의 나열로 비롯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예수님의 권위와 말씀은 그 누구도 회개시키지 못하면서 사람들을 혹하게 하는 그따위 말씀과는 질적으로 다른 말씀이었으며, 듣는 이의 마음을 꿰찔러 관통하는 말씀이었고, 듣는 이마다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이다.”(마르 1,27) 하며 거듭 생각하게 하는 말씀이며,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이자, 정말 무엇인가를 아는 말씀이고 동시에 예언의 말씀이어서, 듣는 이를 흔들어 상처를 내고 확신하게 하는 말씀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매주 주일 전례에서 만나는 사제들이 그러한 말씀을 들려주는 이들이기를 바라지만, 때때로 실망한다. 그분들은 사람이 되어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이 아닐 뿐만 아니라 때때로 무척 피곤하고, 자신의 사명에 좌절하고, 반복해야만 하는 전례와 말씀에 확신과 열정이 부족한 사람들인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분위기 안에서도 전례에 참석하는 이들이 열린 마음과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열망을 가지고 듣는다면, 설령 말씀의 파편에 불과할지라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반드시 마음에 와닿는 말씀의 은총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를 두고 라삐들은 하느님의 율법이 천둥과 소음, 그리고 뭔가 알 수 없는 소리 속에서 들렸을지라도 말씀에 굶주린 백성들이 이를 받아들이려고 애를 쓰면서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은총으로 전달되었었노라고 말한다.

3.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조용히 하여라”

예수님 말씀의권위”는 금세 자유와 해방의 사건으로 이어진다. 복음은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마르 1,23)라는 내용을 전해준다. 소아시아 지역이라는 복음적 배경 안에서 복음은 비교적 상세하게 그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과 예수님 간에 오가는 다소 시끄러운 상황을 묘사한다. 세부 사항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는 없다. 더러운 영이 그 사람 안에서 특별하게 활동하는 어떤 사람이 있었다. 곧, 그 더러운 영이 그 사람 안에 똬리를 틀고서 예수님 안에 거하시는 하느님의 거룩한 성령을 거슬러 대적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현존은 즉시 이 더러운 영에게 위협이 되었고, 그래서 더러운 영은 “소리를 지르며”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한다.

이 더러운 영은 자신을 “저희”라고 복수複數로 호칭하면서 악하고 악마적인 세력의 복합체로 자신을 드러낸다. 예수님의 현존에 위협을 느낀 이 더러운 영은 폭력적으로 “소리를 지르며”(마르 1,23) 반응하고, 심지어는 예수님에 관한 그리스도론적 표현인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참조. 요한 6,68-69)이라는 칭호까지도 올바로 사용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결국 이 복수의 더러운 영은 예수님과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존재이므로 불신을 조장하고 물의를 일으키고야 말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더러운 영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신다.”(마르 1,25)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더러운 영이 당신을 칭송하는 것처럼 내뱉는, 그러나 아무런 뜻도 없고 당신을 절대 따르지 않을 그 더러운 영의 호칭에 닥치라 하시면서, 폭력적이고 위선적이며 치명적인 그 영으로부터 사람을 해방하신다. 이에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마르 1,26) 자유와 해방의 표징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씀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신다. 우리도 우리의 말뿐만 아니라 애덕의 행동으로, 곧 다른 이를 돕는 동작으로 자유와 해방을 만든다.

“더러운 영”은 마귀를 가리키는 데에 흔히 쓰이는 표현이다. 이러한 영의 활동이 하느님과 그분 백성의 거룩함에 반대가 되기 때문에더러운” 것이다. 악령과 사탄의 세력은 인간을 사로잡아 하느님을 등지게 하고, 인간을 소외시켜 자유롭고 의식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게 한다. 악마, 혹은 악은 선善의 결핍 상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무엇인가를 더해놓은 상황일 수 있다. 곧 존재를 왜곡하고 존재에 무엇을 덧씌워 끔찍하고 무서운 실체를 만들어놓는 것이다. 악령은 격렬하게 소리를 지르며 질겁한다. 소리를 지르는 것은 두려움의 발로이다. 소리를 지르는 것은 자기 중심이 무너지는 순간이요, 분노의 순간이며, 억압의 순간이고, 적대감의 표출이며 폭력의 발로이다. 마귀가 인간에 대한 자기의 능력이 끝에 다다랐음을 깨달은 셈이다.(루카 10,18 묵시 20,10 참조)

더러운 악령은 우리의 병들고 그릇된 하느님 상과 왜곡된 인간을 대변한다. 이런 그릇된 상들은 우리의 참생명을 방해한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참모습을 왜곡하는 하느님 상이 많다. 만사를 차변과 대변으로 맞추는 금전출납부의 하느님 상, 인색한 계산을 통해 항상 우리에게 회초리를 드는 무서운 하느님 상, 우리를 늘 조종하고 단죄하는 심판자 하느님 상 등이 그것이다. 이런 그릇된 하느님 상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왜곡시켜 우리 자신을 그르게 바라보도록 한다. 하느님을 생각지 못했던 삶의 모든 사건에 대한 안전장치로 이용한다. 우리는 하느님을 이용하여 우리의 자아를 불필요하게 확장하고, 다른 사람들 위에 자리 잡는다. 우리는 하느님을 마음껏 이용하여 우리의 이익을 도모한다. 이처럼 그릇된 하느님 상을 지닌 사람들은 예수의 가까이 다가오심을 그냥 묵과할 수 없다. 그들은 소리를 지른다. 악령은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 자신의 목숨이 달린 중대한 순간임을 느끼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에 관해 말씀하심으로써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일깨우신다.…그래서 청중들은 눈을 뜨고, 자신이 누군지를 깨닫는다. 그리고 그들 자신이 스스로 만든 하느님 상 이면에 무엇이 감추어져 있는지를, 자신의 참모습과는 다른 자신의 그릇된 모습을 똑바로 깨닫게 된다.(안셀름, 예수-자유의 길, 분도, 2004년, 48쪽)』

경련을 일으키며 큰소리를 지르는 더러운 영에게 예수님께서 “조용히 하여라” 하시는 말씀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몇 마디에 불과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탄을 제압하기에 충분하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신앙고백문이 큰소리로 외치고 드러내는 식으로 악마적이고도 더럽게 교의敎義처럼, 또 어떤 마술적인 주문呪文처럼 너무 쉽게 선포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은 신앙고백은 악마적이다. 마르코복음은 예수님을 두고 행해질 수 있는 이러한 염려를 시종일관 유지하면서 마침내 예수님이 진정 누구신지를 밝히는 과정으로 복음을 기록해간다. 참 신앙은 너무 빨리 예수님을 신성화해서도 안 되고, 그분이 행하신 경이로움에 매료되는 것만으로도 안 되며, 그분께 열광하는 것만으로도 안 된다. 마르코복음은 예수님을 따라서 끝까지 가서야, 복음의 맨 마지막에 가서야 십자가에 달려 숨을 거두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백인대장이 비로소 예수님을 알고서 깊은 신앙으로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라고 고백하는 장면으로 예수님께로 향한 신앙을 고백하게 한다. 12세기의 카르투시안Carthusian 수도자는 『알몸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진리로 흠숭을 받으셔야 한다.(귀고Guigo I, 1083~1136년)』라고 한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22절)라는 오늘 복음의 시작 부분을 다시 되풀이하면서 복음 단락을 마무리한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마르 1,27) 카파르나움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이 두려움에 휩싸여 서로에게 묻고 또 묻는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의 새로운 말씀과 그 말씀의 은총으로 더러운 영까지 굴복시키시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정말 가까이 다가왔음을 보고 들었으며, 예수님께서 설교하시는 온 갈릴래아 지역에서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것으로 사람들 사이에 알려졌다. 그렇게 복음은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나갔다.”(마르 1,28)라고 끝난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 “서로 물어보고”, 소문은 “두루 퍼져나갔다”라고 복음은 기록하지만, “모두”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의 눈에 띈 것은 그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었다. 그것도 흔히 보는 장면이 아니라서 잠깐 놀랐을 뿐이다. 그런 놀람은 이내 사라진다. 겉으로 나타나는 현상만 보는 자들은 놀라기도 잘하지만, 그 놀람이 곧 시들해진다. 또 다른 놀라운 장면을 찾아서 눈길이 분주하기 때문이다. 한 장소에 1분을 서 있지 못하고 줄지어 이동하는 단체 관광객들처럼…그들은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못 본다. 아멘!

One thought on “마르 1,21ㄴ-28(연중 제4주일 ‘나’해)

  1. 당시 예수님의 권위를 느끼게 하는 말씀과 권위를 목격하는 광경만을 보고 떠들고 돌아서서 잊고마는 사람이 아닌, 매일 하느님을 마음의 눈으로 보고 권위를 느끼며 말씀을 내 사소한 매일의 시간 안에서 찾아 행하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또 한번 은총바라는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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