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 1,14-20(연중 제3주일 ‘나’해)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르 1,18)

노인이더라도 노인성 치매에 걸리지 않는 한 종종 과거의 기억, 특별히 뭔가를 새롭게 시작했거나 그로써 인생이 달라졌다거나 인생에 흔적을 남긴 사랑과도 같은 것, 아직도 나의 인생을 일정부분 사로잡고 있는 무엇인가를 기억하며 회개와도 같은 순간을 다시 되살리려고 노력하곤 한다. 감히 회개의 순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성소聖召의 순간, 부르심의 순간, 소명召命의 순간, 주님께서 그때까지 살았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기를 원하신다고 강하게 느끼던 순간, 무엇인가를 마음으로 느끼면서 가슴이 뛰었던 그 순간을 기억하려 노력한다.

지난주 요한복음에 이어 이번 주 마르코복음 역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제자들의 소명 장면을 들려준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던 순간, 마르코 복음사가는 제자들의 과거 그 순간을 기록하면서 그 순간이 제자들을 어떻게 변화시켰으며 인생에 어떤 의미를 갖게 했는가를 들려주고자 한다.

1.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예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들었던 사명을 선포하기 위해 어린 시절을 지냈던 갈릴래아로 돌아가신다. 요한이 유다 지방 요르단 강 유역과 광야에서 세례 운동을 전개한 것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어린 시절을 보내신 갈릴래아 지방 겐네사렛 호수 주변과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활약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수도인 예루살렘이 아니라 지방의 변두리, 소외된 지역, 가난한 곳, 천대받고 별 볼 일 없다 할 수 있는 촌락, 이방인 지역인 갈릴래아에서 조용히 자기의 첫 활동을 개시하신다. 『주류에서 떨어진 변방邊方은 저항과 창조의 공간이다. 변방 의식은 새 영토를 찾아가는 탈주脫走와도 같다.(신영복)』

예수님의 “복음 선포”라는 이 시작은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후(참조. 마르 1,9)였다. 그때는 이미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둔 뒤였으며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마르 1,3)가 침묵에 빠진 뒤였다.(참조. 요한 1,23)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간 길을 따라 계속 갈 때 당신도 조만간 박해를 겪고 폭력적인 죽음을 맞게 될 것임을 알고 떠나신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예언자를 기다리던 때, 준비하고 있던 때, 아기를 기다리는 산모처럼 하느님의 인내가 마침내 완성될 바로 그때 복음 선포를 시작하신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께서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하셨다고 기록한다. 이 선포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설교, 그리고 복음의 종합이다. 하느님께서 당신 생명으로 통치를 시작하시는 새로운 시간의 시작이다. 이 새로운 시간의 시작을 위해서회개, 곧 하느님께로 돌아가야만 하며 복음 자체이시고 말씀이신 예수님과 그분의 현존을 믿어야만 한다. 단순하고 짧은 선포이지만, 이 새로운 시작은 나를 통치하시고 너를 통치하시며 우리를 통치하시어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였고 가능함을 알려 오늘 지금 여기에까지 이어지는 새로움이다.

회개”하라는 초대에서는 아무도 제외되지 않는다. 성경 전체는 “회개”의 초대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 먼저 자기 자신을 바꾼다. 그것이 “회개”의 본질이다. 그래서 “회개”의 맛은 쓰다. 『사과의 달콤함은 뿌리의 쓴맛으로부터 만들어집니다. 뭔가 이익을 얻을 것이라는 희망은 바다의 위험을 감수하게 만듭니다. 건강해지리라는 기대는 약의 메스꺼움을 견딜 수 있게 해줍니다. 알맹이를 얻으려는 마음은 딱딱한 껍질도 부숩니다. 이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거룩한 양심의 기쁨을 바라는 사람은 기꺼이 보속補贖의 씁쓸함을 받아 삼킵니다.(성 예로니모, 347~420년)』

이제 바야흐로 예수님 현존의 은총, 그분의 생명, 그분의 말씀 덕분에 모든 사람이 자신을 내어놓고 우상이나 다른 주인이 아닌 하느님만이 우리의 주인이 되시어 다스리시도록 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복음을 믿어라” 하시는 대로 믿음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의 잠자는 마음을 흔들어 깨우고, 믿음이 없이 잘났다고 우리 스스로 뭔가 해 보려고만 하는 우리의 유혹에서 우리를 돌아서게 한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 하고 묻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믿어라!)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9)라고 대답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하는, 또 하려고 하는 많은 좋은 것들이 어떨 때 ‘주님의이 아니고, 그저 ‘우리의일 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모든 일의 활기찬 뿌리와 의미는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9,23)라고 오늘까지도 강하게 말씀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오직 하느님의 일인 믿음에서만 찾아진다.

2. “지나가시다가…보셨다…이르셨다/부르셨다”

새로운 가능성, 예수님의 현존이 주시는 가능성인 기쁜 소식, 복음 앞에 우리가 서 있다. 그 복음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매여 있는 일상, 생계를 유지하느라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을 하고 있거나, 잠시 쉬고 있거나 그저 그냥 그런대로 일상을 보내고 있을 것이며, 어쩌면 누군가와 노닥거리며 그렇게 하루하루 날들이 간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은 눈치채지 못하더라도 우리 내면에 뭔가 어떤 불꽃이 번쩍하는 순간이 있다. 수많은 물음과 의문이 오가는 순간, 그러나 주의 깊게 들으면 분명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 자신인 것처럼 친밀하게(성 아우구스티누스, 354~430년)』 들려오는 깊은 울림이 있을 때가 있다. 이 울림은 우리 자신을 통해 들려오더라도 우리 자신을 넘어 들려오는 목소리, 바로 주 예수님의 목소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살아있는 현존, 큰소리로 외쳐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끌려들고 빠져들어 듣는 음성이다.

오늘 마르코복음에서는 이러한 부르심의 전체 과정이 요약되어 본질적인 것만을 기술하는 양식으로 기록된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하고 “이르셨다/부르셨다.”(마르 1,16-17) “나를 따라오너라” 하시는 “지나가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자들이 진지하게 들어 받아들이고 인생을 바꾼다. 이것이 단지 심리적인 과정일 뿐이라고 일축하는 이들에게는 별 상관이 없는 이야기이겠지만, 본질적인 것은 이러한 목소리를 누군가는 듣는다는 것이다.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도 이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르 1,18)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역시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보시고”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마르 1,19-20) 제자들은 소명을 듣는다. 그리고 생업의 수단인 그물을 버리고 가족인 아버지와 배마저 버린 채, 벌거숭이가 되어 예수님을 따른다.

제자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18절)” 한다. 18절과 20절에서도 반복되는 “곧바로”라는 말은 마르코복음에서 42회나 사용되는 말마디이다. 예수님의 행동을 묘사할 때나 그에 대한 즉각적이고도 전격적인 반응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다. 제자들은 아무런 조건도 망설임도 없이 즉각적으로 순종한다. 생업인 그물도 버리고, 삯꾼들에게 아버지와 아버지를 돕던 일마저 맡기고 예수님을 따라나선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곧바로…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아르바이트나 일용직 내지는 part time job을 얻은 것이 아니라 full time job을 얻는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part time job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시고, 그에 따라 제자들이 예수님을 “곧바로” 따라나선 바로 그날부터 제자들은 그분께 꼭 붙어 다니며 떨어지지 않았습니다.…그러므로 우리도 우리 마음에 집 하나를 지읍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를 가르쳐주실 자리를 마련합시다.(성 아우구스티노, 354~430년)』

부르심은 예수님의 주도로 예수님 편에서 먼저보시고부르심으로써 이루어진다.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던지고 있는”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시는데, 일상생활의 생업 중에 부르시고 있음에 유의할 일이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일상을 벗어난 특수 상황에서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사 안에서 이루어진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위하여 단순하고 소박한 보통 사람들을 부르신다. 부르심은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고, 부르심은 새로운 형제자매들과 공동체, 가족을 얻음이지만, 일정한 결별과 분리를 동반한다. 주님의 부르심에 순명한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모든 탄생은 설령 눈물을 흘리고 매우 아픈 과정일지라도 긍정적이고 좋은 분리를 요구한다. 사실 좋은 분리를 이룰 때에만 그리스도와 함께 형제자매들의 공동체와 함께 새로운 일치와 생명을 줄 수 있다.

『주님께서 부르신 이들 가운데 그 누구도 ‘이 일을 그만두면 저는 살아갈 방도가 없습니다.’라고 그분께 말씀드리지는 않았습니다.(성 테르툴리아노, 155/160~225/250년)』

3. “곧바로…버리고…따랐다”

이렇게 따라 나선 제자들이지만, 제자들은 자기들이 어떤 부르심에 부름을 받고 있는지 그 부르심의 크기를 짐작도 못 한 채 “곧바로” 예수님을 따라 나선다. 인생의 매 순간 인간은 ‘선택’이라는 이름으로 ‘!’하고 길을 나서지만, 많은 경우에 그 ‘!’의 크기를 모두 알고 대답하지 않고, 부르심을 살아가면서 그 대답의 크기를 알아가고 점차 완성해 간다.

주의해야 한다. 소명위대함과 함께 보잘것없음이 함께 하는 모험이기도 하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오늘 복음에서 듣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처음으로 받았던 네 제자의 이야기를 되새겨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첫째였던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토록 신뢰하시고 예수님 곁에 늘 함께 있었으면서도 예수님에 대해서 자주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던(참조. 마르 8,32 마태 16,22) 이였으며, 예수님께서 심지어 “사탄”이라고까지 불렀던 이(참조. 마르 8,33 마태 16,23)였다. 베드로는 때때로 이율배반일 정도로 예수님의 뜻과 멀리 떨어져 있었고(참조. 요한 13,8), 때로는 스승 예수를 내팽개치고 잠을 자고 있었으며(참조. 마르 14,37-41과 병행구), 마침내는 예수님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알지조차 못 했던 분이라고 배반하기까지 한다.(참조. 마르 14,66-72와 병행구, 요한 18,17.25-27)

안드레아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 역시 많은 경우에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오해하고 그분의 마음을 몰랐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들은 자기들을 몰라주는 사람들에게 하늘에서 불을 내려 혼내주자고 하면서 예수님으로부터 호되게 질책을 받는다.(참조. 루카 9,54-55) 그들도 겟세마니에서는 베드로와 함께 잠에 빠지고 만다. 마르코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분명하게 예수님의 수난과 결정적인 순간에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마르 14,50)라고 이를 기록한다.

예수님을 따라 나섰다고는 하나 얼마나 비참하고 가련한 따라나섬이었는지, 나의 따름도 그렇고 어쩌면 다른 이들의 따라나섬도 그럴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들의 따라나섬이라는 것도 하염없이 초라하고 그리 내세울 것이 없는 따라나섬일 뿐이다. 그런데도 애초에 우리를 부르셨던 하느님 편에서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자비가 있을 것임을 믿기에 그저 감사하고, 그래도 그분의 뒤에서 그분을 하루하루 따라가면서, 그분과 함께하고 싶은 우리의 착한 마음을 축복해주시라고 기도할 뿐이다. 우리의 불신보다도, 제자들의 불신보다도, 예수님의 약속이 더 강하고 위대하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제자들은 부활절 이른 새벽 이후 사람 낚는 어부가 되고 하느님 나라의 선포자가 되며 세상 모든 이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가 된다.

부르심은 내심 저항하면서도 가야만 하는 길이다. 모세는 부름을 받았을 때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탈출 3,11)”, 그리고 “그들이 저를 믿지 않고 제 말을 듣지도 않으면서, ‘주님께서 당신에게 나타나셨을 리가 없소’ 하면 어찌합니까?(탈출 4,1)”하며 부르심을 사양하였고, 이사야는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이사 6,5)” 하고 부르심을 두려워하였으며, 예레미아는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예레 1,6)” 하며 도망치려 했고, 신약의 베드로까지도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하며 주님께 애원하며 거부했던 부르심이었다.

한번 들은 그 복음의 기쁜 소식을 평생 놓치지 않고 싶었던 제자들한없이 부족한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저항과 유혹을 살면서도,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그분의 능력으로 힘을 입어 하늘 나라가 오며 세상 모든 이 하나하나에게 주님께서 함께하시리라 전하면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갔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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