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보스코의 예방 교육과 성모님의 아들 체험(1)

* 이 논문은 피에라 루피나토Piera Ruffinatto 수녀(‘교육 방법론’을 전공한 현 로마 아욱실리움Auxilium 대학 총장)의 <L’esperienza della Filialità Mariana e I Risvolti educativi nel Sistema Preventivo di San Givanni Bosco>의 우리말 번역이다. 이 글의 출처는 “Filialità(Percorsi di riflessione e di ricerca (a cura di) Marcella Farina, Rosangela Siboldi, Maria Teresa Spiga, LEV, 2014, 332-372쪽”이다. 아욱실리움 대학에서 정기적으로 주관하고 주최하는 국제 학술 대회의 논문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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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2. 요한 보스코에게 나타난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인식의 뿌리

2.1 “다정하게 내 손을 잡고 말했다” – 아홉 살 꿈을 통해 계시된 어머니 마리아

2.2 기도의 모범이자 스승이신 어머니 마르게리타 학교

2.3 오라토리오의 출발과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역할

3. 예방 교육의 한 방법 성모님을 향한 효심

3.1 어머니 마리아 발견과 마리아의 아들 체험

3.2 성모님의 아들에서 참된 제자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3.3 성모님의 아들과 교육적 부성父性(paternità)/모성母性(maternità)

4. 마리아를 향한 효심의 효력(열매)

4.1 마리아의 아들 미켈레 마고네: 결정적인 회심

4.2 마리아의 아들 도메니코 사비오: 사랑스럽고 열매를 맺는 사랑

4.3 마리아의 아들 프란체스코 베수코: 하느님과의 일치로 가는 길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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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우리는 성모님께 모든 것을 빚졌습니다.(Di tutto siamo debitori a Maria.)”(Memorie Biografiche, 17권, 1939년판, 510쪽, *이하 MB) 이 말씀은 돈 보스코가 자기의 생애와 살레시오회의 역사 안에서 성모님과 어머니로서 그분이 행하신 행적을 두고 했던 가장 잘 알려진 표현 중 하나이다. ‘우리는 성모님의 빚쟁이’라는 어찌 보면 다소 극단적인 표현이지만 이 표현으로 우리는 돈 보스코와 돈 보스코의 사목활동이 성모님과 아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게 된다.

사실 이러한 관계의 영향은 성모님께 봉헌된 대성당의 건축, 살레시오 수녀회 설립, 가장 가난하고 궁핍한 젊은이들의 교육을 위한 주택, 학교, 기숙사 건축, 이탈리아 다른 곳들이나 해외로의 수도회 확장 등 하느님의 어머니께서 끊임없는 도움을 주시어 그가 이룩해낼 수 있도록 하신 인상적인 업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이 살레시오회의 역사에서 성모님의 결정적인 역할을 어느 정도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모님의 영적 모성애의 진면모를 완전히 드러내 주지는 못한다.

돈 보스코의 성모님 체험은 그의 성소와 그 실현에 현실적인 동기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밝혀주기도 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자신이 마리아의 아들이며, 평생 마리아의 인도와 지지를 받는다는 아주 예민한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자신의 능력을 벗어나고 능가하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자신의 삶과 사명을 구축해간다. 이 틀 안에서 그는 살레시오 수도회의 기초가 마땅히 마리아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정당화한다.

돈 보스코의 성모님 아들 체험은 또한 젊은이들이 마리아의 도우심으로 하느님의 참된 자녀가 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그의 예방 교육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 기고문에서 필자는 돈 보스코의 영성을 특징짓는 이러한 태도를 심화하고, 그의 교육적 사명의 관점에서 성모님의 아들 체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효과를 파악하려고 노력하고자 한다. 먼저 몇 가지 질문을 전제할 필요가 있다: 돈 보스코가 살았던 마리아의 아들 체험은 무엇이며 이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돈 보스코가 살았던 체험은 발도코의 오라토리오에서 그가 행했던 교육적 제안에 어떻게 스며들었으며, 젊은이들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살았는가? 돈 보스코 영성에서 성모님이라는 차원이 예방 체계의 교육적 실행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돈 보스코가 하느님의 아들이자 마리아의 아들로 살았던 독특한 삶의 방식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의 가족 관계와 문화라는 맥락에서 그의 경험을 조사해야 한다. 이 조사를 위해서는 성인의 가장 귀중한 자서전 중 하나인 「오라토리오 회상(MO) *우리말에서는 ‘돈 보스코의 회상’, 김을순 역, 돈보스코미디어, 1998년 초판, 이하 ‘회상’」을 다시 읽는 것이 필수적이다.

다음으로, 마리아의 아들 체험이 과연 예방 교육의 독특한 방법인지,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는지 질문하고 답을 해야만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어른이 된 교육자로서 살았던 마리아의 아들 체험이 어떻게 부성애와 모성애 교육의 원천이 되었으며, 살레시오 교육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하는데 과연 결정적인 경험이 되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돈 보스코의 교육과 양성에 대한 관심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자료들, 즉 전기傳記적 저술, 수도자 양성과 기도에 관한 내용, 도움이신 마리아에 관한 지침서나 신심 소책자 등을 사용하고자 한다.

또한 돈 보스코가 전기를 쓴 세 청소년, 즉 미켈레 마고네(1845~1859, 1861년 발간), 도메니코 사비오(1842~1857, 1859년 발간), 프란체스코 베수코(1850~1864, 1864년 발간)의 교육적 체험을 살펴보고, 그들의 삶에서 진정한 마리아의 아들로서 지녀야 할 태도를 기르기 위해 그들에게 제시된 다양한 길을 강조하려고 한다. 이 전기들이 언급하는 시기는 돈 보스코가 특별히 강렬하고도 중요한 ‘이야기 교육학(pedagogia narrativa)’ 관련 책들을 저술하여 예방 교육을 통합하고 발전시켰던 시기와 일치한다. 이것이 필자로서는 연구를 더욱 풍성하게 도와줄 수 있는 다른 자료들을 배제하고 우선적으로 이런 자료들을 선택한 이유이다.

2. 요한 보스코에게 나타난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인식의 뿌리

돈 보스코가 마리아의 아들로 자신을 인식하게 된 뿌리를 찾아보기 위해서는 돈 보스코 자신의 개인적 기록이자 자신의 과거를 신학적이고도 교육학적으로 재해석하고 재구성했다고 할 수 있는 “교육 체험의 뛰어난 문헌(eccezionale documento di pedagogia esperienziale)”(피에트로 브라이도, 돈 보스코의 예방교육, 돈보스코미디어, 2017년, 197쪽)인 <돈 보스코의 회상>을 활용할 것이다.

이 책에서 돈 보스코의 마리아 체험은 돈 보스코의 초기 기억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그의 개인적 삶 전체와 오라토리오 탄생의 방향을 제시하고 안내하는 운명의 붉은 실과도 같은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돈 보스코의 성모님 아들 체험에서 돈 보스코의 어머니 마르게리타 오키에나의 역할은 그 중요성이 두드러진다. 조기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존재를 불과 2년밖에 알지 못했던 요한에게 지상 어머니의 아들 체험은 아들의 정신과 마음을 능숙하게 인도하여 아버지이시며 창조주이시고 섭리자이신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시고 현존하신다는 것을 느끼게 하고, 모든 그리스도인과 인류의 어머니와의 만남을 성공적으로 중재하는, 강하고 부드러운 모성으로 자신을 봉헌하면서 단순하고 생명력 있는 마리아 신심으로 인도하는 방법을 아는 어머니와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돈 보스코와 성모 마리아의 모자母子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회고록의 기억이 말하게 함으로써 이러한 존재감을 끌어내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 연구의 역사적·영적 틀은 돈 보스코의 출생지인 베키, 공립학교와 신학교를 다녔던 키에리, 그리고 첫 사목 실습 시절을 보낸 토리노의 사제 양성학교에서 경험한 대중적 종교성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는 이론과는 거리가 먼 겸손하고 단순한 신앙심, 냉정하고 신중하며 당시 가족 관계를 특징짓는 관계나 스타일에 매우 가까운, 즉 외적인 표현이 거의 없고 절제된 부드러움으로 단련된 요구의 강인함이 담겼다.

2.1 “다정하게 내 손을 잡고 말했다” – 아홉 살 꿈을 통해 계시된 어머니 마리아

‘회상’의 첫 장면에서는 회고록의 기억이 정리되는 30년에서 매우 중요한 전주곡이 선행된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화자話者가 자신의 개인적인 사건과 일치하도록 하는 회고록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본문 밖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는 이 부분에서는 성모 마리아의 존재와 역할이 결정적이다. 실제로 돈 보스코는 자신의 기원과 관련된 마리아의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의 출생을 성모 승천 대축일인 8월 15일과 일치시킨다.

출생은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이어진다. “그리스도교적 교육을 시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은” 34세 아버지의 죽음, 그 후 흉년과 어머니의 재혼 요청에 관한 기록이 간단하게 서술되더니 “어느새 나는 아홉 살이 되었다.”라면서 이른바 “아홉 살 꿈”이라고 알려지는 꿈 이야기(회상, 43-45쪽)가 무대 밖에서 들려 오는 목소리처럼 곧바로 이야기(내레이션narration)를 펼친다.

꿈의 첫 장면은 웃고 떠들며 놀고 있는 아이들의 마당이다. 아이들은 즐겁지만, 하느님께 불경스럽기까지 하다. 그때 “고상한 옷차림을 한 존귀한 남자 어른 한 분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아이들의 “선두에 서라”고 명령한다. “주먹다짐이 아니라 온유와 사랑으로 아이들을 친구로 만들라”고 하면서 “죄의 더러움과 덕의 고귀함을 즉시 설명하라”고 당부한다.

내레이션의 두 번째 부분에서는 돈 보스코 생애에 진행될 “모든 꿈의 열쇠(la chiave di tutto il sogno)”를 쥐고 있는 “존엄한 여인”이 등장한다. “나는 네 어머니가 하루에 세 번 인사드리라고 가르쳐 준 분의 아들이란다.”라는 말로 보아서 사실 요한이 앞서 등장한 신비한 인물과 여인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지상 어머니 덕분이다. 예수님은 마치 아버지 없는 어린 아들에게 하늘에 계신 어머니를 부르며 기도하는 법을 배운 어머니에 대한 든든한 기억을 선물하는 것처럼 자신을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소개한다. 하느님의 아드님은 마리아를 “나의 어머니”라고 하면서 그 이후 벌어지는 일을 마리아에게 맡긴다. 따라서 마리아가 이야기에서 특정한 역할을 맡게 된 것은 그녀가 예수님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자녀를 교육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사실 마리아께서는 아들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자신이 낳은 아들과 세상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한다. 성모님의 이러한 임무를 잘 표현하기 위해 성모님은 요한에게 지혜를 얻을 수 있도록 확고한 가르침을 주는 스승, 여선생님(La Maestra)으로 등장한다.

혼란스럽고 겁에 질린 소년의 반응에 성모님은 이해와 다정함으로 응답하신다. 어머니로서 그녀는 동요하는 아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신체적 접촉과 차분하고 안심시키는 말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작가는 이렇게 회상한다. 성모님은 “다정하게 내 손을 잡고(presomi con bontà per mano) 말씀하셨다. ‘자, 여기가 바로 네 일터, 네가 일해야 할 곳이다. 겸손하고 강하고 굳건한(umile, forte, robusto) 사람이 되도록 힘써라. 지금, 이 순간 네가 보고 있는 이 동물들에게 일어나는 일을 너는 장차 내 자녀들을 위해서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다시 눈길을 돌리니 맹수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 숫자만큼의 온순한 양들이 나타났다. 양들은 그 남성과 여인을 반가워하듯 그분들 주위를 맴돌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마리아는 요한을 청소년 교육으로 이끌고 늑대를 양으로 바꾸는 일, 즉 사람들의 내면에서 표출되는 통합적인 형태의 교육 사명을 그에게 맡긴다. 그러나 이 부담스러운 위탁은 하느님의 어머니 자신이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보장함으로써 온전히 성취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보호와 도움으로 돈 보스코의 소명이 이루어져 갈 것이라는 엄숙한 선언이다.

돈 보스코가 다시 기록한 1844년(29세) 10월 13일의 꿈(회상, 205-207쪽)에서 성모님은 요한에게 다시 나타나신다. 마치 미완성된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처럼, 성모님은 첫 번째 꿈과 관련된 사건 해석의 열쇠로 자신을 제시하면서도 돈 보스코의 이해를 넘어서는 사건 해석의 열쇠로 자신을 제시한다. 사실 돈 보스코는 그 꿈을 “아홉 살 때 베키에서 꾸었던 꿈의 연속”이라고 정의한다.

화자는 “무시무시한 괴성을 지르는” 많은 동물 사이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두려움에 가득 차 “도망을 치고 싶은” 상황에서 “목자의 차림을 한 한 부인이 앞장을 서면서 이상한 짐승 떼를 따라가라고 손짓을 하여” 그렇게 한다. 그렇게 그녀와 함께 “여러 곳을 지나가면서 세 번 멈춘다. 그때마다 짐승들은 양으로 변했다.” 주저앉고 싶었으나 계속 걸어가다 보니 양떼와 함께 도착한 목적지에 “회랑으로 둘러싸인 마당이 나왔고 그 끝 쪽에 성당이 보였다.” 그 사이에 “양들의 수효는 아주 크게 불어나 있었다. 많은 목자가 그 양들을 돌보러 왔다. 그러나 그들은 오래 머물지 않고 곧 가버렸다.” 그 순간, 놀랍게도 “많은 양이 작은 목자들로 변하여 다른 양떼를 돌본다. 어린 목자들의 수효는 점점 더 불어났고, 이상한 동물들을 모아 안전한 우리로 인도하기 위해 여러 무리로 나뉘어 다른 곳으로 떠나갔다.”

마침내 목자 복장을 한 부인은 돈 보스코에게 그들이 도착한 남쪽 들판을 바라보라고 권한다. “그곳에서 나는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성당을 보았습니다. … 성당 안에는 하얀 띠가 드리워져 있었고 그 위에는 큰 글자로 ‘Hic domus mea, inde gloria mea’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모성적 개입은 이제 막 사제가 된 청년이 자신의 삶과 살레시오회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동행이다. 이 장면에서 마리아의 역할이 중심이다. 사실 마리아는 양떼의 선두에 서서 목자로서 양떼를 안정된 자리인 발도코로 이끌고, 그 중심에 마리아께 봉헌된 성당이 세워질 것이며, 이 엄숙한 비전 속에서 초기 살레시오회의 목적과 그 회에 맡겨진 청소년의 안전한 구원을 위한 돌봄이라는 프로젝트를 상징하는 장소가 드러난다.

이렇게 엄숙한 전주곡이 끝나고 초자연적인 막이 닫히면서 돈 보스코는 베키에서 어머니 마르게리타의 현명한 시선 아래, 그리고 아홉 살의 꿈이 처음으로 실현된 일종의 ‘축일 오라토리오’를 세운 어린 친구들과 함께 보낸 소박한 삶을 묘사하며 자신의 기억에 대한 내레이션을 이어나간다. 자녀 양성에 매우 중요했고 요한이 하느님의 어머니를 만나도록 진정한 첫 번째 중재자가 되었던 지상 어머니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2.2 기도의 모범이자 스승이신 어머니 마르게리타 학교

마르게리타를 두고 ‘어머니’라는 명사가 나중에 좀 더 친숙한 ‘맘마’로 변형되었는데, 이는 돈 보스코의 어머니인 마르게리타 오키에나의 정체성과 사명을 설명하는데 매우 적합하다.

돈 보스코의 고향 베키에 있는 기념비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하느님 안에 큰 용기와 활기찬 믿음을 지닌 이성·종교·사랑의 농사꾼 여인. 신비한 꿈에서 어린 요한의 성소를 직감한 그녀는 하느님과 불쌍한 청소년을 향한 사랑으로 요한에 대한 마음을 굳혔다. 오라토리오의 자원봉사자이자 협력자였던 그녀는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모두의 맘마 마르게리타이다.”(맘마 마르게리타를 기리는 카스텔누오보의 베키에 있는 살레시오가족 기념비)

마르게리타는 다른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 진정한 어머니였다. 역설적이지만, 마르게리타에게는 어머니로서의 소명이 인식과 기간 면에서 배우자에 대한 소명을 능가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성녀가 프란치스코와 결혼하기로 한 선택은 안토니오를 양자로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했다. 친어머니의 조기 사망으로 인해 성격이 평탄하지 못했던 이 아이를 위해 성녀는 ‘두 번째 어머니’가 되기로 하였고, 모성애로 아이를 감싸면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관계적 어려움을 차별하지 않고 인내심 있고 현명하게 받아들였으며, 오히려 그 순간에 더 도움이 필요한 아이를 위해 중재하려고 최대한 노력했다.(회상, 65-66, 74쪽)

29세에 미망인이 된 마르게리타는 그때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모성적 임무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 자신의 모든 존재를 통합했다. 친척들이 재혼을 권유했을 때,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제게 한 남편을 주셨다가 도로 거두어 가셨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세 아이를 맡겼지요. 그런데 제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자식들을 두고 떠난다면, 저는 얼마나 몹쓸 어미가 되겠습니까!” 하면서 재혼에 대한 요청 거부를 정당화했다. 그리고 아이들을 좋은 후견인에게 맡기면 잘 돌봐줄 것이라는 말에 그녀는 “후견인은 친구지만, 저는 제 자식들의 어미입니다. 온 세상의 금을 다 준다 해도 저는 결코 아이들을 버리지 못합니다.”라고 반박했다.(회상, 41쪽)

그녀의 모성은 모성애의 변형이나 변질로부터 자유로웠다. 레뮈엔은 「MB」에서 마르게리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마르게리타는 어머니의 품위를 잃을 수 있는 그 어떤 의혹도 용납하지 않았다. 가혹한 방법이나 폭력적인 태도로 아이들의 화를 돋우거나 효심을 잃게 하는 원인이 된 적이 없었다.”(MB, 1권 42쪽) 실제로 돈 보스코는 신뢰와 확신을 지니고 그와 어머니 사이에 강렬하고 깊은 관계가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나를 무척 사랑했고, 나는 어머니를 한없이 신뢰했으므로 그분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모든 것을 살폈으며 내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셨다. 오히려 내게 무엇인가가 필요하면 그것을 마련해주셨다.”(회상, 55쪽)

마르게리타는 진정한 어머니가 될 자질을 지녔었고, 요한은 그녀가 그렇다고 느꼈다. 특히 그녀의 교육적 행동 덕분에 그는 진지함과 부드러움, 사랑과 두려움, 요구와 존중이 조화를 이루는 어려운 예술인 예방 교육의 유익한 효과를 직접 경험했다.

마르게리타는 교육 행위로 예방 시스템의 근간이 되는 ‘주고받는 사랑(amore ricambiato, reciprocated love)’의 원칙을 실천했다: “사랑받음을 아는 이는 사랑하고, 특히 젊은이들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은 그들에게서 모든 것을 얻습니다.(Chi sa di essere amato ama e chi è amato ottiene tutto specialmente dai giovani)”(돈 보스코, 발도코 오라토리오 살레시오 공동체에 보내는 편지, 로마, 1884년 5월 10일) 실제로 마르게리타가 아들 요한에게 쏟아부은 사랑에 아들은 자신감을 가지고 완전히 열린 마음으로 이에 보답했다.

마지막으로, 마르게리타는 언제 어디서나 아들과 항상 함께하는 어머니였지만 아들을 방해하지 않았고,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관찰하면서도 아들이 잘 행동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렇게 마르게리타는 ‘적은 말과 많은 행동(poche parole e molti fatti)’(돈 보스코, 집들의 규범과 일반규칙Gli Articoli generali del Regolamento per le Case, 3항 281)으로 이루어진 살레시오 아씨스텐자의 이상, 즉 지속적이고 깨어있는 현존이면서도 신중하고 신뢰로 가득 찬 분위기를 만드는 존재를 구현했다.

마르게리타는 인간적으로 풍부하고 그리스도교적 영감을 받은 존재감으로 아이들에게 긍정적이고 건강한 어머니를 느끼도록 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 역할의 부재도 어떤 식으로든 치유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녀는 아이들에게 스스로 책임을 지고, 규칙을 존중하며, 근면하고 정직하게 일하도록 교육했고, 정의감과 그리스도교적 사랑 의식을 심어주었다. 돈 보스코는 그녀를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종교 교육을 시키고 순종심을 길러 주며 나이에 맞갖는 일들을 마련해 주려고 애썼다.”(회상, 42쪽)

어머니 마르게리타의 모범은 하느님의 어머니이자 모든 그리스도인의 어머니에 대한 요한의 효심이 싹트게 한 이상적인 토양(humus)이었다. 단순하고 다정하면서도 냉정하고 본질적인 대중 종교의 영역에서 마르게리타는 요한에게 당시의 특징적인 마리아 신심, 즉 3일 기도, 9일 기도, 매일의 삼종기도와 묵주기도, 성모님 축일들을 소개했다. 이곳에서 그는 성모님을 향한 부드럽고 자발적인 사랑을 배웠고,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고 지지해주시는 하늘 어머니를 배웠다.

그리스도인이자 마리아의 영혼을 지닌 마르게리타는 “어머니만이 내게 교리를 가르쳐주었다”(회상, 57쪽)라고 돈 보스코가 기억하는 대로 요한의 첫 번째 교리 교사이자 기도 교사였다. “내가 형들과 어울릴 수 있게 되자 어머니는 아침저녁으로 나를 그들과 함께 무릎 꿇게 했으며 우리는 다 같이 일상 기도와 묵주기도 15단을 바쳤다.”(회상, 41-42쪽) 아들의 첫 고해성사와 첫영성체를 준비하며 어머니로서 동행하고 귀중하고 잊을 수 없는 조언을 해 주신 분도 바로 그녀였다.(참조. 회상, 57쪽)

* 「사순절 동안 어머니는 내가 고해성사를 볼 수 있도록 세 번이나 이끌어주었다. “요한아, 하느님께서는 네게 큰 은혜를 베풀고 계신다. 잘 준비해라. 모든 것을 뉘우치고 진실하게 고백하도록 힘써라. 그리고 앞으로는 더욱더 착한 사람이 되겠다고 그분께 약속드려라.” 나는 약속했다. 내가 이 약속에 충실했는지 안 했는지는 하느님께서 아신다. 첫영성체 전날 어머니는 기도로 도와주면서 좋은 책도 읽게 해주고 정녕 훌륭한 어머니만이 자기 자녀들에게 할 수 있는 권고를 해 주었다. 첫영성체 날 어머니는 내게 아무와도 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 어머니는 성찬으로 나를 동반해 주었으며, 시스몬디 보좌 신부님이 모두에게 큰소리로 반복시키시는 대로 나와 함께 준비와 감사의 기도를 바쳤다. 그날 어머니는 내게 이런저런 일을 하나도 시키지 않고 오로지 책을 읽거나 기도를 하는 일로 시간을 보내게 했다. 이날 어머니는 내게 많은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중에서도 이 말씀을 여러 번 되풀이 하셨다. “얘야, 이날은 네게 중요한 날이다. 하느님께서 정녕 네 마음을 소유하셨다고 엄마는 믿고 있다. 이제 죽을 때까지 착하게 살겠다고 그분께 약속드려라. 앞으로는 성체를 자주 모시되 양심에 거리끼는 죄를 가지고 모시지 않도록 조심해라. 언제나 진실하게 고해성사를 보고, 순명을 잘하며 교리와 하느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으러 나가도록 해라. 그러나 나쁜 말을 하는 아이들은 페스트처럼 피해야 한다.” 나는 언제나 어머니의 훈계를 명심하고 지키려고 힘썼다. 그날부터 내 생애는 진보하기 시작했다. 특히 타인에 대한 순종과 온순함에서 그랬다.(회상, 58-59쪽)」

마르게리타가 아들에게 한 ‘엄숙한 말씀(i solenni discorsi)’ 중 특히 이번 주제와 관련이 있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그의 신학교 입학을 앞두고 신학교로 떠나기 전날(1835년 10월 30일) 당부하신 내용이다: “요한아, 이제 너는 신학생 옷을 입었구나. 나는 한 어머니가 아들의 성공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온갖 위로를 다 맛보고 있단다. 그러나 너를 영예롭게 하는 것은 옷이 아니라 덕행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혹시 어느 날 네 성소에 의심이 든다면 제발 그 옷을 더럽히지 말고 즉시 벗도록 해라. 자신의 의무를 등한시하는 신부를 아들로 두느니보다는 차라리 가난한 농부를 아들로 두는 편을 나는 택하겠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나는 너를 성모님께 바쳤고, 네가 공부를 시작했을 때는 언제나 우리의 이 어머니를 사랑하라고 당부했었지. 요한아, 이제 나는 네게 완전히 그분의 것이 되라고 부탁하고 싶구나. 성모님께 대한 신심이 깊은 친구들을 사귀도록 해라. 그리고 신부가 되거든 네 주위에 성모님의 신심을 전파하도록 해라.”(회상, 137-138쪽)

이 말씀은 요한 보스코 생애의 주요 사건에 대한 마리아론적 열쇠가 된다. 사실 마르게리타는 청년이 된 자기 아들이 성모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요한이 태어나는 순간에 성모님께 봉헌한 후, 성모님께서는 그를 당신의 망토 아래 두심으로써 그의 성장과 학업, 성소 여정을 지켜보셨다. 그는 성모님을 어머니로 여기고 어떤 어려움에도 자신감을 가지고 그녀에게 의지하여 그녀의 도움과 위로, 보호를 받는 법을 배웠다. 이제부터 그는 “완전히 성모님의 것”이 되어야 했다.

마르게리타의 말에는 성모님을 향한 신뢰와 의탁(넘겨줌)이 담겨있다: 돈 보스코는 지상의 어머니와의 관계를 특징짓는 신뢰와 열린 마음, 자신감의 태도로 하늘의 어머니께도 자신을 맡기고, 지상의 어머니 마르게리타가 다 해 줄 수 없는 것을 이제 하늘의 어머니가 해 주시리라는 예고와 초대를 받는다.

돈 보스코가 기록한 이 순간은 돈 보스코가 세심한 독자의 눈에 중요한 영적 구절이 떠오르도록 주의를 기울인 엄숙한 순간이다. 여기서부터 돈 보스코의 사목과 교육 성소의 전개는 돈 보스코가 어린아이처럼 믿고 맡긴 성모 마리아의 살아계시고 활동적인 현존에 비추어 볼 때만 이해할 수 있다.

2.3 오라토리오의 출발과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역할

성모님의 모든 것이 되고, 성모님의 친구들과 사귀며, 성모님의 신심을 전파하라고 하는 것은 어머니 마르게리타가 키에리에 신학교 입학을 준비하던 아들 요한에게 준 엄숙한 위탁이다. 이에 따라 ‘회상’을 읽어가면서 살레시오회가 어떻게 발전했으며, 그 발전에 어머니이자 스승이신 성모님께서 어떤 역할을 하셨는지 돈 보스코 스스로 답하도록 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첫 번째 웅변적 깨달음은 베키에서 이루어진다. “의자 위에 올라가서 책을 읽었다. 우리는 이야기 전후에 성호경을 긋고 성모송을 바쳤기 때문에…”(회상 53쪽) 하듯이 성모송 기도로 시작하여 묵주기도 암송으로 끝나는 게임과 농담 속에서 함께 보내는 오후에 대한 간단한 제안으로 구성된다. 이 모임은 아홉 살 소년의 꿈, 즉 싸움과 불경한 말을 막고 친구들에게 선을 베풀자는 꿈의 첫 번째 실현으로, 악을 예방하고 선을 증진하는 예방 시스템의 실질적인 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독창성은 나중에 어린 학생 시절, 요한이 성모님 신심이 스며든 ‘명랑회’를 설립하면서 “평일 아침에는 미사를 드렸다. 수업 전후에는 짤막한 기도와 성모송을 바쳤다. 주일에 학생들은 학교 성당에 모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영적 독서를 하고 성모소일과를 노래했다.”(회상, 89쪽)에서 보듯 키에리에서 더욱 공고해졌다.

공립학교를 마친 후, 요한에게는 어렵고 고통스러운 성소 식별의 순간이 찾아왔고, 그는 성당의 성모님 은총의 그늘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강렬한 신심으로 기도를 드렸다. 돈 보스코는 성모님의 전구에 의지하여 신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심했고, 성모님 앞에서 신학생복을 입는 엄숙한 날에 “하느님, 제가 이 순간 새 인간을 입도록 해 주십시오. 이후부터 당신의 거룩한 뜻을 철저히 따르는 새 삶을 살게 해 주소서. 정의와 성덕이 저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부단한 목표가 되게 해 주소서. 오 마리아, 당신은 저의 구원이시나이다.”라고 기도하면서 자신의 결심을 선언했다.(회상, 131.133쪽)

신학교에 도착한 요한은 “나는 사랑하는 어머니의 권고에 따라 성모님을 사랑하고 학업과 신심업에 열심한 동료들과 사귀었다.”(회상, 143쪽)라고 기록한 대로 어머니의 조언을 실천에 옮겼고, “루이지 코몰로는 내 옷자락을 잡아끌면서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그리고는 날 성당으로 인도하여 성체 조배, 임종자들을 위한 기도를 바치게 하거나 연옥 영혼들을 위해서 로사리오나 성모 소일과 기도를 바치게 했다. 이 놀라운 친구는 내겐 큰 행운이었다.”(회상, 146쪽)라고 기록한 대로 루이지 코몰로에게서 성모님의 독실한 동반자이자 연인이자 이상적인 친구, 완벽한 안내자, 비교할 수 없는 모범이 되어준 성모님을 발견했다.

돈 보스코의 첫 번째 저술은 성덕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이 다정한 친구의 삶을 서술하는 것이었다.(참조. Giovanni Bosco, Cenni storici sulla vita del chierico Luigi Comollo mo rto nel seminaio di Chieri, ammirato da tutti per le sue singolari virtù scritti da un suo collega, 1844) 피에트로 스텔라가 말했듯이 “이 책에는 돈 보스코가 지녔던 마리아 신심의 거의 모든 요소가 나와 있다. 돈 보스코의 신심은 성모 마리아의 모성에 기초한 고결한 삶으로 표현되며, ‘이 눈물의 세상에서’ 싸우면서 소유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후원의 보장이 된다.”(P.Stella, Don Bosco nella storia, 149쪽)

코몰로의 삶은 성모님의 참된 자녀가 된다는 것, 즉 성모님의 특징을 스스로 구현해내는 것, 즉 성모님의 미덕을 본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표현한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악이 없이 하느님과 그분과 함께 다른 모든 선을 누리는 것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구원으로 이끄는 참된 봉헌이 된다.(같은 책, 150쪽) 당시의 대중적인 신심의 특징인 경배, 희생, 작은 꽃송이 같은 몸짓은 신심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기보다, 아이가 신뢰와 사랑으로 부드럽고 진실한 자기 어머니에게 안기듯이 어머니에게 드리는 순진하고도 깊은 애정의 몸짓으로 우러나는 것이다.

루이지 코몰로는 병들었을 때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오, 사람들이 죽음의 순간에 성모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을 가져다주는지 확신할 수만 있다면, 그들은 저마다 모두 성모님께 특별한 영예를 바칠 새로운 방법을 찾느라고 경쟁할 것입니다. 성모님은 아드님을 품에 안고 마지막 순간에 우리 영혼의 적에 대항하여 우리를 지켜주실 분이시며, 성모님과 함께라면 지옥이 우리를 거슬러 무장하더라도 승리는 결국 우리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 고작 몇 가지 기도만을 드리면서 자유롭고 무질서한 삶을 살아 그분께 모욕을 끼치면서도 그분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믿는 이들은 조심해야 합니다.”(죠반니 보스코, 한 동창이 기록한 키에리 신학교에서 사망한 신학생이면서 모두가 그의 탁월한 덕을 칭송했던 루이지 코몰로에 관한 역사적 사실들, 150쪽)

1841년 6월 5일에 거행된 사제 서품은 돈 보스코의 인생에서 분수령과도 같은 근본적인 매듭 중 하나이다. 하늘에 계신 성모님의 도움으로 서품을 받은 돈 보스코는 “월요일에 콘솔라타 성당으로 두 번째 미사를 드리러 갔다. 나는 동정녀 마리아께 당신 아드님에게서 얻어 주신 무수한 은혜에 대해서 감사드렸다.”(회상, 175쪽)라고 기록한 대로 돈 보스코는 성모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에 감사하며 토리노의 콘솔라타 성당에서 두 번째 미사를 봉헌했다.

돈 보스코는 영적 지도자요 은인이신 카파소 신부의 제안에 따라 제노바 명문가의 가정 교사나 고향의 전속 사제. 카스텔누오보의 보좌 신부 자리 등을 마다하고 사제학교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회상, 184쪽)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St.Alfonso Maria de’ Liguori(1696~1787년)의 성모님에 관한 묵상(참조. Alfonso De’ Liguori, Leglorie di Maria I, s.e., Torino, 1824)을 읽으면서 성모님에 대한 진정한 신심이 삶과 죽음에서 가장 강력한 보호를 보장한다는 생각으로 강화되었다. 따라서 그는 하느님의 어머니와의 효심 깊은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고 심화할 기회를 얻게 된다.

카파소 신부에게 마리아는 무엇보다도 모든 그리스도인의 어머니이시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아래에 있는 우리에게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맡기셨기 때문이다. 성모님은 거룩함으로 완성된 가장 아름다운 자질, 특히 부드럽고 강한 사랑과 각 자녀에 대한 지속적인 보살핌 등 모든 어머니의 자질을 지니고 계신다. 성모님께서는 당신 아드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고, 예수님 자신이 죽음의 순간에 당신 어머님께 우리를 자녀로 주고자 하셨으므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성모님을 사랑하지 않고 효심 어린 헌신으로 보답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존재할 수 없다. 어머니로서 성모님은 모든 자녀, 특히 약하고 연약하며 도움이 필요한 자녀를 도우신다. 성모님은 모든 은총의 관리인이자 천국의 중개인과 같으신 분이다. 따라서 성모님의 모성애를 표현하는 데 카나보다 더 좋은 아이콘은 없다.(참조. Cafasso Giuseppe, Meitazioni sulla Madonna Ss.ma, in Idem, Missioni al popolo. Meditazioni, a cura di Pier Angelo Garamaglia, Effatà, Cantalupa (TO) 2002, 271-293쪽)

피정 강의나 강론에 익숙했던 카파소 신부는 성모님 신심이 두터웠던 여러 성인, 특히 루이지 곤자가나 필립보 네리의 모범을 즐겨 제시하곤 했는데, 이와 같은 내용은 ‘준비된 청소년(Giovane Provveduto)’(참조. Bosco Giovanni, Il giovane provveduto per la pratica de’ suoi doveri degli esercizi di cristiana pietà per la recita dell’uffizio della Beata Vergine e de’ principali Vespri dell’anno coll’aggiunta di una scelta di laudi sacre(1847), in OE II, 183-532쪽)과 같은 돈 보스코의 저술에서 볼 수 있듯이 훗날 돈 보스코가 청소년들에게 성모님 신심을 전하는 내용이 되기도 한다.

사제학교 시절과 발도코에 정착하기까지(1841~1846년)의 이야기에서 돈 보스는 축일 오라토리오의 시작과 안정적인 거처를 찾기 위한 고군분투를 묘사한다.

이 부분에서는 마리아의 모성적 존재감과 개입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회고록의 구성에서 돈 보스코의 의도는 떠돌이 오라토리오가 진행되었던 몇 년 동안 1844년 꿈 내용이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 보여주고자 하는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 사실, 사건의 전개 과정에서 성모님은 돈 보스코와 오라토리오의 청소년들이 겪어나가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현존하시고 참여하신다. 성모님께서는 여러 국면에서 젊은이들의 선두에 서시면서 장차 당신께 봉헌될 성전의 회랑과 마당이 있게 될 필립비 밭(훗날 ‘꿈들의 밭’이라고 불리게 될, 참조. 회상, 207쪽)으로 인도하고 계신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현존으로 안심하라고 다독이면서 아홉 살 꿈에서 이미 “다정하게 손을 잡고” 말씀하신 그 모습 그대로 돈 보스코가 자기 청소년들을 데리고 낙담하지 않고 확신을 가지고 계속 나아가도록 부추겨 이미 마련되고 예정된 곳으로 인도하고자 도우신다. 어머니로서 그녀는 불확실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결코 자녀를 버리는 법이 없으시다.

돈 보스코는 ‘회상’을 기록해가면서 오라토리오가 걸어가야 했던 매듭과 고비마다 중요한 여정에서 성모님을 향한 믿음을 꼼꼼하게 기록한다. “10월 13일은 천주의 모친 성 마리아 대축일이었다. 나는 소년들에게 오라토리오를 바롤로 후작 부인의 리푸조로 이동한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그러자 약간의 동요가 일었다. 그래서 그곳에는 노래하고 뛰놀 수 있는 완전히 우리만의 넓은 공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신이 났고, 머릿속에 상상하고 있는 새로운 장소를 하루빨리 보고 싶어서 이사 갈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10월 셋째 주, 성모 자헌 축일이었다. 한낮이 좀 지나서 소년들은 새 오라토리오를 찾아서 떼지어 발도코로 내려가고 있었다. 큰아이, 작은 아이, 기계 견습공, 벽돌공 모두 섞여 있었다.”(회상, 212쪽) 이처럼 돈 보스코는 사제학교에 있으면서 신학자 죠반니 보렐 신부님의 도움을 받아 발도코로 이동하고, 급기야 1844년 10월 20일, 당시 정결하신 성모님을 기리는 축일(purificazione di Maria)에 오라토리오의 공식적인 출발일이라고 할 수 있는 날을 맞아 돈 보스코와 아이들은 성모님께 성모송을 드린다.

“1844년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대축일은 몹시 추웠고 눈이 펑펑 쏟아졌다. 우리는 대주교님의 허락을 얻어 갈망해 마지않던 성당을 축성했다.(이곳은 꿈에서 돈 보스코가 세 번째 멈춘 곳이다) 미사를 드렸고 많은 소년이 고해성사를 보고 영성체를 했다. 나는 오라토리오가 드디어 자리를 잡게 된 것만 같아 기쁨의 눈물 속에 미사를 바쳤다. 마침내 나는 악의 길에 빠질 위험이 있는 가장 버림받은 소년들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이다.”(회상, 214쪽) “이곳이 바로 주님께서 지정해주신 오라토리오의 첫 성당이었다.”(회상 213쪽)라고 돈 보스코께서 몸소 기록한 대로 산타 필로메나 병원의 방 두 개를 개조한 오라토리오의 첫 번째 성당이다.

그렇지만 7개월의 “천국 같았던”(회상, 215쪽) 시기가 지나고 산타 필로메나 병원이 개원함에 따라 오라토리오의 가장 어려운 시기가 닥친다. 고발까지 당하며 헤매던 돈 보스코와 그의 젊은이들이 “성 베드로 쇠사슬 성당으로 알려져 있는 성 십자가의 체노파피오 성당과 그 마당에서” 지내다가 쫓겨나고 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내 방에는 성당 비품들과 오락 기구들이 쌓여 있었고 소년들은 내가 가는 곳마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모을 한 뼘의 땅마저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내 괴로움을 감춘 채 기쁜 표정을 지었으며, 오로지 내 머릿속과 하느님의 계획 속에만 있는 미래의 오라토리오에 관한 놀라운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그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축일을 즐겁게 지내게 해 주기 위해 그들을 데리고 사시와 필로네의 마돈나, 캄파냐의 마돈나, 카푸치니의 산, 수페르가까지 소풍을 나갔다. 그 성당들에서 아침 미사를 드리고 복음을 해설했다. 오후에는 약간의 교리와 이야기를 했고 성가도 몇 곡 불렀다. 그리고는 그곳을 빙빙 돌면서 구경을 하거나 소풍을 하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은 오라토리오의 모든 이상을 한낱 물거품으로 만드는 듯했지만,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늘어만 갔다.”(회상, 225-226쪽) 이렇게 돈 보스코와 아이들은 떠돌이가 되고 돈 보스코는 교구 신부들의 반대를 받아 가며 정신병자 취급을 받기도 한다.

마침내 1846년 4월 12일 부활절에 결정적인 최종 목적지라고 할 수 있는 피나르디씨의 헛간에 도착한 돈 보스코와 아이들의 삶은 기적의 주인공으로 여겨지는 성모님과 함께 생활을 이어간다: “(피나르디의 집으로 가기로 하고 계약한 4월 5일) 우리는 가슴 속에 크나큰 기쁨을 안고 있었지만 어떻게 표현할 줄을 몰랐다. 그날 아침에 우리는 들판의 성모님께 기도하러 갔었는데, 동정녀 마리아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셨던 것이다. 우리는 성모님께 감사드리기 위해 마지막으로 풀밭에 무릎을 꿇고 로사리오 기도를 바쳤다. 그 후 제각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별 아쉬움 없이 우리의 풀밭에 마지막 작별 인사를 고할 수 있었다. 더 좋은 장소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주일은 4월 12일, 부활 대축일이었다. 우리는 피나르디의 헛간으로 성당 비품과 오락 용구들을 운반했고 새로운 집을 소유하러 갔다.”(회상, 251-252쪽)

이 사건들을 다시 읽어가면서 우리는 돈 보스코가 필립비 풀밭이 성모님께서 자신의 집을 지으라고 지시하신 장소임을 알아가는 과정을 읽는다. 여기서 성모님의 집은 1868년에 세워질 미래의 대성당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살레시오회 사목이기도 하다. 발도코에서 전개되는 프로젝트는 성모님의 일이며, 집이다. 성모님께서 바로 이 집에 계셨다. 돈 보스코와 아이들은 노래 ‘바다의 별이신 마리아’, 삼종기도, 노래 마니피캇, 묵주기도, 성모 소일과를 드려 성모님을 찬미하고, 성모님께서는 기도와 공부, 게임과 축제, 성사로 번갈아 가며 진행되는 날들을 지켜보는 세심한 어머니로 존재하신다.

오라토리오의 정착지와 성당을 지을 장소를 찾는 것은 성모님의 개입이다. 이때부터 발도코의 집에서는 성모님의 모성적 현존이 글로써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사건 전개에서도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녹초가 되는 일과 속에서 돈 보스코가 폐렴과 기침과 고열로 생명의 위협을 받는 중병에 걸렸을 때, 젊은이들은 콘솔라타 성당의 ‘위로의 성모님’이라는 그림 앞에서 번갈아 가며 어머니 성모님께 애원하며 기도하고 서약과 약속을 했다. 마침내 돈 보스코의 어머니이자 청소년들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돈 보스코가 회복되는 기적이 일어난다.(참조. 회상, 275-277쪽)

결론적으로, 「돈 보스코의 회상」을 읽으면서 우리는 돈 보스코의 영적 체험에 대한 베일을 조금 벗겨내어 그의 가장 깊은 애정, 특히 어머니 마르게리타의 중재 덕분에 그와 함께 성장해갔던 마리아를 향한 효심과 신심의 중요한 뿌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돈 보스코는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자신의 삶과 살레시오회의 역사에서 항상 주도권을 쥐어 “다정하게 손을 잡아” 이끄시며 앞장서 자신을 인도하셨다는 확신을 굳혀갔던 것이다.

돈 보스코는 자신이 성모님의 사랑받고 총애받는 아들이라고 느꼈고, 당시 지역에서 성모님 공경에 쓰이는 다양한 칭호나 관련 신심을 넘어선 자신만의 관심과 애정으로 성모님께 보답했다. 돈 보스코에게 성모님에 관한 일반 신심, 성모님의 위대함, 성모님의 역할, 성모님을 공경하는 각종 칭호는 그만의 것이 되었고, 실제 살아있는 인격체 성모님이 되었다.

실제로 돈 보스코가 임종할 때, “돈 보스코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원죄 없으신 동정 마리아’나 ‘그리스도인의 도움’이 아니라 ‘어머니’였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몇 번이고: 어머니, 어머니……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 마리아, 마리아…… 성모님은 모든 가톨릭 신자에게 가장 필수적인 분, 즉 살아서나 죽어서나 우리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분, 아들과 함께 천국의 문을 열어주시는 분으로 현존하신다. 그래서 돈 보스코는 ‘오 어머니…어머니…저에게 천국 문을 열어주소서’를 기도한다.”(Stella, Don Bosco nella storia, 175. 돈 보스코의 말씀 인용구는 MB. XVIII, 537쪽)

다음 부분에서는 돈 보스코의 교육적 경험을 탐구하고 그의 저술 중 일부를 다시 읽으면서 성모님을 향한 돈 보스코의 효심과 예방 교육 시스템의 적용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확인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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