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25,1-13(연중 제32주일 ‘가’해)

‘열 처녀의 비유’, 6세기, 채색 삽화, 로사노 대성당 보물관, 이탈리아

마태오 복음 24장과 25장에는 그리스도의 재림, 세상의 종말과 심판 등에 관한 내용이 담겼다. 후반부 격인 25장에만도 3개의 비유가 담겨있는데, 오늘부터 그리스도 왕 대축일까지 3주간 동안 이 비유들을 나누어 듣는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만이 전하는 비유이다. 이 비유는 “깨어 있어라”하는 경고의 메시지를 담은 비유이면서, 동시에 신랑은 반드시 올 것이고 신랑과 함께 잔치에 들어가는 이들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비유이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2베드 3,8) 하는 말씀처럼 종말과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재림에 관한 비유들은 오늘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오늘 복음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올리브 산에 앉아 계실 때”(마태 24,3) 제자들에게 “깨어 있어라…명심하여라…준비하고 있어라…”(마태 24,42-44) 하는 가르침을 주신 다음, 그 말씀의 뜻을 한 번 더 강조하시며 더욱더 쉽게 이해시켜 주시려는 듯이 말씀하시는 24장부터 이어지는 세 개의 비유들 속에 위치한다. 이런 맥락 속에서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도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13) 한다. 세 개의 비유들은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마태 24,45-51), ‘슬기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마태 25,1-13), ‘착하고 성실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마태 25,14-30)에 관한 비유들로서 듣는 이들에게 선명한 흑백 논리처럼 이쪽과 저쪽이라는 두 길 사이에서 어느 쪽에 있을 것인가를 다그친다.

1.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

24장부터 계속된 세 비유 중 두 번째에 해당하는 오늘 복음의 비유는 팔레스티나의 결혼 관습을 배경으로 한다. 결혼식 전날 해 질 녘에 신랑은 몇몇 들러리 친구들과 함께 신랑을 기다리고 있는 신부의 집으로 간다. 그런데, 비유에서 들러리만 있고 신부는 없다든가, 신랑이 “한밤중”에 도착한다든가, 그리고 기름이 떨어진 그 들러리들이 그 “한밤중”에 “기름을 사러 간다”든가, 흥겨운 잔치 중에 “문이 닫혀” 들러리들이 슬프게도 집밖에 남게 되는 등 이상한 대목이 참 많다. 그렇지만 그런 내용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단순하게 말해서 이 비유는 마태오 복음사가가 주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재림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그 재림이 늦어지는 것을 예술적으로, 그리고 비유적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마태오의 관심사는 우리의 주님이 진정 메시아이시고, “늦어지는 신랑”(참조. 마태 25,5)이신데, 이런 과정에서 과연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어떻게 깨어 있어야 하는가 하는 내용이었다.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마태 25,1)라는 복음의 첫 구절을 통해서 전형적인 예수님의 비유 도입처럼 우리는 즉시 비유에 들어선다.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서 “맞으러 나간”이라는 표현은 그리스 말에서 왕이 어떤 도시를 공식적으로 방문하려 할 때 백성들이 왕을 환영하기 위해 나간 상황에서 사용되던 표현이다. 우리에게 하늘 나라를 열어주시기 위해서 오시는 분, 모든 이들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해야 하는 백성들의 모습이 여기에 담겼다. 복음사가 마태오는 즉시 열 처녀 중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마태 25,2)라고 기록한다.

어리석음은 실제를 보지 못하는 우둔함이고 슬기로움은 현실을 꿰뚫어 보는 통찰이다. “하늘 나라” 역시 말씀에 바탕을 둔 “슬기로운” 자들의 몫이다. 이 어리석음과 슬기로움은 비유에서 “”과 “기름”을 둘 다 준비하였는가 그러지 않았는가로 구별된다.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세례로 얻은 생명의 불꽃, 그리고 그 불꽃을 계속 살려 나가야 할 착한 행실이라는 기름, 두 가지로 읽을 수 있다. 어리석음과 슬기로움의 차이는 “기름”을 가지고 있었는가 가지고 있지 않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어리석음과 슬기로움의 차이는 산상설교의 맨 마지막에서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으로 드러나고, 이는 결국 예수님의 “말을 듣고 실행하는가 하지 않는가로 드러난다.(참조. 마태 7,24-27)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마태 25,5) 비유에서 이 문장이 결정적인 상황 전개의 계기가 된다. 이처럼 예수님의 재림이 늦어지는 상황은 1세기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맞아야 했던 심각한 문제였다. 지금 오늘의 우리 역시 이냐시오 실로네Ignazio Silone(1900~1978년, 이탈리아의 작가이자 정치인, 노벨문학상에 10번이나 지명된 바 있음)가 말한 대로 버스 정류장에서 이제나저제나 버스가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듯이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한다. 깨어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비유인데 모두 “잠이 들었다”라는 것은 역설이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깨어 있음’은 도대체 어떤 깨어 있음일까? “슬기로운 처녀나 어리석은 처녀나” 모두 잠이 들었다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마태 25,6) 한밤중, 예기치 않은 시간, 도둑이 들이닥치듯이 그렇게 주님께서 오신다고 신약성경이 여러 번 얘기해 준 바로 그 시간에(참조. 마태 24,43 1테살 5,2-4 2베드 3,10 묵시 3,3;16,15)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외치는 소리가 들리자 “(잠들었던)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마태 25,7)라고 비유는 이어진다. 이때 “일어나”라는 말은 희랍어로 έγείρω(에게이로egheíro)라는 동사인데, 이 동사는 야이로의 딸이 살아날 때(참조. 마르 5,41),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때에도 똑같이 사용되는 말마디이다.(참조. 마르 14,28;16,6) 비유가 이어지면서 마침내 어리석은 처녀와 슬기로운 처녀의 차이가 밝혀진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다오.’ 하고 청하였다.”(마태 25,8) 한다. 그렇지만 슬기로운 처녀들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마태 25,9) 하는 것이었다.

이 부분에서 맨 처음 드는 생각은 슬기롭다는 처녀들이 참 이기적이고 야박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대답은 최후의 심판에서 각자가 자기 자신을 두고 대답해야만 하는 상황을 암시한다. 주님과 만남에 필요한 기름은 누군가의 여분으로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미리 준비해야만 하는 것이다. “기름”은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이다.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으로 오늘 나를 살게 하는 것, 시간의 마지막 최후의 심판에서 혹시라도 주님께서 나를 어리석다 하시지나 않을까 하는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염려야말로 기름이다. 이러한 열망은 예수님께서 최후의 심판에서 “오른쪽에 있는 이들…복을 받은 이들…의인들”(참조. 마태 25,31-46)이라고 말씀하신 내용을 살기 위한 열망이며, 우리 그리스도인이 매일매일 살아가는 열망이다. 이 열망으로 그리스도인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인생의 기다림 안에서, 그저 한 남자요 여자로 남지 않고 의미를 담는 인생이 되기 위하여, 행여 그분께서 “뿌리가 없어서 오래 가지 못한다”(마르 4,17 참조. 마태 13,21) 하시지 않도록 거룩한 조바심을 산다.

많은 교부는 이 “기름”을 두고 ‘사랑’이라든가 ‘자비로운 마음’, 혹은 ‘믿음에 살을 입히는 의로운 행동’ 등 여러 해석을 한다. “기름”은 계속 타올라야 할 성령의 불꽃이고, 참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는 “기름”을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애덕과 착한 행실의 기름’이며, 그리스도인의 행동이 나오는 믿음으로 해석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기름은 ‘사랑’의 상징이다. 그 믿음과 사랑은 나누어질 수 없고 양도될 수 없다.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의 기름은 ‘기쁨의 기름, 사랑의 기름, 순결의 기름’이다.

2. “문은 닫혔다…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마침내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마태 25,10) 슬기로운 처녀들의 슬기로움은 한 마디로 “준비”였다고 비유는 밝혀주고, “문은 닫혔다”라고 하면서 다소의 여지도 주지 않고 단정적인 직설 화법으로 기술한다. 문 안에 있을 것인지, 문밖에 있을 것인지의 가능성만이 제시되고 다른 여타의 제3의 상황을 가정하지 않는다.

나중에 (기름을 사러 간 어리석은)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마태 25,11-12) 우선 “나중에”라는 마태오의 표현이 여러 곳에서 보이는 것을 기억할 만하다(참조. 마태 4,2;21,29.32.37;22,27;26,60) 어리석은 처녀들의 청에 대한 주인의 대답은 가혹하리만치 단호하다. 라삐 전통에서 스승이 제자를 물리칠 때 사용하는 것과 같은 엄한 표현이다. 실제의 혼인 잔치 상황이라면 주인의 대답은 너무하다 싶다. 그러나 잔치와 최종 심판이 동시에 있을 주님과의 만남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대답이다. 하늘 나라의 잔치가 시작되는 마지막 날, 우리가 매 주일 미사에서 신경을 통해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니…』라고 고백하는 대로 그분을 만나는 날, 역사가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심판이 있어야 할 그날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각자의 삶이라는 잣대로 우리를 보실 것이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는 똑같은 표현과 비슷한 문형이나 구조, 그리고 주제를 산상설교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런 까닭으로 오늘 복음인 마태오 복음 25장의 ‘열 처녀의 비유’를 정확히 알아듣기 위해서는 특별히 마태오복음 7,21-27과 함께 읽어야 한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마태 7,21-23)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열 처녀의 비유’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전형적인 종교적 위선의 형태를 고발하시고 그 가면을 벗기신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놀라운 일을 행하면서도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뜻을 행한 까닭에 예수님으로부터 비참하게 내침을 당하고 문밖에 있게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독창적이고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일을 수행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자칫 이러한 일들이 우리 손으로 우리가 지어낸 우상이 되어 그러한 일들을 하는 이들에게 영광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두고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호세 6,6 마태 9,13;12,7)라는 말씀으로 확인하셨다.

우리는 마지막 날에 다른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고 선포하는 행위로써만 의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누가 진정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행동한 자였는지, 아니면 그분 이름으로 그런 척하였던 불의한 사람인지가 드러날 것이다. 불의라고 할 때 말과 행동 사이의 불일치만이 있는 것도 아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못된 이들을 “능가하는”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지 않고 이기적으로 자신만을 위하는 불의도 있다. 다른 이들을 능가하는 의로움으로 준비된 자만이 오시는 신랑을 맞이하러 나가는 사람이다.

3. “깨어 있어라”

비유의 마지막에 예수님께서는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13)라는 말씀으로 비유를 마감하신다. “깨어 있음”은 모든 인간과 그리스도인의 기본 덕목이며 모든 행위의 “소금”이고, 모든 인간이 듣고 말하며 사고하는 “빛”이다. 이와 관련하여 성 대 바실리오(St. Basil the Great, 330~379년)께서 윤리 규칙의 결론(80,22)으로 서술하신 말씀을 기억할 만하다.

그리스도인이 특별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생각지도 않을 때 주님께서 오실 것(참조. 마태 24,44 루카 12,40)을 알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완수하기 위해 매일 매시간을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바오로 사도께서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서간문을 통해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1테살 5,4-6)라는 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다그치셨습니다.…깨어 있음은 등불을 밝혀 들고 주님을 마중하러 가는 것입니다. 이는 “슬기로움”이니 똑똑함이라는 기름의 도움으로 오랫동안 기다리며 살 준비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졸다가 잠이 들었다”(마태 25,5) 하고 실제 말씀해 주신 것처럼 주님이 오실 것을 잊어버리거나 아예 오시지 않을 것이라고 행여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졸다가 잠이 들) 그런 가능성을 어떻게 피할 수 있습니까? 반복되는 우리의 따분한 매일의 일상사가 짐이 되지 않도록 고군분투해야 합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 12,37)을 잊지 말고, 마지막으로 오시는 날 우리에게 열어주실 그 나라의 유일한 관문이신 주님을 그리며 오늘이 바로 그날이라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아멘!

2 thoughts on “마태 25,1-13(연중 제32주일 ‘가’해)

  1. 밑줄 그어진 “최후의 심판에 각자가 자기자신을 두고 심판 해야만 하는 상황” 을 잠시 생각해보며, 일상이 하느님께 어떻게 보여지는지 생각하며 슬기로운 행동으로 바로 행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 “어리석음은 실제를 보지 못하는 우둔함이고 슬기로움은 현실을 꿰뚫어 보는 통찰이다.”
    마음에 와 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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