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16,13-20(연중 제21주일 ‘가’해)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마태 16,16) *그림-Emil Nolde

올해 ‘가’해의 복음으로 따라가고 있는 마태오복음에서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이 전환기를 맞는 시점에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생겨났고, 그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스승이요 예언자로 알아 모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은총을 입어 자기들이 그분과 함께 지낸 인간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이해한 것을 넘어 무엇인가가 다른 분이라는 것을 알아가고 있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같은 분이고, 하느님께서 그분을 이 세상에 보냈으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알아가고 있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잡아 죽이는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참조. 마태 23,37)을 향해 가시는 당신의 여정이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위함이라는 것도 제자들에게 예고하실 것이다.(오늘 복음에 바로 이어지는 다음 대목이요 다음 주의 복음이다. 참조. 마태 16,21;17,22;20,17-19)

오늘 복음의 내용은 복음이 쓰인 시점(통상 예수님의 부활 이후이며 70년 이전으로 추정)을 고려하고 신앙 고백문이 실린 것으로 보아 마태오 복음사가가 속해 있었던 교회 공동체 신앙의 결집이요 묵상의 종합이며, 증언이자 그리스도의 신비를 심화시키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1.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의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신다. “카이사리아”는 로마의 황제 시저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 도시는 원조 헤로데의 아들인 필립보가 대략 기원전 2년 경에 헤르몬산 기슭에 로마의 황제 시저를 신격화하려는 의도로 대리석 신전을 세우고 자기 왕조의 수도로 삼았던 도시이다. 바로 이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마태 16,13)라고 물으신다.

이곳은 요르단 강의 발원지로도 알려진다. 요르단 강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곳일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마태 3,17)”라는 소리가 들렸던 자리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하늘의 소리 대신에 땅의 사람들이 당신을 두고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며 땅의 소리를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사람의 아들”이라 불리기를 좋아하셨는데(4복음서에서 95회 사용), 이는 이 호칭이 다소 모호하면서도 유다인들의 귀에 그리 거슬리지 않은, 그리고 인간의 아들이요 땅의 사람이면서 동시에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표현하기에 적절하기 때문이었다. 묵시 문학 전통(다니 7,13 참조)에 따르면, “사람의 아들”은 마지막 날에 죄인들을 심판하고 의인들을 구원하러 오시는 분이다.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단 기억에 존재하는 위대한 예언자 중 하나, 곧 언젠가 다시 돌아올 엘리야(참조. 말라 4장)나 헤로데가 죽였으나 다시 살아났다고 믿는 세례자 요한(참조. 마태 14,1-12), 혹은 예수님께서 예레미야처럼 예루살렘 성전에서 설교하셨으므로 예레미야(참조. 예레 7장)라고 생각한다면서 이를 그대로 예수님께 알려드린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 하고 다시 물으신다. 복음의 앞뒤 전개 과정으로 볼 때 오늘 복음인 16장 이전 14장에서 예수님께서 밤중에 갈릴래아 호수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다가가셨을 때 제자들은 배 안에 있던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태 14,33) 하고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한 터였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이 고백은 처음으로 부르심을 받았던(참조. 마태 4,18-19)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하면서 시몬 베드로의 고백이 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질문은 교과서에 나오는 것과 같은 정답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과 당신 사이의 관계요 삶의 엮임, 나아가 서로가 얼마나 믿을만한가에 관한 질문이었다. 과연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이신가? 이 질문은 우리가 매일 스스로 다그쳐야만 하는 질문이다. 우리 신앙과 삶은 예수님을 두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의 내용과 질에 달려 있다. 그분에 관해 내가 믿고 아는 만큼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다. 나에게 예수님이 누구이신가 하는 질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죽는 날까지 멈출 수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의 대답이 항상 부족하고 부분적인 대답일 뿐일지라도 복음을 묵상하고 성령의 음성을 듣고 깨우쳐 내 바람과 계획의 산물이 아니라 내가 하느님으로 알아 고백하는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시다. 이는 단순한 환상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우리의 믿음이 언제나 그저 부분적이고 부서지기 쉬운 것이기 마련이지만,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 하는 말씀대로 올바른 고백을 위해 그분의 말씀을 듣고 또 들어서 하는 고백이다.

예수님에 관해서 어떤 이는 당시 사회운동가, 그리스도교의 창시자라 하고, 어떤 사람은 성인이라 하며, 도덕적으로 깨끗한 사람이라고도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구세주메시아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시청 앞 광장에서 ‘이미 내가 역사와 시간 속에서 2천 년을 물어왔던 질문’이라 하시며,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묻는 장면을 상상해본다면?

2.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오 복음사가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는…”이라고 복수로 제자들에게 물으셨는데,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대답을 하는 이는 베드로뿐이다. 베드로는 그저 어떤 “스승” 중 한 분도 아니고, 예언자 중 한 분만도 아니며,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 예수님은 그저 단순히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파견된 어떤 인간 중 하나인 예언자가 아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의 신비를 두고 깊이 묵상하며 “주님(Kýrios)”이요 “하느님(Theós)”이라고 부른다. “하느님의 아드님”(참조. 2사무 7,14 시편 2,7;89,27-28)이라는 표현은 히브리말로 벤 엘로힘(ben Elohim)인데, 이는 메시아, 주님의 기름 부음 받은 이(그리스도)에 적용되는 표현이다. 베드로는 분명하게 하느님과 하나이신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 마르코나 루카가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공통 개념을 대변해서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참조 마르 8,29 루카 9,20), 여기서는 베드로가 홀로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처럼 묘사하고, 예수님의 반응도 베드로의 개인 이름을 부르시면서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마태 16,17)라고 표현된다.

“시몬 바르요나”는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는 뜻으로 갈릴래아의 어부이다. 그를 두고 예수님께서는 “행복하다!” 하시며 그가 행복한 이유가 “아버지께서 (베드로의 고백을 직접 베드로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라 하신다. “살과 피가 아니라”라고 하는데, 이는 베드로가 인간적인 체험이나 이론적인 추론으로 고백의 내용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직접적인 계시로 그리 된 것이라 하신다.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뜻에 따라 베드로가 그 계시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행복하다” 하신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 하신 적이 있는데, 여기서는 아버지께서 베드로를 통해서 계시하셨다는 사실을 확인하신다.

예수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생명이 없는 우상들과는 아주 다른 신, 죽어 있는 신들과 달리 살아 계시고 생명을 창조하시는 하느님, 생명을 주시는 신이고, 인류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은 ‘삶’의 하느님이시고, 우리 자신이 살아 있는 곳에서만 그분을 만난다. 예수님께는 우리가 ‘생명’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을 올바로 본다는 것과 그분을 통해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생기 있는 생명의 사람이 되는 것을 뜻한다.

3.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예수님께서는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하고 선언하신다. “베드로(Pétros)”와 “반석(pétra)”이라는 말이 말의 어미만 다르게 반복된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설립을 말씀하신다.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이십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는 선택된 값진 돌이십니다.”(1베드 2,4) 하고 베드로 사도가 훗날 말한 것처럼 “반석”은 예수님 자신이다. 하지만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그 초석이 베드로임을 말씀하신다.

교회를 설립하기 위하여 누군가 초석이 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는데 베드로가 그러한 존재임을 증명함에 따라, 예수님께서는 맨 처음 베드로를 만나시면서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Kefâs)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요한 1,42)에서 보듯이 그의 이름을 “시몬”으로부터 “케파”로 바꾸신다. 베드로는 은총으로 “주님은 저의 반석”(시편 18,3.32;19,15;28,1 등등) 할 때의 하느님이신 “반석”에 감히 참여한다. 여기서는 믿음을 고백하는 굳건함의 상징인 “반석”이지만, 이 “반석”도 죄에 떨어지고 약점을 보이며 배반으로까지 이어질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행복하다” 하신 베드로의 모습은 도덕적인 거룩함의 모습이 아니라 고백하는 믿음의 굳건함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 “반석”에 관해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믿음’으로 해석(오리게네스)하기도 하고, ‘그리스도’라고 해석하기도 하며(성 아우구스티누스), ‘교황의 권한’(로마 교회의 해석 : 예수를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베드로가 교회의 대리자인 교황 안에 살아 있다는 뜻으로) 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베드로의 인간적 약점과 결점들이 베드로에게 열두 사도의 으뜸이 되게 하고 주님 자비의 전문가가 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베드로는 자신에 대한 주님의 자비를 알았으며 진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았으므로 주님께서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믿을만한 모습으로 고백하고 증언할 수가 있었다. 베드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식별의 은혜를 입었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결코 다함이 없을 교회의 첫 번째 초석이 된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몸소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루카 22,32) 하고 말씀하신 대로 주님의 기도를 입어 형제들에게 힘을 주고 형제들의 믿음을 붙잡아 줄 수 있었다.

교회”라는 말이 나온다. 이 단어는 네 복음서를 통해 다시 한번 더 마태오복음(참조. 마태 18,17)에만 등장할 단어이다. “교회”라는 말은 신약이 쓰인 희랍어에서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 Ecclesia’라는 말로서 ‘에크ἐκ’라는 전치사(out of, from, by, away from)와 ‘칼레오καλέω’라는 동사(to call, to name, by name, to be called)의 결합으로 ‘~로부터 부름을 받은 모임’을 뜻한다. 이 말은 그리스에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은 히브리인들의 모임(회당, 시나고가Synagogue)과 구별하기 위해 사용된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이라고 하신다. 교회의 건축가는 예수님이시고, 교회는 베드로나 다른 이가 아닌 예수님의 영원한 소유이다. 바로 이 그리스도의 건축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께로부터 위임받은 열쇠로 이 땅에서 여닫는 성실한 청지기가 된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커다란 선물이 있다. 갈릴래아의 가난한 어부였던 베드로가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였고, 베드로가 처음으로 부르심을 받았으며,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마태 10,2)에서 보듯이 열두 사도 공동체의 맏이가 되었고,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첫 번째 초석이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베드로는 교회 공동체의 초석으로서 “품질이 입증된 돌, 튼튼한 기초로 쓰일 값진 모퉁잇돌”(이사 28,16)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누구이신가를 묻고 교회에 관한 언급을 하신 것에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 교회를 처음 구상하셨고, 그 초석을 놓으신 곳이 갈릴래아 지역 “카이사리아의 필리피 지방”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이렇게 시작한 교회는 배신과 박해, 그리고 적개심과 모순을 안고서도 기나긴 역사적 과정을 흘러왔다. 그러나 교회는 구성원들의 가난과 연약함, 죄와 부끄러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하느님 왕국을 향한 행진을 계속하여 완수할 것이다. “너희들 작은 양 떼야, 두려워하지 마라”(루카 12,32) 하셨고, “저승의 세력(죽음의 힘)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하신 주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작은 양 떼”일지라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울타리를 치시고 초석을 놓으셨으며 돌보시는 목자이시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끝으로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마태 16,19)이라 하신다. 우리 교회의 열쇠가 하늘 나라의 문을 여는 데가 아니라 오히려 하늘 나라의 문을 닫고 잠그는 데, 푸는 데가 아니라 매는 데에 사용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하늘 나라의 열쇠가 하느님의 법이라면 하느님의 법은 사랑의 법이다. 권위의 상징인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의 매듭을 풀어야만 하고 삶의 매듭을 풀어야만 한다. 베드로처럼 주님을 믿어 신앙을 고백하고, 그분께서 주신 권한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리고 사람과 하느님 사이의 매듭을 푸는 일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사명이다.

베드로가 “당신은 그리스도!”라고 하자, 예수께서 “너는 반석!”이라 하셨다. 아멘!

***

베드로의 고백

-마태 16,13-20의 거룩한 독서

어떤 사람에 대해 “좀 안다”고 말하기까지 얼마나 긴 세월이 필요할까요.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알면 알수록 “안다”고 말할 자신을 점점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공통된 체험이 아닐까요. 지금 기도할 대목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누구냐고 물으시는 장면입니다. 그분은 과연 누구실까. 우리가 그분에 대해 “좀 안다”고 말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리는 것일까. 아니, 그런 말을 할 수 있기나 한 건가…. 그만 정신이 아득해지는 이런 질문을 속으로 곱씹으며, 저는 예감합니다. 이 질문의 끝은, 내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이 대목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던지시는 두 차례의 질문과, 베드로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먼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13절) 하고 물으시고, 제자들의 대답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5절)고 물으시고, 이번에는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경탄하며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17-19절).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나름의 지력과 판단력으로 예수님을 알아듣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대체로 그분을 인류가 얻은 몇 안 되는 위대한 스승 중 한 분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런 호의적 대답에도 만족하시지 않은 듯싶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향하여,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하는 말은 접어두고, 너는 나를 누구라고 보느냐?”라는 질문일 것입니다. 신학자들(제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신비가들(제아무리 심오하다고 해도), 심지어 교회의 가르침(제아무리 ‘정통’이라고 해도), 그것들은 다 남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일 따름입니다. 나에게 그분이 누구이신가. 이것은 반드시 내 가슴에서 솟아 내 입을 통해 나오는 솔직한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입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가”에 기댈 때, 우리는 영원히 남의 말로 사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예수께서는 지금 이 단락을 읽고 있는 오늘의 제자들 각자에게, “남들이야 뭐라고 하든, 나는 너에게 도대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던지고 계십니다. 이 질문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새로운 차원의 앎으로 끌어올리고 싶어 하십니다. 관찰과 분석과 종합에서 나온 앎이 ‘바깥’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라면, 살아있는 관계로부터, 그 친교의 정으로부터 생기는 앎은 ‘안’으로부터 생긴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경 역사와 문학 비평의 전문가라고 해도 이 ‘관계’를 놓치고 ‘분석’에만 기댄다면, 기껏 예수님 안에서 또 하나의 세례자 요한, 또 하나의 엘리야나 예레미야를 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분석하고 묘사할 대상이 아니라, 목숨까지 걸고 뒤따르는 어떤 분이십니다. 베드로가 “당신은,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분,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아버지’의 아드님으로서, 세상에 오시기로 된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어쩌면 자기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대답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주님과 맺고 있던 관계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되씹으면 씹을수록 나자렛 예수와 더 깊이 만나게 해주고, 그분의 본래 면목이 지닌 신비 속으로 나를 더 깊이 데리고 가 좁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삼위일체의 신비 속으로 초대되어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고백은 그분과의 관계가 성숙할수록 내 안에서 무한히 자라나는 ‘앎’의 표현입니다.

‘돌’ 베드로가 나자렛 예수의 진면목을 알아챈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를 우리는 주님께서 신명이 나서 외치신 다음 말씀에서 알아채게 됩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5-26). 그렇군요.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필리 3,8)의 조건이 바로 그것이로군요. “그러므로 저는 더 커질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저는 적은 채로 있어야 합니다”(성녀 소화 데레사).

그래서 주님께서는 놀라워하시며 베드로를 두고 ‘복되다’고 선언하십니다. 말하자면, “행복하다 베드로, ‘살과 피’(17절)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을 네가 알았으니, 하느님께서 스스로에 대해 지니시는 그 앎에 참여하였구나! 그리하여 이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누리는 지복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았구나!”라고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나자렛 예수라는 인물에 대한 이런 ‘앎’은 인간 지성의 결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위로부터’, 혹은 ‘안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물’(은총)이요, ‘계시’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말씀’을 얻어 만나는 것도 바로 이런 종류의 계시 사건입니다. 성경의 ‘문자’ 역시 나자렛 예수의 육신에 비길 수 있어, 문자와 역사의 공부만으로는 ‘문자’를 꿰뚫고 그 속에 숨은 ‘말씀’이 본색을 얻어 만나지 못합니다. ‘말씀’은 기록된 글자가 아니라, 그 글자를 영적으로 접촉할 때 내면에서 생기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거룩한 독서를 하기 전에 우리는 ‘살과 피’의 한계를 고백하며 성령께서 우리 마음과 눈을 열어 주시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18절). 베드로petros를 ‘바위petra’라고 하시며 그 위에 당신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시는군요. 베드로가 주님을 두고 한 고백도 놀랍지만, 주님께서 베드로를 두고 하시는 이 고백은 더 놀랍습니다. ‘바위’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충실하심과 미더우심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신명 7,7.9-10;8,18;0,14). 하느님이야말로 우리의 바위라고, 믿는 이들이 대대로 고백해 오지 않았던가요? 베드로는, 그 직선적이고 단순한 성품이 매력적이기는 해도, 덕성이나 지력에서 우리와 그다지 큰 차이가 없는 사람임입니다. 물 위를 걸었지만, 곧 빠져들며 살려 달라고 소리친 인물, 이후로도 끊임없이 의심과 배신으로 두 발이 휘청거린 인물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바위라면, 그것은 베드로의 끊임없는 불충실함과 미덥지 못한 걸음걸이 속에서도 한결같이 충실하시고 미덥게 스스로를 드러내 주신 바위이신 하느님 때문이라 해야 합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내 안에 약점과 한계와 죄는 끊임없이 발견될 것이지만, 나는 계속 걸어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내가 아니라 그분께서 몸소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 약함 안에 들어오신 하느님은, 내 약함에도 불구하고 강하십니다. 내 불충실함에도 불구하고 충실하십니다. 그분은 이렇듯 내 ‘살과 피’ 안에 들어오신 영이요, 질그릇 안의 보화로서(2코린 4,7 침조),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19절)만큼 나를 하느님 자신의 모습으로 만들어갑니다. 바로 이것이 나의 바위요, 교회의 유일한 바위입니다.

베드로는 여러 면에서 ‘돌심장’의 대명사라 불릴 수 있지만(바로 다음 단락!), 하느님의 바위와도 같은 자비를 반복하여 체험함으로써 점차 ‘살심장’을 얻게 되고(루카 22,61 참조), 이리하여 비로소 하느님 자신의 표상인 ‘바위’로 변모해 갑니다(요한 21,15-19 참조). 이것이 베드로의 짧지 않은 여정이고, 이것이야말로 실로 우리 각자의 여정이며 교회의 여정입니다. 이렇듯 베드로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잘 들여다보면, 나와 교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보입니다.

가령 ‘바위’ 혹은 ‘돌’에 관한 묵상을 시작했으니, 마지막까지 가야겠습니다. 베드로는 나중에 최고의회에서, 예수께서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사도 4,11)이라고 증언하게 됩니다. 과연 바위로 상징되는 하느님 충실하심의 압권은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납니다. 그분은 하느님께서 몸소 시온에 놓으신 돌, “튼튼한 기초로 쓰일 값진 모퉁잇돌”(이사 28,16)이십니다. 바로 이것을 베드로가 예수님 안에서 알아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경탄하고 감동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가 ‘바위’라 불린 마지막 이유는 이런 ‘바위’이신 그리스도를 알아 뵙고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살아 계신 이 ‘바위’의 힘을 신뢰하는 사람은 바로 그 신뢰를 통하여 자기도 바위의 속성을 띠게 됩니다. 마치 자석에 붙은 바늘이 자력을 띠게 되듯이 말입니다.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이십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는 선택된 값진 돌이십니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십시오”(1베드 2,4-5). 그렇습니다. 베드로 여정의 마지막은, 그 역시 집 짓는 자들에게 버려지는 돌이 되는 것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기”(요한 12,24)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결국 이 소명을 완성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몸소 알아보신 대로,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기 때문입니다(요한 21,18). 이것이 바위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모두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하느님의 살아 있는 바위이신 예수께서 걸어가시며 몸소 열어 주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바위가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바로 이 바위 위에 주님의 교회는 지금도 세워지고 있습니다.[이연학, 성경은 읽는 이와 함께 자란다-거룩한 독서의 원리와 실천, 성서와함께, 2010년 제6쇄, 166-174쪽]

One thought on “마태 16,13-20(연중 제21주일 ‘가’해)

  1. 예수님이 베드로를 선택하고 사랑하시며 교회의 반석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시게 함을 읽고 묵상하며, 오늘 매일미사의 본기도를 마음에 두며 기도드린다.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시어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을 오롯이 사랑하여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참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