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0,1-10(부활 제4주일 ‘가’해-성소주일, 생명주일)

“양들의 목자·도둑이며 강도”(요한 10,1.2) *사진 출처-depositphotos.com

예수님의 시대에 목자들은 도시나 시골, 산악 지형이나 들을 막론하고 팔레스티나 전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로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양들과 같이 있었고, 다른 이들에게 우유나 고기, 치즈와 가죽이나 털을 공급하였다. 성경에서 목자는 비유나 상징적인 예표로 자주 등장한다. 주님이신 하느님을 두고 “이스라엘을 양 떼처럼 이끄시는 분”(시편 80,2)이라고 한다든가, “당신 백성을 양 떼처럼 이끌어”(시편 78,52;95,7;100,3)에서 보듯이 하느님의 백성을 “양 떼”라고 하거나 하느님의 소유라고 하는 것들이 좋은 예이다. 이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역사적이고도 구체적인 맥락에서 목자와 양을 두고 자주 하느님과 당신 백성 간의 관계로 묘사했다.

그런데 그 목자들이 가끔 ‘나쁜 목자들’이 되어 목자 본연의 사명에 충실하지 않을 때도 있었고, 또 어떤 목자들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지도 않았으면서 스스로 목자들이 되어 양 떼를 돌본다는 그럴듯한 구실로 자기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때도 있었다. 이때는 예언자들이 등장하여 주님의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신음하는 상황을 고발하면서 양 떼와도 같은 당신 백성을 지켜주실 하느님께서 오실 것이라든가 메시아께서 오실 것이라고 선언하곤 하였다.(참조. 예레 23,1-6;31,10 에제 34,1-31)

1. “양 우리…양 떼…문…목자”

오늘 복음의 첫 구절인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이다.”(요한 10,1)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달리 표현하면, 양 우리에 들어갈 때 문을 거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들어가는 이들이 있으니 이들은 모두 도둑이고 강도이며, 양들은 당연히 그 도둑이나 강도의 것이 아닌데도 그들은 양들을 자기 소유로 삼으려 한다는 것이다. 도둑이나 강도들은 거짓 목자들로서 정상적인 문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데, 속이거나 다른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양우리에 들어가 양들을 훔치려 하며, “사나운 이리들”처럼 “(양우리에) 들어가 양 떼를 해칠 것”(사도 20,29)이고, 양들의 필요에 따라 양들을 보살피지 않고 오직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한다는 말씀이다.

그 대신 양들의 목자는 “양 우리”를 지키는 “문지기”가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목자는 문을 통해 양 우리에 들어간다. 그리고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요한 10,3) 예수님은 목자이시고 양 우리를 지키시며 문을 열어 주시는 분은 하느님 아버지이시다. 아버지께서 아드님 예수께 당신 양들을 주셨고, 예수님은 “나와 나를 보내는 아버지…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요한 8,16.42)이라고 한 것처럼 아버지로부터 파견을 받으셨으며,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아버지께서는…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요한 3,35;5,22)에서 보듯이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받으신 분이다. 양들은 유일한 목자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기뻐하며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요한 10,3)주시는 그분을 느낀다.

당신 양들의 목자이신 예수님의 임무는 분명하다. 양들을 이름으로 부르시고, 양 우리 “밖으로 데리고 나가시어” “이끌어 낸 다음”(요한 10,4), 열린 초원자유와 해방으로 인도하신다. 모세가 자기 백성을 약속된 땅으로 이끌어 낸 것은 예수님께서 당신 백성을 이끌어내심과 비교할 바가 못 된다. 모세는 단지 한 국가와 한 정치지도자로부터 자기 백성을 벗어나게 했을 뿐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인간이라는 굴레에서 진정한 자유와 해방으로, 곧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셨기 때문이다. 양들은 예수님이라는 목자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고, 진정 나 하나만을 위한 목소리라는 것을 알아야 하며, 그분을 믿고 따라나서서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는”(요한 10,10) 자유와 해방의 초원으로 나아가야 한다.

2. “양들의 문…나는 착한 목자다”

요한 복음사가는 “나는 양들의 문…나는 문이다”라는 말씀을 두 번 소개한 다음(요한 10,7.9), 이어서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1.14)라는 말씀을 두 번 소개한다. “”과 “착한 목자”는 함께 이해될 필요가 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양 우리의 문’이라 하시지 않고 “양들의 문”이라고 하시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까 양들을 위한 양 우리라는 어떤 시설이나 조직체가 아니라, 당신께서 섬기고 보살펴야 할 양들 하나하나를 두고 그들의 “문”이라고 하신다. 구약성경에서 “문”은 “하느님의 집…하늘의 문”(창세 28,17)에서 보듯이 하늘로 향하는 통로나 주님의 현존 앞에 나아가기 위한 곳, “성문”(이사 60,11) “정의의 문”(시편 118,19) 의인들이 들어가 하느님을 찬송하기 위한 “주님의 문”(시편 118,19-20) 등으로 표현된다.

문은 예로부터 인간을 가리키는 원源상징이고,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곧 이 세상의 영역에서 천상 영역으로 넘어가는 통로를 상징한다. 많은 문화 속에는 하늘나라에 다다르게 하는 천국문의 상징이 있다.…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문이라고 하신다. 그분은 우리 자신에게 이르는 문이시다. 우리 마음에 이르는 통로이시다. 예수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른다.…이런 비유의 말씀이 제자들의 어떤 체험을 가능하게 했으며, 또한 예수의 어떤 체험을 표현하고 있을까?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와 그 말씀들을 자기 자신에 이르는 문으로 체험했다. 그들은 예수를 묵상하면서 자기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그들은 예수를 통해서 마치 문처럼 자신의 내적 집에 들어가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참된 자아에 이르는 문이셨다.…나도 예수를 이해함으로써 나 자신을 이해하고, 내가 참으로 누구인지를 인식하며 마침내 참된 자아에 이르는 통로를 발견하게 된다. 노련한 정신과 의사 베르너 후트는 현대인의 정신적 빈곤이 자신의 영적 핵심을 잃어버린 채 자기 자신의 내적 중심과 아무런 관계를 맺지 못하는 데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문에 관한 예수의 비유 말씀은 자기 자신의 내적 중심을 향한 인간의 갈망을 지적하고 있으면서 아울러 자신의 참된 자아를 만나게 한다.(안셀름 그륀, ‘예수, 생명의 문’, 분도, 2009년 3쇄, 132-133쪽)』

예수님은 내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문”이시고, 내가 나 자신에게 이르는 문이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으로 나가는 출구의 문이시기도 하다. 천상의 목초지를 향해 나아갈 수도 있고, 무서움이 찾아와 두려움을 느낄 때는 안전한 곳에 숨었다가 다시 들어갈 수도 있는 문이시다. 그 문은 인간의 역사 안에서 왕왕 보듯이 그저 지나가는 문이 아니라 결정적인 구원의 문이다. 결과적으로 목자가 양들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는”(요한 10,10) 것이다. 이를 위해 목자는 양들에게 “문”을 통해 새로운 지평이 열리고 새로운 목초지로 나아가는 해방의 탈출을 하라 한다. 그 해방은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요한 10,28) 하였으니 자유와 동시에 완전한 보호가 있는 해방이다.

교회는 언제나 문이 활짝 열려 있는 아버지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개방성을 보여 주는 하나의 구체적인 표시가 바로 모든 성당의 문이 언제나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하느님을 찾고자 성당을 찾아왔을 때 차갑게 닫혀 있는 문을 마주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닫혀 있지 말아야 할 문들은 또 있습니다. 누구나 어떻게든 교회 생활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고, 성사들의 문도 어떠한 이유로든 닫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그 자체가 “문”인 세례성사가 그러합니다. ‘성찬례는 성사 생활의 충만함이지만 완전한 이들을 위한 보상이 아니라 나약한 이들을 위한 영약이며 양식입니다.(성 암브로시오)’ 이러한 확신은 우리가 신중하고도 담대하게 숙고하도록 부름받고 있는 사목적 귀결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자주 은총의 촉진자보다는 은총의 세리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관이 아닙니다. 교회는 저마다 어려움을 안고 찾아오는 모든 이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아버지의 집입니다.(교황 프란치스코, ‘복음의 기쁨’, 제47항)』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요한 4,23), 온전히 충만한 그때는 주님의 양 떼를 위해 예수님만이 유일하고도 제한이 없이 활짝 열려 하느님께로 오르는 문이 되실 때이다. “나는 양들의 문”이라 하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만찬 때에 한 번 더 이를 확인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하실 것이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하신 말씀대로 하느님을 알고 영원한 생명을 알고 누리는 그 길이 바로 예수님이다. 요한 복음사가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요 세상에 오신 메시아로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 이 모든 것이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예수님 이전에 얼마나 많은 목자가 하느님께로부터 파견을 받았다고 설쳐댔는지 살펴볼 필요도 있다. 많은 이들이 왔지만, 그들은 “도둑이며 강도”였고, 양들에게 “낯선 사람”이었으며, “다만 (양들을)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요한 10,10) 왔을 뿐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나보다 먼저 온 자들 모두”(요한 10,8)라고 말씀하시면서 메시아도 아니면서 메시아 행세를 했던 모든 이를 지칭하신다.

시대를 막론하고 세상과 교회에는 거짓 파견자들이 있었고, 하느님께서 보내시지 않았는데도 하느님의 파견을 받았다고 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언제나 이들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거짓 목자들은 양들 가운데가 아니라 항상 양들 위에 군림하려 했으며, 양들 하나하나를 이름으로 불러주기는커녕 지시하고 명령하려 하였고, 허약한 양들을 보호하기보다는 내팽개치려고 하였으며, 잃어버린 양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양 우리 안에 이미 있는 양들하고만 지내는 것을 좋아하였다.

목자와 양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는 예수님 몸소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라는 대목에서 절정을 이룬다. “착한”이라는 말은 “칼로스καλός, kalós”라는 말로 영어에서 그저 ‘good’이라고 번역되는 말이지만, 그 뜻은 ‘아름다운, 올바른, 적절한’ 등 그 의미가 깊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신 사목적 이유는 그저 어떤 사상이나 교의敎義, 혹은 위대한 가르침 때문이 아니라, 자기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목자라는 데에 있다. 시편 작가는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 23,1)라고 노래 불렀는데, 예수님께서 몸소 당신이 목자라시며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고 하신다. 공관복음에 등장하는 사랑 넘치는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고 집으로 데려온다.(참조. 마태 18,12-14 루카 15,4-7) 그런데 요한복음의 목자는 양 우리에 있는 양이든지, 또 길을 잃은 양이든지 가리지 않고 그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고 한다.

목자와 양의 관계가 이렇게 드러난다. 사랑으로 서로 알게 되는 관계, 양들이 차마 목자의 그 깊고도 깊은 사랑을 다 깨우치지 못한다고 해도 “끝까지”(요한 13,1) 그 양들을 사랑하는 관계, 양들은 그저 자기들을 사랑하고 보살펴주는 목자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한 관계이다. 일찍이 『예수님은 진정 문이셨고,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고보, 예언자들과 사도들, 그리고 교회가 그 문을 통하여 아버지께로 나아갔습니다.(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35?~107년경)』라고 성인이 말한 대로이다.

3. “삯꾼”

비유에는 “착한 목자”와 함께 “삯꾼”(요한 10,12)도 등장한다. “삯꾼”은 품삯을 위해서만 일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의 시대에는 이런 목자들이 많았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하다. 삯꾼들이 양을 해친 적도 없고 훔친 적도 없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저 기능적으로만, 받은 삯대로만 임무를 수행할 때 양과 삯꾼 사이의 관계는 기계적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양은 실제 공장처럼 양을 생산하는 곳에서 기계적으로 사육당한다. 교회가 기계와도 같다면, 이런 식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겠지만, 교회는 주님의 양 떼이다. 살아 있는 현실이며 베풀어주는 사랑이 없으면 사라지고 마는 슬픈 운명체이다.

삯꾼은 품삯이 얼마인지 헤아려 그만큼만 일한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도망간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가고 양 떼를 흩어버린다.”(요한 10,12-13) 그렇지만 “착한 목자”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예수님의 사명은 오로지 사랑 때문에 시작한 것이고, 아버지께서는 이것 때문에 아드님 예수를 사랑하신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내가 그것을 스스로 내놓는 것이다.”(요한 10,14-15;17-18) 하는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는 자기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으시고 “그것을 다시 얻으신다.”(요한 10,18)

예수님의 사명은 모든 인간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뿐 아니라 다른 양 떼에 속한 양들까지도 아우르는 모든 이를 위해 당신 생명을 내어주신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요한 10,16) 하신 것처럼, 언젠가 예수님의 양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예수님만이 인간과 세상 모든 피조물을 위한 참목자이시다. 아멘!

2 thoughts on “요한 10,1-10(부활 제4주일 ‘가’해-성소주일, 생명주일)

  1. 유태인과 밀접히 일하는 나는 그들이 출입문마다 문설주에 뭔가를 붙여 놓은 문안으로 매일 들어가고 나온다. 그들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는데,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을 믿는 나는 그들과 같은 문을 들락거리며 함께 하루를 만들어가고, 돌아가 각자의 가정을 꾸려나간다. 유태인 가족들끼리도, 직원들끼리도 정통인지 아닌지를 가리며 말들이 많은데, 그래도 가족과 친분을 지키게 하는 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문뜩 든다…작은 소견으로, 분명 이 안에는 나만을 위한 사람이 아닌 우리를 위하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면서….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