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26,14-27,66(주님 수난 성지 주일 ‘가’해)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27,46) *by 고귀순

예수 부활 대축일 전 한 주간을 ‘성주간聖週間’이라고 한다. 성주간 동안 전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기억하고 묵상하며 주님 부활을 맞이하도록 이끌어 준다. 따라서 교회 전례에서 성주간은 전례의 정점을 이루며, 가장 거룩한 시기이다. 성주간을 지내는 관습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3세기 무렵에는 예수 부활 대축일 전 금요일부터 예수 부활 대축일 아침까지 3일 동안을 성주간으로 지냈는데 지금과 같이 일주일의 성주간을 지내게 된 것은 5-6세기에 이르러서이다. 중세 때는 성주간을 ‘수난 주간’ 또는 ‘파스카 주간’이라고도 하였다.

성주간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부터 시작되는데, 성지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미사를 봉헌한다. 교회 전례는 이날 성지聖枝 축복과 행렬을 통하여 참 임금이신 예수님께 환호하고, 예수님의 죽음 예고와 제자들의 배반,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를 지내신 사건, 마침내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수난 복음’을 장엄하게 선포한다. 성목요일이 되면 주님 만찬 미사 직전에 사순 시기가 끝난다. 이날 오전에 각 교구에서는 주교와 사제들이 성유 축성 미사를 봉헌하며, 사제들의 서약 갱신과 성유 축성식을 거행한다. 저녁에는 예수님께서 성체성사와 성품성사를 제정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 만찬 미사를 봉헌하는데, 이로써 파스카 성삼일이 시작된다.

‘가’해에는 마태오가 전하는 주님의 수난기를 듣는다. 복음사가 마태오는 우리에게 주님 수난에 대한 일지 형식의 사건을 보도한다기보다 예수 그리스도 생애의 마지막에 벌어진 주님의 수난을 두고 교회의 믿음이 어떻게 이를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를 전한다. 복음은 예수님의 부활을 고백하는 이들이 기록한 내용으로서 그 사실에 비추어 앞의 사건들을 설명하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밝힌다. 그래서 마태오는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각도에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록한다. 그래서 이 수난기에는 구약의 인용과 함께 “성경에…라고 기록된 대로”, “말씀이 이루어졌다”라는 구절들이 보인다. 마태오가 전하는 예수님의 수난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부활이라는 대사건의 빛 아래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만나는 과정에서 예수님께서 시련과 고난으로 이를 어떤 시련과 고난으로 받아들이시고 살아내셨는지를 듣는다.

마태오가 전하는 예수님의 수난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뉠 수 있다.

1) 사건 전(마태 26,1-46)

2) 종교적 재판 과정(마태 26,47-75)

3) 정치적 재판 과정과 예수님의 죽음 및 안장安葬(마태 27,1-66)

1. 음모, 값진 향유, 최후의 만찬, 겟세마니

먼저 예수님을 죽일 음모(마태 26,1-5)에 이어 베타니아에 있는 가난한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익명의 어떤 여자가 예수님의 머리에 값진 향유를 붓는 사건(마태 26,6-13)으로 본격적인 예수님의 수난기를 준비하는 과정을 듣는다.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 행동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진정한 사제요 왕이 되실 것임을 알려주는 예언적 행동이다. 여인은 예수님이 장차 고독하게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버려져 “가난한 이”(마태 26,9.11)로서 십자가에 오르실 것을 암시하고,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행위가 제자들이 “불쾌하게”(마태 26,8) 여길 낭비가 아니라 진정 가난한 이로 오신 당신께 드린 선물로서 이를 용인하신다. 이는 유다가 은돈 서른 닢에 팔아넘긴(마태 26,14-16) 예수님, 감히 돈의 값어치로 환산할 수 없는 예수님께 드린 선물이었다. 그런 의미로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이 복음이 선포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마태 26,13)이라고 그 여인이 했던 사랑의 행동을 선포하신다.

최후의 만찬(마태 26,17-35)이 이어진다. 이는 마태오 복음사가에게 부활을 준비하기 위한 만찬이었고, 열두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님을 팔아넘긴 배반자 유다를 고발하며, 바위처럼 굳건하게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베드로마저 바람에 흔들리는 잔가지처럼 흔들리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할 제자들과 함께 하는 장면이다. 이런 모습이 예수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 곧 당신 생명을 내어주실 예수님의 공동체였다. 최후의 만찬은 죄인들, 믿음이 없는 자들, 감히 주님의 살과 피, 그리고 생명을 받아 모실 자격이 없는 자들이 모여 나눈 식사 자리였다. 그러나 죄 사함과 새로운 계약을 이루는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며 주님을 두고두고 기릴 은총의 시작 자리 또한 바로 그 공동체의 식사 자리였다. 마태오는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마태 26,26) 하는 말씀과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 쏟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 26,28)”라는 예수님의 엄숙한 선언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성체성사를 죄의 용서와 연결시킨다.

저녁 식사 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공동체와 함께 성전 아래에 있는 겟세마니로 내려가시어 이미 목전에 다가온 당신의 죽음을 예견하시며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마태 26,39)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제껏 해왔던 말씀과 행동을 부정하며 도망을 칠 수도 있었고, 강력하게 저항하며 폭력을 행사하실 수도 있었지만, 당신께 가해질 악을 받아들이고 끝까지 선을 행하시기로 선택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며 모든 인간 존재를 위한 뜻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유롭게 당신 사랑으로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신다. 공생활 초기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악마의 유혹이(마태 4,1-11) 다시 예수님을 몰아쳤다고 말할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마태 26,42)” 하는 ‘주님의 기도’ 내용대로,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을 당신 몸으로 실현하시면서 다시 한번 하느님의 손에 당신의 운명을 맡기신다.

어둠 속에서 유다의 입맞춤으로 비극이 시작되지만, 예수님께서는 “친구야, 네가 하러 온 일을 하여라.”(마태 26,50) 하시고, 대사제의 종을 쳐서 귀를 잘라버린 사건이 이어지지만, 예수께서는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마태 26,52)” 하시는 비폭력의 선언과 함께 “그러면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태 26,54) 하신다. 배반자와 함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보낸 큰 무리”(마태 26,47)는 자기들이 할 일을 하고 예수님께서는 잡히신다. 예수님 비폭력의 근거는 예수님 스스로 하느님의 보호 아래 있음을 아신다는 것에 있다. 이후 예수님께서는 대사제 카야파에게 인도되어 종교 재판을 받으신다.(마태 26,57-68) “그곳에는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급히 소집되어) 모여 있었다.”(마태 26,57)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동과 말로 율법을 거슬렀고, 하느님을 모독하였으며, 이스라엘 공동체를 배반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거짓 증인들이 많이 모여”(마태 26,60) 법석을 떤다. “마침내 두 사람이 나서서” 자기들이 하느님의 거처로 모시는 성전을 두고 했던 예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이자가 ‘나는 하느님의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세울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마태 26,61)라며 증언한다.

2. 종교 재판, 카야파, 유다의 배반, 베드로의 부인否認

마태오 복음사가가 정확한 사실적 근거들이나 말마디들을 전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모든 재판의 과정은 결국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어떤 관계에 계신 분이신가 하는, 곧 예수님의 신원 규명이었다. 그래서 대사제 카야파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인지 (그리스도인지) 밝히시오.”(마태 26,63) 한다. 이에 예수께서는 카야파의 말과 그의 양심 그대로를 지적하시며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시고, 다니엘서와 시편을 인용하여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마태 26,64) 하신다. 이 말씀은 카야파를 놀라고 화나게 하면서 카야파 스스로 “자기 겉옷을 찢게”(마태 26,65)하고, 마침내 예수님이 “죽을 죄”(마태 26,66)를 지었다고 결론을 내리게 한다.

예수님의 종교 재판이 진행되는 가운데 다른 한편에서는 힘과 권력이 없는 몇몇 사람들과 “하녀”에 의해 베드로에 대한 또 다른 심문이 진행된다. 베드로는 부인하고, 고통받는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며, 그분의 제자였던 사실마저도 부정한다.(마태 26,69-75) 급기야 신변의 위협을 느낀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계시던 곳으로부터 “밖으로 나가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슬피 울었다.”(마태 26,75) 예수님보다 돈을 더 사랑했던 유다는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것을 보고 뉘우치고서는”(마태 27,3) “죄 없는 분을 팔아넘겨 죽게 만들었으니 나는 죄를 지었소.”(마태 27,4) 한다. 유다의 번복 뒤에 마땅히 재판은 처음부터 다시 심문을 시작해야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유다는 자기 인생의 의미를 잃어 마침내 스승의 몸값으로 받았던 돈을 “내던지고 물러가서 목을 매달아 죽었다.”(마태 27,5) 베드로는 무력감 속에서 자신을 하느님의 자비에 눈물로 맡겨드리지만, 유다는 자기의 배신을 스스로 만회하고 싶었으므로 자신을 하느님의 자비로운 심판의 손에 내어드리지 않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심판한다.

3. 정치 재판, 빌라도, 바라빠, 십자가, 새 무덤

종교 재판은 예수님께 형을 선고할 수는 있었지만, 그 형벌을 집행할 수는 없었다. 그런 이유로 예수께서는 다시 당시 유다의 통치자였던 로마 정치 권력, 총독 빌라도 앞으로 끌려가신다.(마태 27,1-3.11-26) 빌라도에게 예수님은 로마 황제에게 정치적 위협이 되는 때에만 관심을 둘 수 있는 사안이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께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마태 27,11) 하고 묻는다. 이는 ‘당신이 감히 황제의 권력에 맞서는가? 로마의 정치적 힘에 맞서는 권력을 꾀하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다시 한번 예수께서는 ‘예’나 ‘아니오’로 답하지 않으시고, 빌라도가 했던 말을 그에게 돌려주며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마태 27,3) 하신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그리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판단했지만, 동시에 유다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고발하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잘 인지하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마태 27,12.14) 예수님께서는 말이 없으시고, 침묵하신다. 그러나 그 침묵을 주의 깊게 듣는다면 이는 그 어떤 말이나 소리보다도 강력한 진실의 웅변이었다.

이어 빌라도는 예수님과 “바라빠라는 이름난 죄수”를 교환해 보려고 시도한다. 이방인이었던 빌라도의 아내도 “꿈”을 근거로 남편 빌라도를 만류하려 한다. 그러나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구슬려놓은”(마태 27,20) 군중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태 27,22.23) 하고 외친다. 여기에 민중의 전체주의적인 부정적 힘의 원리가 작동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혼란이 일어나는 중에 예수님은 그 누구에 의해서도 보호를 받지 못하고, 권한권자 빌라도는 군중의 외침에 동조한다. 군중은 분노하고 폭력의 희생양을 찾으며, 정작 책임을 져야 할 처지에 있는 사람은 군중에 대한 두려움에 “어찌할 수가 없어”(마태 27,24) 짐짓 물러나며 손을 씻는다. 형의 집행 전에 폭력은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에게 모욕과 고문으로 분출구를 찾는다. 고발 내용에 따라 예수는 유다인의 왕으로 여겨졌고, 그 고발은 “진홍색 옷을 입히고,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씌우며, 오른손에 갈대를 들리는”(마태 27,28-29) 조롱의 패러디로, 그러나 훗날 그리스도인들이 절대 잊지 못할 표상으로 거행된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여느 사람의 아들이요 불의와 학대의 희생자로만 대할 뿐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재판 과정은 예수님을 “총독의 군사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나가게” 넘겨주고, 성 밖에 있는 “골고타 곧 해골터라는 곳”(마태 27,33)에서 십자가에 못 박는 형의 집행으로 끝난다.

예수님은 “왼쪽과 오른쪽”에 “강도 두 사람”, 곧 죄인들과 범죄자들 사이에 못 박힌다.(마태 27,38) 그리고 예수님 머리 위에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 예수다.”라는 죄명을 붙임으로써(마태 27,37) 종교 지도자들에게서는 신성 모독자로 판정을 받고 실패한 메시아, 정치 지도자들에게서는 범법자로서 십자가형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면서 조롱의 패러디는 절정을 이룬다. “하느님의 저주받은 사람이요 저주받은 몸”(신명 21,23 갈라 3,13)으로서 수치스러운 노예에게나 가능했던 형으로 예수님은 처형된다. 그렇게 십자가에 달려서까지도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의 초기에 악마로부터 들었던 말이자 공생활 내내 들었던 말,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마태 27,40)라는 말, 권능을 발휘해 보라는 말,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면 자신도 구해보라”(마태 27,42)는 말을 듣는다. 하느님을 끝까지 믿었음에도 버림받은 것처럼 여겨지는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당신의 사명에 충실하시고 시편으로 기도하시며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시편 22,2) 하고 절규한다. 이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흔들림에서가 아니라 어둠에 빛을 구하는 기도였으며 최후의 고백이었다. ‘오, 하느님! 당신께서 버리신 것처럼 느낄지라도, 당신께서 침묵하시어도, 당신께서 멀리 계시는 것처럼 느낄지라도, 저는 당신만을 믿습니다.’ 하는 기도였다.

예수님의 죽음에 “성전 휘장이…두 갈래로 찢어졌다.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다.”(마태 27,51) 이제 모든 사람에게 지성소가 개방되고, 예수님의 죽음이 죽음의 힘을 꺾으며 그분의 사랑이 우주의 중심에 뿌려진다. 그분의 사랑이 닿지 않는 곳은 이제 없다. 아무도 이를 알아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지만, 이방인이었던 “백인대장” 홀로 십자가 밑에서 “몹시 두려워하며”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태 27,54) 하고 고백한다. 예수님께서 진정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이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판가름 난다.

“저녁때가 되자”(마태 27,57) “예수님의 제자”인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과 여성 제자들이(마태 27,61)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 “새 무덤에 모셨다.”(마태 27,60) 그 처참한 죽음에서 백인대장은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께 끝까지 충실하신 분을 보았으며, 그 충실을 끝까지 은총으로 살아내신 분을 보았고, 모든 인간을 위한 사랑과 희망을 보았다. 바야흐로 그 죽음은 부활의 징조요, 생명의 표징이었으니, 사흗날에 예수님 부활의 위대한 신비가 드러날 것이었다.(마태 28,1-10 참조) 이렇게 이방인에게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무덤 맞은 쪽에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앉아 있었다.(마태 27,61)” 예수님의 무덤 옆에서, 한없이 슬프지만, 그래도 예수님을 지키면서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을 묵상하고 있었다. 아멘!

One thought on “마태 26,14-27,66(주님 수난 성지 주일 ‘가’해)

  1. “부활이라는 대사건의 빛 아래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만나는 과정에서 예수님께서 시련과 고난으로 이를 어떤 시련과 고난으로 받아들이시고 살아내셨는지를 듣는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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