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록(20)

3690. 저의 하느님, 저의 자비이시여! 당신을 제가 부릅니다. 당신께서는 저를 지으셨고, 당신을 잊어버린 저를 당신께서는 잊지 않으셨습니다. 제 영혼 안으로 당신을 불러 모십니다.(13-1.1)

3691. (제가 먼저 당신께로 벌떡 일어선 것이 아니고 당신께서 저를 추스르러 오셨습니다.-Enarrationes in Psalmos 1,19)

3692. 당신께서 곧 당신의 행복(그분에게는 살아있음과 인식함과 행복함이 되는 그것이 곧 그분에게는 존재함이다. 바로 이 불변성과 단순성으로 인해서 하느님이 저 모든 만물을 만들었음을 깨달았다.-신국론 8,6)(13-3.4)

3693. (‘하느님의 영’은 곧 ‘하느님의 의지’-여기서는 ‘온전히 자족하는ipsa in se sibi sufficiens 의지’라고도 불린다. ‘성령에 관한 한, 이 수수께끼로 비슷하다고 보여주는 것이라고는 우리 의지 혹은 애정 혹은 사랑밖에 없다. 사랑이란 보다 강한 의지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삼위일체론 15,21,41)

3694. 가파른 심연으로 당기는 욕정의 무게에 관해서는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하고, ‘물 위를 감돌고 계시던’ 당신의 영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고양에 관해서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저의 중심은 저의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어디에 이끌리든 그리로 제가 끌려갑니다-본서 13,9,10라는 원칙에 의거하여 정욕의 무게와 사랑의 고양에 관해서는 ‘사랑을 영혼의 발pes animae이라고 이해함은 옳다. 사랑이 사악하면 정욕cupiditas이나 색정libido이라 부르며, 곧바르면 애정dilectio이고 애덕caritas이라 불린다.’-Enarrationes in Psalmos 9,15)…하나는 걱정거리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서 아래로 떨어지는 저희 영의 불결함이겠고(정욕이라는 것은 사랑하는 몸들끼리 하나로 결합하는 일 말고 무엇을 갖고 그토록 격렬하게 쾌락으ㄹ느끼는가? 고통이 어째서 해로운가? 하나이던 것이 흩어지려고 몸부림을 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헤어지 수도 있는 대상과 하나되려는 노력은 힘겹고도 위험스럽다.-De ordine 2,18,48), 하나는 안도감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서 저희를 위로 떠받쳐 올리는 당신 영의 거룩함입니다. 그 거룩함이 저희더러 마음을 들어 당신께 향하라고, 당신의 영이 물 위에 감돌고 있는 그곳을 향하라고, 저희 영혼이 실체도 없는 물을 건너고 나서(시편 123,5 참조-실체없는 물이란 실체없는 죄악의 물 아니고 무엇인가? 죄는 실체를 갖지 않는다. 실체가 아니고 부족을, 결핍을 지닐 뿐이다.-Enarrationes in Psalmos 123,9) 비할 데 없는 안식에 이르라고 저희를 위로 떠받쳐 올립니다.(13-7.8)

3695. 저의 하느님, 당신을 제게 주십시오. 제게 당신을 돌려주십시오. 사랑합니다. 또 만일 모자면 더 힘껏 사랑하겠습니다.(사랑을 곧 의지와 동일시하므로 ‘사랑이란 보다 강한 의지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올바른 사랑은 ‘더 힘껏 사랑함amem validius’, 혹은 ‘하느님을 사랑함’으로 정의된다) 저의 사랑이 충분하다 할 지경에 이르려면 제게 사랑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저로서는 잴 능력이 없습니다. 제 생명이 당신의 품 안으로 달려들려면, 당신 면전의 피난처에 숨겨지기까지 물러서지 않으려면 얼마나 부족한지 알 재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저도 알고 있으니, 당신 밖에서는 제게 파탄이요, 제 밖에서만 아니고 제 안에서도 파탄이며, 제게 있는 모든 풍요함도 곧 저의 하느님이 아니시면, 실상은 궁핍일 따름임을 알고 있습니다.(영원에까지 영혼을 애타게 만들 만한 대상은 하느님 말고 무엇이겠는가? 사랑할 만한 사물들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애정이니 애덕이니 하고 부를 만하다.)(13-8.9)

3696. 제 중심을 향해 움직이면서 제 자리를 찾습니다. 그런 질서가 덜한 곳에서는 불안하고 질서가 잡히면 평온합니다. 제 중심은 저의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어디로 이끌리든 그리로 제가 끌려갑니다.(pondus meum amor meus. eo feror quoqumque feror:인간 실존의 근본을 천명한 명문장으로 꼽힌다. ‘사랑을 하는 사람한테서는 영혼 속에서 사랑이 한가할 수가 없다. 필히 끌리기 마련이다. 어떤 사랑인지 알고 싶은가? 어디로 끌려가는지 지켜보라.’-Enarrationes in Psalmos 121,1) 당신 선물로는 저희가 불타오르고 위로 이끌려갑니다. 타오르면서 갑니다. 마음의 오르막길을 저희는 오르고 그러면서 층계송을 노래합니다.(시편 119-133편에 해당하는 열다섯 편은 이스라엘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며 불렀으므로 ‘층계송’이라 하였고, 교부는 하느님을 향하는 오르막을 ‘층계’로 비유하고 있다.) 당신의 불, 당신의 좋으신 불에 저희가 타오르고 타오르면서 갑니다. 위로 가면서 ‘예루살렘의 평화’를 향합니다.(13-9.10)

3697. (자연적 차원에서 삼위일체trinitas를 지적. 예컨대 ‘일성-형상-질서;참된 종교7,13’, ‘존재-형상-지속;Episttulae21,3’, ‘정도-형상-질서;De natura boni3,3’, 특히 본격적인 저서 ‘삼위일체론’에서는 ‘기억-지식-의지’, ‘지성-지혜-관상’ 등이 일체로 귀결되는 삼위로 지적된다. 삼위일체에 관하여 오류에 빠짐은 다른 어느 대목에서 오류에 빠지는 일보다 더욱 위험스럽고, 삼위일체에 관한 탐구는 다른 무엇을 탐구하는 일보다 힘들며, 삼위일체에 관한 진리를 발견함은 다른 무엇을 발견하는 일보다 결실이 크다.-삼위일체론 1,3,5)

3698. ‘존재하다-인식하다-의욕하다’는 이 셋(우리는 존재하고, 우리가 존재함을 인식하며, 존재하고 인식함을 사랑한다. 내가 존재하고 내가 인식하고 또 그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에게 더없이 확실하다-신국론 11,26)(13-11.12)

3699. 저희 영혼은 저희 자신을 두고 탄식하였으며, 주님, 요르단 땅에서, 당신과 동등하지만 저희 때문에 작아진 산에서(성부와 동등하신 말씀의 육화를 인간 구원을 위해 작아진 산으로, 요르단 강의 주님 세례를 자기를 낮춘 겸손의 행위로 비유) 당신을 기억하였습니다.(시편 41,7 참조) 저희 어둠이 저희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래서 저희는 당신께로 돌이켰으며, 그러자 저희가 빛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래서 저희는 한때 어둠이었고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에페 5,8 참조)입니다.(13-12,13)

3700. (‘심연이 심연을 부른다’는 구절을 두고 교부는 인간을 심연으로 규정하면서-‘심연이 바닥이 안 보이는 깊은 물이라면 인간의 마음이야말로 심연이 아닌가?’-Enarrationes in Psalmos 41,13)

3701.(사람은 누구나 거룩하든 의롭든 많이 진보했든 간에 하나의 심연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누구에겐가 신앙과 진리를 설교할 적에는 심연을 부르는 것이다. 폭포 소리로 울려나올 적에 심연이 심연에게 특히 유익하다.- Enarrationes in Psalmos 41,6)

3702. 제 영혼은 여태껏 슬프니 다시 뒤로 미끄러지고 심연이 되어버리며 심지어 자신이 곧 심연이라고까지 믿는 까닭입니다.(13-14.15)

3703. (교부는 그리스도를 ‘빛lumen’으로, 그리스도의 말씀 혹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등불lucerna’로 비견하곤 한다.)

※ 총 13권 278장으로 이루어진 <고백록>을 권위 있게 맨 먼저 우리말로 소개해주신 분은 최민순 신부님으로서 1965년에 바오로딸을 통해서였다. 여기서는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Confessiones, 성염 역, 경세원, 2016년>을 따랐다. 각 문단의 앞머리 번호는 원문에 없는 개인의 분류 번호이니 독자들은 괘념치 말기 바란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