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9월 15일)

Pietà by Michelangelo

1688년 인노첸시오 11세 교황에 의해 기념일이 제정되었으며 1913년 이후 9월 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날로 옮겨졌다. 성모님의 일생에서 특별한 고통의 순간들을 기념한다; ① 시메온의 예언(루카 2,34-35) ② 이집트 피신(마태 2,13-21) ③ 예수를 잃으심(루카 2,41-50) ④ 칼바리아 산에 오르심(요한 19,17) ⑤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아드님 예수(요한 19,18-30) ⑥ 십자가에서 내리신 예수님을 품에 안으심(요한 19,39-40) ⑦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 곁에서(요한 19,40-42) ※성모님의 고결한 고통의 삶을 두고 “한 생을 주님 위해”라는 성가 248번이 신자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다.(가사: 한생을 주님 위해 바치신 어머니 아드님이 가신 길 함께 걸으셨네 어머니 마음 항상 아들에게 있고 예수님 계신 곳에 늘 함께 하셨네 한 생을 주님 위해 바치신 어머니 아드님이 가신 길 함께 걸으셨네 십자가 지신 주님 뒤따라가시며)

우리는 누구나 십자가를 안고, 혹은 지고 살아간다. 당신 아드님의 십자가 곁에서 온 일생을 함께 걸으셨던 고통의 성모님께 기도하면 우리 십자가와 함께 걷는 길이 조금은 쉬워진다. 우리 신앙생활이 만나는 역설 중 하나는 가장 힘든 순간에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걸으신다는 것을 종종 느낀다는 사실이다. 모든 일이 원만하고 수월할 때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제 잘난 멋에 쉽게 빠져 하느님과의 관계가 소원疏遠해짐을 느끼지만, 힘들고 암울한 고통의 순간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붙들어주시고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왜 그럴까?

많은 성인과 성모님께서도 슬픔과 고통에 직면하셔야만 했다. 고통이 없었던 성인은 없다. 성녀 파우스티나는 “고통은 큰 은총이며, 영혼은 고통을 통해 구세주를 닮아가며, 사랑은 고통 속에서 정화되니 더 큰 고통 속에서 사랑은 더 순수해진다.(Suffering is a great grace; through suffering the soul becomes like the Savior; in suffering love becomes crystallized; the greater the suffering, the purer the love.)”라고 기록한다.

태생적이거나 만성적인 질환, 사랑하는 사람의 중독을 지켜보는 절망적인 고통,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사랑하는 이를 두고 최종적인 선고가 내려질 때의 참담함… 누구나 나름대로 힘든 싸움을 하며 성모님처럼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니 누구에게나 부드럽고 친절해야 한다. 성모님 대하듯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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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현양: 당신은 십자 나무로 나무의 쓰라림을 치유하시어 인간에게 낙원을 열어주셨나이다. 주님께서는 영광 받으소서. 이제는 저희가 생명 나무로 다가가는 것을 더는 막지 않으시니 저희가 당신 십자가에 희망을 갖나이다. 주님께서는 영광 받으소서. 오 영원하신 분, 나무에 못 박히신 분, 당신께서는 악마의 올가미를 쳐부수셨나이다. 주님께서는 영광 받으소서.

당신께서는 저를 위해 십자가에 걸리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셨으니 밤을 세워 올리는 저의 찬미를 받아주소서. 오 그리스도, 하느님, 인간의 친구이시여. 천상 군대의 주님, 당신께서 제 영혼의 미흡함을 아시니 당신 십자가로 저를 구하소서. 오 그리스도, 하느님, 인간의 친구이시여. 불보다 밝고 불꽃보다 빛나시는 분, 당신께서 십자 나무를 보여주셨으니 오 그리스도. 병든 자의 죄들을 태워 없애시고 그들의 마음을 비추소서. 당신의 기꺼운 못 박히심을 찬송하나이다. 그리스도, 하느님, 영광 받으소서!

그리스도, 하느님, 저희를 위해 고통의 십자가를 받아들이셨으니 당신의 수난을 찬미하는 저희의 노래를 받아주시고 저희를 구원하소서.(비잔틴 전례 ‘그리스도 찬미가’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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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2021년 9월 12일부터 15일까지 슬로바키아를 사목 방문하신 교황 프란치스코께서 방문 마지막 날인 15일 사스틴이라는 곳에서 슬로바키아 주교단과 함께 드리는 기도회를 주례하시면서 슬로바키아의 주보이신 고통의 성모님께 드리는 기도문과 영문 번역본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일곱 고통의 우리 어머니, 저희는 주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감사드리며 당신 앞에 형제로서 모였나이다. 당신께서 사도들과 다락방에 함께 모여 계셨듯이 이제 여기 저희와 함께 계시나이다.

교회의 어머니, 고통받은 이들의 위로자시여, 우리 사목활동의 기쁨과 고통 속에서 이제 당신께 믿음으로 다가드나이다. 자애로운 눈으로 저희를 굽어보시고 두 팔 벌려 저희를 안아주소서.

사도들의 여왕, 죄인들의 피난처시여, 당신께서는 저희가 마주하고 있는 인간적인 한계, 영적인 실패, 내침받고 외로운 저희의 슬픔을 아시니 당신의 부드러운 손길로 저희의 상처를 쓰다듬어주소서.

하느님의 어머니, 우리의 어머니시여, 당신을 믿어 저희의 삶과 이 나라를 당신께 맡기나이다. 당신께 저희 주교의 일치를 맡기나이다. 저희에게 은총을 내려주시고 당신의 아드님께서 저희에게 가르쳐주신 말씀,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이제 저희가 아버지 하느님께 올리는 이 기도를 저희가 매일 실행에 옮길 수 있게 하소서.

(주님의 기도)

오 하느님, 당신께서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본받아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도록 당신의 교회를 초대하시나이다. 성모님의 전구로 저희가 당신의 소중한 외아드님과 같아지게 하시어,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그분 은총의 충만함을 얻게 하소서. 아멘!

+주님을 찬미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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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Amen.

+ Glory be to the Father, and to the Son and to the Holy Spirit. As it was in the beginning, is now, and will be forever. Amen.

Our Lady of the Seven Sorrows, we are gathered here in your presence as brothers, grateful to the Lord for his merciful love. And you are here with us, as you were with the Apostles in the Upper Room.

Mother of the Church, Consoler of the Afflicted, with confidence we turn to you, in the joys and struggles of our ministry. Look upon us with tenderness and open your arms to embrace us.

Queen of the Apostles, Refuge of Sinners, you know our human limitations, our spiritual failings, our sorrow in the face of loneliness and abandonment: with your gentle touch heal our wounds.

Mother of God, our Mother, to you we entrust our lives and our nation. To you we entrust our episcopal communion. Obtain for us the grace faithfully to put into practice each day the words your Son taught us, the words that, in him and with him, we now lift up to God our Father.

(Our Father, who art in heaven ……)

O God, you invite your Church, in imitation of the Blessed Virgin Mary, to contemplate the passion of Christ. Grant that, by her intercession, we may be ever more conformed to your only-begotten Son and attain to the fullness of his grace, who lives and reigns for ever and ever. Amen.

Let us bless the L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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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르나르도 아빠스의 강론에서

동정 마리아의 순교가 시므온의 예언과 주님의 수난기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경건한 노인 시므온은 아기 예수께 대해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될 것입니다.” 하고 말하고 마리아께는 “예리한 칼이 당신의 영혼을 찌를 것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복되신 성모여, 예리한 칼이 당신의 영혼을 창으로 찔렀습니다. 그 칼이 당신의 영혼을 찌름 없이는 당신 아드님의 육신을 꿰뚫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의 것이지만 특별히 당신의 것인 아들 예수께서 숨을 거두신 후, 그 잔혹한 창은 그분의 영혼에 가 닿을 수 없었습니다. 실상 그분이 죽임당하신 후 불능의 상태에서마저 마냥 두지 않은 그들이 그분의 옆구리를 펼쳐 놓았을 때, 그분께 고통을 줄 수 없었지만, 당신께는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그때에 창은 당신의 영혼을 찔렀습니다. 그리스도의 영혼은 더이상 거기에 계시지 않았으나 당신의 영혼은 거기서 떨어져 나오지 못했습니다. 당신의 영혼은 고통의 창으로 찔리었기에 우리는 당신이 순교자들을 능가하시는 분이라고 마땅히 일컫습니다. 당신 아드님의 수난에 참여함은 그 강렬함에서 순교의 모든 육체적 고통을 능가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는 그때 그 말씀은 당신의 영혼을 창으로 찌르고 당신의 영혼과 마음을 갈라놓을 정도로 깊숙이 들어간 칼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오, 놀라운 교환이여! 당신은 예수님 대신에 요한을, 주인 대신에 종을, 스승 대신에 제자를, 하느님의 아들 대신 제베대오의 아들을, 참 하느님 대신에 일개 인간을 받으셨습니다. 그 말씀을 기억할 때 돌이나 쇠보다 더 굳은 우리의 마음은 산산이 부서지는데, 하물며 그 말씀은 당신의 섬세한 영혼을 찌르지 않았겠습니까?

형제들이여, 마리아께서 영신의 순교자가 되셨다는 말을 들을 때 놀라지 마십시오. 그 말을 듣고서 이방인이 지닌 최대의 결점 중에 하나는 동정심이 없는 점이라고 사도 바오로가 지적한 것을 잊어버리는 사람만이 놀랄 것입니다. 마리아께는 물론 그런 결점이 없었고 또 마리아를 섬기는 이들에게도 그런 결점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누군가가 “마리아께서 당신 아드님이 죽으셔야 한다는 점을 미리 알고 계시지 않았겠는가?” 하고 물어 볼지 모르겠습니다. 네,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아드님께서 즉시 부활하시리라는 확실한 희망을 갖고 계시지 않았겠는가?” 물론 갖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마리아는 슬픔을 느끼셨는가?” 더할 수 없는 슬픔을 느끼셨습니다. 그런데 형제여, 마리아의 아드님이 느끼신 슬픔 자체에 대해서보다 그 수난에 참여하신 마리아의 고통에 대해 더 놀라는데 당신은 도대체 누구이고 무슨 판단을 가지고 있길래 놀랍니까? 아드님께서 육신으로 죽으실 수 있었다면 마리아께서는 영신으로 그 죽음에 참여할 수 없으셨겠습니까? 아드님은 다른 어떤 사람의 사랑보다 더 위대한 사랑으로 죽임을 당하셨고 마리아께서는 그리스도를 제외한 다른 어는 누구의 사랑에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으로 그 죽음에 참여하셨습니다.(성무일도 고유 독서기도 제2독서-성 베르나르도 아빠스의 강론에서Sermo in dom. infra oct. Assumptionis, 14-15: Opera omnia, Edit. Cisterc. 5[1968], 273-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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