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라는 예술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로부터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법을 배웠고, 엄마 손을 잡고 매일 새벽 미사에 가서 추운 마룻바닥에 꿇어앉아 미사를 드렸으며,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라틴말을 외워 매일미사 복사服事도 했다. 소신학교에서는 “주님을 찬미합시다!(베네디카무스 도미노, Benedicamus Domino)” 하시는 신부님의 외침에 “하느님 감사합니다!(데오 그라시아스, Deo Gratias)”라는 라틴말을 외치며 아침 눈을 떴고, 선교사 신부님께서 이끌어주시는 대로 전례를 따라 매일 소리 높여 노래하며 기도했다. 그 중심에는 오늘까지도 아침저녁으로 외우는 시편이 항상 함께했다. 어떨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 적도 있었고, 피어오르는 분향 연기로 그저 넋을 놓을 때도 있었으며, 높은 성당의 천장에 닿아 되돌아오는 성가 소리가 황홀하기만 할 때도 있었다.

사람들에게 기도에 관해 많은 말을 하였고, 또 지금처럼 많은 글을 쓰기도 했으나 가당키나 한 일이었을까 싶고 나이 들어 이제 오직 한 가지 기도라면, 그저 자비뿐이리라 싶다. 내가 기도한다지만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창조된 모든 피조물이 함께 기도하며, 내가 그분께 기도드린 것보다 그분께서 내게 기도하신 것이 더 많다는 것, 그 기도 덕에 내가 여태껏 산다는 것도 어렴풋이나마 안다. 기도는 점점 신비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깊은 곳에서 말씀하시는 그분을 듣는 것이며, 그분께 많은 말을 한다는 것이 부질없는 짓일 뿐만 아니라 듣지 않기 위해 말하는 것이 위험하기까지 하다는 것도 안다. 곧잘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9.10) 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고, 오히려 “주님, 들어주소서. 당신 종이 말씀드리고 있나이다.” 하기는 훨씬 쉽다.

기도가 믿음의 웅변이라지만 믿음은 약하고 때로는 부족하며 심지어 아예 없기도 하다. 그럴 때 기도는 누군가에게 “기도하겠습니다!” 하고 생각 없이 말하는 것처럼 빈말이고 환상이며 허공에 대고 하는 헛소리이고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순전히 머릿속의 조작이거나 몽상이다. 그럴 때 기도는 독백이며 궁리이고, 사고思考이며 인간적 가치 식별이고, 인간과 인간의 주인이신 분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자기 합리화나 설명일 뿐이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의 기도

하느님을 믿는 이들의 기도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의 기도 사이에 명확한 구별이 없다. 어느 종교나 영성, 문화에도 인간의 바람을 담은 기도 비슷한 의미 있는 현상이 있다. 인간은 누구나 기도한다. 인간은 누군가에게 말하며 부르짖고 싶은 욕구를 지니고 있고, 누군가를 불러야만 할 필요를 느끼는 존재이다. 종교를 초월해서 함께 기도한답시고 복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우상偶像에게 바치는 기도나 이교도적인 기도도 많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께 신실하신 아드님 간의 관계에서 오가는 기도처럼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그러한 기도는 루크레티우스Lucretius가 말한 것처럼 “신을 귀찮게 하는” 기도가 될 수 없고, 마술적일 수 없으며, 우리의 욕망과 의지를 신에게 요구하거나 강요하는 것이 될 수 없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주님의 기도”를 전해준다. 주님의 기도는 기도의 전형典型이며 기준이요 복음 전체의 요약이다.

그리스도인의 기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기도할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기도를 가르치시고, 그리스도의 기도에 우리 기도가 하나 되게 하시며, 우리를 아버지께 인도하시고, 하느님의 생명에 하나가 되게 하신다는 사실을 안다. 우리 기도가 그런 기도일 때,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그럴 때면 성령께서는 침묵 속에 가려진 말씀, 양심의 소리가 된 하느님의 음성을 우리 마음에 속삭여주신다. 그럴 때 우리는 육친의 아버지께도 결코 사용해본 적이 없는 한없는 신뢰로 “아빠!”를 외칠 수 있게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진실한 기도가 기도문을 그저 암송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안다. 기도는 여러 가지 활동 중 하나가 아니라 아무것도 행하지 않더라도 어떤 차원이나 공간에 머무는 것, 살아있는 관계, 사랑이 커나가도록 영양을 공급하는 머묾이면서 자신을 바라보며 시편 기자가 기록한 대로 “저는 오직 기도드릴 뿐”(시편 109/108,4)이라고 말할 수도 있게 된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께서 생애 말년에 온전히 그리스도를 닮아 이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가 되었다고 말한 것은 사뭇 의미심장하다. 그 정도 되어야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께 가까워진 마음일 것이다.

기도의 시작은 무엇일까? 구약성경의 오래된 가르침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들어가기 위해 맨 먼저 취해야 할 태도가 ‘들음’이라 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며 “말씀하시는 하느님”이라면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듣는 백성”이다. 들음은 귀를 세워 듣는 것뿐 아니라 말씀하시는 분을 향해 온 존재를 던져 자신을 펼치는 것이다.

복음적 기도

성경은 우리의 의지, 행동, 말이 태어나는 곳, 우리의 마음에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고 가르친다. 깊은 곳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언어는 침묵이므로 침묵으로 들어야만 들린다. 외적인 침묵도 침묵이지만 항상 수다스럽고 떠벌이기를 좋아하는 자아가 침묵해야만 한다. 하느님의 음성은 듣고, 청하며, 원하고, 갈망하며, 구하는 훈련을 통해서만 들리며 마침내 양심의 소리로 마음에서 들려온다. 그럴 때 그 음성은 우리가 성경에서 듣고 읽는 맑은 음성이 된다.

성경 말씀을 잘 들으면 지금 여기에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대 그레고리오 성인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 말씀은 읽는 이와 함께 자라고 무한한 해석이 열린다. 시편을 기록하는 이가 “하느님의 말씀 하나, 나는 둘로 들었으니, ‘하느님이 권능을 쥐시었도다. 주여, 자비하심이 당신 것이오니, 당신은 누구에게나 제 행실대로 갚으시나이다.”(시편 61,12-13 최민순 역) 하며 기도의 은혜를 묘사한 그대로이다.

들은 말씀, 묵상한 말씀, 기도한 말씀, 관상한 말씀은 회당에서나 교회에서나 최고의 기도이다. 말씀을 기도로 읽으면서 그 기도는 믿는 이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온 삶을 형성한다.

우리가 하느님께 말씀을 드릴 수 있을까? 복음적인 기도가 된다면 분명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너무도 쉽게, 전례에서마저 너무 쉽게 감성에 호소하는 창의성이 난무하며, 마술적인 기도가 횡행하고, 자연을 신격화하는 타 종교의식이 파고들며, 치유나 구마驅魔처럼 기적에 급급해하는 기도 아닌 기도들이 있다는 것도 잊지 말자.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과 맺은 관계를 신뢰하며 그분께 자기 필요와 고통을 드러낼 수 있지만, 항상 “제 뜻대로가 아닌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하는 말로 기도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 하시며 우리를 가르치셨다. 아버지께서는 자녀들이 청하는 것이 설령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주시지 않을 수 있지만, 반드시 성령은 주실 것이며 고통과 죽음까지도 견딜 힘과 위로를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기도에 자기 온 존재, 모든 관계, 살아가고 있는 사랑, 연약하기만 한 나의 됨됨이 전체를 담는다.

하느님 앞에 침묵하고, 그 대신 하느님께서 말씀해주신 예수 그리스도께 말씀드리는 이는 행복하다. 하느님께서 아버지이시고 말을 건넬 수 있는 친구이시어서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이는 행복하다.(*바탕이 된 글과 이미지: 엔조 비앙키Enzo Bianchi, 마음에 말씀하시는 하느님. 기도 예술Dio parla al cuore. L’arte della preghiera – https://www.ilblogdienzobianchi.it/blog-detail/post/237044/dio-parla-al-cuore-l%E2%80%99arte-della-preghi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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