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와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예수님께서 “보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하신다.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염려하여 당부하시는 말씀이다. 사나운 “이리 떼 가운데 있는 양”과도 같은 제자들의 안위를 걱정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담겨 있다. 성경의 언어에서 뱀은 “간교한” 꾀와 지혜의 상징(참조. 창세 3,1 마태 3,7;23,33 묵시 12,9)이었으므로 제자들을 해치려는 못된 녀석들을 “뱀처럼 슬기롭게” 피하라는 말씀은 쉽게 이해가 간다. 그런데 집을 찾아 돌아오는 귀소본능을 지녔으므로 영화나 드라마 같은 곳에서 통신 수단이 되었다거나 행사장에서 가끔 평화의 상징으로 날려 보내는 정도를 제외하고는 인간 사회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하고 귀찮은 존재로 전락하여 오늘날 비교적 부정적인 이미지로 다가오게 마련인 “비둘기”를 두고 예수님께서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하시는 말씀은 선뜻 와닿지 않는다.(*이미지-구글)

우리말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는 희랍어 성경에서 ἀκέραιοι ὡς αἱ περιστεραί(akeraioi ôs ai peristerai, 아케라이오이 호스 아이 페리스테라이, 어순대로 직역하면 harmless as the doves가 된다. 현대 영어본에서는 ‘simple as doves’라고 옮겼으며, 뜻으로 보아서 다른 번역본에서는 ‘innocent as doves’라고 옮기기도 한다. 마치 이를 반영이라도 하듯 아가서에서는 사랑스러운 연인인 비둘기를 두고 “티 없는 비둘기”라고 묘사한다. 이를 바탕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가 아니라 “비둘기처럼 티 없이 되어라.”라고 옮겨본다면, 험난한 세상에 살면서도 유혹에 빠지지 말고 ‘죄없이 살라’는 예수님의 당부로 이를 읽을 수도 있겠다. 이렇게 읽는다면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167~1623년)께서 ‘티 없는 비둘기’를 성모님으로 생각하였던 것을 지나칠 수가 없다. 

티 없는 비둘기, 성모님

“비둘기”는 성경의 언어에서 창세기 노아의 홍수로부터 메신저로 등장하고, 성전에서 바치는 거룩한 제물, 주님을 찾는 이, 그리고 예수님 위에 내리시는 성령의 이미지로까지 구약과 신약 전반에 걸쳐 무려 61회나 등장한다. 그런데, 유달리 아가서에 등장하는 비둘기는 ‘사랑스러운 이’이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께서는 아가서의 “정녕 그대는 아름답구려, 나의 애인이여, 정녕 그대는 아름답구려, 당신의 두 눈은 비둘기라오!”(아가 1,14) “나의 애인 나의 비둘기, 나의 티 없는 이”(아가 5,2) “나의 비둘기, 나의 티 없는 여인은 오직 하나”(아가 6,9)와 같은 구절들을 두고 성모님이야말로 하느님의 “유일한 비둘기이시며, 흠 없이 완전하시고 온전히 사랑스러우시며 사랑받은 이로서 비교와 유사가 있을 수 없는 자”라고 칭송하면서 신애론 제3권 제8장에서 “하느님의 어머니신 성모님의 비할 데 없는 사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한다:

「…오, 하느님, 지극히 거룩하옵신 동정녀께서는 그 얼마나 경건히 당신의 순결하신 동정의 몸을 사랑하셨겠나이까!

성모님의 그 몸은 부드럽고 겸손하고 순결하여 하느님의 사랑에 순종하였으며 수없는 감미로움으로 꾸며져 있었을 뿐 아니라, 우리 구세주의 모태가 되셨으며 비할 데 없는 종속으로써. 구세주께 속하여 계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모께서는 당신의 몸을 소중히 다루시어 그 천사다운 몸이 잠드실 때, 다음과 같이 말하셨을 것이다. 오, 결약의 궤여, 성성聖性의 배(舟)여, 신성神性의 어좌여, 너의 피로를 풀어라. 그리고 감미로운 숨으로 힘을 돌이키어라!……」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비둘기

성모님을 “티 없는 비둘기”로 생각하였던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께서는 비둘기를 교회의 지체들인 우리 개개인의 독특함과 개인이 받은 은총의 다양성으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태양의 광선을 쬐고 있는 아름다운 비둘기들을 생각해 보자. 그 각양각색의 깃털이 내는 실로 다양한 채색을 보게 된다. 그 여러 가지 깃털은 햇살을 받아 더욱 찬란한 색채를 띠게 되며, 따라서 보다 한층 더 다양한 색채의 변화를 생기게도 한다. 그런데 그 여러 가지 색채는 보기에 조화를 이루어 주며, 그 뉘앙스는 모든 색채에 깊이 배여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들보다도 한층 더 아름답고 맑게, 에나멜의 광채와 윤택을 내게 한다. 또한 그 광택은 너무나 찬연하여 티조차 없는 옥같이 도금한 것처럼 보이게 되며, 생생한 광채를 눈부시게 뿜는다. 이러한 광경을 보는 충성스러운 선지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부르짖었었다.

괴로움이 네 몰골을 몰라보게 만들지라도, 앞으로는 너의 안색이 닮아가고 있으리. “비둘기의 날개는 은으로, 그 깃들은 푸른 빛이 도는 금으로 뒤덮였네!”(시편 68,14)」(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신애론-서문, 변기영 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76년, 24쪽)

제 꾀에 넘어가 속은 비둘기를 경계함

그렇지만,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하느님 사랑을 향하여 곧바로 날지 못하고 유혹에 빠지는 우둔한 비둘기들이 되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비둘기들이 자만하여 공중에서 허영에 들떠 멋 부리며 날아가는 것을 종종 보게 되는데, 이 비둘기들은 다양한 빛깔의 제 깃들을 자랑하려고 이리저리 보라는 듯 꾸물거리다가 몰래 엿보고 있던 수리나 큰 매들이 갑자기 날아와 덮쳐 잡히게 되면 비둘기들은 매들의 희생물이 되는 다른 새들보다 훨씬 튼튼한 날개를 가지고 있어도 제대로 잘 날지를 못한다.

슬프다! 테오티모여, 만일 우리가 조락凋落(시들어 떨어짐)하는 쾌락의 덧없는 헛됨을 즐기지 아니하고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에 대한 이기적 자애심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의 그 사랑, 그 애덕이 일단 우리에게 머물게 되면 우리는 올바로 곧장 날려고 주력하게 되고 동시에 애덕은 우리를 이끌고 다닐 것이며, 결코 사악한 암시나 유혹이 우리를 옭아 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애덕이 우리를 데리고 가려는 곳으로 우리는 날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마치 제 꾀에 넘어가 속은 비둘기들처럼, 즉 제 자신을 높이 생각하여 멋 부리려던 것같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무엇인 체 여겨 자신에게로 되돌아오고, 피조물 중에 우리를 제법 그럴듯한 것으로 평가하게 되면, 우리는 원수들의 올무에 자주 얽혀 잡히게 되고 원수들은 우리를 잡아 삼켜 버리고 말 것이다.」(같은 책, 제4권 제3장, 248-249쪽)

거룩한 묵상, 비둘기의 탄식

그런가 하면,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신애론 제6권 제2장에서 기도, 또는 신비신학의 시작이요 제1단계인 묵상에 관하여 논하면서 ‘묵상’을 비둘기의 울음에 견준다: 「모든 묵상이 하나의 생각이지만 모든 생각이 묵상은 아니다.(Every meditation is a thought, but every thought is not meditation.) 우리는 가끔 정신이 아무런 계획도 목적도 없이 다만 장난삼아, 마치 보통 파리가 아무것도 빨아먹지 않으면서 꽃 위를 여기저기 날아다니듯이 생각하는 일이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생각은 아무리 주의 깊은 것일지라도 묵상이라 할 수는 없다. 다만 생각이라고만 해야 할 것이다. 가끔 우리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주의 깊게 생각하고, 그 원인, 결과, 성질을 알려고 한다.

이 같은 생각은 연구라 불린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는 정신이 풍뎅이처럼 꽃이나 풀 위를 상관없이 날아다니며, 이것을 먹고 이것을 양식으로 삼는다. 그러나 우리가 신적 사물에 대해서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고, 이에 대한 사랑을 더하기 위해서 생각할 때 명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묵상이란 수업에 있어서 우리 정신은 파리와 같이 다만 장난 때문이 아니고, 또한 풍뎅이처럼 먹거나 몸을 돌보기 위해서도 아니라, 거룩한 꿀벌과 같이 여러 현의賢意들의 꽃 위를 여기저기 날아다니며 여기에서 하느님 사랑의 꿀을 빨아들이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학구심을 거스를 수가 없어 아주 근면한 노력으로 연구하고, 헛된 것으로 자기를 채운다. 그러나 하늘스런 사랑으로 자기 마음을 뜨겁게 하기 위해서 묵상에 몰두하는 자는 드물다. 말하자면 생각과 연구는 여러 가지 일에 대해서 행해진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말하는 것 같은 묵상은, 우리를 선량하게 경건하게 하는 사물에 관해서만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묵상은 의지를 자극하고, 거룩하고 구령에 도움이 되는 감정과 결심을 생기게 하도록 정신 안에 고의로 되풀이되고 지속되는 주의 깊은 생각이라 하겠다.

성경의 말씀은 거룩한 묵상이 무엇으로 성립되는지, 지극히 뛰어난 비교로서 설명되어 있다. 히즈키야Ezechias는 그 찬미 가운데 자기가 악에 대해서 하는 주의 깊은 고찰을 표현하려고 “저는 제비처럼 두루미처럼 울고 비둘기처럼 탄식합니다.”(이사 38,14)라고 한다.

친애하는 테오티모여, 유의해 보면 제비 새끼는 울 때 그 주둥이를 크게 벌린다. 이와 반대로 모든 새 중에서 비둘기만은 주둥이를 닫은 채 울고 그 소리를 목구멍과 가슴에서 울리고 다만 반향과 공명으로서 밖에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리고 이 작은 울음소리는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서도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서도 사용된다.(피눈물이 섞인 울음을 말함) 그러므로 히즈키야는 그 불행 중에서도 염경기도를 바치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 ‘나는 제비처럼’ 입을 벌리고 하느님 앞에 애처로운 소리를 내면서, ‘울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 거룩한 기도도 하고 있음을 표명하여 나는 내 마음속으로 주의 깊은 고찰로 생각에 잠기고, 내 비참함에 동정하고, 나를 죽음의 문에서 구원하신 내 하느님의 다시없는 자비를 축복하면서 흠숭하려고 내 몸을 격려하기 위해, ‘비둘기처럼 중얼거리겠다’라는 것이다. “곰처럼 으르렁거리고 비둘기처럼 슬피 울면서”(이사 59,11)라는 이사야Isaias의 말과 같이, 우리는 곰처럼 울부짖고, 비둘기처럼 명상하면서 탄식하는 것이다. 곰의 울부짖음은 염경기도에서 하는 탄성에 비교되고, 비둘기의 탄식은 거룩한 묵상에 비교된다.……」(같은 책, 제6권 제2장, 326-3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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