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 4,26-34(연중 제11주일 ‘나’해)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31) *이미지-ilblogdienzobianchi.it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도록 부르심을 받았던 제자들과 다가올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군중들에게 비유로 긴 말씀을 하신다.(참조. 마르 4,1-34) 비유는 얼핏 수수께끼처럼 들리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 그리고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려는 이들, 예수님 “밖에서…밖에 서서”(마르 3,31.32) 있는 “저 바깥 사람들”(마르 4,11)이 아닌, ‘안에있으려는 이들에게비유로 남지 않고’(참조. 마르 4,11) “신비”(마르 4,11)가 된다.

예수님의 비유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바꾸도록 한다. 예수님의 비유는 어떤 면에서 현재의 문화에 반하는 내용을 담고, 모든 이가 그러려니 생각한 것이나 생각하는 형식을 바꾸도록 하며, 새로운 것을 선포한다. 예수님의 비유가 담은 새로움은 어떤 사상체계 수준에 머물지 않고, 살고 느끼며 판단하고 행동하는 방식 자체를 변화하도록 한다. 예수님은 참으로 볼 줄 아는 분이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주변의 것들과 당신께 다가오는 이들, 또 당신께서 다가가시는 이들을 자세히 보고, 관찰하며, 묵상하셨다. 예수님은 항상 현실에 대한 인식과 열정을 가지고 깊이 생각하신 분이시다. 나아가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기도 안에서 제자들과 군중에게 이를 전달하시기 위해서 많은 비유로 많은 말씀을 하셔야만 하였다.

1. “씨를 뿌려 놓으면싹이 터서 자라는데

오늘 복음은 마르코복음 4장으로서 이 안에 담겨있는 여러 비유와 비유에 관한 말씀 중 한 대목이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그에 따른 예수님의 설명(마르 4,1-20), 그 중간에 삽입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마르 4,10-12), 드러나야만 될 등불의 비유(마르 4,21-22), 새겨듣고 사람들에게 되어 주어야 하는 양(마르 4,23-25), 이런 말씀들 뒤에 이어지는 오늘 복음 대목은 마르코복음 4장의 비유 중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마르 4,26-29)와 겨자씨의 비유(마르 4,30-32)라는 마지막 두 비유를 담고 있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는 마르코만이 전한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마르 4,26)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면서, “어떤 사람이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마르 4,27)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앞서 말씀하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르 4,1-9)와 그 “설명”(마르 4,13-20)에 이어 “씨앗”에 관해 말씀을 계속하신다.

씨앗은 말라서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항상 풍성한 결실을 거두기 위해 심는다. 죽은 것처럼 보이는 씨앗이 땅에 심어지고 물이 뿌려지면 땅속에서 썩어 분해되고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씨앗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싹이 되고 생명을 지닌 식물로 자라면서 마침내 씨앗 한 알에서 시작하여 그 씨앗을 몇 배 몇십 배 열매로 불린다. 씨앗의 변화요 변형이며 불림이다. 참으로 수수께끼 같은 역동성을 담은 씨앗의 신비라 할 수 있고, 이는 하느님 나라의 역동성을 설명하기 위해 매우 적절하므로 예수님께서는 이 씨앗에 관해 여러 번 말씀하신다.

좋은 열망을 품을 때 이는 우리가 땅에 씨를 뿌리는 셈입니다. 올바르게 행동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줄기가 되고, 선행으로 무럭무럭 자라날 때 이삭에 도달하는 것이며, 마침내 우리가 완전한 삶을 위하여 힘쓸 때 바야흐로 이삭에 가득 팬 낟알을 내게 되는 것입니다.…땅은 처음에는 줄기를 내고, 그다음에는 이삭을, 또 그다음에는 이삭에 가득 달린 낟알을 냅니다. 아직 여린 줄기이지만 좋은 시작입니다. 영혼에 심어진 덕이라는 씨앗도 선행으로 발전할 때 줄기에 이삭이 패는 것과 같습니다. 덕에서 훌륭하고 완전한 행동이 나올 정도로 진보하면 마침내 이삭에 낟알이 가득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 낟알들이 영글면 곧 낫을 댑니다. 추수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성 大 그레고리오, 540~604년)』

하느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도래가 농사짓는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을 농사, 곧 밭 갈고, 씨뿌리고, 물 주고, 잡초 뽑고, 열매 맺고, 그 열매가 무르익어가는 일 등으로 비유된다. 사람들은 말라 죽은 듯이 보이는 한 알의 씨앗이 지닌 그 엄청난 잠재력을 보고 놀란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이다. 아주 작은 실체이지만, 그 실체가 지닌 신비하고도 조용하며, 거스를 수 없고 무한한 증폭의 잠재력을 지닌, 인위적으로 조작하거나 만들어낼 수 없는 씨앗의 힘이다. 유전 공학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씨앗 자체는 기다려야만 하는 것이 인간이다. 씨앗 앞에서 인간은 어느 순간 기다림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인간은 그저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는” 일밖에 할 수 없다. 밭에 심은 씨앗을 농부가 다시 뽑아 싹이 텄는지 안 텄는지, 얼마나 자랐는지를 매일 확인하려 든다면 이는 씨앗의 생명을 죽게 만드는 일이 되고 만다.

“씨” 안에 “줄기와 이삭과 낟알”이 담겨있다. “씨”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다. 그래서 “씨”는 완성되지 않은 완성이다. 하늘이 담긴 땅이고 미래가 담긴 현재이다. 이 모든 것이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신비이다. 땅의 사람들은 이럴 때 “저절로”라는 부사를 이용하여 이를 묘사한다. 믿는 이들에게는 “저절로와 같은 기적이 매일 일어난다. 그러나 씨를 심었다고 매일 다시 그 씨앗을 꺼내서 살펴보는 것은 씨앗에 위협이 된다. 죽은 것처럼 땅 속에 묻힌 씨앗 안에 생명의 신비가 담겨있음을 믿어야만 “저절로”의 은총이 함께 한다.

『씨는 자동적으로, 저절로, 돌봄 없이도 성장한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서 활동하시는 기적이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영혼 안에서도 기적을 행하신다. 그분은 당신 말씀의 씨가 우리 안에서 자라게 하신다. 여기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일상의 삶을 꾸려가면서 기다리는 일이다. 일하고, 잠자고, 새로운 일을 하기 위해 다시 일어나면서 기다리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인내롭게 기다려야 한다. 씨앗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랄 것이다.…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인간의 구원을 이루신다. 아주 작고 보잘것없이 보이는 것에 바로 하느님 구원의 위대한 신비가 감추어져 있다. 십자가의 무능에서 하느님께서는 악마를 이겨내시는 당신 권능을 계시하신다. 살인자들의 증오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을 계시하시고, 이 세상의 모든 악을 이겨내신다.(안셀름 그륀, ‘예수, 자유의 길’, 82-84쪽)』

우리가 피부적으로 깨닫지 못하더라도 하느님의 나라는 놀랍게도 항상 조금 더 성장하고 확장되고 있음을 믿어야만 한다. 씨앗 자체가 지닌 힘을 믿어야만 한다. 말씀을 뿌리는 이는 설령 자신이 확인할 수 없고 알 수가 없다 하더라도 말씀이라는 씨앗이 열매를 맺고야 말 것임을 확신한다. 사목자근심과 걱정이 아닌 희망과 기다림의 사람이다. 행여 열매를 맺지 못할까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다. 사목자의 말씀이 자기 말이 아니라 좋으신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씨앗이라면, 그 씨앗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라도 열매를 맺고야 말 것이다. 이것이 씨 뿌리는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알고 있는 내용이며 확신이다. 풍성한 열매와 수확에 대한 의심할 수 없는 믿음이다.

2.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이어지는 비유는 또 다른 씨앗, 곧 겨자씨에 관한 비유이다. 예수님은 정말이지 주의력, 분별력, 사고력이 대단한 분, 지혜로운 라삐로서 몇 마디 말로 하느님 나라의 역동성을 설파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 4,31-32) 하시면서 작은 씨앗 중 하나로서 소금 알갱이보다도 작지만, 커서 큰 관목이 되는 겨자씨를 말씀하신다. 놀라움을 자아내게 하는 겨자씨이다. 우리 인간의 눈에는 하염없이 작지만,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힘을 지닌 씨앗이다.

『이 겨자씨를 우리 마음에 뿌려 우리 안에서 지성의 큰 나무로 자라나게 하고, 우리의 지적 능력을 하늘 닿도록 드높입시다. 그러면 지식의 가지들이 뻗어 갈 것이고, 그 열매의 톡톡 쏘는 맛은 우리의 입을 불태울 것입니다. 그 불타는 낟알은 우리 마음 안에 사랑의 불을 놓고, 그 맛은 우리 안에 있는 못된 미움을 몰아낼 것입니다. 정말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겨자씨처럼 동정녀의 태라는 정원에 뿌려지신 그분은 십자가 나무로 자라나셨고, 그 가지들은 온 세상으로 뻗어나갔습니다. 수난의 절구에 빻인 그분의 열매는 그분과 관계를 맺는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이 맛을 지니고 보존될 수 있도록 넉넉한 양념이 되었습니다.…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안에서 우리 모두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모든 것이 되셨습니다.…그분께서는 당신 정원, 곧 당신 신부인 교회에 씨를 뿌리셨습니다.

교회는 온 세상으로 퍼져 가는 정원입니다. 복음의 쟁기로 갈고, 가르침과 규율의 말뚝으로 울타리를 치고, 사도들의 노고로 온갖 해로운 잡초를 제거한 정원입니다. 향기롭고 사랑스러운 영원한 꽃들인 동정녀의 백합과 순교자의 장미가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모든 이의 기분 좋은 푸른 풀밭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의 부드러운 초목 한가운데 자리 잡은 정원입니다.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당신 정원에 뿌리신 겨자씨입니다. 그분께서 성조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약속하셨을 때 씨앗은 그들 안에서 뿌리를 내렸습니다. 예언자들은 그 씨앗을 싹 틔었고, 사도들은 크게 자라나게 했습니다. 그 씨앗은 교회 안에서는 큰 나무가 되어, 선물을 실은 수많은 가지를 뻗었습니다. 지금 그대 또한 시편 저자가 말하는 “거룩한 태양 빛에 금으로 빛나는 비둘기의 날개”(시편 68,14 참조)를 지녀야 하고, 튼튼하고 열매 풍성한 가지들 사이에서 영원히 쉬기 위하여 날아가야 합니다. 거기에는 그대를 옭아맬 어떠한 덫도 없습니다. 안심하고 날아가십시오. 그리고 그 피난처에서 안전하게 사십시오.(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380~450년)』

땅에 뿌려져 나무가 되는 겨자씨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분명코 옛날 예언자 다니엘이 보았던 나무, “하늘까지 닿고 땅끝까지 이르는” 나무(다니 4,7-9.17-19), 우주적인 하느님의 나라를 암시하고 계시는 것이 분명하다. 한 가지 더, 인간에게 인간의 몇 마디 말로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 연약하고 미약한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일지라도 “속된 기준으로 보아”(1코린 1,26) 인간적인 지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이라면, 그 말씀의 씨앗은 놀랍고 상상할 수 없는 결실을 보고야 말 것이다. 그 말씀의 나무에는 세상 온갖 것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뿐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시작, 주님 공동체의 시작은 별 의미 없고 현실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자라나 의미가 충만해질 것이며, 그 그늘에 깃들이고자 하는 이라면 누구나 받아들이는 나무, 아무도 기대하지 못했고 생각하지 못했던 하느님 나라의 실제가 될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지닌 효력에 관한 계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결정적이다. “복음은…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로마 1,16)이며, “썩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1베드 1,23)으로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잠재력을 지닌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를 두고 아주 오랜 옛날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1)라고 이미 확언해 주었다. 물론 말씀의 효력은 우리 인간이 생각하고 식별하며 예측하는 방식과는 다른 형태로 작동하거나 심지어 반대되는 형태로 발생할 수도 있다. 말씀으로 효력은 세속적이거나 양적인 기준으로 측정할 수 없다. 주님의 말씀은 “십자가에 관한 말씀”(1코린 1,18)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말씀의 씨앗이 듣는 이들의 마음속에 심어지면 그 말씀은 받아들여져야 하고, 내면화되어야 하며, 보존되어야 하고,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마르 4,27) 하셨으므로 그 어느 다른 말보다도 신중하게 존중하여 열매가 되고 현실이 되기까지 깨달아가야 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3.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이 비유들은 우리에게 주어졌고 우리가 심어야만 하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인식, 작고 가난한 실제요 “작은 양 떼”(루카 12,32)이면서도 다가오는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걷는 모든 이를 위해 온 세상 사람들을 깃들이게 할 수 있다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우리의 비전에 대해 묻는다. 한편으로 이 비유의 말씀들이 예루살렘의 명문 학교에서 양성된 사제나 라삐가 아니라 변방 갈릴래아, 소외된 이방인들이 엉켜 사는 곳의 무지렁이 가난한 이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아울러 처음에 예수님을 따랐던 이들이 이루었던 공동체의 모습을 보면 당시 문화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유다인들의 엘리트 계층에 속하지 않았던 열두 명의 소박했던 사람들과 여인들 몇이 이루었으며, 작고 선명하지도 않았으며, 그리 의미도 없어 보였던 공동체였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도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주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가 의미 있는 존재들이고, 우리가 어서 빨리 결과를 보고야 말겠다는 조바심과 걱정이 아닌 겸손과 평온으로 하느님 말씀을 심고, 하느님 말씀의 잠재성과 힘을 믿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인내할 줄 알아야 하며, 무엇보다도 좋은 씨앗이면 열매를 맺고야 마는 하느님 말씀의 힘을 믿어야 한다. 하느님의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하느님의 계획은 우리의 예측과 조급증을 넘어 반드시 이루어진다.

예수님의 삶과 모든 행적이 당신과 당신 말씀에 대한 비유였고, 그 비유에 대한 ‘풀이’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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