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5월 29일)

새벽빛을 여는 사람들, 김형주(이멜다), 2014년

1984년 5월 6일 여의도 광장에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 시성식이 있었던 이후, 30년 만인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순교자들의 형조, 좌우 포도청, 의금부 등 당시 사법기관이 있던 곳이며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당고개·새남터·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에서 복자 윤지충 바오로(1759~1791)123위 동료 순교자들이 시복되고 그 자리에 이를 알리는 표지석을 설치했다. 동료 순교자 중에는 한국에 입국한 최초의 외국인 선교사 주문모 야고보(1752~1801년) 신부도 있고, 1839년 순교 당시 12세도 안 되었던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라는 어린이도 있다.(*그림 맨 앞 중앙)

「전라도 진산 장구동의 유명한 양반 가문 출신으로 총명하여 1783년 봄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기도 했던 윤지충 바오로는 고산 윤선도의 6대 후손으로서 고종 사촌지간인 정약용 형제를 통해 신앙을 알게 되었고 인척인 이승훈 베드로에게서 1787년 세례를 받아 교인이 되었다. 어머니와 5살 아래 아우 윤지헌 프란치스코(1801년 능지처참형으로 순교)를 비롯하여 외종사촌 권상연 야고보 등에게도 신앙을 전파하였다. 그는 유교식 제사를 거부하다 처음으로 순교한 신자이다. 이른바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 폐제분주廢祭焚主 사건이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이 가르침에 따르고자 권상연과 함께 집안의 신주(위패)를 불살랐고, 이듬해 여름 어머니의 장례를 치를 때도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유교식 제사 대신 천주교 예절을 따랐다. 이러한 행적으로 오래지 않아 가장 친하게 지내던 이들로부터는 불효자로 지목되었고, 이웃들로부터는 인성人性의 모든 감정을 배반한 사람으로 손가락질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고발에 따라 체포령이 떨어지자 몸을 피했으나 진산 군수가 숙부를 감금하자 1791년 10월 중순에 진산 관아에 자수하였다. 신앙을 버리라는 온갖 회유에도 굽히지 않자 상급 기관인 전주 감영으로 이송하였고, 문초와 혹독한 형벌에도 죽음을 각오하고 “천주를 큰 부모로 삼았으니, 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그분을 흠숭하는 뜻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전주 감사는 할 수 없이 그들로부터 최후 진술을 받아 조정에 보고하였고, 이내 조정은 다시 한번 소란스러워졌으며, ‘윤지충과 권상연을 처형해야 한다’라는 소리가 드높게 되었다. 결국 임금은 이러한 대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들의 처형을 윤허하였다. 사형 판결문이 전주에 도착하자 감사는 즉시 바오로와 권상연을 옥에서 끌어내 전주 남문 밖(전동 성당 터)으로 끌고 갔다. 이때 바오로는 마치 잔치에 나가는 사람처럼 즐거운 표정을 하였으며,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교리를 설명하였다. 그런 다음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칼날을 받았으니, 그때가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사형 집행 후 당시 전라 감사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유혈이 낭자하면서도 신음 한마디 없었습니다. 그들은 천주의 가르침이 지엄하다고 하면서 임금이나 부모의 명은 어길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며, 칼날 아래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김대건 신부의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는 “탁월한 학자인 윤지충 바오로가 그리스도의 신앙을 위하여 용맹하게 투쟁하다가 가톨릭교의 신앙을 위하여 거룩한 피를 흘려 순교하였습니다. 이분이 바로 조선의 첫 번째 순교자”라는 기록을 남긴다.

바오로와 권상연의 친척들은 9일 만에 관장의 허락을 얻어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다. 이때 그들은 그 시신이 조금도 썩은 흔적이 없고, 형구에 묻은 피가 조금 전 흘린 것처럼 선명한 것을 보고는 매우 놀랐다. 이후 교우들은 여러 장의 손수건을 순교자의 피에 적셨으며, 그중 몇 조각을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당시 죽어가던 사람들이 이 손수건을 만지고 나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CBCK의 124위 복자 약전, 부분 참조)」

2021년 3월 11일 전주교구 초남이 성지에 소재한 바우배기 묘소에서 한국 최초의 순교자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복자 권상연 야고보, 그리고 신유박해 순교자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로 추정되는 유해가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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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대한 부요 곁에서 매우 비참한 가난이 소리 없이 자라나고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 안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순교자들의 모범은 많은 것을 일깨워 줍니다. 이러한 속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어려움에 부닥친 형제자매들에게 뻗치는 도움의 손길로써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요구하시며, 그렇게 계속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르면서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믿는다면, 우리는 순교자들이 죽음에 이르도록 간직했던 그 숭고한 자유와 기쁨이 무엇인지 마침내 깨닫게 될 것입니다.”(시복미사 중 교황 프란치스코의 강론에서)

한국의 박해

박해의 원인을 정치와 문화사적 측면에서 보면; 당시 유교의 한 갈래인 성리학을 기조로 삼던 조선 왕조 분위기에서 ① 양반의 신분적 특권을 부인 ② 여성의 역할 강조 ③ 조상 제사의 가치를 전면 부정(조상 제사로 상징되던 일체의 구舊제도에 대한 거부) ④ 왕의 지위를 하느님 아래에 놓음 ⑤ 천주교 금지와 같은 실정법이나 양반 사대부의 법보다 양심법의 우선 주장 ⑥ 부패한 관리들의 사사로운 박해(천주교인들의 재산 몰수) ⑦ 당리당략을 위한 천주교 탄압의 이용(정치범, 풍속사범, 사상범 등으로 처벌, 연좌제 등을 이용한 정적 제거수단화) ⑧ 당시 동양 문화에 대한 교회의 몰이해 등을 거론해 볼 수 있다.

당시 기득권층이 교회를 미워한 이유; 당시 교회의 사람들은 복음에 대한 열정 / 복음을 교회의 것으로뿐 아니라 사회적인 것으로 인식 / 세속적 권위보다 종교적 권위를 우위에 둠 / 여기에 부패한 관리들의 사리사욕이 더해짐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을 고발하기 때문

“세상을 두고 그 일이 악하다고 증언하기 때문”(요한 7,7)

예수님의 말과 우리 말을 지키지 않으려 하기 때문

예수님과 하느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

우리는 세상 안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

우리가 진리 편에 있으면

거짓 편에 있는 사람들이 미워하고,

우리가 정의 편에 있으면

불의 편에 있는 사람들이 미워하고,

우리가 빛의 편에 있으면

어둠 편에 있는 사람들이 미워하고,

우리가 주님 편에 있으면

세상 편에 있는 사람들이 미워한다.

주님은 진리, 정의, 빛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 다른 그리스도로서 과연 진리, 정의, 빛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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