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지식

“앎·지식”은 교육, 학습, 경험 등을 통해 얻은 무엇인가에 관한 앎이다. 그런데 지식에는 실제로 알지 못하면서도 알고 있는 듯 착각하거나 ‘~척’하는 건너편의 지식, 남에게 팔아 돈을 벌기 위한 지식, 누군가를 조종하거나 통제하기 위해 무기가 되는 지식 등이 있다.(*참고. 김건중, 지식답지 않은 지식, 경향신문, 2006년 9월 15일) 이들은 성경의 언어로 “사이비 지식의 속된 망언과 반론들”(1티모 6,20; ψευδωνύμου

고통

고통은 두 가지 얼굴로 다가온다. 하나는 몸을 찢는 외상의 고통, 다른 하나는 마음을 가르는 내상의 고통이다. 몸의 고통은 눈으로 볼 수 있다. 깁스에 싸인 다리, 붕대에 감긴 손, 그 상처는 시간의 손길을 통해 서서히 아물어간다. 사람은 그 고통을 받아들이며,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위안을 붙든다. 그러나 마음의 고통은 다르다. 보이지 않기에 더 깊고, 말해지지 않기에 더

고통 중에서도 감사할 이유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은 감사하는 존재다. 우리는 누리는 생명에 감사하고, 창조의 신비를 볼 수 있는 눈에 감사하며, 관계와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오늘에 감사한다. 어려움과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감사한다. 그리스도인이 항상 감사하는 이유는, 단지 고난이 지나가고 좋은 일이 생기며 더 나은 시기가 올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 아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느님께서 좋으신 분이시며, 사랑 그 자체이시기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죄罪

(Homo incurvatus in se)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죄”의 본질은 하느님을 향해 열린 존재여야 마땅한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로 굽어지고 휘어져 자아중심적으로 왜곡되어 있는 상태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본성이 진정한 자아가 아닌, 하느님 계시는 곳이 아닌,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죄”, 곧 자기 중심, 내향적 폐쇄, 자기 갇힘 상태로 설정되어있는 것으로 본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러한 죄 이해를 바탕으로

노년의 문턱에서

*옆의 이미지는 ChatGPT에게 “지혜로운 노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 하나를 달라.”고 요청하여 얻은 이미지이다. 내가 한국말로 묻고 있고, 나를 한국인으로 알고 있을 텐데 왜 서양 사람의 이미지로 주었느냐고 따졌더니, 「제가 처음 이미지를 만들 때 사용한 기본 프롬프트(묘사)가 ‘지혜로운 노년’을 특정 인종을 지정하지 않고 요청받았기 때문에, 이미지 생성 모델이 학습 과정에서 흔히 등장하는 **서양인(백인 노인)**의 대표적인

십자가

그리스도교를 그저 바라만 보거나 그리스도교에 관하여 탁상공론이나 벌이려고 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언제나 불편한 스캔들이요 “걸림돌이며 어리석음”(참조. 1코린 1,23)이고, 십자가를 둘러싼 비유와 표징들 역시 그러하다. 그리스도인에게조차 바오로가 코린토 1서 1장 17절에서 고발한 것처럼 “십자가를 헛되게 하려는” 유혹은 되풀이된다. 비그리스도인에게는 십자가와 십자가를 둘러싼 논리가 비인간적이거나, 고통을 그릇되게 해석하려는 잘못된 시도로 비칠 뿐이다. 언제나 그래왔다. 더구나

복음 선포가 이루어진 세 가지 길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는 “그 일은 말과 행동으로, 표징과 이적의 힘으로, 하느님 영의 힘으로 이루어졌습니다.”(로마 15,18ㄴ-19ㄱ)라고 말하면서 이방인을 복음의 길에 들어서도록 인도하는 일, 곧 복음 선포가 이루어진 세 가지 길을 밝힌다. 해당 구절은 신약성경의 언어로 “λόγῳ καὶ ἔργῳ, ἐν δυνάμει σημείων καὶ τεράτων, ἐν δυνάμει Πνεύματος Ἁγίου·(logo kai ergo, en dunamei semeion kai teraton, en dunamei

“위선僞善”(ὑπόκρισις, 휘포크리시스)

‘위선’(ὑπόκρισις, hypokrisis), ‘위선자’(ὑποκριτής, hypokritēs)‘라는 말은 마태오 복음에서 15회, 마르코 복음에서 2회, 루카 복음에서 3회, 바오로 서간에서 3회, 야고보 서간에서 1회 각각 등장한다. 위선이나 위선적인 행동을 고대 희랍어로 ‘휘포크리시스(ὑπόκρισις, 영어 hypocrisy)’라고 한다. 그러한 행동을 하는 이들, 곧 위선자는 ‘휘포크리테스(ὑποκριτής, 영어로는 hypocrite)’이다. 이 말들은 단어 앞머리의 ‘휘포(~아래에, ~로서)’와 ‘크리시스(분리, 결정, 심판, 재판)’가 합쳐진 동사 ‘휘포크리노마이(ὑποκρίνομαι, 말을 가지고

“힘써라”(Ἀγωνίζεσθε, 아고니제스테)

마태오 복음사가가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 7,13)라고 기록한 것에 루카 복음사가는 한 마디를 더해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24)라고 한다. 루카 복음사가는 다른 복음사가들과 견주어 볼 때 “힘”이라는 말마디를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한다. 루카 복음사가가 기록했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도행전에서도 “힘”이라는 말은 빈번하게 등장한다. 루카 복음사가는 “힘”이라는 말마디를 자주 사용하면서 악마와 세상의 힘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시는 예수님의

성경의 의미

*하느님의 말씀을 읽는 이들은 눈으로 읽는 글자를 넘어 「몸과 혼과 영(참조. https://benjikim.com/?p=15056)」으로 읽는다. 이때 성경을 읽는 이들은 오히려 그 말씀이 나를 읽으시고, 나를 살리시는 생명이심을 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15~119항은 성경을 읽는 이들에게 성경을 읽는 기준을 제시하며, 이를 간결하게 종합한다. ———————— 115. 성경의 의미는 오랜 전통에 따라 자구적 의미와 영성적 의미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