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본질적인 물음들

요한복음을 시종일관始終一貫 관통하는 주제 하나가 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 제자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돌아서시어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실 때, 제자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자(요한 1,38), “와서 보아라.”(요한 1,39) 하셨다. 이렇게 시작한 요한복음의 이야기는 맨 마지막 장면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께서 묻히신 무덤에 경쟁하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 도착한 무덤에 들어가 빈 무덤의 상황을 목격하고 “보고

봉인封印

‘봉인’(밀봉, 봉할 봉/인장, 도장 인)은 개봉하도록 지정된 자 외에는 누구도 개봉하거나, 접근할 수 없고, 되 물릴 수 없고, 변경할 수 없도록 객관적인 장치로 막아 놓은 상태를 말한다. 현대적인 용어로 이는 아이디와 암호가 설정되어있는 상태이다. 수도자들은 서원誓願으로 봉인되기를 자청했고, 하느님의 인장印章으로 봉인된 사람들이다. 이 봉인은 거룩한 봉인이어서 아무나 개봉할 수 있는 봉인이 아니다. 또한 물리거나 변경할

아브라함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과 하느님 간의 이야기는 긴 세월에 걸친 극적인 드라마이다. 일흔다섯 나이에 고향, 친족, 아버지 집을 떠나 하느님께서 보여주실 땅으로 가라는 명령(창세 12,1)을 받은 아브라함은 자손과 약속의 땅, 축복을 위해 군소리 없이 길을 떠난다. 여든여섯에 얻은 이스마엘도 과분했는데, 아흔아홉에 이르러서는 이사악을 약속받고 비로소 정식으로 하느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으로 아브람은 아브라함, 사라이는 사라가 된다. 마침내 백

불안과 우울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1.27) 하시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닥쳐올 미래를 두고 걱정하시며 특별한 당부를 하신다. 미래에 대한 염려를 불안이라 하고, 과거에 대한 집착을

마음자리

마음자리는 이웃과 하느님, 그리고 내가 함께 만나는 자리. 그런데, 그 자리에 가시나 바늘이 잔뜩 돋아 있다면? 그 자리가 걱정과 질투, 분노와 심술, 왠지 모를 불안과 어지러움으로 가득 차 있는 옹색하고 불편한 자리라면? 기도는 숨을 고르고 내 마음 깊은 곳에 편안한 자리를 만들어 그 자리에 누가 오든 쉴 수 있고 치유될 수 있게 하는 것, 기도는

자비로운 부성애父性愛

자비로운 부성애父性愛는 슬픔, 용서, 그리고 관대함이다. 슬픔은 탄식이요 눈물이며, 연민이고 기도이다. 눈물 어린 눈으로 이제나저제나 멀리 응시하는 그리움이다. 무심한 듯 속으로 울고, 혼자서 세월을 두고 운다. 이 연민과 눈물로 아버지는 권위를 부여받는다. 용서는 어리석고 온당치 못하며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을 매일 극복한다. 한 계단씩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모든 것을 말없이 훌쩍 뛰어넘는다. 따끔한 가르침도 잔소리나

인내

인내는 완성이 아닌 미완성, 전체가 아닌 부분을 사는 예술. 인내는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시간의 역사를 사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 인내는 하느님, 교회, 자기 자신과 더불어 하는 숙고, 그리고 숙고. 하느님께는 아직도 당신 약속대로 눈먼 이와 다리를 저는 이, 말 못 하고 듣지 못하는 이, 악과 죄,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모두, 그리고 영원히’ 구하셔야만 할 사람들이

머무르다(μένω, méno)

사람마다 자주 사용하거나 입에 붙어 있고 좋아하는 말마디가 있게 마련이다. 요한복음에서만 무려 22곳에서 보이는(횟수로는 더 많다) ‘머무르다’라는 단어이다. 복음사가 요한을 특징짓는 말 중 하나이다. 이 말은 신약성경의 언어인 희랍어에서 ‘메노’(μένω, méno, 머무르다, 붙어 있다, 남다, 지내다, 영어 : to remain, to abide, to stay)’라는 동사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이 말은 괄호 안에 서술한 일반적인 동사의 개념이

성덕의 향기

장미 나무를 접목할 때 갈라진 줄기 틈새에 사향 알갱이를 넣으면 거기서 피어나는 장미가 모두 사향 향기를 내게 되듯, 그대의 마음을 거룩한 회개로 쪼개고 그 틈새에 하느님의 사랑을 넣은 다음 거기에 네가 좋아하는 덕을 접붙인다면, 거기서 피어나는 잎은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더라도 저절로 성덕의 향기를 풍길 것이다.(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신애론神愛論, 제11권 제2장) If you are grafting

내가 바로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

언제부터인가 수도자, 사제, 성직자, 사목자라는 사람들이 나이는 먹었지만, 어른도 아닐뿐더러 성숙하지도 않은 어른으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그런 이들이 많다는 것만큼은 숨길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한 상태로 끌어내리려는 세상의 유혹이나 세력이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도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꼭 세상 탓만일까? 많은 사제나 수도자가 하느님만 나를 알아주시면 그만이라고 하면서도 주변의 인정이나 평가, 장상의 눈에